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69 -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삶   (요14: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5

69 -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삶

 

(요14:2-3)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는 처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처소는 어떻게 마련이 되는 것인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 성도와의 연합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음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 씻김의 사건 바로 뒤에 예수님의 처소 예비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이라 했지요? 예수님의 처소 예비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죄 사함과 구원의 이야기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의 처소 예비 에피소드가 발 씻김의 사건에 이어 붙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소 예비 사건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이 역사의 목적인 것이며, 우리 성도의 인생의 목적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부터 계속해서 ‘당신의 장막’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세우실 것임을 반복하여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처소와 장막, 즉 성막과 성전, 그리고 참 성전 되신 예수님과 성전으로서의 성도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고 그렇게 성전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대해 하나님은 어떠한 권고를 하고 계신가에 관해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26:11-12)

11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 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안식년, 희년 등의 율법을 주시면서, 나는 반드시 나의 처소를 너희 중에 세워서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를 반드시 내 백성으로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라 하십니다. 그 말은 안식년이나 희년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하나님의 처소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같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안식년이나 희년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공부를 했으므로 거두절미하고 처소의 이야기, 즉 하나님의 장막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레위기에 나오는 이 장막에 관한 약속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안에 성막과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하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세워지는 당신의 처소는 궁극적으로 가시적인 성막과 성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상징으로 세워 놓으신 것이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성막과 성전일 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성전이 수시로 파괴되는 것을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수시로 성전이 파괴가 되고 다시 재건이 되고 하는 가운데 영원한 처소, 영원한 당신의 성소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설 것임을 수시로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영원이라는 개념도 정리가 안 되신 분처럼 말입니다.

 

(겔37:26~28)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성전과 성소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가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의 당신의 처소, 즉 성막과 성전으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당신의 처소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고전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그러 하니라

 

여기에서 성전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나오스 떼우’는 ‘지성소’ ‘inner sanctuary’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우리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다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발 씻김의 사역, 즉 십자가 보혈에 의해 우리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확연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곳이 에스겔 36장이라 했지요?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겔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신 성령이 오순절 날 교회에 임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 각자는 모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욜2:27~29)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신이 죄인들에게 내려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 예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행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성도 각 자를 처소로 정하시고 그들 속에 내주를 하시면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하고 계신 일이 뭡니까? 처소를 처소답게 고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집주인께서 허름한 집에 일단 입주를 하신 후에 그 집을 당신의 집답게 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고후6:14~7:1)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다 말씀하시고는 거룩하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차피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므로 미리미리 항복하여 그렇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구원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요구입니다.

성도는 거룩하게 살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지, 거룩하게 살면 구원이 지속되고 거룩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탈락을 하게 되는 그런 의미의 강요가 아닌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강조를 합니다.

왜 사도는 하필 ‘멍에’라는 소재를 사용하였을까요? 그건 사도가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에서 인용을 해다가 쓴 것입니다.

 

(신22:9~11)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11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여기에서 소와 나귀를 겨리하지 말라는 말이 소와 나귀에게 같은 멍에를 메고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내용을 인용 해다가 고린도 교회에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소와 나귀가 멍에를 함께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9절과 11절을 보면 미루어 추측할 수 있습니다. 9절에는 포도원에 다를 씨를 뿌리지 말라는 율법이 기록이 되어 있고 11절에는 양털과 모시를 함께 섞어서 짠 옷을 입지 말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건 레위기에도 나옵니다.

 

(레19:19)

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지금도 유대인 사회에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한 종류의 실로만 짜인 것인지를 감별하는 전문 감별사가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금까지 철저히 지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것과 저것을 함께 섞지 말라고 하시는 율법의 진의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여 정결한 음식만을 먹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주지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꼭 명심하여 경계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좇아 사는 삶인 것입니다.

구약 때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두심으로 정결한 음식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부정한 음식과 같은 이방인들을 구별해 내셨다면 지금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가르치시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고넬료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부정한 자와 정결한 자로 나누어져,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을 상징했던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지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약 시대에 정결한 자로 상징이 되었던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때에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듯이 신약 때에는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7:1-4)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서로 섞여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처소)인 고린도 교회가 지적당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했던 사례가 무엇인지를 보면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적용해야 할 부분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먼저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있던,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는 일, 즉 벨리알(사단)과 함께 멍에를 메는 짓의 대표적인 것은 거짓 사도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아주 쉽게 넘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고후11:13~15)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 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있던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자랑하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운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 가르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는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노라고 하면서 매 맞은 것, 도망 다닌 것, 감옥에 갇힌 것, 풍랑을 만난 것 등을 자랑하지요? 그렇게 기독교는 자신을 자랑스러운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강함이 증명이 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힘의 원리 안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왕 삼아 살길 원합니다. 그 둘이 어찌 한 멍에를 메고 한 방향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도는 세상의 힘의 원리를 좇아 설교를 하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와 한 멍에를 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린도 교회가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메는 일에 빠진 것은 우상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고전10:14)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사도 바울이 ‘내 사랑하는 자들아’하고 부르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와 함께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우상의 뿌리를 캐보면 그 우상의 심장은 항상 ‘나’입니다. 그러니까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우상 숭배는 ‘나’라는 존재를 위해 살라고 하는 한 가지 목표 지점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같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있던 믿지 않는 자들의 행태는, 믿는 자들이 믿는 자들의 송사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지고 간 것이었습니다.

 

(고전6:5~8)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왜 믿는 자들의 송사가 세상 법정에까지 가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가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역시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자기 사랑과 자기주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처소가 된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지나친 자기 사랑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처소가 되고 또한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 일은 ‘나’라는 우상을 비워내고 하나님과 내 형제 자매들을 ‘나’라는 우상이 자리하고 있던 자리에 앉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죄인들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일입니다.

 

(엡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보세요. 여기에도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교리가 잘 나타나 있지요? 분명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성령의 거처가 되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처소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건물이 되어서 다시는 무너질 수 없는 자로 완성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이 무너지시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새로운 하나님의 거처, 즉 처소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실패 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리미리 항복을 하고 자기 사랑과 자기주장에서 내려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Most라는 단편 영화를 소개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Most 라는 영화는 미국인 bobby gabedian 감독에 의해 2003년 체코에서 촬영된 29분 길이의

단편영화입니다. 그것을 7분 정도로 요약해서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작품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보려 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철도 겸 도개교인 다리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평상시에는 철로였던 다리가 배가 지나가게 되면 위로 열리는 그런 도개교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관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어린 아들과 함께 일을 하러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마침 다리 밑으로 커다란 배가 지나갑니다. 아버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지나야 기차가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심을 하고 다리를 들어 올립니다.

그런데 아이가 물가에서 놀다가 보니 기차가 예정보다 일찍 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소리쳐 부릅니다. ‘아빠, 기차가 와요. 아빠 기차가 와요’ 그런데 아빠는 다른 기기를 손보느라 기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 기차 안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많은 이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 대신에 그 기차를 구원하기 위해 다리 위로 뛰어 갑니다. 그리고는 수동으로 그 다리를 내리기 위해 레버를 당기기 위해 손을 뻗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다리 밑으로 떨어집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벌써 기차가 다리 근처까지 돌진해 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 밑으로 가게 되면 그 기차에 탄 모든 이들이 죽게 됩니다. 그렇다고 아들이 그 아래에 있는데 다리를 내려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결단을 내리고 기차를 구합니다. 그 기차를 구하기 위해 다리 위로 올라갔던 아들은 다리가 내려가면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기차에 탄 사람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감사도 없이 그 아비의 절규를 지나칩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셨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함께 멍에를 메고 사는 일을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 막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