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7 - 근심의 이유   (요14: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4

67 - 근심의 이유

 

(요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아버지 다윗을 배반한 압살롬과 아히도벨,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다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연결해 보면서 왜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는지를 공부했고, 그렇게 모두 사망으로 던져져야 하는 상황 속에서 생명으로 건져지게 된 우리 성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이었고, 유다였고, 압살롬이었는데 그 저주받을 인생 속으로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양자들로 입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면목 없는 구원을 받은 성도의 대표로 등장한 사람이 베드로라 했지요? 그는 가룟 유다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아주 유약하고, 무력하고, 이기적인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3장 말미를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라는 사람의 실체를 발가벗겨 폭로를 해 버리시지요?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하고 말씀을 하시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하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마음만이라도 고맙다’라든지, ‘역시 내 수제자답다’라고 말씀을 해 주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날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넌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하고 베드로를 머쓱하게 만드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설사 베드로가 그렇게 유약한 자인 것을 미리 아셨다 할지라도 많은 제자들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주는 것은 옳지 않잖아요?

주님은 13장 첫 머리의 ‘끝까지 사랑하심’에 대한 결론을 맺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은 주님 측에서 준비하신 ‘끝까지 사랑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의 결단이나 열심 등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을 제자들과 성경의 독자들인 교회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 또한 우리의 능력과 재주와 의지에서 우리의 신앙을 출발시키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신앙의 출발지점은 절망의 자리여야 합니다.

‘그래요 주님, 저는 저의 유익을 위해서는 주님을 세 번, 아니 삼십 번이라도 부인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제게 필요합니다.’가 우리의 신앙의 출발지점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에서부터 신앙의 가시적 행위들이 격발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어라 하시지요? ‘후에는 따라 오리라’

그 ‘후’가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성령이 오신 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성도가 ‘내가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라는 객기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요한복음의 맨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요21:17-19)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은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뻔뻔스럽게 자신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네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남(성령)이 네게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일’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출발점은 ‘I'm nothing’인 것이지 ‘I can do everything for you’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을 근거로 내 목숨을 바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나’가 아닌, ‘이웃’사랑이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순종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가 새 계명으로 끝이 나는 것이라 했지요?

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 하며, 정의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요. 우리 성도는 힘의 원리에 의해 하나님을 대적하며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대척점의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을 파괴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 틈에서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 만드신 자연과 친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웃을 밟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는 좀비 같은 자들 틈에서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이웃의 이익을 챙겨주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 맞습니다.

약자를 우습게 알고 강자에게 아부하는 이 세상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대항하여 촛불을 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바울은 그 자기부인을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롬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도가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이 먼저 새롭게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착한 일,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착한 삶, 정의로운 삶은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사회 정의 구현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 또한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여 늘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도 미천한 상태에서, 옳은 일, 선한 일, 착한 일, 정의로운 일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것을 ‘자기 의’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 적 이단(Pelagian heresy)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깊은 성숙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하고 강요를 하는 것은 아무런 실행 능력이 없는 강아지에게 도덕 강연이나 윤리 강연, 그리고 사회법 강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초기 청교도들의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까지 성경의 윤리 강령을 들이밀고 그대로 살도록 강요를 했습니다. 그것은 ‘네 힘으로 정의롭게 살아보라’는 펠라기우스 적 강요와 다를 바 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엡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유일한 길은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이며, 그 일은 현재형으로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나가서 사회정의를 외치기 전에 그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시위는 분노의 시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의구현은 긍휼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를 알기 전에는 당신들과 같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약자의 권익을 짓밟고 약자의 피를 뽑아서라도 전체의 이익을 챙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난 뒤에는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난 당신들도 나와 같이 하늘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가 진짜 참 행복의 삶의 원리임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삶에 의거하여 난 약자들의 권익을 위해 이렇게 촛불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이게 되는 사람은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들고 시청 앞으로 나가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긍휼의 마음이 아닌, 강자에 대한 분노와 나의 행위의 정당성을 자랑하기 위한 시위라면 당장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은 자들의 정의구현을 향한 외침은 또 다른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지시려 자기의 몸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하지 못하는 착한 일은 위선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는, 자기부인의 명령 뒤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여전히 그렇게 자신들의 힘과 열심을 의지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지금 13장은 계속해서 구원의 주도권에 관한 문제와 인간들의 자기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 오던 차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근심이라는 주제가 튀어나온 것입니까? 근심이라는 것 또한 자기부인이 아닌 자기주장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장을 13장과 별개의 장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원래 장과 절이 없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근심’이라는 것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사고 당하는 것, 병 걸리는 것, 죽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왜 생긴 것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들은 근심이 없는 존재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심의 동기들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통제하시는 분이 인간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인간들이 그 존재를 거부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근심과 염려로 점철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인간은 결핍과 부족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근심의 뿌리가 뭡니까? 왜 근심하세요? 왜 염려가 되는 것이죠?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데 나에게 그만한 힘이 없다는 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근심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미래의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 의식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의 일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상인들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상품을 개발해 냅니다. 각종의 보험 상품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고안되고 팔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미래를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기도 하고,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어느 정도 마련되고 준비된 사람들은 비교적 근심이 적습니다. 하지만 근심거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우리 교회 김병하 성도님의 딸 승희 양이 하나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길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는데 그게 뇌진탕이 되어 하루 만에 숨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멀쩡하던 열아홉 살 소녀가 하루 만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 사고를 우리가 돈이나 열심, 노력 등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쓰나미나, 태풍 허리케인 같은 천재지변을 우리가 우리의 열심으로 막아낼 수 있나요? 홍수를 일으키는 비구름의 진로를 인위적으로 변경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근심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쩔 수 없는 근심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근심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그 근심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근심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 근심을 덜어낼 수 있게 해 주는, 이 세상의 비결은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위로도 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막내딸을 잃은 김병하 성도님께 제가 어떤 위로를 해 드릴 수 있을까요?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값진 선물로도 그 분의 슬픔과 근심을 상쇄시킬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나는 그 밀물과 같은 근심을 막아서서 위로를 할 수 있노라고, 난 근심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방법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근심의 천적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그러니까 근심의 반대말은 근심 안함이 아니라 믿음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를 근심케 하는 것은 현실에서 겪는 고난만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미 닥친 고난은 이를 악물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근심의 뿌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인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도,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견디지 못합니다. 진실로 미래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살아가기까지는, 인간에게 결코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근심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을 살아있는 믿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우리 성도들도 그 근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까?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의 천적인 근심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한테조차 근심이 떠나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은 완료형으로 이미 수여된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형으로 쌓아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쌓아가야 하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한 번에 허락하신 믿음을 우리가 양육과 훈련과 교육을 통하여 조금씩 더 밝게 깨달아간다는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서신 서를 잘 보시면 믿음을 굳게 하라는 권고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이미 배웠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믿음’의 내용을 올바로 배워서 잘 정리를 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믿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가 내어놓은 믿음을 풍비박산 내 버리셨습니다.

믿음은 ‘네가 나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죽고 너를 구원해 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믿음에 관한 상세한 해설이 적힌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믿음의 내용을 반복하여 공부를 하고 확인을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근심에 노출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딤전6:1-10)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 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 나느니라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으면 경건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여, ‘하나님 내가 이정도 경건한 삶을 살았는데 아무런 보상도 안 해 주세요?’하고 엉뚱한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자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부하게 하려는 시험과 올무에 빠져 그들에게 근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경건에 관한 말씀을 잘 이해하고 배우고 양육을 받은 이들은 비록 그들이 종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 주인을 잘 섬기며 마땅히 공경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을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 믿음이 지향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반복하여 확인하지 않게 되면 인간은 즉시로 이 세상을 자신의 삶의 목적지인 양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근심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원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이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겪게 된 것이고,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제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그 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사망에서 건져지게 되었고, 그 구원의 현실이 가시적 현실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경험들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의 완성이라는 목적지로 열심히 끌고 가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보호하고 계시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은 나에게 결코 해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우리를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합력이 되어 ‘선’을 향해 수렴이 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이니까 절대 염려하면 안 된다는 포악한 권고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염려를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면 나중에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상을 받게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 일을 겪어낼 힘이 생긴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게 되면 나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내 욕심이 채워진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빌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고를 하면서 하나님을 붙들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염려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해야 맞는데 그게 아니라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염려와 근심의 해결책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인 것이지 그 문제들이 속 시원히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제자들이 근심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제자들이 근심을 하고 있었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자기들이 그동안 투자해 놓은 것들이 헛것이 될까봐 근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제자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도 네가 크니, 내가 크니 하고 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정치적 군사적 민속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른 제자들도 그러한 강력한 힘을 소유한, 민족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실 때 그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유대인들의 호산나 환호를 직접 들은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기대가 컸을까요?

 

(막10:32~39)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 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잘 보세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철없는 제자들 좀 보세요. 주님의 죽음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는 자기들을 왕의 보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러한 기대를 안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는데 주님이 또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근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나 나머지 제자들이나 모두 이 세상의 힘과 권력에만, 화려한 다윗 왕국의 재건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근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그들의 근심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만이 이 세상의 결핍과 불만족과 불안함에서 오는 근심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냥 믿음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다시 1절을 보세요.

 

(요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처럼, 이제 나를 그렇게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지키고 보호하고 복을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민 이스라엘이 로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고 그로인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자기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를 박살내고 화려한 다윗 왕국의 풍요를 재건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라는 사람이 와서 죽는다고 하니 어찌 힘이 빠지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인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며 그 수많은 세월을 믿음으로 이겨왔던 것처럼, 나를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해서 그게 최종적인 실패가 아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고 그 때 너희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영접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돌아오셔서 그들이 기다리던 다윗왕국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메시아 왕국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에 이 세상의 고난이나 결핍으로 비롯된 근심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에게 바로 그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할 이유가 없지요.

오늘 본문 2절의 말씀처럼 이미 우리가 가야할 곳이 예수님에 의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그리고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좋은 곳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이 땅에서 조금씩 맛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우리를 근심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제 말을 들으시면서 ‘맞아, 그런데 왜 우리가 근심을 해?’하고 무릎을 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그런데 이 예배당 문 밖에만 나가면 또 다시 근심이 엄습해 오지요?

해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깨어서 복음을 공부하고, 믿음을 굳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것은 허상이며, 신기루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근거로 하여 그 신기루 같은 근심을 던져 버리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장 굶는 것도 아닌데 굶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신기루 같은 근심, 지금 당장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몸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신기루 같은 근심, 지금 당장 아이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잘못될 지도 모른다는 신기루 같은 근심, 그런 것들을 이제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믿음으로 이겨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꺼내진 순간 가나안이라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도록 자동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세심한 간섭과 배려 하에 가나안으로 끌려가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철이 강한 자석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듯이 그렇게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6:10~15)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 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10절과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그들의 노력과 애씀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풍요로 채우신 땅으로 들여보내실 것임이 언약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 이하부터는 그들이 그 땅에서 조심해야 할 일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로 여호와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 분의 이름으로만 맹세를 해야 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 즉 이 세상의 힘의 신인 맘몬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천국에서의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 삶을, 죄악 된 세상인 애굽에서 나온 성도들이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양육 받고 훈련받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딛2:11~14)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지요?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양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는데 그 양육의 내용은,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부인과 순종의 삶을 사는 자로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요구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친(구별된)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우리를 양육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이들은 그 양육의 과정에서 들이닥치는 근심과 염려를 다른 이들보다 조금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은 1859년에 의사의 아들로서, 영국의 아주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신부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18세에 신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퇴학을 당한 이유는 게으름이었습니다. 톰슨은 신부의 꿈을 접고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나, 번번이 의사 시험에서 낙방하면서,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의사 시험도 완전히 포기하고,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시인의 꿈을 안고 런던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숙자로 방황하며 아편에 더 심하게 중독되었습니다. 간헐적으로 정신이 들 때마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펜과 넝마쪽지에 시를 끄적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써서 모은 시집이 윌프리드 메이넬 (Wilfrid Meynell)의 도움을 받아 출판되게 되었습니다. 그 시집에 실린 시 중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라는 한 편의 시가 프랜시스 톰슨을 두고두고 기억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눈물의 안개 속으로,

웃음의 시냇물 속으로

그를 피해 숨었습니다,

나는 조망이 활짝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밀침을 받아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쏜살같이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계산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그리고 발보다 더 급한 한 목소리 울렸습니다

"네가 나를 등지기 때문에 만물이 너를 등지는 것이다."

(중략)

 

인간의 사랑은 그만한 공로가 있어야 받지 않느냐

너는 무슨 공로가 있느냐

엉긴 흙덩이 같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거무칙칙한 흙덩어리인 네가?

애석하다! 너는 아무런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보잘 것 없는 너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밖에는, 단지 나밖에는 말이다.

내가 네게서 무엇을 빼앗았던 것은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다시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 어린애 같은 착각으로 잃었다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가 너를 위해 집에 간수해 두었다.

일어나서, 내 손을 꼭 쥐고, 가자!

아, 제 곁에 저 발자국소리가 멎었습니다.

제 어두움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고. 앞 못 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밀어냈기 때문에 사랑도 함께 밀어냈던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은 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다듬으려 내미시는 손길인 것을 잊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지나시는 곳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동굴은 끝이 막혀 있지만 터널은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밝은 태양 아래로 연결이 되는 곳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