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6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II)   (요14: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2

76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II)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삼위일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한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숙지해 두어야 할 아주 중요한 헬라어 단어가 있었지요? ‘페리코레시스’ ‘상호통재, 상호점유’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윤무(輪舞)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상호 침투하여 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상호통재의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 한 인격이 되어 버린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기체적인 영적 연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나 베뢰아 같은 곳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양태론 적 ‘페리코레시스’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도 ‘페리코레시스’를 이야기합니다. 삼위는 서로 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페리코레시스’는 비판받아 마땅한 아주 부족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는 ‘신약의 결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 그는 이렇게 페리코레시스를 이야기하는데 다분히 양태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주 부족한 페리코레시스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그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보충 설명을 해 드리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페리코레시스의 형태로 오실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비교신론 적 분석을 통해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삼위 하나님은 각각의 ‘휘포스타시스’를 가지신 개별적인 인격적 독립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 분의 개별적 인격체는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하나의 뜻과 동일한 본질과 동일한 목적을 가진 영적 유기체로서 ‘하나’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삼신론자 들의 주장처럼, 세 분 하나님이 전부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일을 하느라 충돌이 생기거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그런 ‘하나’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휘포스타시스)입니다.

그 상호통재의 개념을 성경 구절 몇 개를 찾아서 읽어봄으로 해서 조금 더 선명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성경은 그러한 유기체적 영적 연합으로서의 상호통재 적 표현을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하여 쓰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롬12:5)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지방교회나 베뢰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우리 성도는 모두 ‘한 몸’ 즉 ‘페리코레시스’적 존재로서 한 장소, 한 인격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말 서로 한 인격이 되어서 한 장소 안에 상호통재하고 있나요? 아니지요? 우리는 각자의 독립적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나 한 믿음 안에서, 한 목적지를 바라보며, 한 뜻으로 유기적 영적 연합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하나, 한 몸’이라 부른단 말입니다.

 

(갈3:28)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역시 그렇지요? 성경은 성도들을 ‘하나’라 부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경이 마치 우리 성도가 서로 안에 한 인격으로 상호통재 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는 그런 구절도 있습니다.

 

(빌1:30)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하는데 그들이 자기 안에서 보고 들었다는 말을 합니다. 마치 주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주님 안에 계시면서 당신들의 일을 하신 것과 방불한 그런 표현이지요? 그러나 그 표현은 정말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기 안에 들어와 한 인격을 이루고 자기와 함께 보고 들었다는 말이 아니지요?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 사도 바울이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 안에서 유기체적 영적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좀 가세요?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가 무슨 뜻인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도가 서로에게 상호통재 하게 된다는 그 말은 무슨 말이 되는 것입니까? 언젠가 우리 성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고, 우리 성도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며, 우리 성도의 본질이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하게 바뀌어 완성되는 날이 온다는 그런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성도와 하나님의 상호통재가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자기들이 도달해야 할 상호통재의 완성지점, 즉 우리 안의 더러운 죄의 오염을 다 비워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꿈과 뜻과 야망과 습관과 집착과 중독을 끊어내고, 비워내어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능력에 연합되어지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성도의 본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요15:10)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분의 말을 듣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 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호통재는 자기주장과 자아숭배에 빠져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던 자가 상대방을 사랑하여 그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상대방의 뜻에 나의 뜻을 기쁘게 합일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그렇게 하나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방식으로, 즉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의 방식으로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가 되는 것이라 했지요?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킨 자가 된 자들을 성령께서 오셔서 시간과 역사 속에서 그들을 율례를 지키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구속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분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분 안에 있게 되고 그 분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이 가시적 역사 속에서 반드시 무엇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쉬운 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를 전가 받아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사랑한 자가 되었으며,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고, 주님을 사랑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고,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몸 속 어디에 좌정하고 계실까? 심장일까? 간일까? 콩팥일까?’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먼저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2,000년 전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예수는 믿음 안에서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뜻과 성품과 인격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신 것이고 결국 우리를 당신의 존재와 합일한 자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예수 안에 거하라는 권고의 말씀과 함께 믿음을 동행시키는 것입니다.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고후13:5)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갈3:26)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렇게 성도와 하나님과의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는 믿음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하나님은 편재(omnipresence)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든 계시는 그 분이 어디에는 안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이 하나님과 성도의 상호통재를 이야기 하는가? 바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마귀의 뜻과 목적에 합류하여 그리로 달려가게 됩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를 가리켜 마귀와 한 몸이 된 자라고 합니다.

 

(고전6:15~17)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마귀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마귀와 한 인격이 된다는 말인가요? 아니지요? 마귀의 뜻과 생각과 성품을 좇는 자들을 마귀와 한 몸이 된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상호통재의 개념인 것입니다. 각자가 독립적 인격체로 존재하되 하나의 뜻과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성품을 완벽하게 한가지로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삼위일체의 개념이 조금 더 확실하게 잡히시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리겐의 종속설 또한 거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동등한 인격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에게 존재론 적으로 종속이 되는 그런 관계라면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단지 예수님의 피조 사실만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의 견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견해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각자가 독립적 인격체(휘포스타시스)이시면서 헤어지거나, 충돌하거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그런 하나이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 보세요.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agent)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누차 강조합니다.(요3:17) 그렇게 보냄 받은 사자인 아들은 자기의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그의 뜻을 좇았으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사자인 아들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는 분으로서, 아버지에게 위임받은 권세로 아버지의 일들인 생명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대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냄 받은 아들의 말씀에서,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아들의 뜻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며 아들의 치유행위에서 아버지의 구원 행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시의 제 1원칙은 계시자(the revealer)는 계시되는 자(the revealed)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원숭이가 설령 동물학 적으로 사람과 99% 같다고 해도, 다른 1% 때문에 사람을 계시할 수 없습니다. 즉 그 약간의 다름 때문에 온전한 계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만이 사람을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본질이어야 하는 것이고 종속적 차이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분명 계시자와 계시되는 자의 구분이 있으므로 둘은 완전히 다른 독립적 인격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을 고스란히 계시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이적 행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막강한 치유의 힘 또는 생명주는 힘을 그대로 계시해 낸 것입니다. 계시된 자와 계시 되는 자는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같습니다.(ontological unity)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같아야 합니다.(functional unity) 즉 계시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 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아들의 치유 행위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구원 행위의 대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능적으로 같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종속(subordination)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물론 오리겐 등이 주장한 우열에 있어서의 종속, 존재론 적인 종속이 아닙니다.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종속이라는 것은 우열의 개념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인 의지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없고 아버지의 행위를 체험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아들이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합치시킬 때만 아들의 뜻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기에 아들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서의 종속(subordination)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의지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어구와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라는 상호 모순이 되는 듯한 말씀을 화해시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고대의 아리우스 이단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라는 어구만을 들어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피조된 피조물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본질적, 존재론 적으로 같을 뿐 아니라 의지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같아야 합니다. 그 의지에 있어서 같다는 것을, 아들이 아버지 의지에 완전히 합치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든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을 한다’는 등의 종속 또는 순종의 언어가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지 본질적,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전능자가 아니라면 그 분은 우리를 결핍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자신도 모자란 분이 모자람 속에 있는 누군가를 구원합니까? 따라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상호통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러분이 공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같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한 그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구원사건은 우리의 밖에서 우리의 참여 없이 객관적이며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로 그 객관적, 역사적 구원사건을 오늘 우리에게 실제로, 실존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오늘 나에게 계시되게 하시고 그 구원이 실제로 내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 내용을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 역시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자신의 가르침이 아닌 자신을 보내신 아들과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십니다. 역시 상호통재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요14:26,15:26, 16:14) 성령 하나님은 아들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이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가르침은 원래 아버지의 가르침이므로, 결국 성령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은 아들 안에 일어난 역사적 또는 객관적 계시를 오늘 우리에게 실존적으로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계시자(the revealer)는 계시되는 자(the revealed)와 같다는 것을 확인 했지요? 따라서 아들과 아버지가 그렇게 같은 것처럼 아들과 성령 하나님,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도 그것은 적용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초월과 내재, 그 어느 것 하나도 배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초월에 계시고 성자 하나님이 그 성부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역사적으로 계시를 하신 것이며, 성령하나님은 그 예수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객관적 계시를 모든 시대에 실존적 계시로 적용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위 하나님은 각각 독립적 인격, ‘휘포스타시스’이시며 각각 초월과 내재 속에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뜻과 한 마음으로 하나의 일을 완성해 가시는 한 본질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초월과 내재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심으로 성취해 내셔야 하는가? 제가 지금부터 비교신론 적 관점에서 그 부분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힘들어도 잘 들어두세요.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는 삼위일체 신론의 소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다른 고등 종교들의 신론과 비교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범신론(Pantheism)입니다. 인도 계열의 종교들, 즉 힌두교와 개혁 힌두교라 볼 수 있는 불교의 신론입니다. 범신론은 신의 내재만 천명하고 초월은 천명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온 우주를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우주보다 큰 우주 밖에 있는 초월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더 부연하면, 범신론은 일원론(monism)으로서 온 우주의 본질(Brahman)이 신이라 보고, 이 신 또는 본질이 바로 인간이 육감으로 인식하는 세계에 다양하게 투영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교 용어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합니다. 브라만이라는 본질이 다양한 현상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브라만이라는 본질이 다양하게 투영되어서 사람, 소, 산, 나무, 물, 건물, 전기 등 모든 현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들은 신의 그림자인 것이며 그 현상들은 본질이 아니고 환상(illusion)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범신론은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렇게 그리스 철학과 인도철학은 그 기본 구조에서 유사합니다. 둘 다 아리안 족속의 언어와 사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 또한 산스크리트어와 헬라어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인도철학과 인도 종교의 범신론은 보통 수레바퀴로 표현하는 세계관을 낳습니다. 수레바퀴의 기하학적인 축은 돌지 않는데, 이것을 우주의 본질이라 봅니다. 그 수레바퀴의 축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레바퀴의 바깥은 돌고 도는 것인데, 이것을 신의 투영으로 일어나는 현상(환상)의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변화의 세계, 시간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현상 세계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고(四苦)가 있고, 다시 이것이 반복하는 윤회(輪回)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에서는 영겁의 윤회를 끊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은 자아가, 변화가 있는 시간성의 현상(환상)세계에서, 변화가 없는 영원의 본질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사고(四苦)와 영겁의 윤회(輪回)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열반,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자아가 현상 세계를 벗어나 우주의 본질인 신과 합일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의 그 신의 투영 상태를 종식함으로써 시간과 변화의 세계에서 탈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쉬운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수레바퀴의 바깥 쪽 바퀴 부분이 모두 수레바퀴의 기하학적 축으로 몰입을 하여 변화가 없는, 사고와 윤회가 없는 영원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열반을 무아(無我), 몰아(沒我), 입적(入寂) 등으로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과 구원론에서 중요한 문제는, ‘누가 그리고 어떻게 그 열반을 가능케 하는가?’입니다. 이 종교체계는 기본적으로 신의 초월을 부인하는, 즉 나 또는 우주 밖에 존재하는 우주보다 큰 분으로 존재하는 신을 부인하는, 범신론적 체계이므로 나 자신을 도와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의 구원은 나 자신이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범신론의 구원관을 자력구원론이라 합니다.

그 범신론의 구원의 수단은 깨달음, 즉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봅니다. 그래서 힌두교 최고 경전은 지식이란 뜻을 가진 ‘베다’(Veda)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이란, 현상 세계가 모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의 환상으로서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현상 세계에 어떤 가치가 없음을 알고 그 세계 모든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말하자면 그것들과 연(緣)을 끊음으로써, 이 환상 세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마치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을 영원과 연속선상에서 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 선하게 살아보겠다는 분투가 있는 것입니다.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범신론과 기독교가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차이인 것입니다.

그렇게 범신론은 영혼이 지식을 통하여 이 현상, 시간 세계를 탈피하여 이데아, 영원세계로 귀환한다는 플라톤철학과 아주 유사한 구원론입니다. 영지주의 구원관 또한 그와 흡사합니다. 이러한 종교의 자력 구원론 체계는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여서, 신이 범신론적으로 설정되어도 사실 인간에게 아무 소용없는 신입니다. 신이 밖에서 나보다 큰 힘을 가지고 나를 도우러 오는 신이 아닙니다. 오로지 내가 나를 구원해야만 합니다. 이런 종교의 자력 구원론 체계에서 근본 문제는, ‘이 환상 세계의 한 개체인 내가 어떻게 스스로 지식을 얻어 이 환상 세계를 탈피할 수 있는가?’입니다. 다른 말로 나의 유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내 고난들을 내가 유한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반면에 범신론에 정반대되는 신론을 이신론(Deism)이라 합니다. 이슬람교 신론이 대표적입니다. 이신론은 신의 초월을 너무 강조해서 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니까 범신론은 신의 초월을 부인하고, 이신론은 신의 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신론의 신은 너무 거룩하고 위대해서 피조 세계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신론을 가리켜 부재(不在)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이신론은 초월자 신이 이 세상을 정교하게 만들고는 그것에 이치와 섭리를 넣어서 세상이 스스로 굴러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을 낳습니다. 그래서 이신론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할 때 정해 놓은 이치대로 굴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론을 가진 종교의 신봉자들은 보통 완전한 숙명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말끝마다 ‘인샬라(알라의 뜻대로)’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 또한 완전한 초월 속에 앉아 인간 세상에 전혀 관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신론적 구원관에서도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자선을 많이 베풂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신론 종교도 범신론 종교와 마찬가지로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력 구원론인 것입니다. 범신론은 신의 초월을 부인하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없고 반면에 이신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초월자 신을 설정하기는 하나 그 신의 내재를 부인해서,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러 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둘 다 우리 구원에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신인 것입니다. 결국 그 둘은 모두 인본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결국 자력 구원론으로 수렴이 됩니다. 그들은 모두 지식과 선행을 구원의 수단으로 봅니다. 지식과 선행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조금씩 종교의 색깔이 달라질 뿐입니다.

 

현대 세속주의 적 인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지식을 쌓고 그것을 기술로 응용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잘 도야하여 선행을 도모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상 정말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까? 현대 인본주의 문명이 과연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나요? 아닙니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삶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확대하는 변증법적인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고난들을 인간이 스스로 지닌 유한한 자원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아주 위험한 신론이 현대 신학계를 강타하고 있는데 신학에서는 그것을 과정신론이라 부릅니다. 과정신학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세계관이 미국 현대신학의 흐름의 형성에 또 다른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철학에 토대를 둔 신학이 바로 과정신학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영국 태생인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로서 현대과학과 조화를 이루는 영이상학을 정립하는데 자신의 만년을 보낸 사람입니다. 과정철학으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생성(becoming)과 관계(relation)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양극적인(dipolar)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원초적(primordial)본성과 결과적(consequent)본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전자로서의 하나님은 현실성의 근거로서, 어떤 현실에도 제한되지 않는 그런 본성임에 반하여 후자로서의 하나님은 창조적 전진의 결과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에 관계하며, 세계는 하나님에게 반응을 합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적인인 완전 속에 있지 않고 과정과 변화 속에 있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는 하나님과 세계가 창조적인 전진에 서로 참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트숀은 만유재신론(Panan the ism)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오그덴이라는 신학자는 그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을 더욱 더 발전시켜 자아의 기본범주는 존재나 실체가 아닌 과정 또는 창조적 생성이라 규정하며 하나님을 실체가 아닌 창조적인 생성의 한 예, 그리고 사회적이며 시간적인 실재로서 규정을 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불변적이며 무시간적이고 비관계적인 절대자로서의 하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불변적이거나 무시간적이지 않고 오히려 계속적으로 자기 창조의 과정 속에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요 성장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게 절대적이지 못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 하에서 인간을 불가항력 적으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역사와 세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데 누가 누구를 전적으로 구원합니까? 

 

이러한 신론들은 절대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신론들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전적 타락, 완전한 무력함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핍 속에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 결핍과는 무관한 초월의 존재가 밖으로부터 와서 그의 삶에 개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인간에게 참 구원이 있으려면, 초월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자 동시에 인간에게 와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초월하며 동시에 내재하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초월자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우리의 죽음 문제를 우리의 제한된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데도 그걸 어떻게 해결해 보려 발버둥치는 처절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다른 한편 초월자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혼자 하늘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계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을 것이고 우리도 우리 힘으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려는 불가능한 일을 헛되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의존적으로 자라가고 변해가는 그런 하나님은 전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 놓인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월자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시며 그 분을 완벽하게 계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사건으로 구체화 시키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그러한 역사적 객관적 예수님의 사역을 각 시대와 택한 백성들에게 실제화 하여 적용을 시키신 것이고요.

이렇게 하나님은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분으로서, 초월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내재하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 그의 구원을 덕 입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은 기독교 핵심 진리요 그 반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도, 구원도, 은혜도 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은 모든 기독교 교리의 궁극적인 정박 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그 삼위일체의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 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셔서 우리와 함께 화려한 윤무를 추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아직 인본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하나님을 종 부리듯 부리시겠습니까? 은혜의 물줄기는 은혜의 수원지인 하나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자에게 비로소 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아져서 그 분의 뜻이 아닌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려 할 때 은혜의 수원지가 우리보다 낮아지게 됩니다. 그 때에는 물이 위로 흐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우리를 이끌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가 전능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가 되신 그 연합의 비밀이 우리에게도 깨달아져서 우리가 우리의 꿈과 야망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낮아지려 할 때 그 때 비로소 삼위 하나님과 성도들의 윤무는 화려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더 낮아집시다. 더 비워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