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2 -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요14:7~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0

72 -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요14:7~12)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 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청출어람(靑出於藍)이(而) 청어람(靑於藍)’ 이라는 말이 있지요? 쪽(물감을 뽑아 쓰는 일 년생 풀)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것으로 순자의 <권학>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절인 12절이 정확하게 그러한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우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게 될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요? 도대체 주님을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이기에 그들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위 구절에 나오는, 주님이 하신 일과 주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거기에 대해 차근차근 자세하게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어절의 주어인 ‘나를 믿는 자’가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모세나 엘리야, 이사야, 나단, 아비후, 70인의 장로들처럼 하나님을 한 번 알현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빌립이 ‘나에게도 하나님을 보여 주세요’하고 주님께 요구를 한 것입니다. 빌립의 그러한 요구는 어찌 보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제자들의 마음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빌립이 자기주제를 모르고 한 소리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죄인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출33:20)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죄인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즉사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겁도 없이 주님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저주를 받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회복되기 전에 하나님의 현현이 타락한 그들을 만나면 그 타락한 모든 피조물들은 즉시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와 거룩은 공존이 불가능합니다. 거룩과 공의는 하나님 고유의 속성이기 때문에 절대 죄가 하나님을 알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직접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시고 숨으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왜 숨으시지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제가 전에 요한복음12장 강해를 할 때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은 죄인들이 인본주의의 망령을 간직한 채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게 되면 그 자체가 사망이므로 당신을 화염검과 그룹들로 감추신 것이라 했지요? 사망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이 사망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절대 화해할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이방인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사망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감추어지심은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숨겨지신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롬1:20)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모든 피조물들이 사망으로 치닫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피조물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법칙으로 원리로 창조의 능력 등으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왜요? 인간의 지각이 하나님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저급하게 타락을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영적 귀가 막히고 영적 눈이 멀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일반 계시라 합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그러한 일반 계시를 가리켜 비언어 메시지라 합니다.

의사소통의 중요한 요소가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중간에서 발신자의 메시지를 수신자에게 전하는 전달 수단입니다. 처음엔 그렇게 발신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는데 그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수단으로 비언어적 메시지인 일반계시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인간들이 통 알아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한 민족을 택하여 언어 메시지로 당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또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계시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언어의 메시지도 못 알아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인간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히1:1-2)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언어 메시지로 끊임없이 당신을 계시하셨는데 그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당신을 계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라 부르는 것입니다.

 

(요1;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8)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렇게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삶으로 행동으로 설명해 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14:9)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렇게 주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분입니다. 누가복음 11장으로 가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눅11:20)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주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 있던 무리들이 예수님이 마귀의 대장인 바알세불의 힘을 이용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모함을 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구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손을 힙 입어’는 헬라어 ‘엔 닥툴로스’를 의역한 것입니다.

그 어구는 ‘in’ 과 ‘finger’라는 단어의 조합입니다. 그러니까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라고 번역을 해야 옳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끼워지는 장갑이었다는 뜻입니다. 장갑이 일을 하는 것은 장갑에 끼워진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지 장갑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남편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깼다고 해 보세요. 아내가 고무장갑을 혼냅니까? 남편을 혼내지요. 마찬가지로 장갑은 그 장갑을 사용하는 손에 의해 움직일 뿐 그 자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손이 끼워진 하나님의 장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 장갑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본 자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10~12)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 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어구, 즉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보다’라는 단어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가면 그 세 가지 단어가 아주 잘 비교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마리아의 전갈을 전해 듣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는 에피소드가 그려져 있습니다.

 

(요20:4-8)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5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의 수의를 보았다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블레포’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로 밑의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는 ‘데오레오’입니다. 그 말은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데오레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오라오’입니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오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봐야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고 예수님을 이해해야 하나님을 보지요. 어떻게 예수님을 볼 수 있어요? 다른 말로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눅24:44~45)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보시다시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가 누구이시며 그 분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지를 배우고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를 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를 보신 거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설명이 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못 보았으나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를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못 알아보았던 예수를 우리가 이 천년이 지난 오늘에 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여러분, 그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봄’은 망막에 새겨지는 물리적 ‘봄’이 아닙니다.

그러한 저급한 ‘봄’ ‘블레포’는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를 하고 보는 ‘오라오’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고 다 보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경이 길을 가다 갑자기 눈을 뜨게 되면 집을 못 찾아 간다는 것을 아십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시각 장애인이 병원엘 갔다가 집을 찾아가는 길에 눈이 갑자기 눈이 떠졌는데 멍하니 길에 서 있더랍니다. 그래서 길을 가던 어떤 교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 ‘왜 이렇게 멍하니 한참을 서 있느냐’고 물으셨더니 그 사람 왈 ‘갑자기 눈을 뜨게 되니 눈을 감았을 때에는 항상 손쉽게 찾아가던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없어서 이렇게 서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자신이 집을 찾아주겠노라고 하시고는 그 사람에게 눈을 잠시 감으라고 하셨답니다. 그리고는 벽에다가 그 사람의 손을 가져다 대니까 그 사람 얼굴에 화색이 돌며 금방 아버지 집을 찾아 가더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 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4장 공부할 때 보았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 기억나세요?

그 때 주님께서 그 왕의 신하에게 뭐라고 하세요?

 

(요4:48)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확인 도장을 찍고 가지요.

 

(요11:40)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행하신 일을 인하여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14:11)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믿으라

 

주님이 행하신 일이 뭡니까? 피상적으로 볼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로 수 만 명을 먹이시고, 병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그런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들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앞에서는 ‘너희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시고는 이제 와서 내가 일으킨 기적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요12:37~40)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적과 기사들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38절부터 그 이유가 나오지요?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시면 그들은 피상적인 기적만 볼 뿐, 그 안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다는 것의 진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그러한 표적들을 통하여 보아야 하는 그 표적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마12: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 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실체가 뭐라는 것입니까?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이 요나가 이스라엘의 대적 국가였던 앗수르 니느웨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물고기 뱃속, 스올에 삼일 밤낮을 있었던 것같이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요6:30)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행 하시는 표적의 내용, 예수께서 하시는 일의 내용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 대답하십니까? 생명의 떡 강화로 대답을 하십니다. 그 생명의 떡 강화의 주요 요절을 볼까요?

 

(요6:53~57)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들의 진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기 위해 예수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고, 문둥병자가 낫는 것을 위해 예수님이 문둥병자가 되셨으며(마8:17), 저주의 풍랑에 빠져 죽어야 할 죄인들을 위해 예수가 대신 그 저주의 풍랑에 빠지신 것이며, 배가 고파 굶어 죽어야 할 자들을 위해 예수가 하늘의 떡이 되신 것입니다. 그게 모두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요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나의 한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은 표면적인 기적을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의 진의를 믿음으로 깨닫는 자는 예수를 믿을 수 있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확실하게 깨닫고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가 마치 자신의 소원이나 야망을 이루어 주러 오신 분으로 착각하며 예수를 자기 종처럼 부리려고 하는 이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고, 여러 가지 표적들로 당신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러한 당신의 행하신 일들의 진의를 깨닫고, 다른 말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과 삶의 진의를 이해하여 당신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6:38~40)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보세요. 주님이 하신 일은 모두 하나님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십자가 사역을 상징하고 있던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을 표현을 하면 이러합니다.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이렇게 이 땅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행하신 모든 일, 이적, 기사, 구제, 선행 모든 것이 다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믿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당신의 사역의 진의는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10:37~38)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안 믿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 즉 십자가 은혜는 제발 이해하고 깨달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 하셨던 일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마16:21~23)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막아섰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사단이라 부르시면서 그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 예수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하신일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자명해졌지요? 그런데 본문 12절에 보면 참으로 부담스러운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할 것이고 심지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잘 보시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 일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이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병자를 고치고, 물 위를 걷고, 기적을 일으키는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어떤 이단 목사가 얼마 있다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지요? 그런 사기꾼의 농간에 속지 마세요.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런 것 아닙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분명 모든 믿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남보다 믿음이 더 깊은 사람이라거나 그런 일을 행하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믿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게 되는 일이라는 말인데 모든 믿는 자들이 전부 풍랑 위를 걷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보리떡 다섯 개로 수 만 명을 먹이고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물 위로 걸어보신 분 손 한 번 들어보세요. 없지요? 그럼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그런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또 다른 작은 십자가를 지는 삶, 즉 예수가 사신 그 순종의 삶, 십자가 지고 죽는 삶을 살게 된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마태복음 16장의 바로 다음 구절을 볼까요?

 

(마16:23~24)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이거 보세요. 사람의 일은 예수가 죽지 않고 살아서 기적적으로 이 땅에서의 화려한 다윗 왕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좇아가며 예수를 따라서 사는, 하나님의 일은 뭐라는 겁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예수의 ‘내가 한 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뭡니까? 믿음 아닙니까? 왜냐하면 죄인들이 맨 정신으로 그 삶을 산다는 것은 김정일이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당해주고, 맞아주고, 섬기고, 죽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옛 사람이 그 삶에 동의를 안 해줍니다. 그 때 보이지 않는 소망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는 자들의 할 일을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도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6:28~30)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아주 간단  명료하게 그 하나님의 일을 정의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예수를 믿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를 믿고, 까짓 거 이 세상에서 한 번 죽어 보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손해보고, 상함을 입고, 하면서 다른 영혼들을 살려내는 삶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고 경험하며, 그리하여 다시는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그 무서운 십자가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경험적 결단을 하며, 믿음으로 죽은 자의 삶을 살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5:14~15)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우리 옛 자아는 죽고 우리는 장갑이 되었습니다. 그 장갑 안에 예수라는 손가락이 들어와 우리를 사는 것입니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은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여 더 큰 일이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도구로 쓰이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참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역 지는 팔레스타인 땅에 국한이 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심겨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을 받은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볼까요?

 

(행2:37~41)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베드로가 한 번에 삼천 명을 회심시켰습니다.

 

(행4:1-4)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21:20)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어떠세요?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삼년 반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일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더 광범위해졌습니다.

 

(마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만 국한 되었던 복음 전파 사역이 땅 끝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지요? 지금은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파송이 되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믿는 자들 안에 들어가 계신 예수님의 사역에 믿는 자들을 동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완성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처럼 쓰여 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게 확실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하게 된다고요?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으로 ‘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 자기 자랑, 자기 증명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실 분들입니다. 거기에는 예수처럼 비워주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죽읍시다. 오늘부터라도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