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8 - 예수가 예비하시는 처소   (요14: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5

68 - 예수가 예비하시는 처소

 

(요14:2-3)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뒤에 베드로가 주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것이라는 결연한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주님은 다른 많은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당신을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성경이 이렇게 유다와 베드로를 한 곳에 등장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유다나 베드로나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 나라에 입성을 하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유기가 되어 창자가 터져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두 갈래로 갈리는 전체 인류의 운명인 것입니다. 신학은 그러한 두 갈래의 인류의 운명을 가리켜 이중예정이라 부릅니다.

주님은 14장1절에서 그러한 은혜의 수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라’ 그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온갖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과 같은 그 믿음으로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신 속에서 기다리라는 말이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2절과 3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근심을 벗어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처소가 뭘까요? 우리 성도가 죽은 뒤에 가게 될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주택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이미 많다고 하면서 처소를 또 마련하러 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할 곳이 많으면 그냥 거기를 쓰면 되지 무슨 처소를 또 예비를 하냐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할 것 같아서 추가로 처소를 더 지으러 가신다는 건가요? 그 해석이 맞다면 그럼 아직도 천국은 건설 중인 것인가요? 그게 아직 완성이 안 되어서 예수님이 아직 못 오시는 것이고 이 역사가 여전히 이렇게 존속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귀하셔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 집만 짓고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신 곳은 하나님 나라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아직 미완성이라는 말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완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하신 후에 바로 그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나라, 성도의 처소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결론 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거하게 될 자들을 위해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 내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거하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하나님 백성들을 완성해 내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한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 즉 성도들과 하나님의 처소라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가 함께 거하는 곳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성도가 함께 거하기 위해서는 일 차적으로 성도들의 죄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죄인은 절대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거짓되어 그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렘17:9~10)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이렇게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하여 하나님의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에도 성막에 숨으셔서 그들을 끌고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하나님의 뒤태만 살짝 보았을 뿐입니다. 그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소 예비인 것입니다.

 

(마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바로 요 상태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그 분의 돌격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지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겔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사도 바울은 그렇게 씻김을 받은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엡5:26~27)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이렇게 교회가 바로 더러운 마음을 씻김을 받아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무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물 중에 가장 더러웠던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씻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발 씻김의 에피소드 뒤에 이 처소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온 몸과 온 마음이 씻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계7:13~14)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성도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 말갛게 씻겨 지고 드디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더럽고 추한 마음이 제해지고 청결한 마음이 심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좌정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그 곳을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처소, 즉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시는 것이고, 그 말은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라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 정리를 잘 하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이며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 통치에 순복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라" 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천국이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고, "지금 천국이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 것은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너희의 더러운 마음을 씻을 피를 흘리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너희의 죄가 해결이 되고 성령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거하시게 되는 하나님 나라, 즉 처소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당신이 준비하신 처소로 우리를 영접하셔서 당신이 계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단순히 먼 훗날 재림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영접을 하시겠다는 그런 말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재림의 이중적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재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파루지아’라는 단어는 안 보이던 것이 ‘나타나다’라는 뜻이지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오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은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라는 말이라 했지요? 그리고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것은, 주님이 초림 때 인간의 육신을 입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그 주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때를 재림의 때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때에는 가시적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준비하시겠다는 처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처소는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 속에서 이미 완성이 된 것이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골고다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며, 그 영적으로 완성이 된 처소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처소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모습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처소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십자가로 막 이루려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너무 피곤해서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하에 잘 지어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움직이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 분께 항복하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예배(가치부여 행위)’라 부릅니다. 하나님만이 참 가치이시며 하나님만이 영광의 주인이심을 모든 만물이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과 합일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그 상태를 ‘연합’이라 부릅니다. 그 연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mutual indwelling' '상호 내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서로 상호 내주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과 신, 신과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상호 내주가 불가능 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합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안식을 ‘하나님의 거처 삼으심’'하나님의 처소 삼으심‘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안식이 바로 ’거주‘의 개념이니까요. 상호 거주가 될 때, 그 상태를 연합이라고 하고, 그 연합의 상태에서 쌍방의 뜻이 하나가 되며, 거기에서 예배가 나오고, 거기에서 참 된 안식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왜 주님의 ‘처소의 예비’가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씀을 드렸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은 인간들을 에덴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안식은 깨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상징적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안식은 그 무엇으로도 깨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다시는 깨지지 않는 안식을 마련하시기 위해 혼돈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이 깨졌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은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영원히 깨지지 않는 안식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새 언약과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출발이 됩니다.

그 민족적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를 준비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 되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15:13,17)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7 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 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걸 뭐라고 한다고요? 상호내주(mutual indwelling).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신명기로 가보겠습니다.

 

(신33:27)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지금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이유를 하나님이 마련하신 처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처소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시고 우리가 또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를 주기 위함이며 그 처소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소를 예비하여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겠다고도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를 그 삼위 일체 하나님 속으로 끌어넣으셔서 삼위 하나님과 연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90:1)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91:9)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표준 새 번역)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처소로 삼았으니,

(시132:13)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표준 새 번역)   

   주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 곳을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도 동일한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당신 안으로 끌어 들여, 다른 말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성숙시키시고 결국에는 완성시키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예수로 부르시기도 하십니다.

 

(고전12:12)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 하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그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 12절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작은 예수 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연합이며, 하나님과 상호 내주하는 처소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새 언약의 내용이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반복이 되고 있는지 보세요.

 

(삼하7:5-7)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언제 사람이 만든 곳에 거하는 것을 보았느냐?’라고 하시면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막으십니다. ‘나는 인간들로부터 무엇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8절부터 다윗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삼하7:8-9)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복된 약속을 마구 쏟아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에게, 아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줄 복은 ‘너희들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너희들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은혜의 언약’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에게 그냥 복을 주실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들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실 지를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삼하 11장에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에는 죄 없는 다윗과 밧세바의 아기가 죽습니다. 그렇게 죄가 해결되고 그 죽은 아이 대신에 솔로몬이 다윗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어떤 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사무엘 하7장의 다윗 언약을 보세요.

 

(삼하7:11-13)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시겠다고 하시지요? 여기서 ‘집’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이트’는 ‘가문,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한 가문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가문’을 다윗을 위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은 다윗을 그 안에 넣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2절과 13절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다윗에게 ‘내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는 것을 봤느냐?’라고 하셨으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다윗이 지은 성전은 안 받으시겠다고 하시고 다윗의 후손에게는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단순히 다윗이 죄를 많이 지었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로몬도 말년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한 사람입니다.

죄로 따지자면 솔로몬도 다윗 못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성전도 안 받으십니다.

 

(행7:46~53)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거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네 후손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여기에는 이중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다윗의 후손은 ‘솔로몬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대로 성전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곧 파괴되고 맙니다. 그 왕위도 영원히 이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솔로몬의 아들 대에서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그러다가 그 둘이 다 결국 망합니다. 다시 말해 사무엘 하 7장의 다윗의 언약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후손이 지은 집이 의미하고 있는 가시적 상징으로서의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것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말로 파괴되기 위해 건축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은혜의 언약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공력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모두 불 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솔로몬의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다윗의 후손에 의해 지어지게 될 집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상징은 여호와의 처소, 여호와께서 거하실 참 성전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참 성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위의 11절에서 언급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지으시는 ‘집’ 다시 말해 ‘다윗의 가문’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백성 안에 거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처소로 제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요한복음 14장 20절 이후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요14:20-24)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시고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확정된 목표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삼위 하나님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분은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약속’이 바로 주님이 예비하시는 처소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이 역사 속에서 성숙되어져 가게 됩니다. 그것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성도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성된 지점에서 과정을 바라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근거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다 씻어 버리심으로 당신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게 하시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달리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망을 이기신 부활로 이어지고 그 부활은 하늘로의 승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셔서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인정받으셨고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의 모습으로 자기가 완성해 놓으신 청결한 마음의 성도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더 이상 죄인들이 하나님의 돌격에 의해 죽지 않아도 되는 구원의 현실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고 하나님은 성도들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상호내주가 실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호내주의 관계는 하나님의 뜻에 성도의 뜻이 완전히 맞추어 지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양육의 훈련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처소 예비는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성도의 성화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 놓으셨고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과거시제와 구원의 현재시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결한 당신의 처소로 만드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선언적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절대 중도에 포기되거나 실패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지는 그 길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수많은 자기부인의 사건들과 상황들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당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편안하게 거하실 수 있도록 자기를 비워 내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시기에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간의 ‘의, 짜다크’뿐입니다.

 

(잠11:4)

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짜다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그 길을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