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2 - 버림받은 자의 하나님   (요12:26~50)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09

62 - 버림받은 자의 하나님

 

(요12:26~50)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 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 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 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 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과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숨으시는 하나님’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창세기의 숨겨진 생명나무에서 부터 시작해서 이사야서, 고린도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편에 그려져 있는 숨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찾아서 연결을 해 본 결과,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더욱 더 오롯이 드러내시기 위해, 자기의 자격과 열심과 조건을 내세우는 인간들에게 당신을 숨기시고 창세전에 택해진 어떤 무리에게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가셔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분이심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옛 아담처럼 자신들의 자격과 열심과 조건을 들고,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화염검과 그룹들을 통과하여 생명나무열매를 먹었노라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했지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요,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에 물든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당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 옛 아담 앞에서 생명나무를 숨기셨다는 것은 자기부인(절대순종)이 선행되지 않은 그 누구도 절대 생명나무실과를 먹을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얻게 되는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소 살아지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옛 아담 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이 막으신 화염검과 그룹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여 생명나무실과를 쟁취해 낸, 말도 안 되는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지요? 기독교의 본질은 ‘은혜’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완전히 부복하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자들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바로 그 자리로 회귀를 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해 간단하게 복습을 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창세기 2장 4절의 전반부는 같은 단어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솨마임, 에레쯔, 엘로힘, 바라’ ‘하늘들, 땅, 하나님, 창조’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섯 째 날까지의 창조기사와 일곱째 날의 안식, 그리고 우리가 흔히 문화 명령이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흔히 쓰이는 인클루지오(inclusio) 기법이라 했습니다. 수미 일치법입니다. 머리와 꼬리가 마치 샌드위치의 양쪽 빵처럼 똑같이 양쪽 끝을 막고 있고 그 사이에, 그 빵이 의미하는 내용을 마치 샌드위치의 속처럼 넣어서 그 내용을 설명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2절부터 창세기 2장 3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첫째 날과 둘째 날, 그리고 셋째 날은 틀도 없고 구조도 없는 혼돈의 상태에 틀을 세우시고 구조를 잡으시는 것이었고 넷째 날과 다섯째 날, 그리고 여섯째 날은 그 정리된 틀 속에다가 공허를 해결하는 내용물들을 채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창조의 끝에 인간이 창조가 되며 그 인간에게 그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날에 안식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안식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2장3절은 그렇게 ‘안식, 솨바쓰’로 끝이 납니다.

그 안식이라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그 완성품의 왕으로 제 자리에 좌정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라 했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를 완성하시고 당신의 자리에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존적 존재로 그 분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하나님 대접을 받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피조물의 안식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해 드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절대 안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의뢰하는 자만이 안식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절대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늘 피곤하고 고단합니다. 늘 수고로운 삶에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안식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할 때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 완전히 항복하고 그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며 찬양할 때에,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받아 자신의 삶 속에서 반사적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들은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예배(worship)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의 예배를 인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게 문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끔 만드는 자들(worship leader)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배(worship)라는 것은 (worth + ship)내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치 부여 행위’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그 분의 영광을 자랑하고, 찬양하는 상태를 예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소원성취, 문제해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무당굿과 방불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분으로 인정하고 그 분 앞에서 오롯이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자신들이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야 하느냐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으며, ‘나’라는 존재도 예배를 받아 마땅한 자라는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의 인생과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하는 것이고 그렇게 구원을 받은 인간들을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한 종류는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전자를 ‘죽은 자’로 규정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 합니다. 거기서 살려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목적지는 자기 자신의 배를 예배하느라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좀 더 알기 쉬운 말로 바꾸면, 성도는 그에게 주어진 일생동안에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 의해 자신의 영광을 좇던 삶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며 의뢰하는 자로 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가 만들어 낸 부귀영화, 만사형통, 소원성취, 문제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악과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허락하신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다름 아닌 흙입니다.(창3:14) 거기에서 쓰인 ‘흙, 티끌, 먼지’라는 의미의 단어 ‘아파르’는 바로 그 밑으로 연결이 되는 아담에 대한 저주에 그대로 쓰입니다.

 

(창3:19)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렇게 흙에서 나온 존재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죽음이라는 것은 뱀으로 상징되는 마귀의 먹이가 되어 마귀와 연합이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모든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고 칭한다 했지요? 그러니까 모든 죄인들은 마귀의 먹이가 되어서 마귀에게 먹혀있는, 마귀와 한 몸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죽음입니다. 그렇게 뱀이 흙을 먹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어서 자기의 배를 채우는 식의 마귀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강함’을 삶의 모토로 하여 살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뱀이라 부르셨던 것이고 그들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3:33)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렇게 마귀가 죄인들과 한 몸이 되는 방식은 강한 자인 마귀가 약한 자인 흙을 먹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그걸 뭐라 하지요? 힘의 원리라 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고 그 약한 자를 자기의 수하로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힘의 원리가 맺는 열매입니다. 그게 죽음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정의 힘이니, 고지 론이니, 번영의 신학 등은 복음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망의 속삭임이며 지옥의 유혹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강해지려고 하는 자들, 다른 말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려 하는 자들은 그 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 사는 마귀의 세력에 속한 자들이 분명한 것이며 그들은 지금도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에 젖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살과 피를 자신들의 노력과 선택과 의지를 발동하여 먹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흙을 덥석 먹어버려 자신의 배 속에 넣어버린 뱀과 어찌나 똑같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일갈을 하신 것입니다.

 

(요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힘의 원리를 숭앙하고, 그 힘의 원리에 의해 이 땅의 다윗 왕국을 기대하며,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을 의지하는 자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이 이제 자명해 졌지요?

 

그러한 마귀와 죄인들과의 연합의 방식의 반대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연합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한 쪽이 약한 쪽에게 먹히는 방식으로 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내어줌’의 방식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6:56)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이렇게 구원은 발뒤꿈치를 물어뜯는 박쥐같은 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발꿈치에 밟혀 죽고 예수의 살과 피를 전가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단,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에 한해서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무리들은 그냥 그렇게 예수님의 발꿈치에 밟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너무나 불가능하고 연약하고 추악하여 하나님에 의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들에게 떡이 되시고 생수가 되셔서, 그들의 음식이 되어 그들에게 먹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연합을 이루어 내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먹고 먹히는 힘의 원리가 아니라 창조주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은혜의 원리인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축약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내 이웃의 영광을 위해 손해와 상함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곳을 성경은 하나님 나라라 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저 우주 저편에 숨겨져 있는 어떤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된 어떤 이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십자가의 삶이 터져 나올 때, 거기가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귀의 땅에서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사는 이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과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안티테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안티테제에 열광을 하며 마치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양 곡해를 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영화로운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대 요리 문답과 소 요리 문답이 모두 그 본질적 질문을 1번에다가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교회의 존재론적 본질인 하나님 나라와 기능적 본질인 예배, 자기부인, 순종이라는 컨센서스(consensus)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영광과 그 영광을 얻어내기 위한 종교 행위로 교회의 존재론적, 기능적 본질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은 ‘오늘날 마귀가 인간을 확실하게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에 등록시키는 것’이라고 다소 과격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본질이 왜곡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목표지점을 잘못 설정하고 있는 교회는 그냥 친목계에 불과한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에 등록을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착각하며 마치 천국은 따 놓은 당상(堂上)처럼 여기게 되고, 덩달아 교회는 그 사람이 이미 교회의 멤버가 되었으므로 전도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초고속으로 지옥을 향해 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본질에 대해 잘 생각하시면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을 보시면 교회의 본질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12:27-28)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7절에서 ‘민망하다’라고 번역이 된 ‘타랏소’라는 단어는 ‘혼란을 일으키다, 당황하다, 동요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굉장히 혼란스러우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옵소서’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굉장히 갈등을 하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어 성경을 직역을 해 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을 다시 원어에 맞게 번역을 해보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이 때를 위하여 왔다’입니다. 그러니까 27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수신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제자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밝히신 후 하나님께 외칩니다. ‘아버지여 제 뜻은 그러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이 두 구절의 강세는 ‘내가 너무나 고통스럽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그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내용이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도 등장합니다.

 

(마26:39)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구절의 강세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가 아니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대로 다 하실 거면서 왜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그러한 약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본문 30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요12:30)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 이니라

 

보시다시피 주님은 당신이 당할 고통 앞에서 흔들리는,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폭로당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당할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제자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신 것은 제자들을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제 곧 당신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인상 깊게 새기고 계신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사망에 속한 자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각인 시키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러한 저주조차 기쁘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비약을 한다면 ‘너희 성도들의 목적지가 바로 그 지점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은 자기의 뜻이 분명히 있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의 뜻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컫는 삶인 것입니다. ‘나는 살고 싶지만 아버지가 죽으라시면 죽겠습니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신 예수님의 삶이었고, 그 예수 안에 연합되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 즉 교회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본질이며 성도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으시면서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시는지 지켜보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업이 어려워져서 사업을 좀 일으켜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결국 사업이 망해버렸다고 해 보자고요. 그 때 성도는 ‘내 정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나보다’라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렇게 사업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제가 미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억지를 부렸네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순종의 고백을 먼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을 하고 계실 때 그 자식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 만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보자고요.

그 때에도 성도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최선이었는데 제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의 제사를 올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바로 그 자리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의 삶,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그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임을 제자들과 교회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이 때를 면하게 해주세요.’라는 당신의 뜻을 밝히신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셔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뱀이 먹어버린 죄인들의 삶인, 힘의 원리의 악함을 폭로 해버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그러한 순종의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이 세상 마귀, 즉 뱀의 삶의 악함을 폭로하는 삶이며 그 뱀을 쫓아내는 삶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요12:31)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 말씀을 곡해 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고 했는데 왜 아직도 이 세상 임금이 우리를 미혹하게 놔두시는가?’하고 마음속에 의문을 품으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번에 걸쳐 설명을 해 드렸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자기가 정답인 것처럼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의 정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폭로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규정되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힘의 원리가 정답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리가 정답이라는 것을 밝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역설을 바로 그 다음 구절의 한 단어가 모두 품고 있습니다.

 

(요12:32)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에서 ‘들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휩소오’라는 단어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들어 올려지다’라는 뜻과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지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2장 33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라는 구절에 쓰인 그 단어가 바로 ‘휩소오’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좇아 목숨까지도 비워내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올리는 삶이라는 이 복음의 역설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놓쳐서는 안 될 기독교의 핵심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날 교회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의 뜻과 소원이 기각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고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니까요. 그러니까 성도는 기도를 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가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한 번 보세요.

 

(빌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어내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얻은 것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전부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뜻을 버리는 자기부인의 삶이 결국 승리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그 나라의 질서를 좇아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성도의 삶은 예수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꾀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를 좇아 사는 삶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섬기려거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마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보시다시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자기부인의 삶이었고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목적지가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를 지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던 것처럼, 성도의 삶 또한 자기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좇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성숙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믿음은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데에 사용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버리는 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믿음을 가지고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이니까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고, 믿음으로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부인시키고, 십자가를 지게 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믿음이며 그 아버지의 믿음에서 격발되는 자녀의 믿음인 것입니다. 본문 44절 이하를 보시면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를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요12:44-46)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 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 이로라

 

여기보시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이 정작 당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당신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자들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보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성품과 속성과 능력 등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계속 수난 당하시고, 배신당하시고, 결국 세상에게 맞아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 어떤 하나님을 보십니까? 약해 빠지고 무능력한 하나님이 떠오르시지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인가요? ‘아니, 주님은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셔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거예요. 여러분, 기적이라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고, 마태복음 7장의 불법을 행하는 자들도 이 땅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마귀도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미루어 추측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폄하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버려지는 예수님을 통해서는 어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마27:46)

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자기 아들을 버리시는 이런 모습을 통해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보십니까? 매정한 분,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 이기적인 분 등등 이런 이미지들이 떠오르시지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버려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버려짐은 바로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갈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저주를 몽땅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아 마땅한 티끌 같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의 독생 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 버릴 만큼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사랑이 풍성 하신 분이시며, 자비와 용서가 충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 십자가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한 아들의 애통한 절규가 묻어나는 그러한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들을 버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버려져야 마땅한 어떤 무리들을 오직 당신의 은혜로 다시 살려내실 것임을 십자가의 버려짐과 안식 후 첫날의 부활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버려짐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버려짐을 보아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자비와 위대하심과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버려짐에 의해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에 똑같이 하나님의 버리심이 경험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롬4:25)

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어줌이라는 말은 그 분의 수난의 삶과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어줌이라는 단어 ‘파라디도미’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막14:10)

10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여기에서 ‘넘겨주다’라고 번역이 된 말이 정확하게 똑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파라디도미’는 유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손으로 넘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중에서, 예수님께 순종하며,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인간이 예수님을 자신의 손으로 넘겨서 자기가 예수의 주인 노릇을 하려 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배반입니다. 또 한군데 보겠습니다.

 

(막1:14)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여기에서 ‘잡히다’라고 번역이 된 말이 ‘파라디도미’입니다. 이렇게 그 ‘파라디도미’라는 단어는 ‘배반하다, 넘기다, 붙잡히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파라디도미’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마치 예수님을 배반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세상에게 넘기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게 잡히게 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넘기 움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손으로 옮기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당신의 손으로 옮기셔서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실 때에, 그 모습이 마치 하나님이 아들을 배신한 것처럼, 그를 세상에 붙잡히도록 내어주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파라디도미’의 삶을 똑같이 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우리가 마가복음 1장에서 확인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과 똑같이 세상에게 ‘파라디도미’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세례요한의 삶을 반추해 볼까요? 세례요한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똑같이 잉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잉태가 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설교를 하다가 갔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세상에게 잡혔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잡혔습니다. 세례요한은 세상에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도 역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꺼려서 몇 번을 놓아주려 했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을 그림자처럼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어줌’의 삶이 세례요한의 삶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세례요한의 삶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요?

 

(막6:7~13)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 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바로 밑에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중략하고 25절부터 보겠습니다.

 

(막6:25~30)

25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하니라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28절에 두 번이나 반복이 되어 등장하는 ‘주다’라는 단어가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의 어근이 되는 단어 ‘디도미’입니다. 요한에게서 예수님의 ‘내어줌’의 삶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30절입니다. 마가가 6장 7절에서 13절까지에서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제자의 파송을 기록하다가 갑자기 세례요한이 세상에게 내어줌이 되어, 세상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 것을 회고의 형식으로 기록을 한 다음 그 세례요한의 이야기의 끝을 파송되었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자기들이 행한 것들을 주님께 고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매끄럽지 못하지요? 마치 13절과 30절 사이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그런 에피소드가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이게 무슨 구조라 했습니까? 양쪽에 빵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 그 빵을 설명하는 속에 들어 있는 것. 샌드위치 구조, 수미 일치법입니다. 그러니까 양쪽에 빵의 역할을 하며 놓여있는, 제자들이 파송 이야기 가운데 세례요한의 죽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바로 목이 잘려 죽는 모양으로 나타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버려짐의 삶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버려짐의 삶을 체험함으로 해서 그들이 어떠한 지경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버려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과 같은 그런 암흑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암흑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영원한 버려짐 속에서 이를 갈며 살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이유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세상이 휘두르는 철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권능이 그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마귀와 세상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난으로 질병으로 공격을 하기도 하고 풍요와 쾌락으로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도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결국에는 완성의 자리에 세우시고 마신다는 것을 마귀와 세상에게 보여주시고 또 우리들에게도 경험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성도를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내어줌의 삶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게 만들기 위해 성도를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만나자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성도의 삶이 그러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도저히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하고 무능력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흥하고 내가 망하는 삶인 것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병이 걸리고 하는 것이 망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부유함 속에서도 그 부유함이 나의 힘이 아님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사람은 부유함 속에서 예수 때문에 망한 사람인 것입니다. 건강함 속에서 그 건강이 진짜 힘이 아님을 깨닫고 그 건강을 힘 삼아 살지 않고 예수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건강함 속에서 망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경과 조건과 처지는 우리의 거룩을 완성하기 위해 방법과 도구로 쓰여 지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내어줌의 삶을 통해 철저하게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부인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적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여러분의 삶에 시작되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소원성취, 만사형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의 완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망하고 하나님을 흥하게 하는, 다른 말로 나의 영광을 위해 살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영광을 불태우는 삶으로의 전환이 우리의 목표 지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죽이는 작업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핵심인 것입니다. 나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장의 결론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12:47-48)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 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방종을 조장하는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아도 심판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들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48절을 보면 그러한 당신의 말을 받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심판의 대상이 되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원에 있어서 자기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율법과 행위를 들고 나와 ‘내가 제사 드렸어요. 내가 율법 지켰어요. 내가 할례 받았어요.’하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에게는 주님이 하신 그 말이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예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돌아오라는 의도였는데 바리새인들처럼 그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자신들의 업적과 행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은 그들이 지켜냈다고 하는 그 말씀에 의해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된다는 그런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과 욕심, 그리고 힘의 원리에 의해 가치라고 규정된 이 세상의 힘을 하나님 앞에 배설물처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구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 앞에 무엇을 행위와 업적으로 디밀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래서 본문 50절이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요12:50)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명령’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엔톨레’는 ‘율법, 계명,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용서해라 하면 용서하고, 감싸주라 하면 감싸주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뭐 특별히 다른 것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력을 풍성하게 부으셔서 우리에게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신적인 복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대장되려 하지 마시고 비록 이 땅에서 버려지는 모습으로, 넘겨지는 모습으로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삶을 추구하시고 경주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좇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을 사십시오. 마지막 결론으로 요한 일서 2장 15절 이하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