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5 - 유다야, 유다야(I)   (요13:18~30)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2

65 - 유다야, 유다야(I)

 

(요13:18~30)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 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 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 오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 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 이러라

 

오늘과 다음 주는 유다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두 번에 나누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와 다음 주 설교를 함께 연결해서 들으셔야 비로소 한 편의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좀 맥없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전부터 유기된 자로 선택이 된 유다와, 창세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이 된 베드로와 요한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구원 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성품이나 능력이나 재능이나 열심의 차원에서, 별반 다를 바 없는 두 종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어 밤으로 나가 창자가 터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지옥의 불길 속으로 침잠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창세전의 택하심에 의해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끝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극명한 대조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들의 티끌 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더욱 더 오롯이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족 사건이 시작되는 13장 서두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구절을 이미 공부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표현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끝없는 사랑은, 그들을 위해 짊어지신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만개를 하게 되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두 명 중에 가룟 유다는, 발까지 다 씻겨주신 상태에서 끝까지 사랑하지 않으시고 밤으로 나가도록 놔두십니다.

 

(요13:30)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 이러라

 

여기서 밤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제가 전에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를 설명하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두운 세상 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밤이 의미하는 바를 어두움의 권세라 지칭하신 적이 있지요?

 

(눅22:52~53)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헤메라, 낮)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왜 유다는 그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에서 제외가 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는 창세전에 유기되기로 작정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왜 주님은 유다를 굳이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까? 주님은 처음부터 그가 마귀라는 것을 아셨잖아요? 그러면 그냥 싹을 잘라 버리시지 왜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발까지 다 씻어주시고는 밤으로 가도록 놔 두셨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요13:18)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이미 성경에 유다라는 존재와 그 유다가 할 일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유다를 제자로 받아들이신 것이고 그가 그의 뜻대로, 밤으로 나가는 것도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 시편 41편의 인용구절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지금 설교의 맥을 잘 좇아오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의 모든 것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에 의해 통제되고, 제한받고 있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대로 역사는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마귀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구속사 속에서의 마귀의 열연도 반드시 필요한 구속사의 완성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귀인 유다가 십자가가 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도구로 쓰여 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절대로 놓치시면 안 됩니다.

왜 주님께서 교회에 들어와 있는 가라지를 뽑지 말고 놔두라고 말씀을 하셨는지 아시겠지요? 가라지 들도 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의 역할이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유다는 알곡들의 천국입성에 쓰여 지는 가라지의 역할을 맡아서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게 살다가 간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인 유다는 전도의 도구로도 쓰임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사역 초기부터 유다라는 자가 마귀의 세력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대적할 것임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요6:70~71)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그런데 그러한 유다를 삼년 반 동안 곁에 두시면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나 전도 여행을 하실 때, 기적을 일으키실 때, 모든 순간에 유다를 동참 시키셨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능력까지 더하셔서 그가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며, 전도도 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돈궤까지 맡기시고 모든 재정의 출납을 맡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기된 자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구절이 바로 그 밑의 20절입니다.

 

(요13:20)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유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갑자기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비록 유다가 유기된 자, 즉 마귀의 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를 들어 당신의 전도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 자신은 유기된 자이고, 마귀의 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자까지도 당신의 도구요 수단으로 쓰실 수 있는 만물과 만사의 주관자이심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를 보내셨을 때 유다를 통해 예수가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자격 있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 도저히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어떤 이들을 통해서도 복음은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 대 제사장 가야바 등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구속사에서의 한 역할 씩을 해 내지요?

 

(요11:49~52)

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 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 이러라

 

보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대 제사장의 입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을 하게 하십니다. 저는 지금 아무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까지도 도구로 쓰실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한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는 데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들어서 사용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택한 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나 스펄전 목사님 같은 분들이 ‘하나님, 혹시 저를 이렇게 사용만 하시고 나중에 지옥에 보내시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라고 일기를 쓰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다가 나중에 버려지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경외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고전9:23, 27)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나 루터나 스펄전 같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이 수시로 흔들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경외와 두려움의 긴장감 속에서 진지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저도 사도 바울과 같은 경외감과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바로 내가 유다가 될 수 있고 바로 내 곁의 친구가 유다일 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을 했던 것입니다. 너희 자신에 대해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점 가감 없이 성취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복음을 전파하는 데 쓰임을 받는 자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마귀, 유다의 제자단 합류 사건에 의해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다의 선택을 통하여 마귀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주님의 순결함과 거룩함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기를 유다는 마귀라고 했는데 그 유다가 ‘그는 무죄한 자다’라고 증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그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도덕적 무흠함이 완전히 입증이 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 편을 들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요.

또 한 가지 우리가 배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유다로 말미암게 될 결국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를 택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순종의 모습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제자단 합류는 죄의 흉악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삼년 반을 교제를 했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그 분의 모든 강화나 가르침을 다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열하게 그 스승을 팔아버렸습니다. 죄인은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의 구속사 속에서의 역할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제한된 지혜를 뛰어넘는 깊고 크고 높은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왜 유기된 자의 표본인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단에 합류하여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기로 작정된 자가 그 작정과 계획에 의해 죄인의 역할을 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그것을 근거로 그들을 심판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미 그의 존재와 그의 역할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역할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정되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유다를 처벌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유다 속에 들어간 마귀가 유다를 조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13:2, 27)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그렇지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은 것도 마귀이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도록 유다 안에서 움직인 자도 마귀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무죄 아닙니까? 세상 법정에서도 자의에 의한 범죄가 아닐 경우에, 그리고 어떤 세력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범죄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다의 범죄는 충분히 정상 참작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사건에 마귀가 등장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임을 암시하는 것이지 유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행위가 마귀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뭡니까? 마귀는 실존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떠한 세력을 상징하고 있는 거라 했지요? 마귀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도덕적 피조물의 상태와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상징적 존재이면서 실체인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유다 자신이 바로 마귀인 것이고 그러한 유다의 생각과 행위 또한 마귀의 것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들어간 유다의 모습은 바로 예수를 믿기 전의 죄인들의 모습이며,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옛 사람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성도에게 남아있는 죄의 잔재(macula)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인 유다, 그리고 그 유다라는 나라가 상징하고 있는 죄인들, 그리고 그 죄인들의 대표인 아담,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를 뭉뚱그려 상징하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바로 내가 유다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의 이름이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민족적 ‘이스라엘’ 즉 ‘유다’인 것입니다. 그 모두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육의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입신양명, 소원성취를 꿈꾸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만족, 그리고 진정한 강함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상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이 세상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이었으며, 유다였으며, 가룟 유다였으며,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가룟 유다의 죄가 어떤 것인지 간단하게 짚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의 죄가 심판받아 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정상참작이 가능한 것인지도 아울러 살펴보지요.

 

가룟 유다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가룟’(Iscariots)은 성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성이 없다고 했지요? 물론 지금은 그들이 오랜 세월을 전 세계로 흩어져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느라 성을 갖게 되었지만 원래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 하여 성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본의 황제가 자신은 태양신의 자손이라 하여 성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 가룟이라는 말은 그가 속했던 자객 단(secret society of assassins)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열심당이라고도 하지요? 유다는 ‘시카리’(Sicarii)라고 불리던 그 비밀 단체의 회원이었습니다. 그 단체의 회원들은 품속에 단도를 품고 다니면서, 유대 민족을 학대하는 로마인이나, 로마인에 빌붙어 동족을 착취하는 유대인들을 처치했습니다.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로마인들로부터 나라를 해방시켜 독립 국가로 회복시키고, 다윗 왕국의 영화를 되찾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를 비롯한 열심당원들의 목적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힘을 풍성하게 소유한 다윗왕국의 건설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와 우리 민족이 이 세상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의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그들의 목표로 삼아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 전체의 바램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이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린 것 아닙니까? 유다는 지금 그 전체 유대인들의 대표로 열 두 제자들 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들의 대표로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애국자였습니다. 당시의 열심당원들은 가족도, 직업도 모두 버리고 오직 한 가지 목표, 조국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회복에만 몰두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국 독립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통째로 드린 그런 열혈당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 관점에서 유다는 다른 열 한 사도들보다 훨씬 용기도 많고, 의지력도 강한 사람이었으며, 애국심에 불타는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며 유대인들을 규합하여 몰고 다닌다는 한 사람의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 예수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엄마를 시켜 다윗 왕국이 회복이 되면 하나는 우의정을 시켜주고 하나는 좌의정을 시켜 달라고 청탁까지 했겠지요.

그런데 그 예수가 자꾸 죽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호시탐탐 민중봉기의 날을 기다리며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애국의 칼을 갈고 있었는데, 자기의 꿈을 실현해 줄 지도자가 자꾸 약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을 포함한 열 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그 날에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자극하기 위해 그 분을 죽이려는 자들을 동원하여 그를 공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 스승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유다는 그 분이 오병이어로 수 만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았고, 물 위를 걷는다든지,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한다든지 하는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분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분을 붙들기 위해 공격을 해 오게 되면 그분이 분노하실 것이고 그 분노가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으로 추측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인 장정들이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이 운집해 있었고 로마군들 또한 초 긴장상태로 두려워 떨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여 ‘일어나라 동지들이여’ 한마디만 하면 엄청난 규모의 독립 전쟁이 일어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황제에게 보낸 편지들이 다수 발견이 되었는데 그 편지들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있던 내용이 증원 군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지금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유대인들을 장악할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의 편지를 수시로 황제에게 보냈을 정도로 당시 유대의 치안은 허술했었습니다. 유다는 그 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하스모니안 왕조의 시조였던 유다 마카비라는 사람이 마치 유대의 메시아처럼 성전을 탈환하여 수전 절을 지켜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의 독립군들은 마땅한 지도자만을 기다려오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죽겠다고 하시니까 유다가 극약처방을 생각해 내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만일 은 30세겔이 탐이 나서 예수님을 팔았던 것이라면 그가 나중에 ‘그는 무죄한 자라’라고 소리를 치며 그 돈을 땅 바닥에 내 동댕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른 가지고 도망을 갔겠지요.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뒤를 졸졸 쫓아갔단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지 유심히 살폈습니다.

은 30 세겔은 당시의 화폐 가치로도 아주 작은 액수였습니다. 그 정도의 돈은 유다가 맡고 있던 돈 궤에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그 돈 30세겔보다 더 큰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선동하려는 계략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자기의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기대와는 달리 자기의 스승이 말없이 잡혀가서 채찍에 맞는 모습을 보고 뒤늦게 뉘우쳤습니다. 자기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살벌한 현장에서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 이건 내가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27:1-5)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 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어떠세요? 끝까지 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감당해 내려고 하는 유다의 장렬한 죽음이 멋지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그것을 바로 죄라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행복과 만족과 쾌락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이 세상의 힘과 폭력으로 그것을 쟁취해 내려고 하는 모든 시도와, 인간이 자기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여,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그 것을 바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의 자세가 어떤 자세입니까?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거나 도움을 바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그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다의 죄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죄였고(유대인), 그게 바로 죄인들의 죄인 것이며, 그게 바로 아담의 죄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아야 하는 자가 감히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했던 최초의 반란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습니까? 아담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최초의 인간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행위를 ‘죄’라 하시고, 그를 가리켜 ‘죄인’이라 규정하셨습니다. 바로 그 아담의 교만과 배신이 우리가 지난주일 창세기 강해 때 공부한 창세기 38장의 유다의 이야기에서 또 다시 반복이 되고, 구약 내내 전체 유대인들의 삶으로 재현되어졌지요? 유대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선악과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그 전체 유대인들의 대표로 유대, 즉 가룟 유다가 십자가 바로 앞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나지 말았으면 더 좋을 뻔 했다’는 말씀까지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 민족적 이스라엘의 유기, 유다의 배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묘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피조물들의 교만을 벌하시고야 마신다는 엄한 경고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즉 유다와 가룟 유다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는 것이 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죽이시기로 작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반드시 사망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미리 그러한 자들의 대표로 성경에 등장하게 되는 자들의 행위와 그들의 결국을 기록을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타락, 민족적 이스라엘의 실패, 유다의 배신은 한 가지 이야기를 여러 가지 다른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반복적이며 점진적인 기록인 것이며 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유다의 배신이야기를 보면서 ‘유다, 그 나쁜 놈’이라든지 ‘유다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반응을 보이기 전에 ‘내가 바로 유다입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를 배신했고, 내가 예수를 팔았으며,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도덕적 피조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영광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의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은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처럼 하나님 다음가는 위대한 존재로 창조를 해 내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엄연히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공급을 받아야만 존재가 가능하고 행복과 기쁨과 만족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면 그들은 그저 티끌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붙들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바로 그 양자 선택의 시험에서 모든 자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을 시험하십니다. 거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시험에 성공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그들 중 당신의 택한 자들 얼마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들을 살려 내시고 당신의 나라로 그들을 입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자들은 이제 이성과 인격을 가진 상태에서 영원히 타락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이 가능한 아담에서 타락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 것이 이 역사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끊임없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중에서 시험에 떨어진 자는 지옥으로 유기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시험에 통과한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시험이 복된 것이며,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약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2절에서 ‘시험’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페이라스모이스’입니다. 그 단어는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어떤 것, 영어로 하면 ‘trial, test'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12절에서도 똑같이 쓰입니다.

 

(약1:12)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서도 ‘페이라스모이스’가 똑같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입니까? 아니란 말입니까? 시험을 하시지요? 왜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페이라스모이스’는 복을 받는 길에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는 하나님은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고 정 반대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약1:13~14)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13절에 쓰인 시험이라는 단어는 2절과 12절의 좋은 의미의 시험, ‘페이라스모이스’와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페이라조메노스’라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유혹(temptation)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4절의 ‘미혹됨’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델레아조메노스’인데 그 단어는 사냥용어입니다. ‘미끼로 고기를 꿰어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의 의도는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며 자기 위에 절대 상위권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혹여 그 시험에서 실패를 한다하더라도 그 실패의 경험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하게 되어 결국에는 복된 자리로 안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시험은 그야말로 ‘페이라스모이스’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제외된 이들은 그 시험을 ‘페이라조메노스’ ‘유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욕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욕심에 의해 시험이 유혹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쉽게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은 자신의 위치 확인에 힘써야 했습니다. 아담 자신은 하나님 절대 하위 권자이며 자신의 위에 절대 상위 권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장치가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그렇게 살게 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욕심이 가입하게 되면 그 시험(페이라스모이스)이 유혹(페이라조메노스)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망이 왔습니다.

 

(약1:15)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인간이 설사 그 시험에 실패를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게 되면 그 시험의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연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실패에 임하게 되면 인간은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구나.’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데에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유혹으로 덥석 물어버리게 되면 ‘내가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돼? 나도 능력이 있어, 나도 내 힘으로 얼마든지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유다입니다. 그리고 그 유다의 반대편에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그 유다의 반대편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이 담고 있는 은혜의 왕 노릇에 관한 내용과 예수님이 인용하신 시편 41편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 ‘유다야, 유다야’의 설교를 완결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