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8 - 과실을 많이 맺는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   (요15: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3

78 - 과실을 많이 맺는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

 

(요15:1~8)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포도나무로, 그것도 참 포도나무로 지칭하셨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켰던 포도나무를 빗대어 당신만이 참 포도나무이시며,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모두 짓밟아 멸망시켜 버린다는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포도나무는 전부 들 포도를 맺는 악한 포도나무들임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가 그 멸망에서 건져질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셔서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짓밟히시고 그 분의 옷에 피를 튀게 하심으로 우리가 그 진노의 심판을 면하게 된 거라 했지요?

거기에 우리의 공로나 노력이나 열심 등이 조금이라도 개입이 되었나요?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열심의 정도에 따라 중도에 탈락을 하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서는 마치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는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면 제하여 버린다는 둥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밖으로 내다가 불살라 버린다는 둥 그런 구절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거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위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알미니언 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주장인지를 밝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요15:2)

1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여기에서 ‘제하여 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이로’는 사실 ‘가지를 들어 올려 햇빛을 잘 보도록 해 주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잘라 버리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리고 ‘깨끗케 하다’라고 번역이 된 ‘카다이로’라는 단어는 ‘가지치기’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카다로이’라는 단어가 3절에서깨끗하였으니’로 번역이 되어 쓰였습니다.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보시는 바와 같이 2절의 ‘제해 버리시고’의 ‘아이로’나 2절 말미의 ‘깨끗케 하신다’의 ‘카다이로’ 3절의 ‘깨끗하였으니’의 ‘카다로이’는 모두 열매를 잘 맺게 하기 위한 농부의 손길에 쓰이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2절을 제대로 잘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무릇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 가지를 높이 들어 올려 열매를 맺게 하시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해 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어절입니다.

그러니까 2절은 농부가 과실을 많이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 없애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과실을 더 많이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들어 올려서라도 기필코 과실을 맺게 만든다는 정 반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6절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요?

 

(요15:6)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 구절도 알미니언 주의를 지지해 주는 그런 구절 같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맨 앞에 쓰인 ‘사람’이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라는 단어를 받는 대명사인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이것’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과 밖으로 던져져서 불에 타는 ‘이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이것’이 같은 것이라면 그 단어들의 ‘수’가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수’가 틀립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그 위의 3절과 4절을 보시면 이해가 좀 더 쉬우실 것입니다.

 

(요15:3-4)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여기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어 진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2절에서 본 것처럼 깨끗하게 된 사람들은 과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이미 과실을 맺을 수 있게 깨끗하게 된 그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과실을 맺지 못하면 잘라버리겠다’에 강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거하는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에 강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 말로 이미 깨끗해 졌고 내 안에 있으니 얼마나 수지맞은 것이냐?’가 오늘 본문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당연히 줄기인 예수님 덕분에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6절은 무슨 뜻인가? 깨끗하게 된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된 자들도 마치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처럼 행동을 할 수는 있지요? 그 문맥을 잘 보세요.

깨끗하게 된 것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동일한 사건으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면밀히 분석을 해 보면 깨끗하게 된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주 안에 거하는 것이 맞습니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포를 해 놓고서는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요.

그러니까 깨끗하게 된 자들이 예수 안에 거함으로 해서 과실이 밖으로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굳이 나누어서 이름을 붙이자면 깨끗하게 된 것은 운명적, 신분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신앙생활 속에 나타나는 성화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포도나무인 자신에게 접붙여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미 깨끗하게 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계신 중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깨끗하게 된 자들은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고,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 즉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신 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들을 밖에 던져 불사르게 하시겠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불에 살라지는 6절의 ‘이것’은 ‘사람’을 받는 대명사가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 있는 ‘어떤 것들’이란 말입니다. 명사의 ‘수’가 다르단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밖으로 던져져 불에 살라지는 것은 이미 깨끗함을 받은 이들에게서 나오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같지 않은 행위들’인 것입니다. 그 6절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과 비교해서 보면 한결 수월해 집니다.

 

(고전3:10-15)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가 나오고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등의 재료로 집이 세워지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 근거한 인간들의 인본주의적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마지막 날 다 불에 타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에 의해 집이 지어져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처럼, 인간들이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과 자격과 조건을 보태려고 시도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태워버리시고 오직 예수와 예수의 공로만을 오롯이 남겨 그들을 천국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을 잘 이해를 하셔야 이 이야기의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14절 15절을 잘 못 이해를 하면 ‘인간들이 내어 놓은 공력이 불에 탈 것도 있고, 타지 않을 것도 있으니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을 내어 놓도록 열심을 부리자’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알미니언 주의입니다.

14절과 15절은 반어법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세운 공력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력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따라서 너희들이 너희들의 힘과 꾀를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운 모든 공력은 다 불에 타 버릴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너희의 가능성을 의지하여 수고를 한 만큼 손해이다.(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그렇게 너희들의 모든 공력이 불에 타고 오직 예수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너희들에게 복이다. 그걸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이게 고린도 전서 3장 10절에서 15절까지의 정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지요.

 

(벧후3:10,14)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0절을 보시면 그 날에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드러나리로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휴레떼세타이’는 ‘모두 불 타 없어진다.’는 의미보다는 ‘불순물이 제거되고 온전한 새 것으로 나타나다’라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문맥에 맞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는 이 우주와 자연이 전부 사라져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이 제거된 온전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은 종말을 소멸(消滅) 아닌 ‘갱신(更新)’으로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완전한 구속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요? 다 타버릴 거라면 피조물들이 자기들이 타버릴 날을 탄식하며 기다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그들의 기다림은 불로 인한 죄와 허물과 저주에서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누가복음 15장에 쓰였습니다.

 

(눅15:24)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여기서 ‘얻었노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이 새롭게 나타났을 때 사용되는 단어가 ‘휴레떼세타이’입니다. 타락한 것들이 온전히 원래의 목적대로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베드로 후서로 돌아가서 그 10절의‘드러나다’라는 단어와 14절의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단어의 절묘한 대조를 보세요. 그걸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는 언어유희, word play라 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불로 태워져, 왜곡되고 망가진 모습을 벗고 온전하게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 회복이 될 것이므로 너희들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나타나기, 드러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10절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어구에서 ‘체질, 스토이케이아’는 희랍의 스토아 철학에 나오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 물질을 가리키는 단어라 했지요? 그 단어는  ‘땅과 공기와 물과 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물질 가운데 하나인 불이 나와서 그 것들을 불사른다는 말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는 이 ‘스토이케이아’라는 단어가 율법을 가리키는 ‘초등 학문’이라는 말에 쓰이고(히5:12, 골2:8, 갈4:3) 정사와 권세 등의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대적하고 인간을 죄에 빠트리는 부정적인 하늘의 영들을 가리킬 때 주로 쓰입니다.(마24:29)

그러니까 체질이 불에 풀어진다는 말은 마지막 날에 죄인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과 악한 영들이 불타버린다는 뜻이 되겠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대적하고 인간을 죄에 빠트리는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다 제거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반 창조적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악한 영들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 10절에서의 불은 상징적 불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말3:2-3)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시고 완전한 새 것으로 다시 지으실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타락한 인간의 탐욕과 허세로 왜곡이 된 첫 창조의 불순물들이 모두 제거가 되고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런 세상으로 회복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새 하늘 과 새 땅에 쓰인 형용사 ‘카이노스’는 처음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한 새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원래 상태에서 어긋나 있는 것을 원래대로 바로 잡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밖으로 던져져 불에 살라지는 것들’은 성도 안에 있는, 그리고 성도가 내어 놓는, 하나님 나라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이 세상 힘의 원리의 산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맺어 내시는 열매들 말고,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좇아 살면서 내어 놓은 모든 악한 열매들을 하나님이 태워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업적일 수도 있고, 종교적 행위일 수도 있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착해 보이는 행위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상관없이 행해진, 인간 측에서 내어놓은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 6절의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불살라 버릴 것’이라는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방해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완성해 내실 것이라는 말인 것이지 구원받은 자가 중도에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절단을 내 버리겠다는 그런 협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안에서 예수가 맺으신다는 그 열매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열매를 선한 일, 착한 일, 도덕적 윤리적으로 합당한 일, 혹은 종교적 열심 등이라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욕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그 잉여의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왔던 사람들이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살기 위해 거짓말하는 입을 바늘로 꿰매는 등의 자해도 서슴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도 ‘너희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겉으로 보기에 전혀 흠이 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 일들을 해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러 올라가실 때에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지요? 그리고는 율법을 상징하는 옛 성전을 정화하시고 다시 내려오면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로 그 성전정화 사건이라는 에피소드를 마무리 하십니다. 그게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성전은 율법, 즉 인간의 가능성과 이 세상의 힘에 의한 인간들의 구원을 향한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대주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열매로 원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을 부수라고 하신 것이고 실제로 옛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잎사귀만 무성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맺으라고 하시는 열매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은 그런 류의 열매는 아닌 것이 확실하지요? 그럼 도대체 어떤 열매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구약은 그 열매를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사5:7)(표준 새 번역)

7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들에게 ‘선한 일’과 ‘옳은 일’을 원하셨다고 하시는데 그 선한 일과 옳은 일이 살육과 전쟁의 반대편에 있는 일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 옳은 일은 단순히 착한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의 회복에 관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기만을 사랑하던 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을 비우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왕의 자리에 올라 자기 다른 모든 존재들을 경쟁자로, 적으로 간주하며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던 죄인이 ‘나’라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진정한 사랑의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도나무에게 바로 그 열매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요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그 가지는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에게 접붙여져 있는 성도입니다. 여기에서 내 안에 ‘있다’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메노’는 ‘거하다’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어 12절까지 무려 11번이나 쓰입니다. 그 단어는 영주권을 가진 시민이 한 곳에 영원히 머물러 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절대 들락날락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영원을 전제로 한 거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주님에 의해 주님의 거처가 되면 주님이 영주권을 가지고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주님 안에 거하게 된 성도는 반드시 과실을 맺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 떠나시니까요.

 

여기서 잠깐 사족을 달아 왜 예수님께서 접붙임이라는 포도의 번식방법을 예로 들어 구원과 은혜를 설명하는지를 설명해 드리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포도나무는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번식이 됩니다. 하나는 ‘커팅(cutting)’이라는 방법인데 그건 그냥 말 그대로 가지를 잘라서 땅에 심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이 바로 ‘접목(grafting)’입니다. 좋은 포도나무의 가지를 이미 포도원에 심겨져 있는 포도나무의 줄기에 접목시키는 것입니다.

둘 중에 첫 번째 방법인 ‘커팅’이 많이 쓰이는 번식 방법입니다. 그런데 굳이 접목을 하는 이유는 그 나무를 심으려는 토양에 이미 잘 적응한 뿌리를 사용하여 좋은 품종의 나무를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땅에서 가져 온 나무는 옮겨 심으려는 땅에 기생하는 기생충에 무차별 폭격을 당할 소지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 땅의 기생충에 면역이 되어 있는 좋은 나무에 새로운 나무를 접목을 시키면 그 원래 나무의 뿌리와 줄기의 덕택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절대 하나님 나라라는 땅에 심겨져 제대로 열매를 맺으며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무력하고 더러우며 지저분한 우리 가지가 하나님 나라라는 토양에서 무럭무럭 그 나라의 풍요를 먹으며 과실을 맺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하나님 나라의 토지에 뿌리를 굳게 박고 있는 줄기에 접목되어지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접붙임이라는 식물의 번식방법을 예로 들어 구원과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 5절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과실을 많이 맺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구절과 연결해서 8절을 보세요.

 

(요15:8)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여기에 보시면 5절에서 ‘너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과실을 많이 맺게 된다’고 하신 후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하고 연결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뒤에서부터 거꾸로 짚어 올라가 보겠습니다. 

가지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거랍니다. 그러니까 과실은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대목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지요? 13장에서입니다.

 

 (요13:1~2, 3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은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걸고 순종하신 그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맞습니까? 다시 15장으로 돌아 와서 8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요15:8~10)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3장의 말씀과 여기 15장 8절 이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은 주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5장 8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과실을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게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 맺는 좋은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이기적 자아에서 벗어나 아버지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 내시고 아버지의 말씀에 오롯이 순종하여 그 분에 대한 사랑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욕망과 비전과 야망을 비워내고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완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우리가 맺어야 하는 과실입니다. 그러니까 과실은 한 마디로 자기부인이며, 자아 숭배 교에서의 탈출인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숙지하시고 14장으로 가보세요.

 

(요14:12~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맺으신 열매를 우리도 맺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그렇게 예수의 과실을 좇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근거를 대십니다. 그 근거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시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가 맺으신 과실과 같은 순종과 자기부인의 과실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고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일까요? 지금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종과 자기부인에 관한한 모든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다 시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13절에서 그 가지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다 시행하실 것에 대한 이유를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관한 모든 기도는 다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영광에 관한 것이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였지요?

 

그럼 이제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한꺼번에 연결을 시켜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맺으라고 하시는 열매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을 하셨는데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십자가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죽어 버린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열매를 위하여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게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맺어야 하는 유일한 열매는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일인 것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의 안전을 위해 살던, 하나님의 자리를 꿰 차고 앉아있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반드시 하나님이 맺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지금 내 삶 속에서 열매로 보여 지지 않을 때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으세요? 내가 여전히 ‘나’라는 우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하나님께 제발 이렇게 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본적 있으세요?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경험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맞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 잡아먹고서라도 우리의 배만을 불리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다른 종자로 바뀌어져 있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우리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중간에 잘라 버리겠다는 그런 협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 그렇게 떨고 있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너희가 나에게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맞다면 너희는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라고 격려를 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아시지요? 헤라클레스의 첫 부인이 누구입니까? 오이칼리아의 공주 이올레입니다. 그런데 그 오일레의 아비가 활쏘기 대회에서 우승을 한 자에게 자기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기자 그 아비와 오빠들을 다 때려 죽이고 오일레를 납치해 버립니다. 헤라클레스는 그렇게 오일레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라클레스가 죄를 짓고 죄 값을 치르게 되고 그 동안에 오일레를 잃어버립니다. 헤라클레스는 칼리돈의 공주 데이아네라를 새 아내로 맞이하여 결혼 생활을 하는데 헤라클레스의 두 번째 아내가 켄타우로스의 네소스와 바람을 피웁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네소스를 레르나의 히드라의 피가 묻은 화살을 쏴서 죽여 버립니다. 네소스는 죽기 전에 헤라클레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데이아네라에게 자신의 피와 정액을 줍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를 다른 여자로부터 지키려면 그 것을 헤라클레스의 옷에 바르라고 합니다. 데이아네라는 이올레를 그리워하는 헤라클레스의 옷에 그 피와 정액을 묻힙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옷을 입자마자 히드라의 독이 몸에 퍼져 살이 타 들어가고 뼈가 드러나는 고통을 겪습니다. 결국 헤라클레스는 나무 장작 위에 앉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그 고통을 잊고자 시도를 합니다. 헤라클레스는 결국 그렇게 타 죽습니다.

여러분,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독이 퍼진 헤라클레스의 몸뚱어리가 바로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 아닙니까? 괴롭지 않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껍데기를 벗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히드라의 피가 묻은 겉옷을 하나님이 벗겨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그게 과실인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독을 다 태워 버리시고, 가지를 높이 들어 올려서 과실을 많이 맺는 자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주 메시지인 것입니다.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라고요?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 기도는 다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