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81 - 예수라는 친구가 맺는 사랑이라는 열매(II)   (요15:7~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30

81 - 예수라는 친구가 맺는 사랑이라는 열매(II)

 

(요15:7~17)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잠깐 복습을 하고 오늘의 내용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맺으라고 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맺으라고 하시는 열매는 착한 일, 선한 일, 도덕적 윤리적 바른 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연합되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자기 부인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그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여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 맺혀지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구속사의 과정을 몸으로 살아냄으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성화가 100% 하나님의 몫임과 동시에 100% 성도의 몫이라는 이야기는 성도가 자신의 노력으로 100% 거룩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100% 자신들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라 했지요? 잠자고 일어났더니 자동적으로 성화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100% 내가 그 과정을 겪어내고 통과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성도가 평생 동안 맺어야 할 거룩이라는 열매는 이스라엘의 진과 성막과 지성소의 도식 속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지 절대 정하고 부정한 것, 깨끗하고 더러운 것 등의 자격과 조건으로 맺혀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나세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속된 것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맺게 되는 열매는 자기부인이며, 순종이며, 결국 연합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도 하지요. 자기만을 사랑하던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며,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관심과 배려에 대해 배우게 될 때 우리는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 분의 뜻에 조금씩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순종, 연합, 자기부인은 하나로 묶여있는 덕목인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고 그 의존은 순종으로 이어지며 순종이 깊어질수록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연합이 된 상태를 사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고민되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열심히 그 열매를 맺고 계십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지금 처한 상황이나 사건 등이 전에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우며,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지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의 뜻을 맞춰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불안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워서 단 한시도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그런대로 담담하게 살아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순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성숙시켜 가고 계신 것입니다. 나에게 들이닥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질 때 그걸 열매 맺는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반복이 되다보면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 순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작은 순교를 수없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을 완전히 거두어들이는 것이 순교이니까요. 왜 순교를 신앙의 절정이라 표현하는지 아세요? 하나님 나라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죽인 순교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연합이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뜻과 계획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의 뜻과 계획으로 받아들여지고 바뀌어져 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계획을 관철시켜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와 종교적 열심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해 내는 것은 다른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여타의 종교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제 LA에 있는 모 교회에 다니시는 집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저희 교회 설교를 오래전부터 들으시는 분이신데 다짜고짜 자신의 교회 이름을 대시면서 그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그 분이 다니시는 교회의 설교는 조엘오스틴이나 로버트 슐러, 그리고 고지론을 적당히 비벼서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는 그런 설교입니다. 거기에다가 적당하게 신비주의를 섞어서 아주 매력 있는 교회로 정평이 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 교회 설교와 우리 교회 설교를 1년 반 정도 함께 듣다보니 점점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지 절대 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명성을 쌓아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게시판에다가 조엘오스틴이냐? 김성수냐? 라는 글을 여러 차례 올리셨답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설교는 조엘오스틴의 설교를 판박이 한 것과 같은데 서머나 교회의 설교는 그와 완전히 반대이니 둘 중에 하나는 틀린 것이 아니냐는 요지의 글이었답니다. 결국 그 교회 목사님 이하 장로님들의 압력으로 글을 다 지우게 되었는데 자신은 그 일로 교회에서 완전히 왕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저희 교회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신데 그 분들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저를 얼마나 미워할까요? 저는 그냥 우리 교회에서 설교만 하고 있었는데 전 세계 각지에 적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긍정적 사고나 종교적 열심, 도덕적 윤리적 선한 행위 등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옛 사람을 장사지내며 세상의 힘을 조롱하고 너무나 선명하게 약속이 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인 된 자신의 소원이 기각이 되고 하나님의 소원이 자신의 인생에서 성취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성도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계획이 무산이 되어 집니다. 자신의 뜻과 계획이 무산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기도 응답을 못 받는 것도 은혜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거절 속에서 우리의 미숙함이나 무력함, 욕심 등을 폭로 당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절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소원인 우리의 거룩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할 것으로 고난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시는 하나님도 고통스럽습니다. 당신 자녀의 고난을 곁에서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을 향하여 이 세상과 구별되어져 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 자녀들의 고통을 보시면서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신다고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막1:40-45)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41절에 보면 ‘민망히 여기사’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을까요? 문둥병 환자를 만나고보니 너무 불쌍해서 그런 것인가요? 그렇게 문둥병 환자들이 불쌍하셨다면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셔서 한 번에 다 낫게 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네가 있던 곳에 가서 그 곳에 있는 문둥병 환자를 전부 데리고 와라, 다 고쳐주마’하셨어야 옳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절대 아무에게도 그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문둥병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은 단순히 그가 가진 병이 너무 가혹한 병이라서가 아니라, 문둥병이 걸린 사람이 자기 병을 낫게 해 줄 능력이 있는 예수님 앞에서 막무가내로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당신이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첨언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들어보세요. 당시 문둥병은 천형으로 여겨졌던 아주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앞에 서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문둥병자였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울고불고 매달렸어야지요? 그런데 그 문둥병 환자는 ‘주님이 원하시면’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구가 이 에피소드를 여는 열쇠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문둥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기도도 간절히 했을 것이고, 좋다는 명약은 다 찾아서 먹어 보았을 것이며, 혹시 착한 일을 많이 못해서 그런가 하여 남 몰래 선한 일을 한답시고 열심히 노력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문둥병 환자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고 열심히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과정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당신의 주권에 대한 고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주권의 타이밍을 인간에게 양보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소원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소원이 계속해서 기각당하는 경험을 통해 ‘아, 이것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셔야 되어지는 일이구나’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항복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그가 받은 거절감과 외로움과 박탈감과 소외감과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요?

주님은 그 과정을 전부 한눈에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민망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문둥병 환자가 ‘주님, 저 좀 낫게 해 주세요’라는 요구를 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렇지요? 문둥병이라는 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이가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 저 좀 고쳐 주세요’라고 소원을 말한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둥병 환자가 그 당연한 소원의 주체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신앙생활을 통과하면서 아주 당연한 것 같은 소원도 ‘이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를 고민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보좌를 흔들어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해내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수없이 많은 거절과 기각과 외로움과 버려짐을 경험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겪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버려짐과 거절당함과 부끄러움과 외로움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제화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이 ‘주님 제가 원합니다. 저 좀 고쳐주세요’라는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낫게 해 주세요’의 자리로 내려가기까지 문둥병과 함께 당했을 그 거절감과 외로움과 설움을 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문둥병자의 ‘주님이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듣자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천형으로서의 문둥병을 지니고 있는 자들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제를 직면하게 될 때 정말 얼마나 더럽고 추악합니까? 문둥병이 아니라 에이즈보다 더 징그럽지 않아요? 그런데 성도는 그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면’의 자리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고쳐주세요’가 아닌 ‘하나님, 당신이 뜻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부디 저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저를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음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 원하시면 저를 고쳐주세요’ 이게 바로 성도가 도달해야 할 자기부인의 자리요, 순종의 자리요, 사랑의 자리인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그 분의 크심을 자각하며,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깨닫게 되면 당연한 요청조차도 더 이상 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성숙한 성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소원, 너무나도 당연한 간구일 수 있는 것에 대해조차도 자기가 바랄 수 없는 자라는, 소원의 주체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생을 향하여 소원을 하시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내게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삼고 자신은 객체로 내려앉는 상태를 순종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편을 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며,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구원이 완성이 됩니다.

문둥병자가 부정함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건이 바로 구원의 완성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은 그리 녹록치가 않은 것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던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지는 일이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여기에서의 문둥병은 모든 죄인들의 총체적 부정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저 질병으로서의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둥병이라는 질병으로서의 현상을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가난이라는 문둥병, 질병이라는 문둥병, 약함이라는 문둥병,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소원을 이루는 것을 신앙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자아 숭배 교라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짜 벗어나야 할 문둥병인 것입니다. 만일 문둥병을 고쳐주는 것 정도가 신앙의 본질이라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에서 벗어난 그 이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되지요? 이왕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동네방네 알려서 문둥병자란 문둥병자는 모두 오게 하라’고 하셨어야지요?

그런데 주님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소원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면’의 자리로 내려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문둥병자의 말을 듣고 수없이 모여 들었을 수많은 문둥병자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을 가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노니’의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시면’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해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말은 자기에게 닥친 모든 상황과 현상과 사건을 주님의 사랑으로 해석해 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가 말았다가, 또 사랑하셨다가 말았다가 조변석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 때에도 성도는 ‘이건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일이므로 내가 이 상황에 순종 하겠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닥쳤을 때 ‘주님이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나보다’하고 그 분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옳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로서의 거룩은 하나님의 편을 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희생 등의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어려우시겠지만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

제가 지난 시간부터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내용을 본문의 역교차 구조의 설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역교차 구조는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A : (7a)너희가 내 안에, 그리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B : (7b)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C :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나의 제자 됨을 입증하리라

         D : (9)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E : (10)나의 계명들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F : (11a)내 말의 목적은 나의 기쁨이 너희 속에 있고

                 G : (11b)너희 기쁨이 충만하기 위함이다

                 G': (12)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나의 계명이라

               F': (13)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E': (14)내가 명하는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라

         D': (15)내가 너희를 친구라 불렀나니,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했음이라   

       C':(16a)너희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택했다

    B': (16b)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가 주시리라

A': (17)이것을 명하노니 서로 사랑하라

 

이러한 역교차 구조(chaism)의 핵심은 항상 맨 가운데에 있는 것과 맨 가장 자리에 위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주된 강조점은 A와 A' 그리고 G와 G'인 것입니다. A와 A'를 연결시켜 보면 성도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행동의 구체적인 결과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G와 G'를 보시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며 그 계명을 지킴으로 성도는 기쁨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전체 요약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서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거기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본문 9절 이하를 다시 보겠습니다.

 

(요15:9-11)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13절과 14절로 가면 더 암담해 집니다.

 

(요15:13-14)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계명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세목이 제시가 되는데 그게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점입가경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평생의 숙원 사업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우리가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요?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도 아니고, 계명을 지킬 수도 없는 자이며, 서로를 사랑할 수도 없는 자가 맞지요? 그런데 15절로 가면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요15:15)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도저히 ‘나’ 아닌 다를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를 향해 주님이 먼저 값없이 ‘친구’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된 것인지 보세요.

 

(롬5:6-10)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 이니라

 

바로 우리를 친구 삼기 위해 먼저 우리를 대표하여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때문에 우리가 감히 예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의 공로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친구’가 된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된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좀 더 분명해 집니다.

 

(요15:16)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이지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의 친구의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적인 무능력과 전적인 타락 속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들에서 천지의 주재,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본문 16절에는 두 개의 목적절이 있다고 했지요? 처음 목적절은 선택과 열매와의 관계, 즉 하나님의 선택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 대해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절은 첫 번째 목적절에 지배를 받는 종속 결과절로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므로 거기에 관해 그들이 하는 기도는 다 이루어 질 것’임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 목적절이 모두 ‘선택하심’이라는 단어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포도나무 가지를 어디에다 쓰는지 아세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화목으로도 못 씁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가지는 쓰레기를 태울 때 함께 태워 버립니다.

 

(겔15:2-4)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은 순전히 줄기와 뿌리의 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라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쓸모없는 자들에게서 열매를 맺어내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기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이미 친구로 삼으시고, 열매 맺는 자로 만드시고, 거룩한 자로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거룩하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만 기쁨이 있기에 당신의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결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징계를 가하시는 것도 우리의 죄에 대한 보응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거룩을 위해 은혜로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히12:10~11)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렇지요? 징계는 우리의 유익, 즉 우리의 기쁨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거룩을 위한 은혜에서 발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항상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습3:17)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보세요. 사랑과 기쁨이 동반되어 나오지요?

 

(마3:17)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사랑과 기쁨은 항상 동행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자각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올바로 직시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게 되는 것이고, 아주 가끔이지만 그 속에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열매와 사랑의 이야기에 계명이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 나오는지 잘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계명의 요약이 사랑이잖아요?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고 올바로 인식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수시로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과거에 잠깐씩 맛보았던 하늘의 기쁨을 추억하고 되새기며 그 완성된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소망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시1:1~2)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율법의 세목을 지키는 것을 즐겁게 행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이들이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이해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계명을 지킴입니다.

 

(시119:35, 48, 54-56)

35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 함이니이다

48       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54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여기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것만이 자기의 소유이며 분깃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기쁨으로 격발이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곧 기쁨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요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아니하셨느니라

 

주님은 하나님을 한 몸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사셨습니다. 그게 주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간음을 안 하고, 도둑질을 안 하고, 거짓말을 안 하고, 살인을 안 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그 분이 하지 말라니까 안 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발각되어지고 폭로되어질 때 그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거룩으로 향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죄를 짓고 나서 그 죄 속에서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고 그 죄 속에서 거룩을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죄를 짓지 않는 단순한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죄에게 분노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절박하게 간구하는 그 자기부인의 자리가 바로 계명을 지키는 자리이며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룩하라, 사랑하라’ 하는 하나님의 권고를 단순히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권고로, 지키기 힘든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짐으로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또 다시 아담의 범죄 현장 속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금지 조항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그 금지 조항이 서운해졌던 것이고 급기야 그 명령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고 그렇게 까지 세심하게 배려를 하시며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계명 지킴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해 드리는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그냥 한낱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금지 조항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짐이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유혹이 오자 그 짐을 확 내던져 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분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아닌 계명지킴, 선한 삶, 착한 일은 모두 꽝입니다.

사실은 십계명도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관한 것을 세목 화시켜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계명의 진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격발되어 나오는 성도의 삶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문둥병자들이 그 문둥병의 무서움과 더러움과 추악함을 경험하며 ‘우리는 감히 이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그런 자들이지만, 이 문둥병 같은 세상을 경험해 보니 절대 이 문둥병을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기에 면목 없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여기서 좀 건져 주십시오’하는 자리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 더럽고 추악한 죄라는 문둥병에서 건져진 것이고 그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며 결국 그 사랑과 은혜 앞에 완전히 굴복하여 하나님과 연합이 되는 것을 목적지로 삼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친구가 맺은 사랑의 열매 오늘도 풍성히 맺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