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59 - 나귀를 타신 왕   (요12:12~19)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08

59 - 나귀를 타신 왕

 

(요12: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 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 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 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요한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기록하기 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그 앞에 끼워 넣음으로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암시했던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그 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이야말로 참 제사장이요, 참 선지자요, 참 왕이라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정은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베푸시는 행위였으며, 그렇게 낮아지고 죽는 모습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삶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실제 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대표로 그 자리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그녀를 버렸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상의 힘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자신의 영광인 머리카락을 주님의 발 아래로 내려놓았던 그녀의 행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보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고 이 땅을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복음이 전해질 때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이미 예고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 보잘것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죽음의 행진이 오늘 본문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데 이렇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그림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절기 때마다 의무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고 나머지 식구들도 최소한의 인원만을 집에 남겨두고 대부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명절을 지켰습니다. 유대 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의 수가 270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이지요?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소식을 듣고 그 성 입구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향해 환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시편 118편에 가면 그 단어가 나옵니다.

 

(시118:25~27)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 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 하였도다

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 지어다

 

25절에 있는 ‘이제 구원 하소서’라는 단어가 ‘호쉬아나’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바로 그 단어를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반복하여 연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산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편 118편의 ‘호쉬아나’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단 뿔에 희생을 매셨다고 하지요? 제단 뿔 하면 생각하는 것이 있지요? 도피성입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살인자라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내재된 것만으로는 그것을 다 채울 수 없어서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의 것들을 탈취하여 자신의 행복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경쟁자요 원수로 여기기 되어 있는데 성경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 확실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3:15) 그래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은 다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살인자들은 모두 사형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돌로 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확정적 고의나 미필적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죽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단 뿔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인의 후손들로 칭해지는 죄인들은 모두 다 가인처럼 고의적인 살인자들이지만(가인은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유혹한 후 거기서 죽인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고의적 살인자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고의적 살인자들의 명단에서 그 이름을 빼내어 도피성에서의 구원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친절한 힌트였습니다.

시편 118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호산나’를 외쳐야 하는 긴박한 지경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 살려 주세요’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하나님, 우리 스스로는 절대 이 지긋지긋한 죄와 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좀 강구해 주세요.’라고 하는 절박한 외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죄와 사망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호산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질병으로부터의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데, 지금 로마라는 악한 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호산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왕에게 이 세상 현실에서의 구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이 바로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려나무가지는 유월절에 흔드는 것이 아니라 장막절에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은 그로부터 2세기 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그들을 쫓아낸 유다 마카비의 승리를 예수님에게 다시 한 번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시리아는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 유화정책을 써서 그들의 종교와 제사 등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성전 보수 자금까지 대 주었습니다.

 

그런데 BC198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3세가 BC190년에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에게 대패를 하고 당시 돈 5만 달란트를 로마에 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안티오쿠스 3세는 점령지의 물건을 수탈하기 시작했고 특히 성전의 집기들이나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아서 그 빚을 갚았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힘겨운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 우리가 잘 아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엄청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다니엘이 본 환상에 나온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8장 23절에 보면 헬라에서 갈라진 네 나라의 마지막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서 유대인들을 파괴하고 멸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가 바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였습니다. 그는 정말 엄청나게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종교를 뿌리 뽑고 헬라의 종교로 바꾸려 시도를 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두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오니아스(톨레미 쪽)파와 토비아스(셀류코스 쪽)파였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당시 톨레미 쪽 대 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3세를 쫓아내고 그 동생 야손에게 돈을 받고 대 제사장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메넬라우스라는 사람이 돈을 더 주고 그 대 제사장직을 빼앗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그러한 치리에 반발해서 ‘어떻게 성경대로 아론의 후손에서 대 제사장을 임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돈을 받고 대 제사장을 세울 수 있는가’ 하며 한 집단으로 뭉쳤는데 그것이 바로 하시딤(경건주의 운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바리새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때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집트를 치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로마의 방해로 회군을 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서 돌아오고 있는데, 팔레스타인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야손이 그 틈을 타서 메넬라우스를 쫓아내고 대 제사장직을 탈환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군사를 보내서 약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야손이 시리아의 군사가 팔레스타인에 들어오는 구실을 준 것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167년에 아폴리우스 장군을 비롯한 2만 명의 대군을 팔레스타인에 보내어 주둔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안식일과 할례, 제사를 폐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금서로 지정을 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기도 지키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의 지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제사의 제물은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단은 늘 돼지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사를 드린 후에는 반드시 그 제물로 바쳐진 돼지를 먹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 창녀들을 두어 신성한 성전을 매춘 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을 때 마따디아 라는 노 제사장이 시리아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들의 뜻대로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어떤 유대인을 죽여 버리고 그를 저지하는 시리아 왕의 사신과 군사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아들과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의 무리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얼마나 나이가 많았는지 3개월 만에 노환으로 늙어 죽었고 엉겁결에 셋째 아들인 유다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동조자들, 특히 하시딤(경건 주의자)들과 합세해서 시리아 군과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그는 결국 3년 만에 시리아 군을 몰아내었고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유다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그의 별명이 “망치”였습니다. “망치”라는 히브리어가 ‘마카비’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마카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카비에 의해 성전이 청소되고 제사를 드린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대인들이 지금도 지키고 있는 ‘수전 절, 하누카’입니다. 성전탈환 절, 성전봉헌 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유다 마카비를 메시아로 추앙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로부터 시작된 하스모니안 왕조는 온갖 내분과 외세의 공격으로 금방 지리멸렬했고 그들이 원하는 다윗 왕국의 화려함과 풍성함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또 다시 유다 마카비와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로마에게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눈앞에서 오병이어로 빵과 고기를 산더미처럼 만들어 내시는 분이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병든 자 들을 순식간에 고치고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는 신통력까지 있습니다. 물위를 걷기도 하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한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셨구나. 이제 우리 이스라엘은 세계를 지배하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구나.’하고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 등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연호하며 그 분께 환호하는 무리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의 삶에도 유익이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그 분의 능력을 인정은 하되 그것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 분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두 부류는 한 편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적과 그 분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호산나’를 외쳤던 동일한 목소리들이 며칠 뒤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종교행위나 신앙생활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얻어내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모든 헌신과 종교 행위들은 반대급부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미리 지불하는 선수금 정도로 치부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헌신을 하고,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시어 우리에게 선물로 부어주셨다는 확신 속에서 감사의 제사로 드리는 것이지 절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지불의 행위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주 이 세상에게 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주여, 이 지긋지긋한 죄의 세상과 옛 사람의 세상에서 하루속히 저를 구원해 주소서, 호산나’를 외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힘 있는 자의 모습으로, 강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날 때부터 허름한 사관의 구유를 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겉모양도 시원치 않아 사람들이 눈을 돌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의 힘에 맞아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러한 그의 삶을 하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자신의 약함으로 원수를 유익하게 하고, 섬겨주는 삶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죽기까지 순종만 하신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 드셨습니다.(행2:33)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이 힘이시며, 하나님만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실행하심으로 움직여지는 하나님 나라, 그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그 분이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행하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순종합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최고의 선이신 분입니다. 그 분은 절대 당신의 백성들을 상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최고의 선이신 분이 최고의 선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인격을 가지고, 이성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도덕적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자신들에게 은혜로 부어주신 그들의 지혜와 힘을 자꾸 의지하여 살려하면 하나님 나라는 최고의 선으로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신 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들이 추구하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유익만을 채우려 하는 자들의 어둡고, 고단하고,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나게 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진 자들의 절대의존을 이끌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자가 다 약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자는 약자로 서야 합니다. 그걸 성경이 자기 부인이라 합니다. 그렇게 옛 사람이 비워지고 부인이 되어야 진짜 강함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처소로 삼아 진짜 강자로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약자로 서는 훈련을 하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의 강한 자, 거인,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창6:4)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약한 자로 서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차려주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하나의 모형으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왕으로, 당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장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린 나귀, 즉 새끼 나귀입니다. 어른이 새끼 나귀를 타면 발이 거의 땅에 닿습니다. 말이 나귀를 탄 것이지 실제로는 거의 자기 발로 걷던지 아니면 보기 흉하게 두 발을 반짝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왕의 모습으로 어울립니까?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입성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기록된바’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요12:15)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말은 지금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입성이 구약의 어딘가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슥9:9-12)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 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지금 요한은 스가랴서를 인용하여 주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스가랴서는 나귀를 타신 주님의 입성을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그들의 활을 끊기 위함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은 곧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귀행차는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유대주의)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화평이 전해질 것인데 그 방법은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전체의 내용을 단 한 절로 요약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나귀행차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을 얻어 그 힘으로 완성되는 화려한, 세상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유대주의를 부수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참된 하늘의 메시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칼과 창이 아닌 겸손으로, 언약의 피로 그 일을 이루러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몇 가지 준수사항을 하달하셨습니다

.

(신17:16)  

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힘은 말과 병거와 은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시33:16~17)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과 만족, 즉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와서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인간 세상의 힘의 대표적 상징들인 말과 은금과 여자를 많이 두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20:6-7)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부어주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오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활과 칼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탱크와 자동소총과 원자폭탄으로 바꾸어 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순종, 즉 약함을 들어서 당신의 강함으로 채우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 함이니라

(고후13:4)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이게 바로 바울이 본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필두로 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새끼 나귀를 탄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연약해 보이나 사실은 그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꽉 채워진 진짜 강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행진을 마치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요12: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사람들은 사망으로 던져질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 즉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만이 영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라는 알기 쉬운 그림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 안에서 연합이 되어 작은 예수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이 세상에서는 나귀를 탄 우스꽝스럽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다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느라 커다란 말을 타고 활보하는 가운데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져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감싸주고, 인내하면서 새끼 나귀를 탄 바보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볼 멘 소리를 하지요. ‘하나님 창피하게 새끼 나귀가 뭡니까? 폼 나게 백마 한 마리 보내 주세요. 내가 그 백마 타고 하나님 일 열심히 할게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 새끼 나귀만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게 잘 가고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작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중에 ‘바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차태현이 평생을 바보처럼 동생과 이웃을 위해 희생만 하다가 결국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주고 바보처럼 죽어가는 그런 흔한 이야기인데 그 영화를 본 후 제게 남은, 간접경험에 의한 아포리즘은 ‘참 아름답다, 바보의 삶이 갖는 이 강렬한 역설의 힘이 바로 십자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윌 스미스의 ‘seven pounds’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털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 내어주고 나중에는 심장과 눈까지 내어주고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와 제가 동시에 한 말이 ‘우리도 저렇게 살자’였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삶은 그렇게 매력 있는 삶이고, 강한 힘이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의 힘을 축적하여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하는 인간들의 욕심과 교만이 그 십자가의 삶을 자꾸 보잘것없는 것처럼 폄하하고 감추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제시하는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유대주의입니다. 예수님이 부수러 오신 유대주의가 오늘날 성공주의와 물질주의로 이름만 바꿔 달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주의와 물질주의는 십자가의 삶과 완전히 반대쪽에서 십자가를 조롱합니다. 그 둘은 사실 적대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이들은 그 둘을 자꾸 화해를 시켜보려 합니다. 아닙니다. 성공주의, 물질주의, 엘리트주의, 자연주의, 고지론 등은 십자가를 공격하는 대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을 공격합니다.

 

(시2:1~9)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 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보세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군왕들이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합니다. 나귀를 탄 연약한 예수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비웃으신다고 하지요? 나귀를 타신 예수가 철장으로 그들을 질그릇처럼 부수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약함이 강함을 파하는 형국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거기에 대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12:19)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 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하여 시편 2편 8절의 말씀, 온 세상의 당신의 백성들이 나귀를 타신 예수에 의해, 다른 말로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 당신께로 다 돌아오게 될 것임을 힌트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우스꽝스러운 예수님에 의해 온 세상이 정복당할 것임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나귀 새끼 같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창49:10~11)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 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자기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유언을 하면서 그의 후손으로 실로 즉,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에 빨 것이라 합니다. NIV 성경을 보면 포도즙을 blood of grapes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빠는 이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 모두에 공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새끼나귀는 전부 매여 있는 나귀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다른 말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의 모습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적시고 물들이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피 묻은 저주의 옷은 모두다 자신이 가져가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새 하얀 세마포 옷을 입히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계19:11~16)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시편 2편의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백마를 타고 철장으로 적들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 예수의 뒤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앞장을 서셔서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받아내어 온통 피가 뿌려진 옷을 입으심으로 뒤에 따라오는 당신의 군대들인 성도가 희고 깨끗한 하얀 세마포를 입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그 피 뿌린 옷은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뿌려지는 피도 우리의 피였어야 합니다.

 

(사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백마를 타신 예수님에 의해 짓 밟혀지고, 짓 이겨져서 피를 튀기며 죽었어야 할 우리였는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당신 자신을 밟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당신의 옷을 적셔 버리심으로 우리의 옷을 희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스바냐가 이렇게 멋지게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습3:14~17)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 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 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어다

15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오늘 본문 15절의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는 말이 여기에 동일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두에 스가랴서 9장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고 한 후에 ‘에브라임과 예루살렘, 즉 유다의 칼과 활과 병거를 다 부수실 것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온의 딸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답이 스바냐 3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예수 안에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였고, 그들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아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이며, 그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새끼 나귀를 타시고, 다른 말로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부인하시며,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의 모습은 이 땅에서 어떻게 보여야 할까요? 역시 나귀 새끼를 탄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적심으로 원수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연합되어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자꾸 백마를 타고 싶어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마치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향해 닦달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신들의 인생은 나귀가 아닌 백마를 타신 예수의 도움으로 풍성하고, 멋지고,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가 나귀를 타고 나타나면 곧 모른 척 해버리고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자기의 기대를 묵살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할 기세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구원의 때입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에는 예수가 백마를 타고 와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 순간 죄인들은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천년 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이 세상은 거기서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읽은 것처럼 백마를 타신 예수는 심판의 예수이신 것입니다. 이제 곧 그 분이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 세력들이 모두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성도들이 백마를 타고 오신 주님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 옛 사람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신 예수에 의해 구원을 얻은 성도의 삶에는 종말에 나타날, 백마를 타신 예수의 심판의 전쟁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백마를 타신 예수께서 이 세상의 죄를 모두 솎아내어 불 못에 던져버리시는 그것처럼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이 백마를 타신 예수에 의해 미리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 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마 백발백중 불 못으로 들어가야 할 자들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죄를 털어내고, 잘라버리고, 쫒아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는 복 받은 자들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궈놓은 아담 적 열매들을 하나하나 쳐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처럼 사랑하고, 바보처럼 섬기기도 하며, 바보처럼 참아주고, 바보처럼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에 의해 우리의 옛 자아가 조금씩 죽어가게 될 때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나귀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는 나귀를 탄, 바보 같고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마 타신 예수님에게 철장을 맞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연약하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바로 백마를 타고, 새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은 바로 우리를 그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군대로 만들어 가시는 은혜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그림이 어떻게 십자가 복음으로 연결이 되는지 잘 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