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0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요14:4~7)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18

70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요14:4~7)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제 대학시절 추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분은 천상병이라는 시인입니다. 천 선생님은 사모님이 운영하시는 인사동의 귀천이라는 작은 카페 구석자리에서 늘 어린아이 같은 웃음으로 지인들을 반기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천원만’이라는 말씀을 누구에게나 넉살좋게 하셨습니다. 천 선생님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항상 막걸리나 맥주를 사 드셨습니다. 그게 천 선생님의 식사였습니다. 저도 여러 번, 곁에서 막걸리와 맥주를 얻어 마셨었지요. 천 선생님은 대학 후배인 저를 아주 사랑해 주셨습니다. 말을 그리 다정하게 하지 못 하시는 분이고, 평소에 별로 말도 없으신 분이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의 가르침을 참 많이 던지셨던 그런 분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말수가 적어진 것도 그 분의 영향이 컸습니다.

제가 그 분을 알게 된 건 많은 분들이 그렇듯이 그 분의 시 ‘귀천’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오랜만에 그 시를 한 번 낭송해 볼까요?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그 무시무시한 죽음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기에 눌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에서 귀천(歸天)이란 하늘로 돌아감,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천 선생님은 죽음을 단지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귀향의 의미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해 같은 인생을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지나는 소풍으로 묘사를 하십니다. 이 시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어둡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명상적이며 아름답습니다. 그 이유는 시인의 삶의 자세와 죽음을 바라보는 특유의 관점에서 비롯된 자유와 소망이 시 안에 가득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는 돌아갈 길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로움이 묻어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길을 따라 본향에 돌아가게 되면, 자기가 소풍 나갔던 인생이라는 곳이 나름 아름다웠고 의미가 있었다고 말하겠다는 그 분의 시는 차라리 위대한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분입니다. 지금도 ‘아빠, 아버지’하며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를 하시던 그 분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본향으로 가는 길을 이미 찾으셨습니까? 정말 그 길을 아세요? 아니면 아직도 그 길을 찾아 헤매고 계십니까?

 

저는 자타가 공인하는 길치입니다. 정말 길을 잘 못 찾습니다. 그리고 이미 가 봤던 길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 길 심방을 갈 때면 항상 제 아내가 운전을 해 줍니다. 아마도 운전을 하면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확실하게 아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절대로 그 길은 헛갈리지도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예수라는 길에 대해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다들 암송하시는 구절 아닙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기독교는 이렇게 단 한 길만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라는 길 이외에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행4:12)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예수 이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요즘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원주의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따르는 이들이 생기고 있음이 참 안타깝습니다. 산에 오르는 길이 어찌 예수 한 길 뿐이겠느냐고 기독교의 배타성과 독선을 질타합니다. 종교는 모두 같은 것을 추구하는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합니다. 모든 종교는 화해의 대상이지 배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단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엄밀히 말해 같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종교가 진리와 선을 찾아가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정말 그런가요?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와 선의 내용이 같습니까?

아닙니다. 종교 중에는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겨난 미신도 있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불의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사교도 많습니다. 그리고 정경을 갖고 있는 고등종교들을 흉내 낸 사이비 종교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가 똑같다니요.

기독교 이외의 다른 모든 종교는 전부 인간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근사해 보이는, 범신론을 근거로 한 힌두교나 불교의 목적지인 해탈이나 오도(悟道) 또한 인간이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목적지는 하나님과의 화해,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의 욕심이나, 인간의 만족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나 사망의 증상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 이외의 참선이나 고행이나 수도나 종교행위나 보시, 선한 행동 등의 다른 길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수고나 노력, 업적이나 공로도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인들이 기독교를 배타적이라 합니다. 독선적이라 합니다.

저는 오히려 그러한 질타를 반갑게 받습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들은 배타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이외의 다른 길은 죽음으로 향하는 비탈길임을 알기 때문에 그 길을 막아서서 ‘그리로 가면 안 된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길로 가면 뻔히 죽음으로 향하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가만 놔두는 것이 포용력입니까? 아닙니다. 그건 직무유기입니다.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진리가 여러 개면 그건 벌써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단 하나이며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야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진리가 예수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적인 길, 절대적인 진리, 그 길과 진리에 의해 주어지는 생명은 단 하나 예수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지요. 여러분, 정말 기독교만 배타성을 띄고 있습니까?

가톨릭의 교리 집을 공부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가톨릭의 교리대로 하면 기도교인들은 단 한 명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리에 나옵니다. 개신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그건 배타적이 아닙니까? 겉으로는 모든 종교의 화합을 외치는 가톨릭의 교리에 개신교인들은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항목이 버젓이 기록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제2차 공의회에 관한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보조 수단인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방법의 모든 충족에 도달 할 수 있다’..” (일치교령제3항, 제 일편316 쪽)“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끝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교회헌장14항, 제 일편328쪽)

 

불교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성탄절에 절 앞에다가 ‘예수님의 오심을 감축하옵니다.’라는 현수막을 올려 거는 불교를 향해 포용력이 있는 종교라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의 윤호진 교수의 논문 ‘불교인이 본 기독교’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 글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막상 좀 더 가까이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대하면서 놀랐던 것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 교리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라든지, 편견, 몰이해와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길과 다른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승려인 자기 생각에 기독교는 불교와는 달리 헛 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왜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가지고는 배타적이니, 독선적이니 하는 지적을 하지 않습니까? 왜 꼭 예수를 이야기하는 기독교만을 독선적이라 하나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인간도 가치가 있는 존재이고, 인간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지독한 인본주의에 빠진 죄인들의 속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우기는 인본주의자들은 힘없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예수의 죽음을 구원의 길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한다는 것이지요. 왜 우리 같은 위대한 존재가 ‘은혜’라는, 나약하고 가망 없는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유독 은혜와 믿음을 제시하는 기독교만을 가리켜 배타적이라느니, 독선적이라느니 온갖 욕을 해 대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절대 그 인간의 죄 성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적당히 추켜 세워주고, 적당히 다독여 줍니다.

해탈이나 열반 같은 말은 형이상학 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인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아주 고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감, 하나님과의 화해, 순종, 복종, 은혜, 믿음’ 등은 인간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말이기 때문에 인본주의에 빠진 죄인들이 기독교의 구원 교리에 콧방귀도 안 뀌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죄 성에서 종교다원주의 같은 엉뚱한 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즐겨 말하는 ‘산에 오르는 길이 어찌 예수 한 길 뿐이겠는가?’라는 말은 참 멋지고 포용력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그건 하나님이라는 산이 얼마나 높은 산인지 몰라서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산은 얼마든지 인간의 힘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고행의 산, 수행의 산, 참선의 산, 착한 행위라는 산 그 어떤 산도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산은 절대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못 올라가는 산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히말라야를 등반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길도 모르고, 그 산에 오르기 전에 준비해야 할 준비물도 전혀 없이 그 산 꼭대기를 향하여 발을 내 딛는 순간 여러분은 죽은 목숨입니다. 절대 못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산을 정확한 길도 모른 채 마구 올라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얼토당토한 주장일 뿐입니다. 그들은 산 정상이라는 목적지를 헛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택하여 갈 수도 없는 그런 길입니다. 예전에 제가 술 한 잔하고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 많은 사람 오고가는 을지로에서...’ 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이리저리,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며 달리고 있는 제 모습이 하도 측은해서 저 자신에게 자주 불러 주었던 그런 노래였습니다.

제가 정말 열심히 그 길을 찾으려고 했을 때에는 그 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저를 찾아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는 그 길 한복판에 저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마치 공항 복도에 깔려 있는 자동 인도(人道)처럼 가만히 서있었는데 그 길이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저를 찾아온 그 길이 너무나 좋고 감사해서 그 길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길을 전한다는 말을 한문으로 하면 전도(傳道)지요? 저는 그 길이 너무 좋아서 그 길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라는 길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 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길이 오셨는데 사람들이 엉뚱한 길들을 붙들고 그게 길인 줄 착각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만에 하나 어떤 이가 그 길을 알아보았다 하더라도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요13:36~38)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예수라는 길을 좇아 목숨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너의 힘으로는 절대로 예수라는 길을 좇아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좇아오기는커녕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약하고 불가능한 인간의 실체입니다. 길이 내려 와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시기 전에는 누구도 길을 좇아 하나님께로 갈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정확하게 나오지요?

 

(요14:4)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표준 새 번역)

4         내가 가는 곳으로 가는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그들이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이 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삼년 반 동안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길이신 예수를 그들이 안다는 것을 가리켜 '너희가 길, 즉 나를 알고 있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길을 보고도 다른 길을 찾으려 하느냐?' 하는 주님의 책망이 그 안에 함의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너희는 길을 본다 할지라도 그 길을 좇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을 보면 그 것이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집니다.

 

(요14:5~6)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금방 주님께서 ‘너희가 길을 알고 있다’하고 자신이 길이심을 말씀하셨음에도 도마가 묻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압니까?’ 그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곧 길이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길이 와서 수년 동안 옆에 있어도 그 길을 알아보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길을 좇아 하나님께로 갈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의 흐름을 이해하시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길이신 예수의 ‘찾아오심’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이미 탈락할 수 없고, 포기 될 수 없는 예수라는 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각자의 인생 속에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바울 신학의 백미인 ‘이미’와 ‘아직’의 교리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길에 의해 습격을 받아 그 예수라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길이 우리를 덮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길을 우리의 발로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스스로 길이 되셔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길을 내시고 그 길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시지만 그 건져낸 백성들을 구름에 태워 가나안으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라는 길을 스스로의 발로 걷게 하셔서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런데 그 길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덮여 있는 길입니다.

확인해 볼까요? 그 광야 길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것들이 뭡니까? 만나, 반석의 물, 놋 뱀, 율법, 성막, 법궤 등입니다. 그것들이 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예수를 밟고 가나안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요6:32-36)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만나는 뭘 상징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10:3-4)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생수를 뿜어낸 그 반석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놋 뱀 사건은 어때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놋 뱀 사건은 저주의 뱀이 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라는 장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지요? 율법은 무엇입니까?

 

 (요1:45)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눅24:4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율법이 결국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막은요?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번제 단, 물두멍, 성소, 모두 뭡니까? 예수입니다. 지성소 안의 법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명을 해 드렸으니까 다시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고, 이스라엘이 겪은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길을 직접 경험하며 걸어야 했던 광야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불평과 불만이 수시로 터져 나오는 그런 힘겨운 길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일 세대는 자신들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고 그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광야는 그런 길입니다. 자신의 추악함과 나약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부인되는 그런 길입니다. 그러한 자기 부인을 구약은 일 세대의 죽음, 즉 옛 사람의 죽음으로 묘사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라는 길은 그리 녹록한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께 이르는 예수라는 길을 가리켜 좁고 협착한 길이라 부른 것입니다.

 

(마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지요? 당신이라는 길을 열심히 좇아 보겠노라고 찾아온 이들에게 ‘나를 좇아오려거든 각오를 하고 좇아와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8:19~20)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난 네가 원하는 세상적인 힘이나 주러 온 사람이 아니야. 난 머리 둘 곳도 없단다. 날 좇게 되면 너도 그렇게 될 텐데 그걸 각오하고서라도 좇아오겠니?’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막8:34)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여기서는 당신을 좇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아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라는 길에 접어들어, 예수라는 길을 가는 삶은 좁고, 협착하고, 고단한 자기 부인의 삶이며,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넓고 화려한 길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소원이 들어진다고도 하고, 예수를 믿으면 질병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식들이 공부를 안 해도 좋은 대학에 척척 붙는다고도 하고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도 합니다. 그런 넓은 길은 성경 어디에도 약속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그런 것들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예수라는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생명력, 즉 하늘의 복을 받을 때에만 진정한 구원이 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 때 비로소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다른 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를 실제화 하여 살게 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라는 좁고 협착한 길 이외의 모든 길을 악한 길이라 하십니다.

 

(사55:6~9)

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라는 길 이외의 모든 길은 버려야 할 악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시77:16~19)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18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바다 속에 당신의 길을 내십니다. 바다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주와 심판의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길인 십자가의 길, 예수의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길을 좇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성도가 여전히 바다와 같은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면서 ‘난 예수라는 길을 좇아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처럼 우스운 코미디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나 사망의 바다에서 허덕이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내신 예수라는 길을 따라 자기 부인과 십자가라는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모으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고, 얼마나 훌륭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로 그 가치가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 삶 속에 하나님이 내신 길인 예수와 십자가라는 길이 실제화 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로 성도의 가부여부와 성숙도가 판단되어져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자식이 대학에 떨어졌다면 그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욕심과 교만을 조금이라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 때 감사헌금 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에 좋은 대학에 붙었다면 그것도 성공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에 사업이 망하여 이 세상 힘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알게 되었다면 그게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에 사업이 번창하는 것, 성공적인 삶입니다.

성도의 성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로 인도해 가시는 모든 사건과 정황과 인생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악함과 죄에 방치하여 내버려 두시는 상태에서 대기업 총수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하는 것은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성도의 성공, 성도의 형통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셨다면 여러분의 모든 삶은 다 성공적인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에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실패와 낙담과 질병 등 모든 것이 다 성공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성공시키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은 성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힘과 업적을 그 목표지로 삼지 않습니다.

그냥 나는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불가능한 나에게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며, 그 은혜가 내게 부어지기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쏙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품 안에서 잘 난 척 하고 뛰쳐나오지 않겠다는 강한 순종의 자녀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난이 쓰일 수 있고, 질병이 쓰일 수 있고, 망함이 쓰일 수 있으며, 부유함이 쓰일 수 있고, 인기가 쓰일 수 있고, 명예가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타나는 현상들에 너무 목매지 마시란 말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