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58 - 마리아의 향유     (요12: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07

58 - 마리아의 향유

 

 

(요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사건이 담고 있는 심오한 복음의 내용에 관해 심도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야기가 아니라 요단 동편에서 요단강을 건너 철옹성 여리고를 파하시는 것으로 모형 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권세를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사망이 물러가고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모습으로 죽은 나사로가 부활을 하는 그림이 등장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은 죽은 나사로와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나사로의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셔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장자들을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오늘 본문에서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실제화 되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塗油)사건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마리아의 도유사건을 마리아의 헌신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깬 마리아를 본받아서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주께, 혹은 교회에 드리자는 선동의 소재로 자주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보다 더 웅숭깊은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아주 은혜로운 에피소드입니다.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다시 베다니로 가셨는데 그 베다니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는 어절이 나옵니다. 요한은 지금 그러한 나열을 통해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게 되어 잔치가 벌어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장사되심에 의한 것임을 넌지시 힌트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마리아의 헌신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마26:6-13, 막14:3-9, 눅7:36-50)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복음서에 각기 기록된 그 마리아의 이야기의 내용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는 것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는 그 잔치가 벌어지는 집이 누구의 집인지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나사로가 예수님 옆에 앉아있고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가 분주히 집안일을 돕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의 집이나 나사로의 가까운 친척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도유사건은 장소도 베다니가 아니고 그를 초청한 이도 어떤 예의 없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들어오셨는데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고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을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이가 만일 선지자였더라면 저 여자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저 여자가 하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하고 믿음 없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그 여자가 ‘죄인’으로 등장하고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어디로 보나 그 여자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향유 도유사건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간에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나머지 세 복음서의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향유 도유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적어도 두 번 이상 일어났던 이야기인 것이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과 누가복음의 어떤 여자의 향유 도유 사건은 완전히 다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의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도 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유월절 이틀 전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보시다시피 유월절 엿새전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26:2, 6~7)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14:1-3)

1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렇지요? 여기서는 이 사건의 배경이 유월절 이틀 전인 듯 보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이러합니다.

 

(요12: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

 

이런 걸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봐라, 성경 자체도 이렇게 엉켜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성경의 역사성은 잊어버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교훈이나 잘 체득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자’하고 공격을 합니다. 사실 제가 어제 이 부분 때문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들여서 여러 주석서들과 강해서, 논문들까지 찾아서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이 부분에 관해 시원하게 설명을 해 주는 책이나 논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의 하루를 다 소비한 것 같은데 이렇게 배경이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넘어가 버리는 것도 제 양심상 허락치를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다시 잘 읽어보니 그건 의외로 간단한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가신 것은 유월절 엿새 전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마태와 마가는 유월절 이틀 전이라는 것을 그 사건 바로 앞에 굳이 삽입해 넣었는가?

마태와 마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월절 이틀 전에 있었던 공회의 결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유월절 이틀 전에 공회에 모여서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와 마가는 유월절 이틀 전에 있었던 그 사건을 먼저 기록을 하고 베다니에서의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회고 식으로 간략하게 그 이야기 아래에 붙여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음모를 배태케 한 사건이 바로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사건이었고, 바로 그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유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것을 계기로 그 음모가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유월절 이틀 전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 뒤에 그 음모의 매개체인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잘 보면 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 앞이나 뒤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마태와 마가가 잘 쓰는 ‘그 후에’ 즉 ‘then’이라든지 ‘immediately’같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은 마태와 마가가 그 사건들을(마리아 향유 도유사건과 공회의 음모) 시간적 순서를 가지고 기록을 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 이야기들이 시간적 순서로 연결이 된 것이라면 마태와 마가는 반드시 그들이 즐겨 쓰는 ‘그 후에’라는 단어를 거기에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요한은 베다니에서의 잔치를 시간적인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마태와 마가는 그 베다니에서의 예수님의 책망이 유다의 마음에 사무쳐서 그로 하여금 대 제사장들에게 즉시 가서 거래를 하게 만들었음을 밝히고자, 그 잔치에서 야기된 사건을 중심으로(유월절 이틀 전의 공회의 음모)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앞서 기록한 사건을 서술할 때 그에 앞서서 기록한 기자들이 상술한 상황과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반복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기록하지 않은 다른 특징들을 상술합니다. 그래서 마치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가 상이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보면 오히려 세 복음서는 상호 보완을 하고 있지 상이점으로 모순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 주해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12:1-2)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절에는 ‘나사로’와 ‘죽음’과 ‘살아남’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2절에는 ‘예수와 함께 앉다’라는 어구가 나옵니다. ‘죽음과 살아남, 그리고 함께 앉음’ 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요?

 

(엡2:5~6)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사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는 그림은 바로 이 에베소서에서 기술되고 있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 보좌에 앉아 있는 그 구원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무엇을 근거로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된 메시지인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요12:7)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마26:12~13)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 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14:8~9)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보시다시피 성경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장사지냄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마치 사족처럼 붙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어디에서든지 함께 전하여져서 저를 기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한 번 여러분께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분명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믿게 되신 분들이 맞지요? 그런데 그 복음을 전해 들으실 때 마리아의 이야기를 함께 전해 들으셨나요?

아니면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이 마리아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계십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일까요? 바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남,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등의 복음의 이야기를 그대로 함의하고 있는 사건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마리아의 향유 도유사건 이퀄(equal)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히브리 사람들이 어떤 때에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하는지부터 보겠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눅7:44-46) 두 번째로 왕이 즉위를 할 때 기름을 붓습니다. (삼상10:1, 왕하9:3) 세 번째로 거룩하게 하는 고대적 예식의 측면에서 기름을 붓습니다.(창28:18) 네 번째로 제사장의 의식적 성별을 위해 기름을 붓습니다. 다섯 번째로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붓고 여섯 번째로 장례식 때 시신 위에 부어서 바릅니다.(요19:40)

지금 마리아에 의해 주님에게 부어진 기름은 위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의 기름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그 기름이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이라 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상황은 유대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시간 이었습니다. 그 때 시체에 바르는 향유가 그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름은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마치 지켜보기나 한 것처럼 다윗이 그로부터 천 년 전에 쓴 시에 그 상황이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리로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시 이기도 합니다.

지금 주님의 상황을 잘 그려보세요. 주님은 지금 당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전에 죽으셔도 안 되고 그 후에 죽으셔도 안 됩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때에 정확하게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때까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주님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 상황에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베푸셨습니다. 거기에서 ‘상’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슐한’은 잔치집의 식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시편 23편과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겹쳐지지요?

그러니까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는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승리의 잔치인 것이며(나사로의 부활을 이유로 벌어진 잔치이므로) 예수님께 부어지는 기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승리를 위한 장사 지냄의 기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기름을 가리켜 희락의 기름, 즐거움의 기름이라고 부릅니다.

 

(사61:1-3)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 예수님에게 부어진 그 기름을 이사야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게 하는 기름’이라 하며 그 기름을 ‘싸손 쉐멘’ ‘희락의 기름’이라 합니다.

 

(시45:6-8)

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7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8         왕의 모든 옷은 몰 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 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여기서도 몰 약과 침향 등의 장사 용품과 함께 왕에게 부어지는 기름을 가리켜 즐거움의 기름이라합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시133:1-3)

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곳에서는 영생을 얻은 하늘의 형제자매들이 동거하고 성별된 이유를 아론과 같은 어떤 제사장이 보배로운 기름을 머리에 부음으로 일어나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가 그 머리와 하나가 되고 성별이 되어 동거를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잔치 집에서 마리아에 의해 예수님께 부어지는 향유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기름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왕으로 제사장으로 구별되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즐거움의 기름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그 즐거움은 하나님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시고 그 분의 대 제사장이심과 왕이심을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기름이 즐거움의 기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비밀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똑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얼추 2-3만 불은 되는 돈이지요. 그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몽땅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비난당하고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버립니다. 예수님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마리아가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 원수들의 목전에서 예수님이 그녀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그녀에게, 주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그녀를 위한 잔치를 베푸시고 그녀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는 형국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와 존경의 표시로, 그리고 절대 순종의 표시로 그 발 앞에 꿇어 앉아  자기의 머리를 풀고 그 머리를 이용하여 향유를 발랐는데 그게 결국 자신의 머리에 즐거움의 기름이 발라지는 격이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머리를 푼다는 것은 ‘나는 부정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민5:18) 그리고 누군가의 발 앞에 앉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절대 복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정한 자들의 모든 부정함을 품어 안고 부정한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삶과 똑같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존경의 표시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순종의 제사를 올렸습니다. 바로 그 순종의 제사를 아버지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리아의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에게 있는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을 가지고 나와서 그 것을 아낌없이 주께 부었고 자기의 몸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머리카락을 이용하여(고전11:15) 주님의 가장 더러운 발을 닦았습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다 비우시고 당신의 영광마저도 비우신 채로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러한 마리아의 편을 들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가 벌어진 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의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은 시편 23편의 기자인 다윗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그 삶은 우리 성도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복음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성도의 헌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 쓰시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은 헌신이요, 헌금입니다. 봉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이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그가 부은 향유가 값비싼 것이어서도 아니고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부어서도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진정한 헌신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헌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헌신을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선교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고, 나도 그 죽음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헌신은 ‘내가 주님께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을 보태드립니다.’의 차원이 아닌 주님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엄청난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제물로 바쳐지신 그 하늘의 제사에 내가 깍두기로 참여하게 되는 사건이 우리의 헌신이요, 헌금이요, 봉사요, 선교요, 구제요, 예배요, 선한 삶인 것입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전의 연보함에 두 렙 돈을 넣은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두 렙 돈은 아주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지만 그 과부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 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여러분 이걸 어떻게 이해하시겠어요? 제 생각에는 주님이 그 두 렙 돈이 그 과부의 전 재산이라는 것을 아셨다면 그 과부가 전 재산을 다 헌금하는 것을 막으셔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재산이 두 렙 돈이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아주 극빈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그걸 알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헌금을 다 받아 챙기기 보다는 헌금함 위의 그녀의 손을 붙들고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겠다. 내가 다 받은 걸로 할 테니 그 돈으로 식구들 빵이라도 좀 사가지고 들어가거라.’하는 것이 더 주님답지 않나요? 그런데 주님은 그 극빈자의 전 재산을 모두 받아 놓고는 ‘아주 잘했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돈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헌금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래서 당신 백성들의 처지와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과분한 헌금까지 칭찬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의 헌금이나 우리가 바치는 제물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시50:7~15)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 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이 뭐라 하세요? 다 내 것인데 내가 뭐 하러 너희한테 그런 것 바치라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고 왜 헌금은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어차피 유용하게 쓰실 것도 아니면서.

(신12:5~6)

 

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여기에 보면 ‘십일조, 헌금 꼭 해라’고 하시지요? 하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그러면 전 재산을 바친 과부를 칭찬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 한 번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전 교인이 두 렙 돈을 바친 과부처럼 전 재산을 다 교회 앞에 내 놓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쓴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행4:32~35)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 이러라

 

전 교인이 자기 재산을 모두 내 놓고 나누어 썼더니 그 공동체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이제 아파트 하나 통째로 사서 전교인이 재산 다 내놓고 모여서 살까요? 성경이 굳이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해 놓은 것은 후대 교회들이 이 세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령이 처음 임하시고 교회라는 것이 처음 생겼을 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였던 것이지 그러한 것이 이 땅의 지역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어떤 약속이 성취된 모습인 것입니다.

 

(신15:4)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그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유사 이래로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12:8)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그 분이 명하는 것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애초에 첫 단추 부터 잘못 끼운 것입니다. 계급을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착각들 하는데 방법이 틀렸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도록 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그 전에는 절대 이 세상에서 가난이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행전에는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는 그런 공동체가 생겨났지요? 누군가가 여호와의 말씀을 다 지켜냈다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누구지요? 두 말 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지킴과 십자가의 공로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탄생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도행전에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공유하는, 가난한 자가 없는 공동체가 잠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이며, 감사함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렸습니다. 심지어 초대 교회 중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제발 헌금을 하게 해 달라고 바울에게 조르기도 했습니다.

 

(고후8:1-5)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왜 그들은 그렇게 헌금을 못해서 안달을 부렸을까요? 당시 구약에 능통했던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시자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사1:10~11)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 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말1:6~10)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 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 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제사의 제물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그 제물이 불에 타 하나님께 열납이 됨으로 해서 나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제물을 바치고 헌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열납 하실만한 ‘나’를 드리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도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이 토하여 내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격 없는 제물은 하나님 앞에 열납이 되어질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제물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를 대신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대속 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짐승의 피는 ‘나’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받아 주실 수 있는 제물은 적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나’에 상응하는 그런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나는 ‘나’와 상응하는 인간 중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할만한 제물로서의 의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 제물 중에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제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를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명을 모두 지켜내시고 ‘나’를 대신하여, 아니 ‘나’와 함께 당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그 제물만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물의 자격을 유일하게 통과한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드려진 제물들, 즉 교회를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의 제물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신약의 헌금은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나를 품에 안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있는 자들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며 봉사나, 헌신, 선교 모두 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물 되심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전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격도 되지 않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립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저를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 열납이 되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하나님께 저를 드립니다.’ 이게 바로 헌금이며, 봉사이며, 헌신이며, 구제이며, 선교이며,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드린 과부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그 전 재산이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이었거든요. 헌금은 그렇게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 기쁘게 드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너는 헌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구나.’하고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전 재산을 다 갖다 바치라는 그런 말이 아닌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도 바로 그러한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교회 앞에 내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가 바로 그러한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한 복음을 이해한 자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300데나리온이 아니라 3000 데나리온 짜리 향유라도 기쁘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없는 자였는데 예수님의 공로로 나의 물질과 나의 힘과 나의 시간과 나의 지식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에 의해 쓰여 질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헌신과 헌금의 정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나를 받으시고, 나에게 허락하신 그 영생이라는 복락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알기에 이 땅에서는 ‘나’와 나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쁘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극빈자들이었던 마게도냐 사람들이 제발 헌금을 좀 하게 해 달라고 바울에게 졸랐던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복음에 나도 동참하게 해 달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착하게, 선하게 살려고 하지요?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서 선한 ‘나’를 하나님이 받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선한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근거하지 않은 선한 일, 헌신, 헌금, 구제, 봉사, 선교 등은 반드시 자기 자랑을 낳게 되고 분명 그 것으로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피상적으로 드러난 헌금의 양이나 헌신의 모습, 선하게 보이는 도덕적 윤리적 삶, 봉사, 선교, 예배 등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일예로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의 삶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약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대변인이 되어 평생을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인종 차별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 합니다. 그런데 인도에는 식민지 정책보다 더 무섭고 살벌한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힌두교에 있는 계급 제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힌두교인인 인도에서, 힌두교도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카스트 계급 제도에 속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 계급 제도인 카스트는 ‘모든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인식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힌두교 최고의 신인 크리슈나의 입에서 브라만(승려, 교육자), 팔에서 크샤트리아(통치자, 군인), 허벅지에서 바이샤(상인), 발에서 수드라(노동자)가 나왔다고 하지요.

이에 속하지 않는 다섯 번째 계층은 아츠유타(achuta), 또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 불리는 달리트 들입니다. 인도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제5계급' 불가촉천민은 대부분 오물수거·동물가죽가공·시체처리·도살 등의 일에만 종사할 수 있어 절대적 빈곤 속에서 엄격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달리트 들은 지금도 엄격한 차별 대우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인도의 한 도시에서는 한 여인이 벌거벗겨 진채로 35km를 끌려 다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죄목은 달리트가 감히 힌두교 사원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수두가 창궐하자 달리트 여인 둘을 마녀로 몰아 그들에게 한동안 사람의 똥을 먹고 살도록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상위 계급 여자친구에게 연애편지를 썼다가 기차 철로로 던져져서 기차에 치어 죽은 달리트도 있고 상위 계급 여자 친구와 함께 야반도주를 한 달리트의 엄마를 상위 계급 남자들이 강간을 하고 불에 태워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침으로 땅이 더러워 지지 않도록 침통을 목에 달고 다녀야 하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물도 마실 수가 없으며 한 마을에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달리트 출신으로 암베드카르라는 훌륭한 교수가 나왔습니다. 그는 달리트 출신으로 독일과 영국, 미국 등에서 유학을 하고 인도로 돌아와 달리트들의 권익을 위해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1947년 그가 인도의 법무장관이 되어서 불가촉천민 차별을 철폐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차별이 쉽게 사라지지 않자 더욱 강력한 법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때 단식을 하며 막아선 사람이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그 이유는 불가촉천민들이 독립을 하게 되면 영국의 분열정책에 동조하는 꼴이 되고 그렇게 되면 인도의 완전 독립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인종차별 철폐나 국가의 자주독립은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하위 1억 6천 만 명의 달리트 들은 안중에도 없는 상위 계급 자들만을 위한 독립이 되는 것입니다. 달리트 들은 자신들의 목표달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달리트들은 오늘날까지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도의 지식인들은 간디를 카스트제도의 원흉이라 부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내어놓는 사랑이라는 것의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으로의 선이 아닌 모든 인간들의 선은 결국 자기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이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라는 것은 내가 나의 욕심과 나의 배를 위해 살던 삶에서 돌이켜 나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내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살기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절대 나의 목표와 나의 계획, 나의 야망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나를 받아 주신 하나님이 감사해서 ‘나’를 드리는 행위를 선한 행위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계산도 있을 수 없고, 자랑도 있을 수 없으며, 교만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행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큰 영광인 머리카락으로(고전11:15) 예수님의 발을 닦은, ‘나’를 드리는 ‘자기 부인’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복음이었기에 그녀의 행위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기념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리아와 대조되어 등장하고 있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 세상 것들을 목적으로 삼아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다의 주장이 뭡니까? 예수님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죽지 말고 살아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라는 것이 유다의 주장 아닙니까? 오늘 본문이 유다를 도둑이라 하지요? 이 땅의 것에 모든 관심을 쏟아 붓고 예수를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도둑놈들이 바로 이 시대의 유다들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영생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소중한 것과 나의 영광을 초개처럼 주님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하시고, 그렇게 헌금하시고, 그렇게 봉사하시며, 그렇게 선교 하십시오. 만일 아직까지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로 말미암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지 못하다면 절대 헌신이라는 말 입 밖에도 내지 마시고, 헌금도 뒤로 미루십시오. 봉사, 구제, 선교, 예배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복음을 이해하세요.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그 때가 되면 자랑 없는 자발적인 헌신과 자발적인 헌금과 자발적인 봉사와 자발적인 선교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