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6 - 유다야, 유다야(II)   (요13:18~38)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3

66 - 유다야, 유다야(II)

 

(요13:18~38)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 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 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 오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 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 이러라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유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바로 그 유다가 우리의 모습을 대표하여 상징으로 담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의 힘과 권세를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 했던 자들이었고, 우리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예수를 판 자 들이었으며, 우리가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이었고, 우리가 바로 유다처럼 창자가 터져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음도 확인을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시편 41편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분석을 함으로 해서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면 유다라는 사람의 존재와 역할은 이미 구약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13:18)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이것은 주님이 다윗의 시인 시편 41편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시41:9)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은 총 5권의 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 중 제 1권이 시편 1편에서 41편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인용하신 시편은 시편 1권의 마지막 시편인 것입니다.

시편 1권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는 시편들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1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당신의 언약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에서 그 메시아를 예표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1권은 마흔 한 개가 모두 다윗의 시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다윗의 시편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주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메시아를 상징했던 인물인 다윗과도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보시면 시편 1권의 첫 번째 시편과 마지막 시편이 같은 어구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1: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권의 마지막인 41편을 볼까요?

 

(시41:1)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둘 다 어떤 말로 시작합니까? 둘 다 똑같이 Blessed is the man 으로 시작이 됩니다.

히브리어로는 ‘아쉬레이 하이쉬’입니다. 직역을 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 복 있는 자여’입니다. 이렇게 시편 1권은 진정한 ‘복 있는 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승리자로 서게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로부터 복 있는 자들이 창조가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참된 승리자가 가까운 친구의 배신으로 곤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친구의 배신으로 수난을 받고 결국 참된 승리자의 자리로 등극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권의 마지막에 친구의 배신이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 41편의 배신자와 그 배신자의 행위를 규명하면 오늘 본문의 이해가 훨씬 쉽겠지요?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왜 예수님이 굳이 이 시편 41편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유다를 묘사하셨는지 확실히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시편 41편은 다윗이 병상에서 기록을 한 시입니다. 다윗이 병상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일이 있지요? 바로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박해를 받던 시기에 쓴 시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정한 재판관으로 자처하면서 이스라엘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급기야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던 아히도벨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가장 사랑했고 신뢰했던 아들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배신을 함으로 해서 다윗은 병상에서 일어나 신발도 신지 못하고 도망을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아들 압살롬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아들 압살롬은 요압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은 유다처럼 목을 매어 자살을 합니다. 그 때 다윗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보세요.

 

(삼하19:4)

4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복 있는 자의 상징인 다윗이 이 세상의 복을 좇아 자신을 배신한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와 유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배신한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또 다른 이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3:9~15)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나선 압살롬 같은 아담을 하나님께서 애타게 부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배신자 아담이 살길이 제시가 됩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은총을 입을 기회조차 없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지만 창세기에서의 아담에게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회는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로 죄의 세력의 머리를 밟아 부수심으로 말미암는 기회입니다. 바로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예수님을 밟아 그 분의 머리를 부수려 시도를 하게 될 것이지만 결국에는 그 일이, 예수님의 발꿈치에 마귀의 세력의 머리가 부수어지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 복음의 내용입니다. 성경에 발꿈치라는 단어 ‘에케브’라는 단어가 딱 세 번 나오는데, 창세기 3장 15절에 발꿈치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고, 두 번째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나오며 세 번째가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시편 41편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셋 다, 대 반전의 이야기입니다. 악의 세력은 항상 발꿈치로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을 밟으려 하는 자로 등장을 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이 결국 그 악의 세력의 머리를 밟아 부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뱀,에서, 압살롬 모두 발꿈치를 들어 자신이 섬겨야 할 자를 밟으려다 결국 자신이 그 상대의 발꿈치에 밟히게 되는 자들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발꿈치를 들다’라는 어구는 ‘그가 발꿈치를 크게 만들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종이 주인을 차 버리고 도망하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어구를 ‘그가 발로 그를 밟았다’라고 번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리를 하면, 언약의 후손은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의 발꿈치에 밟히는 모습으로 당하게 되는데,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승리로 귀결이 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경이 메시아를 배반하는 세상 세력을 상징하는 압살롬을 어떻게 묘사를 하는 지 보세요.

 

(삼하14:25)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지도력까지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성경이 그를 가리켜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는 자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자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스스로가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다이며, 바리새인들이며, 뱀과 아담 아닙니까? 아울러 그 모습은 하나님마저 종으로 부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해 내려하는 목이 곧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창세기 3장 1절이 에덴동산의 뱀을 가리켜 ‘가장 간교하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간교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아룸’은 ‘현명하다, 지혜롭다’라는 단어입니다. 뱀은 뛰어난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와가 그와 어울렸겠지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신의 잘남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들이 아버지의 머리를 밟아 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전쟁은 아버지의 승리로 끝이 나고 그 배신자들은 처참한 결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강한 자로 서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신학의 중요한 한 축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지혜롭고, 용감하고, 유명한 자로 서게 되면 곧바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로 거인, 네피림, 유명한 자, 용사를 지목한 것입니다.

 

(창6:4~8)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용사요, 유명한 자요, 아름다운 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티끌이요, 아무것도 아닌 자요, 순종하는 자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용사인 척 했습니다. 내가 율법 다 지켰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대로 이 땅에서의 다윗왕국을 회복시켜내라고 하나님께 윽박을 질러댄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이신 주님을 로마에 팔아 버렸지요?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자는 그가 하나님일지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용사인 척, 거인인 척, 유명한 자인 척 행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마치 주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사람처럼, 대단한 자리에 올라앉아 그 분의 일을 거들 수 있는 자처럼, 주님은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분처럼 행하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향해 발꿈치를 드는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보다 내가 더 강해야 하고, 주님보다 내가 더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나의 야망을 막는 자는 그게 주님이라 할지라도 발꿈치로 밟아 버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상태에서 은혜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유기된 자들은 그러한 교만으로 계속 달리다가 결국 창자가 터져 죽게 되는 것이고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신하고 로마에 당신을 팔아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23:37)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예루살렘은 유다의 수도이지요?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는 유다,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십자가라는 비장의 무기로 그들을 살려 내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예루살렘, 유다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행복의 길을 찾다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멸망할 예루살렘, 유다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며, 압살롬과 아담의 이야기 또한 유다의 이야기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시편 41편의 이야기를 인용을 하신 것이고, 그 시편의 이야기는 창세기 3장 15절을 인용 해다가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자신을 배신하신 유다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셨다는 것이지요? ‘유다야, 유다야 내가 너를 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더냐, 그런데 네가 원치 않았다’ 이게 주님의 마음이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와 이번 주의 설교 제목이 ‘유다야 유다야’인 것입니다.

유다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반응을 하여 ‘네’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고, 유다야,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줄기차게 가는 자들이 유기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 유다와 베드로, 그리고 유다와 요한의 그림으로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26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유다에게 떡을 찍어다가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13:26)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그가 누구입니까?’하고 묻는 요한의 질문에 ‘그는 유다 이니라’하고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떡을 소스에 찍어서 유다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떡을 나누고, 먹여주는 행위는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 행하는 행위였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유다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입니다. 유다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것마저 뿌리치고 결국 밤으로 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실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유기가 된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마태복음26장에 보면 주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주여, 내 니이까?’하고 묻는데 유독 유다만 ‘랍비여, 내 니이까?’하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태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유다가 처음부터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라고 조차 부르지 못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똑같은 종류의 인간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는 베드로입니다. 그도 역시 이 세상의 다윗 왕국의 회복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정식으로 공표하시는 그 세족의 현장에서도 ‘내가 크니, 네가 크니’하며 다투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열 제자의 대표로 유다의 대척점에서 또 다른 모델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다른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여 ‘너희들은 모두 이렇게 죽어야 할 자이다’를 보여주는 모델이었다면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도 역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유다처럼 주님의 죽으심을 말렸던 사람입니다.

그 때 주님은 그에게 ‘마귀야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되게 꾸중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갑자기 ‘이 중에 마귀가 하나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가장 마음에 찔렸을까요? 당연히 베드로입니다. 자기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마귀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주님의 품에 안겨있던 요한에게 눈짓을 하여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채근을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을 판 유다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그는 무죄다’라고 성소에 돈을 집어던지고 목을 매어 죽었을 때, 그는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베드로는 유다보다도 더 형편없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나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백일하에 폭로가 되자 ‘나 같은 게 무슨 주님의 제자냐’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묻지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 만일 자존심 강한 유다 같았으면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주님을 사랑한다 하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멋있게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뻔뻔스럽게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멋지게 반응을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면목 없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와 넘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이 우리 안에서 직접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유다처럼 겉멋을 부리려 하면 안 됩니다. 마치 자기는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민중들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선택되어 태어난 사람처럼 입만 열면 평등, 구제, 순결, 정의를 외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마치 더러운 벌레처럼 취급하며 치를 떠는 사람들 있지요? 그런 것 하지 말자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그러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본연의 생래적 무력함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조용히 자기 스스로 그런 삶을 살기 시작하고 조심스럽게 권고를 하지 절대 다른 사람들의 치부를 드러내며 ‘너희들은 왜 나처럼 살지 못 하냐’고 비아냥대지 못합니다. 그게 다른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 앞에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한 이들은 절대 선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손가락질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원래 그렇게 못 사는 자로, 생래적 본성을 소유하고 태어난다는 것을 말씀과 삶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거든요.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니까요. 그런데 가끔씩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구제의 삶, 선한 삶, 정의로운 삶은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자기 안에 실제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삶이 가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임을 그 자신은 알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부족함에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훌륭한 삶이 자기의 삶 속에서 격발되어 나온다 할지라도 절대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못 사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열망과 소원과 기도로 응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다’라고 말씀을 하시지요? 다시 한 번 보시지요.

 

(요13:14~15)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기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한 것처럼 그대로 따라 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엉뚱한 행함이 분명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을 보이시고 ‘이 대로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이 뭐였습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착하게 사는 것, 부당한 권세에 항거하는 것 등이라면 주님께서 그런 것들을 보여주셨겠지요? 그런데 뜬금없이 발을 씻겨주시고는 그걸 따라하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너희들의 더러움은 나의 희생에 의해서만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섬김이나 봉사의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거기에는 발 씻김을 당하는 자의 무력함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각자가 서로서로 상대방을 대할 때 ‘나는 주님의 은혜로 깨끗해 진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곧 ‘나의 공로는 전혀 없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살아갑니다.’라는 항복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짜 사랑이 나오고, 진짜 용서가 나오고, 진짜 섬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나’라는 존재가 부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어 놓는 사랑과 용서와 섬김은 전부 ‘나’를 위한 위선의 행위일 뿐임을 명심하십시오.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아야 할 자이고,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받아야 할 자인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하며, 누구의 행위 위에 도덕적 상위자로 군림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발을 씻는 삶의 첫 번째 전제는 나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의 공로를 인정하는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 씻는 이야기로 시작이 된 오늘 본문에 갑자기 새 계명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발을 씻겨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그 말씀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로 바꾸어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은,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란, 내가 어떻게 용서를 받은 자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레19:18)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보시다시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새 계명이라는 것은 계명의 내용이 새 것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계명의 성취에 이르는 방법이 달라졌다는 의미에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옛 계명 하에서는 이웃 사랑이 사람의 노력과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 하에서는 그 이웃 사랑의 목적지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의해 용서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부인이 되어질 때에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무력하고, 내가 제일 더러운 인간임이 자각된 사람에게서 다른 이들을 향한 정죄의 몸짓이 나올 수가 없지요? 내가 제일 큰 빚을 진 자임을 알게 된 사람이 나에게 몇 푼 빚진 자들을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지요? 그렇게 더럽고 추한 나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거저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음이 제대로 믿겨지지 않고 실감이 안 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복음이 정말 우리에게 실감이 되어질 수 있도록 열심히 말씀을 배우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우리의 힘으로 사심 없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열심히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실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부인이 되어지게 되면 우리 안에서 겸손한 사랑이 하나 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애를 써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모두 통과하고, 종국에는 우리의 의지가 원하는 대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부인이라는 신앙의 성숙의 자리에 깊이 들어간 사람일수록 사심 없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유다와 베드로, 둘 중에 누구의 삶과 가깝습니까?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과 자신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겸연쩍은 얼굴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늘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저를 도우소서.’하며 살고 계십니까?

 

많은 이들이 신앙을 우리가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소유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꺼내서 그 크기를 재 볼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재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인 되었는가로 그 성숙의 정도를 잴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성숙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됐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가 보세요. 저는 이제 제 힘으로 충분히 선하게 살 수 있어요.’이런 것이 신앙의 성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은 Total dependence, 완전한 의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점점 더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다가 종국에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을 신앙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점점 업그레이드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 요한복음 13장이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로 시작이 되는 지 아시겠지요? 끝까지 사랑하심이라는 것은 ‘배신’을 전제하는 어구입니다. 유다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 다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절대 밤에서 건져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유다와 같은 운명에 처해져야 하지만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주님 앞에서 강한 자, 용사, 유명한 자, 아름다운 자로 설 수 있다면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의 사랑은 수시로 변하지만 예수님의 사랑만이 끝까지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기에 우리가 밤에 속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번 그 대상을 정하시면 그 대상의 행함이 어떻든 간에 끝까지 사랑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끝까지 사랑하심의 모델로 유다와 베드로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이기도 하고 베드로이기도 한 자들인 것입니다. 유다처럼 가망이 없던 자들이었는데 베드로처럼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게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점점 자신을 포기합니다. 옛 사람이 추구하던 야망에서 내려앉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사람의 새로운 삶을 열심히 추구하게 됩니다. 물론 많이 실수하고 많이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우리는 차차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놓아가게 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공주의, 물질주의, 기복주의에 물든 거짓 기독교는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네 꿈을 펼치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네 꿈을 펼쳐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펼쳐지도록 네 꿈을 내려놓아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가 나가자마자 주님께서 영광을 얻었고 그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나오지요? 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확정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부여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기부인이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되어서,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서 영광스러운 자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아버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모습을 보며 ‘네가 나를 영광스럽게 했다’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요.

오히려 로마의 황제가 되게 하거나 세계의 정복자로 만들어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뜻을 좇아 하릴없이 죽으신 주님을 영광스럽다고 하셨고 거기에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청부 론이나 고지 론이 얼마나 잘못된 가르침인지 잘 아시겠지요?

우리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영원한 영광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실 때까지 한시적이며 유한하게 부어놓으신 작은, 복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지금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조하문 선배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돈이나 명예 등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한시적인 것이며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행복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생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자장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입니다. 열심히 자장면을 먹다보니 단무지가 딱 한 개 남았습니다. 둘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찍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합의를 하기를, 서로 상대방의 뺨을 세게 때려서 울지 않는 사람이 그 마지막 단무지를 먹기로 했습니다. 먼저 A가 B의 뺨을 있는 힘을 다해 후려 갈겼습니다. B는 눈물이 찔끔 났지만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먹기 위해 꾹 참았습니다. 이제 자신이 A의 뺨을 때릴 차례였습니다. 이를 악 물고 A의 뺨을 때리려는 찰나에 A가 단무지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B의 입에 넣어주며 ‘그냥 너 먹어’했습니다. 그리고는 웨이트리스를 불러 ‘단무지 한 접시 더요’하고 외쳤습니다. 어떠세요?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생사를 걸고 서로 빼앗으려 하는 것이 그 종지 안에 남은 단무지 한 개와 많이 다른가요?

눈을 돌려서 ‘아줌마 단무지 한 접시 더요’하면 지금 눈앞에 남아 있는 제한되고 유한한 그런 보잘것없는 단무지 한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늘의 풍요가 우리에게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우리는 겨우 하나 남겨진 그 단무지에 목숨을 거냐는 말입니다.

눈을 드십시오. 믿음의 눈을 드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이 잠시 합의해 놓은 그런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없는 하늘의 풍요를 품어 안으십시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한시적인 행복에 목숨 걸지 마시고 열심히 자신을 부인해가며 그 부인된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질 하늘의 참 복, 영생의 행복에 여러분의 목숨을 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