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82. 친구 되어 지기   (요15:13-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34

82. 친구 되어 지기

 

(요15:13-15)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는 지난 몇 주간에 걸쳐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맺으시는 열매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서, 나무가 맺는 열매를 그저 가지에 주렁주렁 달기만 하면 되는 은혜의 가지들이라 했지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 열매의 정체가 뭡니까?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은 십자가의 다른 이름이며, 순종의 다른 이름이며, 율법지킴의 다른 이름이며,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거룩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거저, 값없이 열매를 맺게 되는, 그야말로 부지중에 수지맞은 이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인가? 논리적으로는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만 뭔가 조금 찜찜하지요?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던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닮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썩 괜찮은 그림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순종의 삶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친구이신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삶인지 하나의 예를 들어 조금 구체적으로 규명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친구가 된 우리가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일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친구를 사귀라고 권고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을 해 보겠습니다.

 

(눅16:9)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값없이 거저 친구라는 신분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라고 권고를 하십니다. 그 말은 ‘너희들도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친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후반부의 ‘없어질 때’라고 번역이 된 ‘에클리페’는 ‘쇠하다, 죽다, 멈추다’라는 뜻을 지닌 ‘에클레이포’의 가정법 동사로서 ‘호탄’과 함께 재물이 다하여 없을 때, 즉 더 이상 세상 재물을 상할 수 없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처소라는 대비적 표현을 볼 때, 없어질 때란 내세에 들어가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영원한 처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의의 재물, 영원한 천국의 보화와 비교하여 가치중립적인 세속적 재물, 효용가치의 한계적 속성을 지닌 이 세상 재물을 희생하여 친구를 사귀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힘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아낌없이 사용하여 친구를 만들어 내는 데에 쓰여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친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없어질 때에 친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니까요. 인간이 인간을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그렇지요?

거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위 구절이 들어있는, 복음서의 내용 중에 가장 난해한 비유 중 하나인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가 보겠습니다.

 

(눅16: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 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그 뒤에 붙어 있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와 한 쌍입니다.

그리고 그 앞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열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이어지는 비유입니다. 1절의 ‘또한’이라고 번역이 된 ‘데 카이’는 ‘And also’라는 뜻으로 앞의 세 비유와 뒤의 두 비유가 시간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에 의해 다섯 가지 비유가 한꺼번에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지금 앞의 세 비유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마신다는 것을 점층적 인 기법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00마리의 양 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두 아들 중에서 잃어버린 한 아들, 이렇게 점점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강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유들의 결론은 ‘하물며 하나님의 잃어버린 아들들을 그 분이 얼마나 애타게 찾으실 것이며, 얼마나 확실하게 구원해 내시겠느냐’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두 비유를 붙이셔서, 그렇게 확실하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성도의 삶에 대해 부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일은 성도의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필연적인 통과 과정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드리겠습니다. 1절을 보면 마치 청지기가 주어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원문을 보면 ‘한 청지기를 소유한 부자가 있었다.’입니다. 따라서 이 전체 비유의 주어는 부자입니다. 부자가 자기의 종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로 각색을 해 놓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부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있는데’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에이켄’은 ‘소유하다’라는 동사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입니다. 그러니까 그 종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해서 주인의 소유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종이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고 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소유’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휘파르콘타’는 평판(reputation), 명성, 소유 등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 ‘허비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디아스코르피존’은 ‘디아스코르피조’의 현재분사입니다. 그 단어는 분리(separate)의 의미로 쓰이는 전치사 ‘디아’와 ‘흩뿌리다, 분산시키다’라는 뜻의 동사 ‘스코르피조’의 합성어로서 모아 있는 사람이나 물건들을 흩어지게 할 때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것들을 종합해볼 때, 주인의 집에서 주인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종이 주인의 뜻에 반하여, 주인의 소유나, 주인의 사람들을 반복적이며, 습관적이며, 지속적으로 흩어버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좀 더 의역을 해보면 ‘종이 주인의 뜻을 거스려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인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고, 그 주인이 모으려 의도했던 주인의 소유가 흩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결코 주인의 재산을 종이 허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재산이나 재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맡겨진 선교 적 사명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상 대 명령이라 부르지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는 바로 이 지상 대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사명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 상황, 사건, 사람 등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다른 말로 우리가 다른 이들의 친구가 되는 데에 필요한 것들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또 다른 하나님 백성들에게 친구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에 쓰임을 받도록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들을 하나님의 지상 대 명령에 순종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비유는 자기의 종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난 주인과 종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금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고 떠나면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라고 명령을 하고 떠났습니다. 주인이 그러한 명령을 했다는 것은 이 이야기의 말미인 27절에 나오는 주인의 말에서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이익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만을 보면 주인이 마치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많은 열매를 맺고 업적을 쌓아야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불순종한 것을 들어 비록 적은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은사를 묻어두면 안되고, 적은 은사로도 열심히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금 한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당시에는 금 달란트와 은 달란트, 동 달란트가 있었는데 금 한 달란트는 평균적인 수입을 가진 노동자가 20년을 일한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따지면 백 만 불에서 이 백 만 불 정도 되는 돈입니다.

이 비유는 비록 적은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열심히 충성 봉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업적을 열매로 내어 놓아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값진 것이니, 그 은사가 세상 적으로 보기에 커 보이거나 작아 보이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최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떠나시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가시는 그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한 명령을 받은 우리는 주인이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남기라면 남겨야 하고, 묻어두라면 묻어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자기의 생각대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 비유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29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많은 업적을 남긴 이는 큰 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는 쪽박을 차게 될 것이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때 그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고, 그 은사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 방치하여 직무 유기를 했을 때에는 그의 삶이 곤비해 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에게 맡겨진 모든 재물과 사람과 사건과 상황과 여건들은 전부 하나님의 명령인 ‘친구 사귀기’에 쓰여 져야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다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비유에 보면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착복했다거나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취리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결론 부분에서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 주인의 의도는 자기의 청지기가 자기가 맡긴 재산으로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가신 지상 대 명령을 비유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이 허비한 주인의 소유는 주인의 재산 정도가 아니라, 주인이 자기의 소유로 삼기 원하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1절 후반부에 보면 아주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단순히 주인의 재물을 축낸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종을 질책하는 그런 비유가 아니라 마지막 종말 때에 하나님의 회계와 정산과 심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힌트하고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눅16:1b)

1b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여기 보면 그 청지기의 소행이 주인에게 ‘들린지라’라고 하지요? 여기에서 ‘들린지라’로 번역이 된 헬라어 ‘디에블레데’는 ‘디아블로’의 수동태로 ‘밀고 되었다, 고발 되었다(was accused)’라는 뜻입니다. 그 동사에서 참소자(딤전3:11) ‘디아블로스’가 나온 것입니다. 칠십인 역(LXX)성경의 욥기를 보면 사단을 가리켜 ‘디아블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욥1:9)

이 단어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여기 한 곳에만 쓰인 단어입니다. 왜 누가가 사단의 참소를 의미하는 ‘디에블레데’라는 단어를 굳이 이곳에 썼을까요? 누가는 지금 이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는 마지막 심판 때에 사단의 참소를 받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에 대한 경계와 경고의 말씀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주인이 주신 금 달란트를 가지고 종들이 행한 일을 판단 받는 달란트의 비유와 흡사하지요? 이 비유는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한 종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그 1절 후반부를 개역 성경에서 빠져 있는 접속사 ‘카이’와 지시 대명사 ‘후토스’를 살려 다시 번역을 하면 ‘그런데 이 사람이 그에게 고발이 되었다’입니다.

그것은 청지기의 불의는 결국 심판 날에 주인에게 모두 알려지게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에게 실망을 안겨준 종에게 주인이 하는 탄식이 2절입니다.

2절을 보시면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마치 의문문처럼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눅16:2)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그런데 이 구절은 의문문이 아니라 감탄문입니다. ‘내가 너에 대해 들었는데 네가 어찌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라는 실망과 탄식이 강하게 담겨 있는 어절인 것입니다. 누가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절절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당신의 자녀를 참소하는 사단의 고발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미리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2절 후반부로 가면 이 장면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회계와 결산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더욱 더 선명해 집니다. 거기에 보면 주인이 종에게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하지요? 거기에서 보던 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오이코노미아스’는 ‘하나님에 의해 맡겨진 직무’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린도전서로 가서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을 보겠습니다.

 

(고전9:17)(공동번역)

    17  만일 내가 내 자유로 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내 직무로 맡기신 일’로 번역이 된 단어가 ‘오이코노미아스, 네 보던 일’입니다. 그리고 ‘셈하라’라고 번역이 된 어구 또한 심판의 용어입니다. 그 어구는 헬라어로 ‘아포도스 톤 로곤’인데 그 어구가 쓰인 곳을 찾아보면 그 어구가 심판의 용어라는 것이 더 선명해 집니다.

 

(벧전4:5)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여기에서 ‘직고하리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아포도스 톤 로곤’입니다.

 

(마12:35~36)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여기에서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번역이 된 어구 또한 ‘아포도스 톤 로곤’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종에게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말을 한 것은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당신의 백성에게 맡기신 직무와 일에 대하여 ‘잘하고 왔나? 못하고 왔나?’이실직고를 명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거기에 쓰인 모든 단어가 심판의 용어입니다.

그렇게 종말의 일을 미리 알게 된 종이 자신이 심판을 당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로 가서 4절을 보세요.

 

(눅16:4)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청지기가 자기가 심판 날 당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그가 어떤 일을 시작하는데 그 일이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채무액을 깎아 주는 일이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의 5절 이하로 가 볼까요?

 

(눅16:5-7)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여기서 기름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엘라이우’는 ‘감람 나무’를 가리키는 ‘엘라이아’에서 나온 단어로 감람유입니다. 당신 감람나무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아흔 두 그루에서 백 오십 그루 정도에서 나온 열매로 짠 기름 양애 해당하는 것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 데나리온 정도입니다. 그건 노동자가 3년을 꼬박 일해서 벌어야 하는 돈입니다. 뿐만 아니라 밀 백 석의 ‘석, 코루스’의 원형 ‘코로스’는 약 360리터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그걸 돈으로 환산을 하면 은화 25데나리온이므로 밀 백 석은 2,5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아주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만한 것을 빌려줄 수 있는 재력이 있는 그 주인은 대단한 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 감히 상상 할 수도 없는 빚을 지고 있는 죄인들과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기름은 일 년에 백 퍼센트의 이자를 내야 했고, 밀은 일 년에 이십오 퍼센트의 이자를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름 오십 말을 빚진 사람은 백말을 빚진 것이 되고, 밀 팔십 석을 빚진 사람은 백석을 빚진 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자를 청지기가 착복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웃들에게 고리를 뜯어 주인의 소유를 불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인의 뜻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종은 주인의 뜻을 간파하고 그 빚진 자들을 불러 이자의 부분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그 주인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서두에 확인 한 것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서 ‘친구’는 일차적으로 주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을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수 있는 친구는 주인으로 상징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친구’의 이차적 내용은 이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친구 삼는 일과 이웃을 친구 삼는 일은 정확하게 같은 일임을 마태복음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보시다시피 주님은 심판대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청지기에게 맡긴 재물이나 은사 등으로 다른 이를 친구로 삼는 행위는 바로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그것을 원한 것입니다. 단순히 재산을 잘 운용해서 자기의 재산을 늘려주기를 원하거나, 자기를 도와주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이 특심이어서 자꾸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기특하게 나서곤 합니다. 부자가 되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뭔가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거기에 우리를 도구로 쓰실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어떠한 도구로 쓰시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물질, 시간, 힘 등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는 도구로 쓰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것을 지혜로운 일이라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주인의 소유를 늘려주고, 주인의 일을 도와주는 것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재물이나 세상의 힘을 쌓아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처럼, 자신의 은사나 소유로 친구를 사귐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을 지혜롭다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우리가 이 세상의 힘들에 착념하지 않고, 그 힘들을 사용하여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친구가 되셨지요?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을 사랑하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나’라는 우상을 버리고 그 사랑의 대상을 ‘나’아닌 다른 존재, 즉 ‘이웃’과 하나님으로 돌려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경쟁자로 삼아 그들의 것을 탈취하여 하나님의 일을 돕는 일을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가 우리의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됨됨이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언가 기특한 업적을 이루어 내어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이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친구가 되고 있을 때 주인이 비로소 종을 칭찬합니다.

 

(눅16:8)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 이니라

 

여기서 주인이 종을 칭찬했다고 하는데 그 ‘에파이네오’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찬양하다(praise)’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이 주인이 원래 의도했던 행동을 함으로 주인이 ‘맞아, 바로 그거야. 내가 너에게 원했던 것이 바로 그거야’라고 그의 행동을 찬양한 것입니다. 도대체 자기에게 맡겨진 것들을 나누어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어떤 유익을 주기에 이렇게 쾌재를 부르시며 찬양을 해 주실까요? 누가복음 12장에 잘 나옵니다.

 

(눅12:42~47)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 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3절의 ‘이렇게 하는 것’에서의 ‘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 ‘포이에오’는 ‘창조하다, 치유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맡기신 세상의 힘과 은사들을 동원하여 다른 이웃들을 섬기고 나누어 줄 때 치유와 창조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친구들이 이 땅에서 하는 일입니다.

잘 보세요. 진실하고 충성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주인의 종들에게 때를 따라 (on the right time) 잘 나누어 주어 주인의 평판을 높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인이 모든 소유를 맡기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잘 살아서, 하나님의 친구들을 치유하고 하나님 친구들의 새로운 창조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하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친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소유로 다른 이들을 오히려 주눅 들게 하고, 피해를 주고 하는 것은 참된 종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호되게 때리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되거나 높은 명예를 쌓아서 하나님께 자랑이 되겠다는 생각을 어서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절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당신께서 주신 각양의 은사를 사용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친구들을 모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내 뜻과 내 비전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자로 사는 그 삶, 그것이 하나님의 친구의 삶인 것입니다.

 

아이성의 총 인구가 몇 명이었는지 아세요? 천명 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아이성을 정복하겠다고 삼천 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전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망치질 한 번도 못하게 하시고 거저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삼천 명이나 가서 대패를 하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과 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과 겸손과 낮아짐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을 듣는 자들을 기뻐하시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고 성취해 내겠다고 나서는 마징가 제트들을 미워하십니다. 가나안 정복으로 상징이 되었던 성도의 구원이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리품 모두 창고에 넣어라 하면 다 넣어 버리고, 다 나누어 가져라 하면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이성을 정복하여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서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친구를 사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먼저 내 아내에 대해 죽고, 내 남편에 대해 죽으세요. 내 모든 은사와 소유를 다 동원하여 그들을 친구로 삼으세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웃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도저히 불가능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그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당신의 친구들에게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그 친구들도 예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친구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것을 비워내는 자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안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시험으로, 사람 채찍으로, 인생 막대기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든 삶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죽으십시다. 우리가 한 번 죽을 때 하나님의 친구가 한명 돌아  옵니다. 우리가 두 번 죽을 때 하나님의 친구가 둘이 돌아옵니다. 그걸 생각한다면 기꺼이 죽어 줄 수 있잖아요? 우리 그게 잘 안 될 때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반드시 져요. 교인 둘이 싸움을 했다고 해보세요.

한 사람은 기도를 했고 한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 누가 먼저 사과를 할까요?

우리가 사소한 일로 다툰 후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져줘라’

기도만 하면 ‘지라’고 하시는 데 어떻게 그가 이깁니까? 져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승리입니다. 예전에 어떤 권사님께서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시 어머니에게 된통 야단을 맞고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에 ‘네 시어머니를 용서해라, 그리고 사랑해라’하고 반복하여 말씀을 주셔서 ‘그럴 순 없어요’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고 하는데 기도는 그렇게 우리에게 용서의 마음, 섬기는 마음, 죽는 마음을 줍니다. 기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