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4 - 주님이 부탁하신 발을 씻기는 삶   (요13:12~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1

64 - 주님이 부탁하신 발을 씻기는 삶

 

(요13:12~20)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 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세족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자세하게 파헤쳐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이 되셔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나님과 동등 된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씻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표현을 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그 일을 마치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십니다. 거기에서 ‘옷’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쓰였다고 지난주에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 단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모두 발가벗겨졌던 상황에서 쓰였던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그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 해서 제자들 앞에서 겉옷을 벗으신 예수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샅샅이 비워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다시 그 옷을 입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옷을 입으신 후에 자리에 앉으십니다. 이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

(히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바로 이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복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은 결국 부활과 승귀와 보좌로의 복귀로 결론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은 바로 그 모습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과 섬김의 삶이 이렇게 부활과 승귀와 영광의 보좌에로의 복귀를 향한 삶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의 삶도 역시 그렇게 결론지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미리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본문 14절 이하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과 똑같은 삶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3:14-16)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준 것처럼 너희도 행하라’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세족식을 행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의 세족 사건은 단순히 발을 씻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을 똑같이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 교회가 모두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럼 지금 주님께서 우리보고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마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그렇지요? 주님은 분명 우리 제자들에게 당신을 좇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좇아와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큰일 났습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 어떻게 지실 거예요?

 

그러면 이제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좇아,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규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관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13:16)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내가 행한 것을 본받아 행하라’고 하시고는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씀은 본문 13절과 병행이 되는 말씀입니다.

 

(요16:13)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여기서 쓰인 ‘선생, 디다스칼로스’나 ‘주, 큐리오스’는 둘 다 최고 권위를 가진 주인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헬라어로 번역을 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에는 하나님과 버금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주인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당신을 향한 제자들의 그러한 평가가 ‘옳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은 16절의 말씀을 하시기 위한 포석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문 16절의 상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울러 종은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전인 주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모습을 제자들이 마다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상전이 했는데 종이 그런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따라서 종들은 상전이신 주님이 본을 보이시고 시키신 발 씻김의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은 상전에 의해 보냄을 받는 자들입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는 것이지요? 먼저 어디로 보내심을 받는 것인지 보지요.

 

(요17:18)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주님이 제자들을 어디로 보내십니까?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에 가서 뭐 하라는 것이지요?

 

(행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사건 현장에서 그 사건을 확실하게 목격한 사람을 가리켜 증인이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족 현장에서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일거수일투족 모두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서 바로 그 세족 사건이 의미했던 바를 분명하게 전해야 함과 동시에 자신들도 그러한 발 씻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십자가의 삶, 발 씻김의 삶에서 배태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요20:21~23)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보내심을 받고 발을 씻기는 삶의 증인으로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즉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종들이 하는 일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13:20)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예수님께 보내심을 받고 발을 씻는 삶을 사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게 되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즉 성도들은 주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내지는 곳은 이 죄로 물든 세상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종이 되어 다른 이들의 발을 씻는 일입니다. 종이 상전보다 낫지 않다는 말씀은 상전이 산 삶을 종이 마다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의 발을 씻는 일은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의 발 씻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발 씻음의 삶이 바로 십자가를 이해한 증인의 삶이며 성도의 그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그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먼저 돌아온 자들의 발 씻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발 씻음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지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 삶이 과연 우리의 의지의 결단으로 비롯될 수 있는 것인지 부터 한 번 보겠습니다. 혹자들이 가르치기를 우리도 주님의 삶을 본받아 열심히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자고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보지요.

 

(고후2:14~16)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바울이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형태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고 추상적 묘사를 합니다. 냄새는 모양과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형태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의 삶을 묘사하면서 모양이 아닌 추상적 개념을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서의 말씀대로 분명 성도의 삶을 통해 사망에 속해 있는 자들이 사망에 이르게 되고, 생명에 속한 자들은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향기는 성도의 삶 속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윤리적 모양이 아닌, 그 존재의 속에서 뿜어 나오는 그 존재 자체의 냄새인 것입니다. 냄새는 그 발향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미꽃에서 개나리 냄새가 날 수 없고 시궁창에서 샤넬 N5 향수 냄새가 날 수 없듯이 냄새는 그 존재의 고유한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향기를 대하면서 자신의 시체 됨을 보게 되어 우리를 불편해 하게 되는 것이고(그게 사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향기를 대하면서 예수의 은혜, 즉 생명의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다음 장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켜 ‘편지’라고도 합니다.

 

(고후3:3)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편지는 누군가에게 보내져서 보낸 이의 마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스스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진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전도 사역에 의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편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즉 바울이라는,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향기에 의해 그들이 편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사도가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이가 쓴 편지입니다.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향기에 의해 편지가 된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심비, 즉 그들의 마음 판에 편지가 새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 하에 들어있는 모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렘31:31-33)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 하였음 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진 증인들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고유의 향기를 갖게 되는 것이고, 그 향기를 세상에 풍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마음의 심비에 그리스도의 새긴 편지를 지닌 이들이 그 생명의 향기를 좇아 또 다른 향기가 되어 세상으로 보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서 나오게 되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의 삶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에게서 자연스럽게 격발되게 되는 향기의 삶, 편지의 삶은 우리의 결단이나 우리의 열심에 의해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가 되면 그 새로운 존재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어떤 특별한 현상과 모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단어로 옮기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발 씻음의 삶은 우리가 열심을 부려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발 씻음의 삶은, 내가 반드시 너희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인 것이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명령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발 씻음의 삶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자기 것을 손해 보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모습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이를 악 물고 용서해 버리는 그런 모습으로? 일 년에 수차례씩 오지에 단기 선교 가는 모습으로? 물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발 씻음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안 나타 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존재의 향기나, 심비에 새겨져 있는 편지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풍겨져야 하는 발 씻음의 삶의 향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빌립보서 2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제 거의 외우시지요?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종의 모습이 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이 삶이 바로 발 씻음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하나님의 편지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삽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을 하는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에 들어 있는 삶을 발 씻음의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발 씻음의 삶은,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삼아 살던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발 씻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착한 삶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삶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이 땅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재산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오직 변치 않는 예수 뿐 이구나’하고 진리의 복음을 붙들게 되었다면 그 삶 자체가 바로 발 씻음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향기의 삶이며, 하나님의 편지의 삶인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육신의 삶의 한계를 절절히 깨닫고 ‘내 육신은 비록 이렇게 후패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로 이루어 놓으신 새로운 부활의 몸과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후패함과 썩어짐과 사망이 없는 영원한 곳이므로 나는 이 상황에서도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다’고 신앙 고백을 한다면 그게 바로 발 씻음의 삶이며 향기요 편지의 삶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고 내 주인의 종의 자리에서 그 주인이 시키시는 것을 수긍하고 수용하며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발 씻음의 삶이었으며 우리 성도의 발 씻음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명령하신 발 씻음의 삶은 간단히 말해 ‘자기부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우상이 제거되고 그동안 그 우상을 섬기기 위해 차지하고 앉아 있던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이고 ‘내 행위를 본받으라는’ 말씀의 진의인 것입니다.

‘나’가 내 인생의 중심에 앉아 있을 때에는 내 옛사람의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아무리 위장을 해도 냄새는 숨길 수 없습니다. 썩은 시체에다가 아무리 향기로운 향수를 뿌려댄들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내 안에서 ‘나’라는 옛 사람이 제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좌정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겨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여 하나님께 후한 점수를 얻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나’라는 존재가 부인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마20:26~27)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이 바로 ‘나를 좇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기부인이라는 발 씻음의 삶을 살도록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이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쳐 내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자존심, 체면, 재산, 건강, 가정의 행복, 안전한 직장, 등등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우리의 안전과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모든 것들의 허황됨과 무력함을 경험케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배려 속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존하고 있던 것들에서 하나하나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아, 예수 믿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저런 시험과 고난도 잘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구나,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저 굳건한 믿음을 나도 한 번 갖고 싶다’하고 생명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된 자들은 ‘봐, 예수 믿고 잘 되는 게 뭐가 있니? 애초에 예수 안 믿길 천만 다행이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뻐기더니 그거 쌤통이다’하고 사망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이지만 너희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발을 씻는다는 것이 단순히 다른 이를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도와주고 하는 것이라면, 그런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데 누가 그 사람을 마다하겠습니까? 당연히 환영받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인의 삶과 십자가의 삶을 보면서 ‘저게 바로 예수 믿는 삶이구나.’하고 그들의 삶을 영접할 수 있는 이들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발을 씻는 삶을 살라고 하셔놓고,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씀을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는 종이 된 자들의 모습을 통해 소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미련하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의 효력이 검증이 될 것 아닙니까?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상황과 현상 하에서 어중이떠중이 다 믿는다고 나서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셔서 제공해주신 ‘믿음’이라는 것이 무용지물이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본문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신 후에 이 중에서 한 사람은 그 발 씻음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 씻음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은 사람에게만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그만이 직접 그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발 씻음의 삶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모양으로서의 착한 삶이라면 유다도 복 받은 사람에 들어가야 합니다. 유다는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주님에 대한 실망이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조국 해방에 꼭 필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맥없이 죽는다고 하니까 화가 났겠지요. 이렇게 발 씻음의 삶은 우리가 내어놓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착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완성되기 위해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지 론이니 청부 론이니 하는 그런 얼토당토 한 주장에 놀아나지 마세요.

복음은 종이 된 제자의 삶에서 향기로, 편지로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 그래도 감수하고 살래?’하고 하나님의 의중이 그의 삶에 실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의 높은 지위와 우리의 재산이 도움이 된다고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고요?

아니 종이 되어 발 씻어 주러 가는 사람이 무슨 재산이 그렇게 필요합니까? 거기에 무슨 명예가 그렇게 필요해요? 자가용타고, 경호원 데리고 다니는 종 보셨어요?

  

그러면 이제 그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발 씻음의 삶, 향기의 삶, 편지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낸 제자들의 모습을 성경에서 몇 군데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고전10:31~11:1)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2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는 ‘나를 본받아 행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이 전부 어떤 삶이었습니까?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그 삶을 본받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분을 믿는 이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서슬이 퍼런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고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을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스데반처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제거하며 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종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를 발 씻는 종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4:9-16)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도 바울의 삶이 정말 처참하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님의 삶과 방불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이 정말 나를 죽이시려고 그러시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를 세상의 더러운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살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왜 그렇게 취급하십니까?

그게 바로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내는 삶, ‘그 삶을 네가 살아낼 수 있느냐?’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고야 만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도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자신의 열심과 노력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티끌인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발 씻음의 삶입니다. 사도가 그러한 발 씻음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삶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게 진짜 전도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사도는 그러한 자신의 삶을 장황하게 나열한 뒤에 ‘나를 본받아라.’하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그 삶을 정말 본받고 싶으세요? 세상의 쓰레기 같은 취급 받고 싶으세요? 만민의 찌꺼기 같은 취급 받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이 죽이려고 코너에 몰아넣으신 것과 같은 그런 진퇴양난의 삶을 원하세요? 그런데 사도는 교회들에게 자기의 삶을 본받으라고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삶이 주님이 부탁하신 발 씻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발 씻음의 삶 뒤에는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의의 흰옷을 챙겨 입고 하늘의 보좌에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3:21)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엡2:5-6)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지금 한국에서는 대척점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동시에 인기를 얻는 아주 이례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TV에서는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고 극장가에서는 ‘워낭소리’라는 저예산 독립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꽃보다 남자’에서는 외제 스포츠카와 아버지 회사의 전용기를 타고 외국의 휴양지를 안방 드나들 듯 하는 10 대 고교생 구준표가 나오고 

‘워낭소리’에서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한 장애인 촌로 ‘최원균’할아버지와 40살 먹은 소가 나옵니다. 이 둘은 그야말로 대척점 같은 차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둘이 전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둘 다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대중들은 도대체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기에 구준표라는 로망과 최원균 할아버지라는 향수에 둘 다 환호를 보내는 것입니까?

그 두 종류의 환호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힘의 원리라는 세상의 삶의 원리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대중들은 구준표라는 환상 속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워낭소리에서 상대적 위로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꽃보다 남자’와 ‘워낭소리’는 대척점에 있는 콘텐츠 같지만 사실상 서로를 보완해주는 우리 욕망의 두 얼굴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혹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거나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구준표라는 판타지는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니까 워낭소리의 촌로를 보며 상대적 위로를 느끼고 있지는 않으세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위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내 이웃의 불행이나 슬픔을 나의 위로로 삼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다’를 외치고 싶은데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다른 사람의 불행을 위로삼아 ‘나’라는 우상을 달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건 여전히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은 세상 사람들의 삶인 것이지 종으로 보내심을 받아 발을 씻는 성도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상전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파하다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바로 그 삶을 본받아 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은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씀과 함께요. 그 말은 보내심을 받은 종은 상전의 삶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감수하며, 아니 기대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발 씻음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날 때에 당황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것에 기뻐 찬양을 했다는 사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발을 씻는 종의 모습입니다.

저는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워낭소리’라는 영화는 4년 전 이충렬 감독이 경상북도의 한 마을에서 여든이 가까운 할아버지와 마흔이 다 된 소를 주인공으로 그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부터 관심을 갖고 기다려 왔던 영화이기 때문에 작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다큐멘터리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을 때, 일반극장에서 개봉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보았던 영화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며 생뚱맞게 ‘성도의 삶이 저러한 것이구나.’ 하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대성통곡을 했었습니다.

워낭소리를 내며 주인이 시키는 것은 뭐든 하는 소의 모습이, 바로 발을 씻기는 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성도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찡 했습니다.

소는 원래 평균 수명이 15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최원균 할아버지네 소는 40년을 할아버지 곁에서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소는 최원균 할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40년을 할아버지 곁에서 장수를 합니다.

소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잘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최원균 할아버지가 쇠죽을 쑤어서 한 통 먹이고 나서 ‘이랴’하면 산더미 같은 나무 짐도 척척 져 나릅니다. 그 소는 40년간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등뼈가 앙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할머니는 수시로 그러한 소의 등을 어루만지며 ‘너하고 나는 팔자가 사나워서 평생 고생만 한다’고 넋두리를 해댑니다.

그 소는 바로 여덟 살 때 침을 잘 못 맞아서 한 쪽 다리 근육이 자라지 못해 편치 않은 걸음걸이로 평생 엉금엉금 기어서 논 갈고 밭 갈아 아홉 자녀의 뒷바라지를 해 온 최원균 할아버지의 또 다른 투영이었습니다. 최원균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평생을 소처럼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소는 그러한 할아버지의 일에 동역자로 부름을 받아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할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마치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시고 수난의 삶을 살다가 결국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의 모습과 그 예수에게 부르심을 입고 예수의 종으로 이 땅에서 종의 모습으로 살다가야 하는 성도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세요?

최원균 할아버지의 소는 결국 노쇠하여 죽습니다. 죽으면서도 주인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러한 소의 코뚜레를 낫으로 잘라주며 ‘죽어서는 좋은 데에 가라’고 하며 우는 최원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코에 코뚜레를 끼우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우리를 끌고 가시기 위해 우리를 이끄시면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저렇게 우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코에 끼워진 코뚜레를 빼내시면서 그 자유의 순간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시면서 ‘우리 아들 잘 참아주었다’ 하는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또 다시 눈물을 흘리실 것이라는 생각에 저도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삶은 그렇게 한 주인의 종으로서의 삶으로 수렴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시험과 고난과 이해할 수없는 사건들이 우리에게 찾아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인내하게 하실 것이고, 그러한 우리의 삶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저런 게 예수 믿는 거라면 절대 나는 예수 안 믿을 거야’ 라는 반응과 ‘그래, 저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바라는 저게 바로 신앙이야’라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전자가 ‘사망에 이르는 향기’이고 후자가 ‘생명에 이르는 향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참 된 종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발을 씻는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교만을 떨고 있는 우리를 당신의 능력과 은혜로 부인시켜 가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대할 때 당황하지 마시고 열심히 종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그게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4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후6:4~10)

4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6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