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1 - 왜 숨으신 걸까?   (요12:26~43)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09

61 - 왜 숨으신 걸까?

 

(요12:26~43)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 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 하였더라

 

이제 요한복음 12장의 마지막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분량이기 때문에 한 번에 다 공부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에 나누어서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매로 맺혀지게 된 교회에 관해 공부를 함으로 해서 구원이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지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것임을 공부했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어떤 방법으로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건 단지 지난 시간만의 결론이 아니라 지금까지 공부한 요한복음 강해의 60편의 설교 전체의 결론이었습니다. 앞으로 몇 편의 설교가 더 보태질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나머지 설교들의 주제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이며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한 것이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우리가 지금까지 2년 가까이 공부해 온 요한복음은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의 긴장과 대조로 점철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나서고 하나님은 반복하여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지적하시고 폭로하십니다. 아울러 인간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맥락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 이야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피력한 요한은 계속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부연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한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지 않아서 자칫 무관심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그런 부분입니다. 그러나 잘 보면 복음의 핵심 교리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열심이 아주 선명하게 대조가 되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 35절로 가보겠습니다.

 

(요12:35-36)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제자들로부터 헬라인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그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십자가의 복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것처럼 율법과 행위를 자신들의 구원의 근거로 삼고,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치 않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전면 적으로 부인하시고 기각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밀알이신 예수님이 저주의 땅에 떨어져서 죽는 것 이 외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죄인들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예수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말씀에 이어서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영생을 얻는다’고도 말씀하시고,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도 말씀하셨으며,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도 하셨습니다. 언뜻 보면 마치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열심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하고 우리 인간 쪽에서 구원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36절에 가면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36절을 보시면 그렇게 빛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빛이신 예수님이 숨어버리십니다. 거기서 ‘숨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크뤼베’는 사실 ‘크뤼프토, 숨다’의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예수님을 숨기셨다’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숨겨 버리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참 생명을 주시는, 빛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셔놓고 그 빛이신 주님을 숨겨버리셨을까요? 빛을 믿으라고 해놓고 빛을 숨겨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아래 구절인 38절에서부터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요12:38-40)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보시는 것처럼 주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숨겨지신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못 보게 하기 위해 숨기셨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믿으라고 해놓고 믿지 못하도록 숨겨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 읽어 보았던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6:9~13)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바로 이 구절을 요한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외칩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의 입을 숯으로 지져서 그의 죄와 악을 제하여 주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나를 위하여 누구를 보낼꼬’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 이사야가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9절 이하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가라고 해 놓고 그를 보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심보입니까? 믿게 하라는 겁니까? 아니면 믿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선지자를 보낼 때에는 믿으라는 메시지를 전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못 알아듣게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거기에는 죄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믿어버리면 뭔가 큰 일이 난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바로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숨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요한복음 1장의 이야기가 조금 이해가 가지요?

 

(요1:5, 9~11)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 지 아니하였으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이 못 알아보게 숨기셨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이 빛을 숨겨 놓으셔 놓고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빛을 믿지 못했다고 그 사람들을 심판 하실 수 있나요? 당신이 못 믿게 해 놓고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합니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 빛을 감추어 버리셨는지 그 이유를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생명의 빛을 숨겨버리신 원인 제공을 인간들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죄인들을 심판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우시지요? 지금부터 제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사람들로부터 숨겨 버리신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도 생명나무를 숨기시는 하나님의 그림이 등장하지요?

 

(창3:22~24)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과실을 따 먹고 영생을 할까봐 생명나무를 화염검으로 막고 그룹들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실과를 숨겨 버리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들이 선악의 판단 자가 되어 자신들의 기준과 판단으로 선악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들이 그 죄인의 상태로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되면 그 상태로 영생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생명나무를 숨겨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생’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오람 하야이’는 단순히 오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숨겨져 있는 신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나무실과를 먹으면 그 영생이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 생명나무실과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요6:51)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창세기에서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 영생을 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며, 그 떡을 먹는 사람이 영생을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생명나무 실과는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던 생명나무와 실과는 그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는 그런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생명의 떡이시며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상징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죄인이 그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 그 상태로 영생을 하게 될까봐 그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막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죄인이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그 길을 원천 봉쇄하셨을까요? 죄인이 그 상태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으면 영원히 죄인으로 살기 때문에 그것을 막으신 것일까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설명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영생이라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신적 생명이라는, 삶의 질의 개념이라면 그러한 설명만으로는 좀 부족하지요? 어려우세요? 그러면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으로 가져와 보세요. 아담이 죄를 짓고 생명나무실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은 죄인들이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이 되죠? 성경은 지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을 받는 건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하고 마음속에 의문이 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지금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확인한 것처럼 성경은 끊임없이 인간의 가능성을 기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하나님에 의해 숨겨진 생명나무 실과를 이해해 보자고요.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숨기셨는지를 밝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이미 생명책에 기록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이 역사 속에 파송하셔서,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해야 하며, 그 은혜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독생 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골고다에 못 박으심으로 그 예수의 십자가로 축약되어 설명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만 천하에 공포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자신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본주의는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기고 악착같아서 인간들의 삶 속에 마치 거머리처럼 붙어 다닙니다.

그러한 죄인들의 현실은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 바리새인들의 유대주의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이 결국은 ‘나’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모습을 성경과 역사가 폭로를 해 버렸습니다. 그러한 옛 아담 적 인본주의는 역사를 타고 유연하게 흘러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인간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의 인생도우미로 전락을 해 버린 것이 오늘날 인본주의에 젖어버린 엉터리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절기와 제사와 율법과 할례로 자신들의 구원을 획득하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구원의 열매는 이 세상에서 열리는 화려한 다윗 왕국의 재건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그렇게 유대주의 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땅에서의 힘을 사랑하고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옛 사람인 ‘나’를 부인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나’가 속해있는 이 세상을 부인하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를 의지했던 바리새인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면목을 세워 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이 인생의 목표인, 에덴동산의 옛 아담에 속한 자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생명나무실과를 따먹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영생을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마저도 도우미로 전락시켜 버리는 자들이 기독교라는 것을 그러한 것으로 이해를 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 옛 아담이 생명나무실과를 따먹은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그게 저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진입하는 길을 화염검과 그룹들로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전히 자기 부인이 되기 전에 생명나무를 먹게 되면, 그저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종교인으로 타락을 하게 되기 때문에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이는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좀 더 명확히 말을 하자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반역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셔서 절대 진짜로 존재할 수 없는 모조품이 등장해 버린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고린도전서에 그대로 옮겨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치 생명나무실과를 숨겨버리신 하나님의 처사처럼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성찬 떡을 먹지 못하도록 말리는 내용이 있지요? 물론 상징입니다.

 

(고전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 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

 

사도 바울이 생명의 떡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담 적 죄 아래에서 그 떡을 먹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것이라 설교 하고 있습니다. 27절의 ‘범하다’ ‘아낙시오스’는 ‘가치 없이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이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이 그 떡을 먹고는 ‘나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때문에 죽으신 것인데 여전히 자신들의 건재함을 주장하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이라고 사도가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해고시키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우주의 중심이 되려 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서기 까지, 그들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숨기시고 못 먹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거짓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난 생명나무 실과를 먹었으니 이제 아무 걱정 없어요.’하고 끝까지 간 자들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렇게 여전히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삶을 추구하면서 수많은 종교 행위로 떡칠을 해대는 자들은 옛 아담의 상태에서 생명나무실과인 예수를 먹었다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에 나중에 영원한 저주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자기를 주장하는 아담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빛을 볼 수 없도록 생명나무를 숨겨 버리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우리에게 공개되는 시점을 ‘자기부인’의 시점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이사야서 6장 9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그 생명나무를 숨기시는지 그 시점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세요.

 

(사6:9~13)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언제까지 숨기신다고 하시지요?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 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랍니다.

여기서 황폐한 땅은 ‘티끌, 광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땅 가운데서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라는 어구에서 ‘많다’라는 단어는 ‘충분한, 흘러넘치는’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이 세상이 충분히 티끌이며 광야임이 폭로되고 그들의 불가능함이 완전히 폭로될 때까지 하나님이 빛을 숨기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은 인간들의 불가능함이 완전히 폭로되고 인정되어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날 때까지 생명나무 실과는 숨겨져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 사실이 완전히 폭로되었습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를 그들 스스로 십자가에서 꺼 버렸을 때 모든 인간들의 불가능함이 완전히 폭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때에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어 다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들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 ‘난 빛을 보았어, 난 하나님을 믿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셨는데 어떻게 그들이 찾아냅니까? 그래서 주님이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이고, 자신이 소경임을 인정하는 자가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9:39~41)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은 빛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 본다고 하는 자들은 분명히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죄인들에게 공개가 되는 시점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이미 자기들은 하나님의 생명나무실과를 먹었다고 했던 자들이 유대인들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본다고 하는 그들의 눈이 사실은 멀어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숨기셨는지는 이제 이해가 가시지요?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그렇게 구원에 있어서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임이 폭로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은 우리가 거룩한 씨에 의해 새로운 창조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숨겨 져있던 생명나무를 보았고 그 생명나무실과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명나무실과를 먹은 사람이라면 그 생명나무실과의 출현이 전제하고 있는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의 덧없음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어떠세요? 여러분은 지금 우리가 그렇게 황폐한 자이고, 티끌에 불과한 자들이며, 도저히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그러한 죄인들이 생산해 놓은 이 세상의 힘이라는 것이 신기루같이 허황된 것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아니지요? 지금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그 딜레마가 아주 간단하게 해결이 됩니다.

 

(계22:1~2)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여기에 창세기에 등장했던 생명나무가 그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가 실과를 맺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이 어디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었지요? 어린양의 신부인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나무는 지금 어디에 심겨져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안에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안에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감추신 생명나무 열매를 찾아가서 따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 생명나무를 심어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게 믿음이며 새 언약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정성과 깨달음까지도 전혀 가입되지 못합니다. 그냥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 뿐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부인하고 겸손의 자리로 내려와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시려고 생명나무실과를 숨기셔서 자신의 손으로 우리 안에 심어 버리신 것입니다.(고전1:31)

 

잘 보시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 의해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생명수의 강은 성령입니다.(요7:38) 그리고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맺혀지는 열매를 풍성하게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성도, 교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나무에 의해 열리게 되는 영생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을 해서 따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뚫고 들어오셔서 심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 이하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조금 어려우셨지요? 지금부터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해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아담 적 죄인들이 생명나무실과를 따먹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그 분의 뜻대로만 살아야 하는 영생을 도저히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나’라는 그릇을 완전히 비워내었을 때에 우리 안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사람은 영생을 주는 생명의 열매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 죄는 다름 아닌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사고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상태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 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자신의 가능성과 자기 자신의 영광이 충돌을 하는 이상한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화염검과 그룹들을 두어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절대로 자기 힘으로 뉘우치거나 회개를 하여 자신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 안에 뚫고 들어가 그들 안에 생명나무를 심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들 안에서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그 열매는 당연히 영생의 열매입니다. 생명나무실과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나님께서 그러셨으니까요. 그런데 영생은 신적 생명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열매가 성도의 삶속에서 맺어지게 되면 그의 삶 속에서 신적 성품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신적 성품이 어떤 것이지요? 사랑, 인내, 용서, 섬김, 온유, 절제, 오래 참음 등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온전한 의미에서의 신적 성품이 내 안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나’가 부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성품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심겨진 생명나무에 의해 내 속에서 영생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나’라는 옛 사람이 자꾸 죽어가는 것으로만 보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 안에 뚫고 들어온 생명나무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황폐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는 우리가 황폐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나무를 숨기신다고 하셨지요? 그 말은 우리에게 우리를 부인하는 것을 맡기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황폐한 상태, 즉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상태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믿어라’하고 말씀하시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 하나님에 의해 숨겨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들 힘으로는 절대 빛을 믿을 수 없으므로 내가 너희들 앞에서 빛을 숨겨 너희들의 가능성을 기각하고, 오로지 나의 은혜로, 내 아들의 십자가로 그 빛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의중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사 복음서에서 그 숨겨진 빛이 언제 공개가 됩니까? 참 생명의 임재 처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그룹들이 새겨진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 하늘로부터 땅으로 찢어지지요?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숨겨져 있던 생명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하나님에 의해 공개되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우리가 우리를 부인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장하고 싶어서 자기부인의 삶에서 실패하고 있는데, 그러한 실패를 통하여 우리 안의 예수가 점차로 드러나는 것이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십자가가 없이는 단 일 초도 서 있을 수가 없는 그런 티끌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와 의지와 선택을 발휘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이 되고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세상의 영광과 나의 영광을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여전히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나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입네’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12:42-43)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기에 관원들이 믿었다고 하지요? 잘 보세요. 정말 그들이 믿었는지. 43절을 보시면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다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출회를 당할까봐 두려워 자기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2:8~9)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그렇지요? 자신의 무사안일과 자신의 자랑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믿음을 떳떳하게 시인하지 못하고 두려워 떠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계21:8)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되는 불신자들의 첫 번째 특징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초개처럼 던져 버리는 이들을 가리켜 ‘예수를 믿었다’라고 표현을 한 것은, 그들이 바로 여전히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고 있으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예수를 믿었다고 우기는 괴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상징하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뒷전으로 밀어놓은 이들이 모여서, 나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들어 버린 교회의 모습 아닌가요? 그건 하나님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창세기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든 기독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형국인 것입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물론 그 과정을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나’의 유익과 ‘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고수하며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는 자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 즉 죄인들이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음을 화염검과 그룹들이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으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생명나무의 침노로 자기의 영광을 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밀어냈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인생 도우미로 부려먹으려 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힘과 명예를 우리의 영광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영광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바보처럼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참아주는 것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과 수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격리를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주님은 그러한 순종의 삶이 자신의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주님의 순종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가시적 영광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그 날에 폭포수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우리에게서 배태되고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넘치도록 부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게 부어질 수 있는 빈 그릇의 삶을 훈련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비워내면 낼수록 우리는 영광을 얻는 것이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시키 )��0L� �� �분으로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본문 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옛 사람에 대한 자기 부인이 없이 여전히 자신의 육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는 그렇게 무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두 씨가 발아할 때 그 딱딱한 호두의 껍질이 박살이 나는 걸아십니까? 그런데 여전히 옛 자아를 사랑하고 그 옛 자아를 살찌우는 삶을 살면서 내 안에 거룩한 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해 가는 성도만이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이 부정된다는 것은 곧 이웃 사랑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느라 이웃을 모두 적으로, 경쟁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가 우리의 옛 사람을 부인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세상조차도 품에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디오게네투스’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당시 초대 교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와 그 지체들을 사랑하면서도 그것들에게 미움을 당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으면서도 육체를 온전히 붙들어주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감옥에 갇혀 있듯 세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가슴으로 세상을 품는다.’ 그게 거룩한 씨에 의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의 죽음에 의해 열매가 된 이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 밀알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강요나 억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심겨진 거룩한 씨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삶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용서하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인내하고, 포옹해 주느라 세상 사람들에게 약자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게 죽어가는 밀알입니다. 그렇게 성도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죽는 밀알로서의 삶을 살게 될 때 그 밀알이 속해 있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천국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천국을 망각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가 그랬지요? 철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요.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는 천국 망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국은 성도가 밀알이 되어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거기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