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0 - 밀알이 되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요12:20~25)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08

60 - 밀알이 되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요12:20~25)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호산나를 연호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맹점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새끼 나귀가 아닌 백마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안타까움이 되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도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이 계속해서 구원이 무엇이며 복음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을 하십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은 24절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는 구절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헌신과 희생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희생하여 많은 열매를 맺자’라는 그런 부담스러운 구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쁜 교훈은 아니지만 우리가 거기에서만 머문다면 자칫 그 구절이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거기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그 구절은 20절, 21절과 아주 긴밀한 연계가 되어 있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헬라인 몇 사람이 예배를 하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한 말을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그들이 빌립에게 가서 뭐라고 했다고 합니까?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제가 예전에 타주에 있는 어떤 교회에 집회를 갔었는데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섰더니 그 강단 마주 편에 바로 그 구절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님들의 간절한 염원이었던 듯싶었습니다. 목사의 경험담이나, 신문에 오르내리는 가십거리나, 경제이야기, 사회 이야기, 도덕과 윤리 이야기 그런 것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설교만 해달라는 그런 요청이 그 안에 절절하게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도 이 강단에서 누가 설교를 하던 바로 그러한 요구를 담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설교자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지금 요한이 이곳에 헬라인들의 출현을 굳이 기록을 한 것은 선민이라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를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찾아옴으로 해서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자처했던 유대인들이 개라고 여겼던, 이방사람인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를 찾으며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제 때가 왔다’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그 때가 어떤 때인지를 설명하시는 부분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인들이 예배를 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왔다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왔다는 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나라를 모델로 사용하여 인간 측에서의 불가능함을 폭로하고,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선물해 주시는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구약이 끝나고 그 구원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가시적으로 적용이 되고, 실행이 되는 신약의 은혜의 때가 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가릴 것 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율법도 아니고 제사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고지하는 것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인 것입니다. 바울이 역시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를 보면 좀 더 실감나게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엡2:11~13)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 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 할례 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무 할례 당이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도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게 될 그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24절은 성도의 헌신을 강요하는 구절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설명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그 구절은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것과 정반대로 ‘너희들이 너희들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으므로 이제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희들의 모든 죄를 품어 안고 죽는 것으로 너희를 구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밀알이 되어 죽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먼저 선택을 받은 민족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방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공히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미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창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족속에게 적용이 될 것임을 이렇게 처음부터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라는 조상에게서 시작이 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영적이스라엘, 즉 교회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민족만이 선민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롬4:16~18)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9:6-7)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롬10:11~13)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보세요. 구원은 창세전에 택해진, 모든 족속 안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수여 방법이,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시는, 십자가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된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헬라인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에서 ‘영광’ ‘독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고 했지요? 지금 예수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가리켜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있다는 말이 되지요? 맞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오래 참으심 등의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되심이 농축이 되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용어들이 얼마나 많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찾으면서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로부터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닫고 그 분의 사랑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로 서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만 우리 주님은 우리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별 없이 당신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부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게 하시는 것으로 영광을 얻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찾아와서 주님을 만나겠다고 하시자 그들을 만나겠다, 혹은 만나지 않겠다는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는 당신의 십자가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사역이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반복되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이 최초로 제자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난 곳이 가나의 혼인잔치였습니다.

 

(요2:11)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의 일곱 개 표적 중에서 제일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나의 혼인잔치에 나타난 표적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영광의 내용과 동일한 것이라는 말이 되지요?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를 잘 기억해 보세요.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요2:4)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 하였나이다 

 

오늘 본문과 비교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는 ‘때가 왔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가나 혼인잔치의 에피소드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가나의 혼인잔치의 시점에서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사건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그 영광의 사건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는 간접적으로 알려 주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징을 통하여 제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지요?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참된 잔치로 완성해 내실 것임을 보여준 표적이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신 사건입니다. 그 집에는 정결예식 때 쓰는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에 물이 하나도 없었지요? 그것은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고 있노라고 너스레를 떨던 유대인들의 율법의 행위가 실은 겉만 번드르르한 외식의 행위였음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항아리들을 물로 채우라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꿔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숫자, 안식의 숫자는 7입니다. 그렇다면 항아리가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 마지막 일곱 번째 항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헌신인 십자가에 의해 완성이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인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이 납니다.

 

(요11:39~40)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보시는 바와 같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얼마 전에 공부한 부분이니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에 관한 신기한 기록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서,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사망이라는 대적을 파하시고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당신의 백성을 일으키시는 구원의 이야기라 했지요?

그렇게 모형으로, 그림자로 설명이 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제 실제로 골고다 언덕에 설 때가 되었다는 것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인 것이며 그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축약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이었는데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열매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밀알에 의해 맺혀진 열매는 어떤 열매여야 할까요?

역시 밀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죽는 밀알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죽도록 헌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경의 다른 이야기를 인용해서 부연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 중에 한 알의 밀알로 땅에 심겨지는 ‘씨’에 관한 비유가 있지요?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그림으로 훌륭하게 설명해 놓은 비유입니다.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좋은 밭이 되자’거나 ‘우리 마음속의 돌밭이나 가시 떨기 밭을 갈아엎자’는 권고가 아닙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돌밭이나 가시 떨기 밭이나 길가 밭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좋은

밭에서나 나오는 열매를 맺어내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한 것이지 절대 우리에게 어떠한 행위를 요구하는 비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3:18~23)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여러분은 이 중에 어떤 밭이라고 생각하세요? 좋은 땅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해서 백배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누가복음에서는 그 좋은 땅을 가리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고 계세요? 항상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돌밭처럼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가시떨기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번번이 넘어져 결실을 못하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서 하나님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지는 좋은 땅으로 기경을 해야 합니까? 그게 가능한 것이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겠습니까? 채찍하나 들고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도록 가르치고 독려하시면 될 것을.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비유는 이사야서에서 인용을 한 비유입니다. 먼저 이사야서 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7:23-25)

23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앗수르를 시켜 그들을 침공케 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판의 날에 등장하는 것이 질려와 형극입니다. 질려와 형극으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 ‘솨이트, 솨미르’가 다 가시덤불, 가시 떨기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시 떨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죄에 빠져, 심판에 이른 모든 죄인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이 어디에서 나오지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심판하실 때 그의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시지요? 바로 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에 놓여있는 그러한 죄인들의 상태. 그렇다면 돌밭은 어떤 밭인지 볼까요? 역시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사8:13~15)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 이니라

 

율법을 의지하고 자신들의 불가능함을 인정치 않는 이스라엘은 돌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치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라는 돌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열매는커녕 함정과 올무에 빠져 넘어지고 부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돌밭입니다. 이렇게 돌밭 역시 심판받을 자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전부 심판을 받아 거치고,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려서 다 죽어야 하는 자들 중에서 어떤 자들이 은혜를 입어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6:9~13)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가 세상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모든 패역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도 없어서 전부 황폐한 땅이 되어 멸망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를 하나 심어서 그 땅의 그루터기를 만드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땅은 다 길가 밭이요, 돌밭이요, 가시 떨기 밭이어서 모두다 심판과 저주 속으로 던져져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거룩한 씨를 준비하셔서 그 씨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거룩한 씨’라고 번역이 된 ‘제라’라는 단어는 창세기 3장의 여인의 후손에서의 그 ‘후손’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오는 그 ‘자손’과, 갈라디아서 3장 16절의  ‘자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 후손과 자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까?

 

(갈3:1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분명하지요?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황폐한 땅에 심겨지는 거룩한 씨는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그 씨를 무엇이라 하십니까? 말씀이라 하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은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라는 씨는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 도저히 심겨질 수 없는 씨입니다. 왜냐하면 그 밭들이 그 씨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셔서 그 안에다 그 거룩한 씨를 심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밭이 좋은 땅만이 맺을 수 있는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이사야서 6장 9절 이하의 말씀처럼 열매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 밭이 얼마나 추악한지 하나님이 그 밭을 갈아엎는 것 정도로는 그들을 옥토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만큼 더럽게 타락해 있습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이라는 것입니다. 그 황폐한 땅에서는 절대 열매가 맺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황폐 속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거룩한 씨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황폐한 땅에다가 심어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씨가 십자가를 통하여 그 황폐한 땅의 더러운 가시와 돌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거룩한 씨가 ‘영생’이라는,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고야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알아듣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 이사야서의 내용을 그대로 들고 다시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 전에 주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보세요.

 

(마13:10~18)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 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지금 우리가 함께 살펴 본 이사야서의 내용이 그대로 다 들어 있지요?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12절에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 앗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많이 들어서 머릿속에 쌓아놓고는 있는데 그 말씀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넉넉하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들은 나중에 그들이 들어 놓은 것마저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씨에 의해 열매가 된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달을 수도 없고 그 분이 원하시는 열매를 삶으로 맺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예배당 안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중에 그 들어놓은 것마저 다 빼앗기게 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롬10:16~17)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 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도에게 믿음이 주어지게 되는 과정이 잘 설명이 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16절에 ‘순종치’라는 단어가 있지요? 그 단어와 역시 16절의 ‘전하는 바’라는 단어는 ‘듣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17절에도 역시 ‘아코에’ ‘듣다’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구절에 ‘듣다’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듣는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사도 바울이 연달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그 단어를 썼을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여 듣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서도 성경 지식은 많은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하나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자들이 열매로 맺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십자가에 의해서, 한 알의 밀알에 의해서.

 

하나님은 저주받아 황폐해져 버린 죄인들의 밭에 거룩한 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필코 열매를 맺어내시고야 마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인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결코 우리가 좋은 밭이 되어서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닙니다.

 

(롬9:25~28)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벧후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고전1:30)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경건이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이 되셨으며,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함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거저 받은 것 뿐 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한 알의 밀알의 수고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육신적으로는 좋은 밭도 아닙니다. 예수가 맺으신 열매 때문에 좋은 밭이라고 여겨지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로 가보겠습니다.

 

(출14:10~14)

10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홍해라는 난관이 닥치자 곧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돌밭이며 가시떨기 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내가 싸우리라’하십니다. 그 돌밭과 가시떨기 밭을 기경하여 좋은 밭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심겨진 씨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밭 같고 가시떨기 같은 우리 인생 속에 심겨진 거룩한 씨는 그 껍질과 씨젖을 양분으로 삼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을까요? 아니잖아요? 그 반대로 죽은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에 그대로 묻혀 있게 되는 것이고 살아 있는 씨가 열매를 맺는 것 아닙니까?

식물의 씨앗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맨 바깥에 껍질이 있고 그 껍질 안쪽으로 씨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쌀로 치자면 우리가 밥으로 먹는 그 부분이 씨젖입니다. 그리고 그 씨젖 맨 위쪽으로 조그마한 씨눈이 있습니다. 쌀을 너무 씻으면 그 씨눈이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하지요? 그러한 씨가 땅에 심기우면 껍질과 씨젖이 죽어 씨눈의 양분이 되어 싹이 트게 되고 급기야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씨눈이 죽어 있는 씨는 절대 싹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열매가 맺힌다고 하셨을까요? 씨눈이 죽어 버리면 절대 열매가 맺혀질 수 없잖아요? 그건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눈이 살아있는 씨는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된다는 진리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도 씨앗처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씨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씨눈이 대지와 교통하며 그 대지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대지에 심겨져 그 분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 삶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사람은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껍질과 씨젖을 먹고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육신, 즉 옛 사람을 부인하며 그것을 양분삼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은 씨눈이 살아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씨눈이 열매를 맺기 위해 그분의 육체가 죽었습니다. 예수라는 씨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이 세상의 죄인들이 예수 안에서 모두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라는 거룩한 씨가 심겼습니다. 그 거룩한 씨는 씨눈이 씨젖과 껍질을 양분삼아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육신을 기각하고 부정하며 그것을 양분삼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가 부정되는 것은 우리가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가 맺힌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의 열매 맺음을 위해 우리의 육신을 자꾸 부인해 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씨가 싹을 틔우겠다고 씨젖과 껍질을 요구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그것들을 내 놓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그렇게 수동적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모습이 세상에서는 지는 모습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용서하는 모습으로, 인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성경은 그것을 옛 사람의 죽음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딤후3:1-4)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게 바로 거룩한 씨가 심겨지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며, 거룩한 씨가 심겨진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악의 잔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밀알이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옛 육신을 부인시키며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본문 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옛 사람에 대한 자기 부인이 없이 여전히 자신의 육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는 그렇게 무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두 씨가 발아할 때 그 딱딱한 호두의 껍질이 박살이 나는 걸아십니까? 그런데 여전히 옛 자아를 사랑하고 그 옛 자아를 살찌우는 삶을 살면서 내 안에 거룩한 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해 가는 성도만이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이 부정된다는 것은 곧 이웃 사랑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느라 이웃을 모두 적으로, 경쟁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가 우리의 옛 사람을 부인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세상조차도 품에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디오게네투스’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당시 초대 교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와 그 지체들을 사랑하면서도 그것들에게 미움을 당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으면서도 육체를 온전히 붙들어주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감옥에 갇혀 있듯 세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가슴으로 세상을 품는다.’ 그게 거룩한 씨에 의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의 죽음에 의해 열매가 된 이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 밀알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강요나 억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심겨진 거룩한 씨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삶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용서하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인내하고, 포옹해 주느라 세상 사람들에게 약자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게 죽어가는 밀알입니다. 그렇게 성도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죽는 밀알로서의 삶을 살게 될 때 그 밀알이 속해 있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천국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천국을 망각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가 그랬지요? 철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요.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는 천국 망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국은 성도가 밀알이 되어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거기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 � ‘나’를 드리는 ‘자기 부인’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복음이었기에 그녀의 행위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기념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리아와 대조되어 등장하고 있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 세상 것들을 목적으로 삼아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다의 주장이 뭡니까? 예수님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죽지 말고 살아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라는 것이 유다의 주장 아닙니까? 오늘 본문이 유다를 도둑이라 하지요? 이 땅의 것에 모든 관심을 쏟아 붓고 예수를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도둑놈들이 바로 이 시대의 유다들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영생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소중한 것과 나의 영광을 초개처럼 주님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하시고, 그렇게 헌금하시고, 그렇게 봉사하시며, 그렇게 선교 하십시오. 만일 아직까지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로 말미암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지 못하다면 절대 헌신이라는 말 입 밖에도 내지 마시고, 헌금도 뒤로 미루십시오. 봉사, 구제, 선교, 예배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복음을 이해하세요.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그 때가 되면 자랑 없는 자발적인 헌신과 자발적인 헌금과 자발적인 봉사와 자발적인 선교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