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5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I)   (요14: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2

75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I)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승귀 뒤에 이루어질 성령 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와 내용에 관해 심도 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위해 ‘내가 다시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 강림으로 성취가 되고,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승계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 2의 자아(alter ego)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사역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다른 자아라고 표현하는 것이지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면에서의 다른 자아는 아닙니다. 잘못 오해하면 (alter ego)를 양태론 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건 이단입니다. 저는 지금 삼위일체론에 입각한 제 2의 자아(alter ego)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주님께서 ‘그 날에는(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울러 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요? 따라서 우리 안에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이고 그 삼위의 하나님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14장 1절부터 전개되고 있는 ‘처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 처소의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를 하고 계세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 안에 우리가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오늘은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주까지 연결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가 다소 어정쩡하게 끝나는 것 같아도 조금 참으시고 다음 주 설교까지 연결해서 잘 들으셔야 합니다. 제가 이번 주와 다음 주 설교 원고를 잘 정리를 해서 나누어 드릴 테니까 집에서 열심히 읽어 두세요.

오늘 설교의 내용은 강해의 성격을 띤 신학 강의가 될 것 같네요. 조금 딱딱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과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반드시 숙지해 두어야 할 부분이므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신 분들은 앞으로 삼위일체라든지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에 관한 성경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강림은 우리를 사랑한 자로 만들어 내셨고, 계명을 다 지킨 자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구속의 사건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보혜사 성령의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죽으시기까지 지켜내시고는 그 계명지킴의 사건을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를 목숨 걸고 사랑하셔서 그 사랑 또한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본문에 나왔던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을 하신 후 그 분의 십자가 지심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계명을 다 지키셨고 그 계명 지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발로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신 자신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키지도 못할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을 하시고 자신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이 된 성도의 구속 사건이 성령의 ‘더 큰일’사역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로, 공짜로, 아니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지고 적용이 되어졌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에서는 그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중보에 의해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오시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요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런데 15장과 16장에서는 예수님이 보혜사를 보내시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요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요16:7)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정확하게 누가 보내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성령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임과 동시에 하나님 아들의 사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 그리고 서방교회의 분열이 여기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동방 교회는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했고, 서방 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에게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에게서도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결론은 서방 교회가 옳았지요.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아들의 영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입니다.

 

(롬8:9)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보세요. 바울이 한 문장 안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부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을 아예 아들의 영이라 부릅니다.

 

(갈4:6)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이시기도 하면서 아들이 보내시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것처럼 분명 요한복음 14장16절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시는데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고 하십니다.

 

(마28:20)

20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까?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의 해결책으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인 것입니다.

 

제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오늘 조금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단어입니다. 그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교부 터툴리안입니다. 터툴리안은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활동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이며 교부였습니다. 그 분이 ‘파락세아스를 반대하여(against paraxeas)’라는 책에서 삼위 하나님의 한 본질과 세 위격을 처음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그 이론은 후에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사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조금 문제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할 때 ‘한 본체(substantia)와 세 인격(persona)’으로 표현을 했는데 당시에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는 개체성을 가진 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고, 무대에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어떤 배우가 왕으로 분장해서 왕의 역할을 할 때 그 때 이 ‘페르소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영화감독의 사상이나 인격, 의도 등을 연기로 잘 표현해 주는 특별한 배우를 그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하지요? 그렇게 이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습니다. 따라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을 다시 번역하면 ‘한 본체(substantia)와 세 역할(persona)’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양태론(modalism)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정확하게 양태론은 아니지만 양태론 적 그림자가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지요?

그 터툴리안의 부족한 삼위일체론을 어거스틴이 이어받아 발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도 삼위 하나님 각자의 개체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한 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의 일신론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심리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르는데 그는 한 인간 안에 있는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억, 지성, 의지는 한 인간의 어떤 측면들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세 인격체로서의 개체성을 가진 인격적 개체로서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이론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도 양태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대의 존 칼빈은 세 인격의 인격적 개체성을 강조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독자적 개체성을 확실하게 부각을 시킨 삼위일체론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칼빈은 아타나시우스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로 연결되는,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존재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깊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터툴리안 식의 삼위일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대가들에 의해 전승이 되어졌습니다. 그 중 칼 바르트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에서의 ‘페르소나’는 계몽시대 이후의 개체성이 들어 있는 의미의 인격이 아니었고, 단지 역할이라는 의미로 터툴리안 시대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한 인격체(person)와 세 존재양태(seinsweise)’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칼 라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 라너는 삼위일체를 ‘한 인격체(person)와 세 본체의 양태(subsistenzweise)’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 하나님을 하나의 본체로 표현을 한 것에 유래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의 본체가 드러나는 세 가지 양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역시 양태론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기 어려운,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인 것입니다.

 

혹시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양태론(modalism)’이 뭔지는 다 아시지요?

3세기의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일신론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세 가지 역할을 하신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한 인격이신데 세 가면(프로소폰)을 가지고 계신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구약 때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예수님 안에서는 성자 예수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의 모습으로 옷만 갈아입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경륜적 삼위일체론(the economical doctrine of the trinity)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라는 본체가 빛과 열의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혹은 물이 얼음으로, 수증기로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모양만 바꾸어 세상에 역사를 하신다는 그런 주장입니다. 그건 이단으로 규정이 된 이론입니다.

만일 그들의 이론이 맞다면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행위는 모두 연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래 한 인격인데 누가 누구한테 기도를 합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도 쇼에 불과한 것이고요, 뿐만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 되지요?

만일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과 15장 16장은 하나도 이해가 안 됩니다. 또 다른 보혜사도 같은 보혜사가 되고, 누가 누구를 보내는 것도 전부 가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지요. 누구와 누구 사이를 중보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들렸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예수님의 복화술이 되는 것이고, 스데반이 본 하나님 옆에 서 계신 예수도 착시일 뿐입니다.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의 인격적 개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은 한 분이다’에 매여 일신론적 관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전부 이 양태론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삼위일체론은 어떠한 것인가?

제가 보기에 성경적 삼위일체론을 가장 잘 정리를 해 놓은 신조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인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사도신경과 거의 흡사하지요?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는데 여기보시면 하나님은 ‘하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사도신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전부 동일한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는 개별적 본체로서의 하나님으로 봅니다. 이 신조가 만들어진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가르쳤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원 속에서 창조된 피조물’이라 했습니다. 성자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가 되긴 했지만 그는 피조물에 불과한 성부보다 조금 못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시간 가운데서는 항상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존재 했었지만 영원 속에서는 성자가 없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인격적 개체라는 것이 무너지면 우리의 구원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이단들의 주장을 일축하는 신조가 바로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였던 것입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325년 니케아 신조와 385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해놓은 신조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단에 대항하던 교부들과 학자들이 신조를 통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그러나 인격적이며 개체적인 본체로서의 하나님임을 강력하게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권능과 위엄과 신성을 지닌 다른 본체를 가지신 한 본질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삼위일체론입니다. 그 세 하나님은 서로에 대해 열등하거나, 종속적일 수없는,(사역적 측면에서는 종속이론을 적용할 수 있음)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터툴리안이나 오리겐도 성자의 성부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때때로 드러내곤 합니다.(Bavink, 개혁주의 신론)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각 위 사이에는 종속적인 면이 전혀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이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열렸던 362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회의에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항목이 결정이 되는데, 현대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이나 칼 바르트나 칼 라너의 삼위일체 도식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희의의 삼위일체 도식이 성경적으로 정확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본도식은 ‘하나의 본질(ousia)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입니다. 여기에서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는 독립적이며 인격적인 개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일신론으로서의 한 인격이 아니라 세분의 개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본질(우시아)입니다.

여기에서 한 본질(우시아)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을 지니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신성은 항상 합의가 되어 있으며, 분리될 수 없고, 나누어 질 수 없고, 독자적일 수 없고 각자의 영역을 개별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온)을 가지신 세 본체라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히브리서 1장에 나옵니다.

 

(히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본체의 형상이라 하지요? 여기서 쓰인 본체가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개별적이며 인격적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이며 인격적 개체라는 것입니다. 그 독립적 개체인 ‘휘포스타시스’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본체의 형상’이라는 어구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본질(우시아)이며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신조인 것입니다.

아직 섣불리 결론을 추론하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그렇게 세 본체이면서 하나의 본질이라는 개념을 아주 훌륭한 한 단어로 요약하여 잘 표현한 사람이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이 세 하나님은 ‘상호통재(相互通在)’와 ‘함께하심’으로 하나 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세 분 하나님의 하나 됨을 가리키는 단어로 상호통재(相互通在)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단어가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그 단어가 정확하게 오늘 본문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어절의 축약입니다. 서로 침투하여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끊어낼 수도 없고 독립적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유지하고 추구하며 일을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 단어의 원래의 뜻은 ‘윤무(輪舞)’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윤무는 무대에서 세 명의 무희들이 손을 맞잡고 원형으로 둥그렇게 서서 빙빙 돌며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무용수들은 분명 완전한 객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여럿은 하나의 춤과 하나의 연기와 표상을 만들어 냅니다.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며 춤을 추어야 하는 윤무의 현장에서 어느 누군가가 손을 놓아 버리고 혼자 독무를 한다면 그 윤무는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혼자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페리코레시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들어내시는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홀로, 충분한 능력과 완전한 힘을 소유하고 계신 분들이 서로 독립적일 수 없고, 개별적일 수 없도록 계획과 의지와 추구와 뜻에서 필연적으로 하나인 상태, 그것이 ‘페리코레시스’인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 로마신화의 신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페리코레시스’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희랍의 여러 신들은 상호 간의 갈등과 투쟁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의 깊은 사귐으로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삼위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지닌 존재로, 독자의 길을 걷는 세 신 들이 아니고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삼위 하나님 중 그 누구도 다른 분을 영원의 측면에서 앞에 있지 않고, 위엄의 측면에서도 앞서 나가 있지 않으며, 능력의 측면에 있어서도 위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 개의 횃불이 있는데 그 각자의 횃불이 하나의 빛을 내고 있는 상태가 ‘페리코레시스’인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빠지면 그건 더 이상 ‘페리코레시스’가 아닙니다. 하나가 빠진 상태에서 세 개의 횃불에서 나오는 그런 빛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은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하나’라는 개념이 제한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에서 한 하나님, 세 인격체라는 표현을 쓸 때 ‘하나’와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둘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게 되면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수학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괴상한 모순의 결과가 초래됩니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가 지칭하는 것은 하나님은 목적이 다를 수 없고, 독자적 계획이 있을 수 없으며, 신성과 능력과 엄위의 본질에 있어서 똑같다는 의미에서 ‘전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셋’은 각자 인격적 개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분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나누어지거나 분리되거나 다를 수없는 하나의 신성을 가진 삼 위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이지 ‘일신론’적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의 하나님을 형성하는 근원으로서의 신성을 가진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신성 자체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 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체이시지만 한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하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과 같은 이단적 일신론에 빠질 위험이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그건 ‘3 Gods’ 혹은 ‘3 gods’를 말하는 삼신론 아닌가?

그렇게 인격적 개체성을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이단이라 정죄된 삼신론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간단히 말씀드리면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체의 인격적 개체성을 언급했다고 해서 삼신론이 맞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시지만 하나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세 ‘인격,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Not three Gods)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 글에서 그레고리는 ‘우리는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 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세 개의 횃불에서 하나의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하나의 본질과 세 휘포스타시스’의 형국이기 때문에 결코 그 하나의 불기둥을 세 개의 불기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시지만 하나의 거룩과 같은 하나의 동일한 신성과,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신의 삶과 역사만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신 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신론은 세 개의 독자적인 신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세 신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삼신론의 신관입니다. 이런 삼신론의 신관과 삼위일체론을 헛갈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서로 분리되실 수 없고, 함께 거하시고, 서로 안에 거하시고(mutual indwelling), 함께 일하시기 때문에 결단코 ‘세 하나님들’의 삼신론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신적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독자적으로 행하시고, 아들이 그 속에 함께 일하지 않는 경우는 상상할 수도 없고 성령과 관계없이 아들이 행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레고리의 말입니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모든 일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줄기의 흐름과 같기 때문에, 서로 다른 셋이 아니고 하나이며, 하나의 삼위일체 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반면에 삼신론에는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의 교리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의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을 형성하는 상호통재의 교리가 삼신론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 신 들, 혹은 세 하나님들에 대한 교리는 삼위일체 신학이 아닌 것입니다.

삼신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오류는 삼신론은 세 신 들의 독자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신 중 그 어떤 신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존재, 곧 절대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그 어떤 신도 절대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몰락하고, 때로는 갇히고 때로는 죽기도 합니다. 도교에 나오는 천신, 지신, 수신 역시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 신 들은 모두 자신의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삼신론으로 이해하게 되면 세 분 모두 신이시지만 그 어떤 분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노출하게 됩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신성의 폄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 모두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모두,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신이십니다. 아버지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이 상호통재(mutual indwelling) 상태에 있고,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신성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신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의 신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규정하는 이론이지만, 삼신론은 결국 세 신 들의 신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이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니고 고대 교회의 신학적 사변도 아닙니다. 고대교회가 유대교의 일신론과 결별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성령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교회가 삼신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고 성자와 성부가 하나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성자와 성령의 경우에도 해당이 됩니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체계화한 이론이고 그 핵심에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의 교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페리코레시스의 교리는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 등의 성경의 기자들의 가르침의 자연스러운 신학적 체계화였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통재적 삶을 통해 한 하나님이시고 하나의 삼위일체 신의 역사를 이룩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초월과 내주를 이루시며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기여하시는 지를 부연하고 그 삼위일체 속으로 초대받은 교회에게 쏟아 부어진 은혜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