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3 -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   (요13:1-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0

63 -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

 

(요13: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    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입니다. 제목이 조금 어색합니다. 그냥 ‘하나님 백성 되기’라고 하면 더 깔끔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라는 다소 어색한 수동형의 제목을 붙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우리의 능동적 노력이나 선택이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 되기’하면 마치 우리 구원의 주도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보이니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의 완벽한 모형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의 세족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닦으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단순히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 이웃의 발을 닦는 사람이 되자’는 식의 도덕적 훈계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에피소드 안에 그러한 권고가 함의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군데만 확인을 하고 가지요.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바로 이 자리에서 제자들 간에 큰 다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22:24)

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무슨 싸움입니까? ‘내가 높으냐, 네가 높으냐’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한 싸움의 와중에 주님께서 손수 종의 모습이 되셔서 그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했던 제자들에게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려는 주님의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훈은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웅숭깊은 복음의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게 되는 것이지 오늘 본문이 말하려 하는 주된 메시지는 아닌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이 이야기의 배경이 ‘유월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어린양 예수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진정한 유월절로 오신 예수의 모습을 유월절 바로 전날 예수님이 행하셨던 세족의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족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전에, 그 사건이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행위임을 밝힙니다. 1절을 다시 볼까요?

 

(요13: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누구를 사랑하셨다고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요. 그 말을 직역을 하면 ‘세상 안에 들어 있는 자기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 한 절만 보더라도 모든 세상과 악한 천사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보편 구원론 자들의 주장은 얼토당토한 주장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중에 있는 자기 소유의 백성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고 하지요? 그럼 그 전에는 모르셨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서 ‘알다’ ‘에이도’는 ‘완료 분사’로 쓰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를 줄을 아셨으므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모두 부어 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3절 역시 분사구로 이루어진 문장입니다. 1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1절과 3절에 의하면 주님은 당신의 ‘권위’와 ‘신적 기원’ 그리고 ‘장래의 영광’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죽이려 하는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에이도’라는 완료 분사가 1절과 3절에 반복적으로 쓰여 진 것입니다.

따라서 4절부터 11절까지는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떻게 죽으실 것이며, 어떻게 하늘로 올라갈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가에 대한 설명용 그림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사랑의 절정, 십자가에 관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그 예수님의 세족 사건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을 보세요.

 

(요13:4)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이 모습은 당시의 전형적인 노예의 모습입니다.(눅17:8)

여기에 쓰인 ‘옷’이라는 단어가 ‘히마티온’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복수 명사입니다. 예수님이 옷을 얼마나 많이 입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 벗으신 옷을 복수로 표현을 했을까요? 그 단어를 요한이 다른 곳에서 똑같이 쓰고 있는데 그 곳을 보면 왜 여기에 ‘히마티온’이라는 단어가 쓰였는지 아실 것입니다.

 

(요19:23)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서로 나누어 갖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옷을 ‘히마티온’이라 표기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종이 되시기 위해 벗으셨던 옷과 십자가에서 벗겨지신 옷이 똑같은 단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예수님의 세족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임을 ‘히마티온’이라는 단어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벗는다’라는 단어도 흔히 쓰는 ‘아포 티데미’가 아닌 다소 어색한 ‘티데미’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 단어는 ‘목숨을 버리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 불가능한 제자들을 거룩한 맨발로 만들어 내셨음이 이 그림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비롯한, 거룩한 곳에 서는 자들은 항상 신을 벗으라고 하시지요? 바로 그 상태인 것입니다. 옷을 벗으시고 제자들을 맨발로 만들어 내신 그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시겠지요?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옷을 벗고 수건으로 띠를 띤 종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주인이 종들의 노예가 되어 그 종들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주님께서 그 전에 이미 당신의 제자들에게 비유로 한 번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눅12:35~37)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여기에 보시면 하인들이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을 칭찬하고 오히려 주인이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을 들것이랍니다. 오늘 본문의 그림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그 주인이 지금 종들의 노예가 되어 허리에 띠를 띠고 그들의 발을 닦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주인이 종들을 수종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종들이 먼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여기에서 주님께 수종을 받고 있는 종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런 준비하는 종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그 곁에서도 잠만 잘 자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시는 그 자리에서도 누가 크냐로 싸우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먼저 그러한 종들을 위해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땅에 무릎을 꿇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우리 자신의 불가능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를 발동하여, 띠를 띤 종의 삶을 산다거나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그런 기특한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종이 되시고 그러한 섬김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간섭하시며 우리를 깨어있는 섬김의 종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다 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종 되심이 우리의 종 됨을 이끌어내는 것이지 우리가 먼저 종의 삶을 잘 살아내어 주님의 섬김을 받아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종으로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을 왕과 백성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버금가는 능력과 지혜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인간들이 자기들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선악과’라는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선악과는 ‘너희들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너희는 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힘을 가지고 자기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로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피조물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여 신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온 상태를 헬라어로 ‘휘브리스’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인간들이 교만에 의해 종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로 자리를 바꿔 앉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마저도 종으로 부리며 자신들의 왕좌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 중에 있는,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 백성의 자리로 불러 내리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백성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로 자리를 바꿔 앉은 가련한 죄인들을 다시 종의 자리로 끌어내려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선포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한마디로 요약하여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의 결론은 하나님이 타락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해 내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앉히시고 당신이 그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복귀하시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계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 앉아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후 그들의 삶에 열매로 맺힌 것은 눈물, 사망, 애통, 곡, 아픔 뿐 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러한 사망과 사망의 증상들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다시 당신의 백성의 자리로 불러 내리신 것입니다. 그게 역사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이 세상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옮겨 앉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예수님께서 모두 완성해서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먼저 띠를 띠고 종이 되어 섬기는 모습이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섬김의 주님과 대조되어 등장하는 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요13:2)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이 되어 제자들을 섬기십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종인 자가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 그 주님을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쪽은 어리석은 종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죽음도 불사하고 있고 한쪽은 자신의 알량한 유익을 위해 주인을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지옥의 삶의 원리의 극명한 대조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낮아짐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를 한 곳이 있지요?

 

(빌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6절의 ‘하나님의 본체’에서의 ‘본체’라는 단어가 ‘몰프헤’라 했지요? 그 단어는 ‘본질(substance)까지 똑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형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역시 ‘몰프헤’입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띠를 띤 것이 단순히 종의 흉내를 내신 것이 아니라 진짜 종이 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마땅히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6절에서 ‘취할 것’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할파그모스’는 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리고 다른 헬라어 문서에도 거의 쓰이지 않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전리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인데, 주님은 그 전리품과 같은 자신의 권리를 전혀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신 종 된 주님의 모습이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이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백성들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하고 하나님이 그르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해야 하며 하나님이 죽으라 하면 죽어야 하는 순종의 백성으로 살 때 가장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종의 삶을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마귀와 연합된 죄인들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 한 번 보겠습니다.

 

(사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

      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어떠세요? 예수님의 삶과 완전히 반대이지요? 이게 바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늘 높이 높아져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으려 하는, 유기된 자의 대표인 유다와 그 안에 들어간 마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음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서 유다와 마귀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인지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보면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발을 씻긴다는 것의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오늘 본문의 소품으로 등장하는 대야와 같은 것에 물을 담아 놓고 반드시 거기에 몸을 씻어 정결하게 하도록 명령을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출30:17~21)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 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       그들이 회 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단과 물두멍을 지나야 합니다. 제단에서는 제물의 피가 뿌려지고, 물두멍에서는 물로써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물과 피 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과 피를 통과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에서의 씻음이라는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식이 랍비들의 전통으로 이어져서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은 적이 있었지요? 그 때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불결함과 부정함을 지적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5:19~20)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 하느니라

 

그러니까 구약 때에 물두멍에서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던 행위는 더 이상 신약 때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건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으로는 속까지 정결하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은 물로 씻는 것 정도로는 절대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더러운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예식이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죄를 도말하여 씻어 버리는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물두멍의 물로 몸을 정결하게 씻었던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깨끗하게 씻겨서 하나님과 연합을 하게 되는 교회의 탄생을 성소의 번제단과 물두멍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번제 단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죄가 사해지는 그 제사가 바로 물두멍에서 몸을 씻어 정결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정확하게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제단과 물두멍은 물과 피를 쏟아내어 죄인들의 죄를 말갛게 씻어낸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물로 씻겨서 거룩하게 된 공동체라 표현을 합니다.

 

(엡5:25~27)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깨끗해지는 것, 다른 말로 예수를 믿어 정결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시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하시지요? 주님은 유다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6장에 보면 그 유다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6:64)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씻음과 상관없는 자인 유다를 믿지 않는 자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씻음은 십자가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믿음과 그로 말미암게 되는 죄 씻음의 이야기라는 것이 확실하지요? 확인도장을 찍어 드리겠습니다. 8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송구스러워서 발을 씻지 못하게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13:8)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을 하시지요? 거기에서 ‘상관이 없다’라는 말은 ‘우크 에케이스 메로스 메타’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영광이나 전리품, 재물 등에 공동 소유자로 참예하는 데에 쓰이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연합’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 것입니다. 그 어구를 영어로 하면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in me’입니다.

만일 네가 나의 섬김을 거절하면 너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발 씻김의 행위는 제자들을 자기와 연합시키는 행위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메로스 메타’라는 단어를 거기에다 끌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족 행위가 어떻게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지 조금 더 선명해 졌지요? 그 연합의 이야기는 출애굽기로 가면 더 확실하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출21:2~6)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 할

       것이며

3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종이 상전의 집에 들어왔다가 6년간 일을 하면 7년째에는 풀려나게 됩니다. 여기서 6년이라는 것은 책임완수에 관한 상징입니다. 종이 상전에게 갚아야 하는 것을 모두 갚았을 때 비로소 그 종은 상전에게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6년이라는 것은 상전이 시키는 일을 모두 완수 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상전의 집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그 가족은 못 데리고 나갑니다. 그 가족이 상전의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신랑인 종이 신부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유를 포기하고 상전의 집에 계속 머물겠다고 하면 상전은 그 가정이 하나로 연합이 되도록 유지시켜 주는 대신에 신랑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영원한 종의 상징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 종은 그 상전의 영원한 종으로 살아야 하지만 아울러 그 상전의 상속자의 대열에 끼게 됩니다. 일종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머릿속에 잘 그려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해 택해진 분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을 완수하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20:28)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섬기도록 택해진 하나님의 종 예수가 하나님이 맡기신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의 신부를 이 땅에 두고 홀로 하늘로 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의 그 종처럼 신부와의 연합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신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는 다름 아닌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입니다. 예수는 자기 신부인 교회와의 연합을 깨지 않으시고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종이 송곳으로 자신의 귀에 종의 상징을 남기는 것처럼 당신의 몸에 못자국과 창 자국을 남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의 몸에 못자국과 창 자국이 남았던 것은 바로 출애굽기 21장의 그 이야기를 재현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영원한 섬김 이의 삶을 사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을 섬기시며, 또한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섬김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실제화 되고 있는 지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아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의 예수님의 섬김과 간섭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13:9-10)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자기들의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거부를 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손과 머리도 좀 씻어 달라고 오버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아무런 공로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으로,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베드로가 자신들의 무능력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전적인 은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바리새인들처럼 그 예수님의 섬김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언뜻 보면 그러한 베드로의 행위는 기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감히 종의 모습을 하신 스승의 섬김을 한 두 번의 거절도 없이 넙죽 받아 챙길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구원의 문제일 때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구원은 그렇게 면목 없는 것이 맞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하고, 추악하며, 파산해 버린, 거지같은 존재가 값없는 선물을 면목 없이 넙죽 받아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지가 동냥을 하면서 면목 없다고 거절하는 것 보셨어요? 제가 어떻게 이런 걸 공짜로 받을 수 있냐고 손사래 치는 걸 보셨습니까? 거지는 주는 대로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티끌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섬겨 주시는 예수의 은혜를 면목 없이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것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네 발을 씻지 못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왜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왜 내가 거지같이 공짜로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는 아담 적 자존심이 그들을 은혜의 복음 밖으로 밀어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파산한 거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거기에 무엇을 보태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거지가 동냥을 주는 신사에게 ‘뭐 필요한 것 없수’하고 묻는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고 계신 주님의 섬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뭘 또 감사한 마음으로 면목 없이 받으라는 것인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했지요? 신분적, 운명적, 선언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인생 속에서 구원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것인지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게 구원의 현재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경험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길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도 많은 오해가 있는 구절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목욕은 했지만 계속해서 짓는 자범 죄는 이 땅에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로만 카톨릭에서는 계속해서 고해성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발을 씻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세요?

여기서 주님이 ‘목욕을 한 자’라고 말씀하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기에서 쓰인 ‘호 레라루메노스’라는 표현은 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스스로 목욕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같이 누군가에 의해 목욕시킴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그렇게 목욕을 한 자들은 온 몸이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발이 온 몸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깨끗한 발을 닦고 계신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같은 절기의 만찬이나 혼인 잔치와 같은 잔치에 참여할 때 반드시 목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사람이 내어 주는 물로 또 다시 손과 발을 닦습니다. 그게 거의 율법 화 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의 전통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러 온 제자들 또한 모두 목욕을 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목욕을 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다시 그들의 발을 닦으셨을까요?

본문 10절 후반부를 보시면 주님께서 ‘너희는 모두 깨끗하다’라고 반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 주님은 깨끗한 발을 닦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자신들의 발을 닦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깨달아 알았을까요? 자신들은 목욕을 한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 주님의 세족 사건은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우리의 가장 더러운 발을 닦으시는, 다른 말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닦아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함과 동시에, 우리의 삶에 계속 섬기는 종으로 남으셔서 우리가 목욕을 한 자라는 것을 재확인 시키시는, 우리의 삶 속에서의 주님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왜 십자가가 필연적으로 골고다에 설 수밖에 없었는가?’를 가르치시고 경험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로 목욕을 한 자가 되었다는 것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목욕과 발 씻음, 둘 다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욕과 발 씻음이 대조가 될 때에 목욕은 골고다의 십자가로, 발 씻음은 이 땅에서의 작은 십자가로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목욕 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왜 목욕이 필요한 자였으며, 왜 그 목욕을 스스로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목욕을 시켜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심으로 그 목욕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요15:2~4)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게 바로 발 씻음이며 1절에 나오는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어구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발을 계속 씻으신다고 하시는데 발 씻음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무관심하게 살고 있다면 그게 어떻게 말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발을 씻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욕을 한 자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때로 우리의 지저분한 죄를 폭로하심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의 필연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목욕시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뻔 했는가’하는 예수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러한 사망의 증상에 시달려야 했을 텐데, 이게 웬 은혜인가’하는 고백을 받아내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자아를 철장으로 두들겨 패서 부인시키심으로 ‘우리는 정말 예수의 은혜로 자신을 부인하는 자로 완성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게 예수님의 발 씻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옛 자아가 죽어가는 모습을 감지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발 씻음입니다. 그러니까 목욕이 구원의 과거시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발 씻음은 구원의 현재 시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모두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 은혜도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받아 누려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주님의 발 씻음도 불가항력적이며,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신 주님께 발을 붙들린 상태로 씻김을 당한 것은 바로 그러한 구원의 불가항력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주님께 붙들려 꼼짝을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반드시 주님의 발 씻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발 씻음을 거부하게 되면 주님의 일갈이 들려오게 될 것입니다.

‘네가 나의 발 씻김을 거부하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주님의 발 씻김,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게 될 때 당황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래서 내게 예수가 필요하다’라는 고백을 터져 나오게 하는 사건들과 증상들이 일어날 때 힘들어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의 과정을 거쳐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의 언약의 완성지점으로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