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1 - 다른 길, 다른 진리는 없다     (요14:4~7)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9

71 - 다른 길, 다른 진리는 없다

 

 

(요14:4~7)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인간에게 구원에 이르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을 성경은 명확히 밝히고 있고, 역사도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전쟁이나 교육, 종교, 과학, 문명 그 어떤 선행체계, 지식체계도 인간을 참 행복과 만족 속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류는 그러한 역사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제 다시는 다른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의 행복과 안식에 도달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며 신 이성주의다 신자유주의다 해서 여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지상 낙원을 이루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성도라는 사람들조차 이 세상의 선행체계나 지식체계, 이 세상의 힘 등으로 자신의 행복에 도달하려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자들이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얻어내어 그것으로 행복에 도달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 힘을 자꾸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시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이 세상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자기가 추구하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거듭 거듭 명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종교, 교육,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라는 말은 듣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지적은 영광스러운 지적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만 길이라고 우기는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자들로 똘똘 뭉쳐있는 하늘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수단과 방법의 개념을 가진 하늘에 이르는 도(道)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목적지에 이르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제시해 주면 그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들 스스로 해탈도 하고, 사회 정의도 구현하고 하는 그런 도(道)로서의 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길이신 예수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옛 사람의 실체를 폭로시키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상황이나 처지 환경 등을 바꿔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는 복음을 들고, 그 복음을 수단과 방법으로 하여 자기 주변을 살기 좋고,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자신을 덮쳐온 하나님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자신을 바꾸어 가시는 지를 경험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 길에 각자의 믿음의 분량(신앙의 색깔)에 따라 사회 운동을 할 수도 있고, 그 길에 개혁 운동 같은 것에 참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기독교의 목적지를 그리로 잡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착한 일 많이 들 하세요. 그리고 평등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 여러분의 한 몸 불살라 던지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예수의 은혜를 가슴 속 깊이 이해하고 절감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 후에 그 예수의 마음으로 평등을 외치든, 평화를 구현하든, 정의를 수호하든 하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행동하시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해 보고 하시란 말입니다. 평등, 평화, 정의, 공의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세상 사람들을 참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일까요? 예수만이 길이라면서요? 그런데 그 예수를 전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행해지는 사회운동이나 시위 같은 것들이 자칫 자기 의나 자기 자랑에 기여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하세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이 땅에서의 사회 정의 구현과 공의의 실현으로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드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기득권층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대항하여 공평과 정의를 쟁취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 우리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라고 반복하여 권고합니다.

 

(골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

 

그렇지요? 뿐만 아니라 성경은 배부르고 등 따스운 환경을 오히려 경계하라고까지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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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8:12~17)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신31:20)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어떠세요? 죄인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그나마 하나님을 찾다가 배부르고, 등 따습고, 편안해지면 오히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고 멀리 떠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제국주의나 빈곤이나 억지나 불평등과 같은 이 세상의 어두움들이 성도들에게 무조건 해가 될 것이므로 그들을 거기에서 반드시 구출해 내야 한다는 발상은 다분히 세상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평등을 추구해야 하고 안전과 편안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상황과 처지가 자기 맘에 들지 않더라도 자기 처지에 순복하고 그 자리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독려하십니다.

 

(딤전6:1~10)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 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자 되는 게 행복의 길 아니고, 종의 자리에서 상전의 자리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행복의 길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삶인 것이지 그 것을 뒤집어엎어서라도 평등과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성도의 지향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그것 아닙니까? ‘왜 인간이 사유 재산을 소유해야 하는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처럼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쓰자’는 것이 공산주의 이론 아닙니까? 어떠세요? 분명 평등, 평화, 정의를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기 위해 70여 년간 일 억 명이 숙청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산주의가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 겨우 얻어낸 것이 무엇입니까? 가난과 질병과 전쟁입니다.

평등과 정의를 위해 일 억 명의 희생을 대가로 치르고 우뚝 선 공산주의가 평등과 정의는커녕 가난과 질병과 전쟁만 남기고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평등과 정의를 내세우며 그 공산주의를 타파하자고 외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 정말 정의와 평화와 공의가 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됩니까?

그 전에 자본주의 하에서 불평등과 불공정과 억지 등을 해결하자고 공산주의 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다시 공산주의를 깨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복음 안에서 바뀌지 않으면 어떠한 이데올로기 하에서도 인간은 다른 이들을 배려할 수 없습니다. 불평등과 불공정과 억지와 억압은 이데올로기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복음 안에서 바뀌지 않으면 그 어떤 체제나 환경 하에서도 늘 소외당하는 계층이 생기게 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인간은 힘의 원리가 아닌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모든 불평등과 불공정과 억지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삶의 원리를 좇아 살기 때문에 그런 세상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원리란, 무조건 내가 남을 위해 나의 것을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삶은 이 천 년 전에 골고다에 선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는지를 확인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년 전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왜 죽었습니까? 죽을 짓을 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품에 안고 예수가 대신 죽으신 것뿐입니다. 그것이 확인이 된 사람은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불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업이 망했습니까? 그게 골고다 십자가보다 더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태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자리를 과분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학 시험에 낙방을 했나요? 그게 십자가의 자리보다 더 부끄러운 자리인가요? 아니지요? 그러면 그 상태도 우리에게는 과분한 상태인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정말 마음에 안 드세요?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 확인이 된 사람에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아내나 남편이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대방을 과분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셨습니까? 그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그 순간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는 과분한 상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심지어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달렸던 십자가의 실체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낮아지는 경험들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성도들에게 오히려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나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배움과 자각도 없이 무턱대고 사회의 정의와 인민의 평등을 위해 촛불을 들고 나가서 그들을 그 억압과 핍박과 가난에서 구해 내겠다고 나서는 것이 어찌 성도의 올바른 자세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독교는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그 자리가 자기에게는 최선의 자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마음에 안 드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바꿔서 행복을 쟁취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인의 자리보다는 종의 자리가, 높은 자리보다는 낮은 자리가, 부자인 자리보다는 가난한 자리가 더욱 더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데 유익한 고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힘의 원리 하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부자가 가난한 것보다 행복한 것이고, 공산주의보다는 민주주의가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독재보다는 민주주의가 더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그런 단세포적 발상으로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것은 성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아시지요? 그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 비유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는 ‘이 모든 상황이 저에게는 과분합니다.’하는 고백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그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바로 그 전장인 19장부터 연결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그 유명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기 생각에 율법을 모두 지켜온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은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을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맘몬과 하나님 둘 중에 누구를 택하겠냐는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만 맘몬을 택해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니까 어줍지 않은 종교행위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장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무엇을 주실 것입니까?’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좇는 이유가 무언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19:27~30)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이에게 버림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버린 것들의 여러 배를 받게 될 것이고 또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 합니다. 거기에서 ‘여러 배’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헤카톤타플라시온’이라는 단어는 ‘백 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백 배’라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많은’이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또’라는 단어는 동격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사람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생이라는 것을 받게 된다’입니다.

먼저 버린다는 것의 의미부터 규명을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고요. 여러분, 자식을 버린다, 전토를 버린다, 집을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예수 이외의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은 부모나 자식이나 집이나 전토가 어떤 상황, 어떤 크기, 어떤 분량이라도 그 자리에서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네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그 때 ‘넌 무슨 일이 있어도 하버드에 들어 가야해, 넌 내 아들이니까’하는 것은 아직 그 사람이 자식을 꼭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내 아들이 이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깨닫고 더욱 더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된다면 나는 이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하고 아들을 내 욕심에서 놓는 것을 ‘버린다’ ‘압히에미’라고 합니다.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마음을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그게 버리는 것입니다. 집, 전토, 재물 다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상황에 순종하는 것을 ‘압히에미’ ‘버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신인 맘몬, 즉 돈에 집착하여 예수를 좇을 기회를 상실해 버린 부자 청년과 베드로를 동일한 선상에서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 너도 저 부자청년처럼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보상받기를 바라느냐? 네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만으로 행복해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을 모르느냐?’하고 일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에피소드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로 끝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20장 1절이 헬라어 ‘가르’ 즉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이 되고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 마지막이 또 동일하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로 끝이 납니다. 그 유명한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기법 중 샌드위치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일꾼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도 지금처럼 이른 아침 일용직 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섰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 일거리를 찾아야했고 거기에서 선택이 된 사람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받았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우리 시간 개념으로 저녁 6시를 0시로, 아침 6시를 12시로 부릅니다. 그리고 저녁 여섯시를 다시 0시로 하여, 그 시간을 일몰시간으로 통상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 아침이라는 것은 새벽 6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3시, 5시, 9시, 11시에 계속해서 품꾼을 부르러 갔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11시에 온 품꾼은 일몰 바로 한 시간 전인 저녁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일몰시간이 되자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계산합니다. 그런데 제일 늦게 온 사람, 일 끝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줍니다.

그 사람은 정확하게 계산하면 1/12 데나리온을 받아야 맞습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계산이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이 주어집니다. 그 사람이 그 돈을 받으면서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사람은 그 한 데나리온이 너무나 과분합니다. 그렇지요? 자기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반면에 제일 처음 온 사람은 은근히 기대를 했겠지요?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면 자기는 열 두 시간을 일했으니까 12 데나리온을 받아야 맞잖아요? 그런데 주인이 그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줍니다. 그 때 처음에 온 자가 따집니다. ‘왜 나의 품삯과 저 늦게 온 사람의 품삯이 같습니까?’ 그 사람에게서는 감사라든지 과분함이라든지 만족이라는 것이 없지요? 왜요? 자기가 주인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그 교만한 마음이 은근히 보상욕구로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은 저녁 다섯 시에 일하러 나온 자가 한 데나리온을 받고 그 과분함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의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 즉 자기들은 선민으로서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고, 할례를 받았으므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러한 자기들에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화려한 다윗 왕국으로 보상을 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러한 바리새 적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이 세상의 풍요와 가치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하려 애를 쓰는 자들이 반드시 나중 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떤 상황과 환경을 허락하시든 과분하다는 마음으로 그 상황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런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게 보이고 싶으셔서 성도들에게 간혹 그런 상황들을 주시기도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고치라고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어둡고 암울한, 억지뿐인 세상 속에서 영원한 나라와 영적인 세계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지 이 세상을 고쳐서 평등하고 윤택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17:14-18)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성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이 세상을 멋지게 고치라고 보내셨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므로 이 세상의 환경이나 가치나 정황 등과 무관하게 악과 반대되는 하늘의 삶을 살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요구하신 것은 세상의 정화가 아닙니다.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내려가서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내 명령에 순종하여 죽으면 그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마’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 그 것들을 자기의 뜻에 맞게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상황과 처지 속에서 순종이라는 하늘의 보물을 따라고 이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옛사람을 죽여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는 일에 몰두하고 매진해야 하는 것이지 섣불리 머리에 띠 두르고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운동이나 민중봉기에 의해 만들어진 평화나 부유함은 절대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으로 이 세상이 조금 더 살기 좋고 편안한 세상이 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니 다른 길로는 절대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회운동이나 민중봉기가 절대 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만이 길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들을 그 불평등과 억압과 억지와 불공정 속에서 구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소개하는 데에 더 주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러한 삶을 사는 이들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지하무덤인 카타콤 속에서도 감격의 찬양이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지하무덤 생활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산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그 분과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싶어서 자진하여 무덤 속으로 기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중에는 로마의 귀족들이 상당수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로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풍요가 자신들의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지하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을 두고 어떤 이들이 ‘그들을 지하 무덤 속에서 구출해 내자’하고 시위를 했다고 해 보자고요. 이 얼마나 우스운 코미디입니까?

우리가 바로 그러한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란 말입니다.

 

동기로 따지자면 십자군 전쟁만큼 건전하고 건강한 동기를 가진 전쟁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는 것이 십자군 전쟁의 피상적 모토 아니었나요? 그 전쟁이 성공했습니까? 그들이 창과 방패를 동원하여 이슬람 세력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빼앗은 결과가 뭡니까? 오히려 대대로 기독교의 적대 국가를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절대 우리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뒤집어엎어 유토피아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죽어주는 방법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지금 조금 못 살고, 지금 조금 불편하고, 지금 조금 압제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얼마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자매님이 숨을 거두기 전에 제게 한 말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저의 암은 제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단단한 마음을 고치시려고 암을 약으로 쓰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 자매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암이라는 무서운 질병이 자기에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암이 낫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 가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암이 자기에게 약이 되었다는 진솔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쓰여 지면 암도, 가난도, 공산주의도, 핍박도, 억압도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세상과 사물과 사건들을 바라보는 관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무작정 가난에서 구해내고, 공산주의 하에서 건져내고, 월급을 많이 받게 해 주고,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 주고 하는 것이 마치 행복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 인양 행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열심히 투쟁해서 비  정규직 노동자들 정규직으로 앉혀주고, 군사독재 하에서 온갖 억지로 시달림 받던 사람들 민주 정부 쟁취하여 풀어주고,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배 두드리며 지옥가게 놔두실 거예요? 그렇게 해서 정말 세상이 살기 좋아졌습니까? 왜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민주적 행정부를 지난 사람들이 오히려 군사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는 기현상이 일어나지요? 인간은 그 마음속의 죄를 해결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자신의 경쟁자요 적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는 시기와 다툼과 사기와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정부 하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부를 민주화하고 안정된 직장을 확보해 주고 하는 건 행복에 이르는 정상적인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라는 길의 습격을 받고 그 예수의 길에 서게 된 사람들은 좁고 협착한 길을 가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이 세상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배우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된다고 명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크고 넓은 길만을 추구하며, 그게 안 될 때는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쟁취해 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어찌 성도의 삶이겠습니까?

‘대통령을 바꾸자, 국회의원들을 몰아내자, 새롭게 법을 바꾸자’ 이런 것으로 세상이 바뀔 것 같으세요? 이 세상의 역사는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요? 성도를 중심으로 역사는 운행됩니다. 그럼 지금 개혁의 대상과 시위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 역사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하기 전에 먼저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개혁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요.

구 소련의 기독교가 서구의 자본주의 교회에 의해 망해 버린 것을 잊지 마세요. 공산주의 치하의 소련의 기독교회는 그야 말로 목숨을 거는 신앙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서구의 자본주의가 교회를 강타하자, 맥도날드와 코카콜라가 들어오자  교회가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하에서는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못할 것이라 추측하고 서구의 교회들이 공산주의의 몰락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배를 두드리며 교회를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무엇이 정말 예수의 길에 선 자들의 삶인지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어떤 것이 진정 세상을 위한 길인지 잘 분별하시라는 말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아무 길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에 내 던지실 때, 그 때에 우리는 ‘왜 길이 없어?’하고 외칠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정상적인 길을 걸어 하나님께로 오라고 나를 이렇게 길도 없는 벼랑으로 밀어 넣으시는구나.’하고 예수를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꼭 그 상황을 반전시켜 내야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예수라는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그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공백은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그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공백을 우리의 계획과 소원으로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머리 둘 곳 없는 외로운 길이며,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점철되는 고난의 길이며, 좁고 협착한 험난한 길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 올바른 길 위에 서 계신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성도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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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5:1-4)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8:24-26)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후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요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벧전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히12:6~8)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딤후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눅6:26)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벧전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롬12:12)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벧전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엡1:14)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4:17~18)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 함이니라

 

보세요. 이게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환난 속에서, 핍박 속에서 오래참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이겨내는 그러한 삶입니다. 그 속에서도 예수로 행복해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십시오. 예수라는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세요. 신앙생활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받은 이들이 이 세상의 어떤 상황과 환경과 처지 속에서도 과분한 마음에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한 참 하늘 백성의 삶을 멋지게 보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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