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9 - 기도와 열매   (요15:7, 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6

79 - 기도와 열매

 

(요15:7, 16)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인간들의 전적인 무능력과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 짧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 속에 그 모든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는 것을 확인 했지요? 하나님은 가지인 성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당신께서 손수 들어 올리시고 가지치기를 하셔서라도 반드시 열매를 맺으시고야 마신다는 것이 2절의 말씀이었고(제하여 버리다=들어 올리다), 아울러 성도들에게 여전히 오염으로 남아있는 모든 찌꺼기들과 어두움의 행위들은 마지막 때에 전부 불태워 버리심으로 우리를 반드시 불 속에서 구원을 하시고야 마신다는 6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실 것이며 그 길에 우리의 옛 자아가 방해물과 걸림돌이 되면 가차 없이 백마를 타시고 철장으로 쳐 내시며 우리를 완성해 나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 실패와 실수와 넘어짐의 연속입니다. 그 때 뭘 하라고 했지요?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 본문의 결론까지 이미 공부를 다 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이 구절들은 끊임없이 오해되어지는 구절이기 때문에 오늘 조금 더 보충하여 부연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참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아침에는 우리 교회의 한 권사님으로부터 당신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잠시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민 생활 속에서 세 아들을 홀몸으로 키우시며 고생고생하신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코끝이 찡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얼마 전까지 산타바바라에서 매주 직접 운전을 하시며 우리 교회에 출석하셨던 집사님이셨고,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우리 서머나 교회 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말씀을 듣고 전하고 있는 태종이 친구 만영이, 그리고 멀리 팜데일에서 시간만 나면 교회에 오셔서 청소며 부엌일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시는, 귀여운 우체부 김보경집사님, 그리고 코스타가 끝나고 우리 서머나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텍사스로 돌아가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LA로 와 버린 정수라는 아이 등등 많은 이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왜 그 분들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공교롭게도 그 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참으로 정직하고 분명하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고 기대하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도 그 분들의 공통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송함, 송구스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그런데도 또 변함없이 옛 사람에 대한 연정을 뿜어내고 있는 자아에 대한 실망,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완성이 될 거란 기대로 인한 소름끼침 등등이 그 분들의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그건 정직한 자아성찰이 선행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고백들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기도가 비로소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받아들이는 악습입니다. 타락한 이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 버린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떤 자기 보호 장치 같은 것이 있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취사선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미화시킵니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성처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여과장치에 대해 경계하는 훈련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 영성 생활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나 자신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보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취사선택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미화시키려는 유혹을 경계하고, 때로는 나 자신을 거북하게 만들고, 때로는 참담하게 만들고, 때로는 절망스럽게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훈련은 성도의 영성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입니다.

 

이 악습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여지없이 활동합니다. 아니,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가장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이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이 악습은 성경말씀을 묵상할 때 더 강력하게 활동합니다. 이 악습 때문에 우리는 읽은 말씀의 참 뜻을 캐물으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받아들입니다. 눈 질끈 감고 우리 귀에 좋게 들리도록 말씀을 변조시킵니다. 그 말씀의 원래 의미를 알아보려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위로만 받으려 하지, 말씀이 주는 도전에 대해서는 회피하기 일쑤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악습에 의해 가장 많이 오해 되고 있는 구절들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우리를 흥분케 하는 본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할 것이다’

이 두 말씀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 손에 신기한 요술램프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진짜로 적용이 되던가요? 지금까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여러분이 기도만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왜 그렇지요? 뭐가 문제인가요? 믿음이 부족해서? 아님, 정성이 부족해서?

여기 어디 믿음과 정성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단서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지금 예수님은 지키지도 못할 공수표 같은 약속을 남발하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는 그 ‘무엇이든지’라는 단어를 올바로 규명하지 않고는 계속해서 이 구절을 오해하고 오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무엇이든지’가 제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잘 규명을 해보고 또 그 ‘무엇이든지’를 구하는 ‘기도’와 ‘열매’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7절을 다시 정독을 해 보겠습니다.

 

(요15:7)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잘 보시면 ‘구하라’는 말씀 앞에 하나의 전제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전제입니다. 그렇지요?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구하는 것, 즉 ‘기도’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게 되면 당연한 결과로 주어지는 결과물인 것이지 어떤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기도는 아직도 남은 어떤 일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할 방법과 과정이 아니라, 기도가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 갔기 때문에만 드디어 맛보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결과로써 제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어떤 결과의 반증이요, 어떤 수준과 경지에 와 있는 자기 증거요, 감사거리인 것이지 단순히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원인이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응답을 받아 감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에서부터 감격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니까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여러분,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시작하여, 사귐을 지향하며, 사귐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는 죄와 허물로, 하나님의 거룩과 대면하게 되면 즉시 멸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의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예 함께 동거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언제든지 ‘아버지’하고 부르면 ‘왜? 아들아’하고 대답을 하시는 그런 친밀한 관계로의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 회복의 증거가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지성소 안에서의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표현하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가지로 접목을 해 주시는 바람에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가지들이 자기를 예수로 보아주시며 그렇게 양자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까요? 가지들이 농부에게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가지가 농부에게 구할 것은 열매를 많이 맺게 해달라는 요구밖에 없습니다. 가지에다가 금칠을 한들 그 가지가 가치가 올라가겠습니까? 아니면 가지를 가장 꼭대기에 달아 준들 그 가지의 위상이 올라가겠습니까? 가지를 굵게 만들어주면 그 가지의 인기가 높아집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열매를 맺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가지의 소원은 열매 맺음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자신의 야망이나 문제 해결이나 세상 적 소원 성취에 관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6:31-32절에 보면 주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항상 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분명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 이 땅의 것으로 먹고 사는 일에 사용되는 저급한 것으로만 정의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의 여분으로서의 다른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안 되잖아요? 따라서 기도는 먹고사는 문제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됨됨이에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간단한 예를 들어드릴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기도에 대한 정의는 어느 곳에서든 동일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맞습니까? 미국에서의 기도의 정의와 우간다에서의 기도의 정의가 틀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만약 우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나무나 풀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움막에서 먹을 것, 마실 것만 주어지면 다른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해 보자고요. 거기에서는 성공이나 인기나 명예나 자랑이나 비교 우위 자가 갖는 상대적 행복 등이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런 게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기도할 때 과연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지금처럼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사업이 잘 되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까? 아프리카 오지와 같은 곳에서는 그러한 기도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는 말입니다. 그곳이야 말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하나님이 새를 먹이시는 것처럼 공짜로 주신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러한 물질적인 욕심이 배제된 곳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이미 행복한 이들에게서 나오게 되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자신들을 그렇게 은혜로 돌보고 계신 그 분께 오롯이 순종하여 그 분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 말고 또 있을까요?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은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모두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그런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욕구들 속에서 ‘기도란 무엇 무엇을 구하는 것이다’라든지 ‘기도란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든지 하는 등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화의 오류를 비켜갈 수 있는 기도의 정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자기부인의 외침’정도로 해 두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열심을 내어 어떤 것을 얻어냄으로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자녀의 모습은 자신의 노력과 힘과 지혜와 열심으로 하나님을 도와주는 그런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녀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그 분 안에 있는 기쁨이 충만한 것으로 ‘난 하나님 없이는 못 살아요’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은 그 고백에 대해서 ‘난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대답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기도가 어디로 향해 있어야 합니까? 바로 우리의 됨됨이, 즉 하나님의 자녀 됨을 향해 쏟아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요17:21~26)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 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과의 하나 됨, 연합입니다. 우리를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연합 속으로 초청하여 하나로 만들어 하나님이 누리는 교제와 안식과 기쁨과 성품과 풍요와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능력으로 보필하려 하고 알량한 지혜로 참모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마음과 계획과 뜻을 하나로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14장 내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합일하는 자로,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의 복된 자리로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예수의 성품과 예수의 복종이라는 당신의 열매를 맺으려 하실 때 나의 뜻을 내세워 거부하지 않고 그 분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을 때에 우리가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10:3~6)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을 향해 내리꽂히는 것입니까? 불복종입니다. 5절에 의하면 복음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살아내어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그 성자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본받아 살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니까요.

 

(고전1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예수를 본받아 치열한 고난의 삶도 감수하며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빌3:17)(표준 새 번역) 

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 까지 이야기를 할 정도로 예수님 닮은 삶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빌1:8)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러니까 성도의 본무는 이 땅에서 예수처럼 사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엡4:13)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란 하나님이 지금 이 세대와 이 세상을 향하여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 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한 모든 기도는 다 들어주시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주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기도인데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구합니까? 아니면, 그런 사귐이 없는 상태에서 다급할 때마다 살려달라고 구합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는 상태에 있으면, 우리가 구하는 대상이 점점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삶이 없으면, 많은 경우, 이기적인 욕심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급한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께 기도할라치면, 이기적인 욕심에서 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이 시작되고 깊어지면, 점차로 우리는 자신의 이기적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로써 구하는 대상이 점차로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귐의 깊이가 깊어져감에 따라 이기적인 욕심을 구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사귀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닮아가게 됩니다. 선생을 깊이 사귀는 제자는 선생을 닮게 되어 있고, 아버지를 친밀하게 사귀는 아들은 그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귀는 부부는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귀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사고방식도 닮아가고, 가치관도 닮아가고, 사는 방법도 닮아가고, 인생의 목표도 닮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귑니까? 말씀을 통해 사귀고 묵상을 통해 사귀며 기도를 통해 사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귐이 기도의 내용을 바꿔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초점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는 일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써 무엇을 구하는 일은,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귀는 과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농부가 공급해 주듯, 우리가 참된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제공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카메라의 어원이 뭔지 아세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라틴어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camera라는 단어를 ‘방’이라는 의미로 씁니다. 그 카메라의 원리는 BC3세기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때 그런 실험 안 해보셨어요? 아주 어두운 상자 안에 바늘 구멍만한 구멍을 뚫고 그 상자 안에 양초의 상을 맺히게 하는 그런 실험. 그 바늘구멍이 뚫린 어두운 상자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 보시면 무방합니다.

아주 옛날부터 유럽이나 중동에서 어두운 방의 천정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드는 상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측해 왔는데 거기에서 오늘날의 카메라가 탄생한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안이 죄로 어두워 있을 때에는 밖에 있는 현상들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게 된다는 그 자연의 원리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어두운 방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벽면에 밖에 있는 상이 그대로 맺혀지듯이 우리 안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밖의 현상에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하나님이라는 빛이 가득 차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더 이상 밖의 사건이나 상황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밖의 현상이 우리 마음에 심각하게 맺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의 사귐이 없이 기도를 하게 되면 나에게 일어난 현상이나 사건의 해결이 주된 기도의 내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깊이 갖게 되면 우리는 바깥의 것들과 무관한 기쁨과 안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이어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