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84 - 성령이 오시면   (요16:5~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4. 12:36

84 - 성령이 오시면

 

(요16:5~15)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6장 역시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15장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소개된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을, 16장 4절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하신 주님께서 5절부터 15절까지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떠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오시게 될 성령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역을 하실 지를 설명하십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이 오늘 본문인 5절에서 15절까지의 내용을 둘로 나누어 5절에서 12절까지를 세상에 대한 파라크레토스로서의 성령의 사역으로 보고, 13절에서 15절까지를 제자들과 관련된 파라크레토스의 사역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이 부분을 둘로 나누는 결정적 근거로 작용하는 8절의 ‘책망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저는 조금 달리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때 정말 세상이 책망을 받을까요? 죄와 의와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세상이 과연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행동에 책망을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죽는 날까지 자신들이 옳다고 우기다가 결국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12절까지를 세상에 대한 성령의 사역으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책망에 관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일까요? 그 해석도 좀 어색합니다. 6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셔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이 심히 근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16:6)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시기 위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며 그 분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실 것’이란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제자들의 근심이 덜어진 것이 아니라 더 깊어졌겠지요? 그렇다면 그 말씀은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일까요?

 

먼저 ‘책망하다’라는 말씀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쓰인 ‘책망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엘렝코’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17번 쓰인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때로는 ‘폭로하다’(눅3:19, 요3:20, 엡5:11, 13)라는 뜻으로,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마18:15, 딤전5:20, 딤후4:2, 딛1:9, 히12:5, 계3:9)라는 뜻으로, 때로는 ‘고소하다, 고발하다’(요8:46, 16:8, 유15)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번째 ‘고소하다, 고발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엘렝코’라는 단어가 ‘고소하다, 고발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항상 전치사 ‘페리’와 함께 쓰이는데 오늘 본문에 그 전치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쓰인 곳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8:46)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고소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한군데 더 볼까요?

 

(요3:20)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여기에서 ‘행위가 드러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엘렝코’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고소되거나 고발될까봐 절대 빛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책망하다, 엘렝코’라는 단어는 죄에 대한 주관적인 깨달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유죄 판결의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소와 고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단어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말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세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세상이 제자들 안에도 여전히 오염이라는 잔재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소는 1차적으로 세상을 향한 고소이지만 2차적으로는 제자들 안에 남아 있는 오염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상은 그러한 하나님의 고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고발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은 성도 들 뿐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의 고발에 의해 찔림을 받는 사람들은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책망에 의해 무언가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로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 안에 여전히 오염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그 세상을 향해 날아오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를 받으며, 자신들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이루어진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근심을 덜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삶에 검과 불이 들이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10:34)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눅12:49)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 하리요

 

하나님의 본질은 검과 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화평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화평과 사랑과 은혜로 오십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랑과 은혜와 평화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의 삶에 검과 불이 되신다는 걸까요? 그건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타락한 죄인들의 왜곡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이 검으로, 불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나라는 존재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염과 집착과 중독과 습관 등에 의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에서 성령의 불이 내려와 덮쳐버리면 본인이 그 왜곡되고 이기적인 관계구도를 불편해 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맺어놓은 그 관계가 왠지 생경하고, 불편하며, 뜨악해 집니다. 그게 검이며 불입니다. 그러한 뜨악함과 생경함이 그 관계라는 것을 새로이 설정하게 해 주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관계들이 재편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그러한 관계의 재편에 검과 불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면, 그 삶의 주체와 목적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세상과 한 방향으로 무리 없이 흘러가던 일상에 제동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세상과 동일한 주제로 대화를 하기도 힘이 들고, 동일한 취미생활로 즐거움을 누리던 것도 어색해 집니다.

놀러가는 것보다 예배당에 가는 것이 우선이 되어버리고, 목숨처럼 여기던 돈에 대한 가치관도 많이 달라져서 헌금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세상은 그러한 것들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세상과 성도 사이에 불과 검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과 깨달음과 인식을 통하여 성도는 참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소망으로 한발 한발 삶의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게 성도에게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건 성도가 검과 불을 경험하는 삶이긴 하지만, 나의 옛 자아가 고소당하는 아주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믿음 안에서 소망으로 연결이 될 때, 우리는 그 검과 불로 인한 근심을 덜어내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로 돌아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실 양으로, 성령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세상을 고소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조금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그것이 너희들의 근심을 덜어내 주는 특효약이 될 것이라는 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고소를 당하는 대상은 세상이면서 동시에 성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하나님의 고소를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마지막 날에 가서야 심판대 앞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성령의 참소 앞에서 ‘죄 있음’의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고, 성도는 그 심판대 앞에서의 고소가 이미 예수 안에서 해결이 된 상태이지만 이  생에서의 하나님의 고소를 삶 속에서 경험하면서 그 무서운 고소와 심판에서 아무 공로 없이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고소하시는 성령의 객관적 사역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왜 꼭 ‘죄와 의와 심판’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볼까요? 다른 것으로는 고소가 안 됩니까? 제가 그러한 의문을 갖고 요한복음 주석서를 20여권 정도를 찾아보았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 놓은 주석서는 한 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고서점에서 아더 핑크의 논문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에서 유일하게 잠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아더 핑크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죄와 의와 심판이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셈’어적 표현방식이라 언급을 했습니다. 그 셋은 심판이 일어나는 법정에서 죄책과 무죄와 선고를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들이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셋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죄 있다 하여 심판을 받은 이가 무죄한 자로 판명이 남으로 그를 죄 있다 한 이가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되는 십자가 사건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 ‘죄와 의와 심판’이라는 단어들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죄와 의와 심판은 십자가의 세목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 번 보지요.

 

세상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크게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먼저 죄에 대한 오해부터 보지요. 세상은 죄를 규정하기를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위반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를 규정하시기를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주십니다.

 

(요16:9)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것처럼 ‘죄,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죄’라 합니다. 피조물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그냥 그렇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삶을 정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입니다.

 

(요12:43)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바로 요 상태가 죄인들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힘의 축적을 통해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 그 삶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인정하며, 자신들이 살 길은 세상의 힘을 축적하여 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예수를 믿는 믿음임을 알아 겸손히 순종의 삶을 지향하는 것을 죄로부터 돌이킨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만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삶,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붙들고 있고, 예수 이외에도 행복의 길은 있다고 믿으며, 돈이나 명예나 자식이나 육신의 건강을 행복에 이르는 도구로 여기며 그것들을 추구하며 사는 모든 삶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바로 그 죄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교훈하신다는 것입니 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죄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자들이 그 분께 모두 드려야 할 마음을 이 세상 다른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고 있는 그 상태를 죄라 하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에 의해 그러한 교훈을 받고 계십니까?

 

두 번째로 보혜사 성령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요16:10)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여기에서의 ‘의, 디카이오수네’는 일차적으로 ‘칭의’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옳음’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의’는 일차적으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유죄 판결을 내려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습니다.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을 지적하는 그 눈엣가시 같은 예수를 자기들의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세상의 처사가 옳았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셨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옳음을 인정하시고 세상의 그름을 확인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이 ‘의’, 즉 ‘옳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단죄하여 죽여 버린 예수님을 당신의 보좌로 불러들여 예수님의 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처사가 다 틀렸고 예수님만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자신들의 세상 적 유익을 위해서는 그 누구도 경쟁자요 적으로 삼아 죽일 수 있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힘을 부정하고 기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의 삶 중에 후자가 옳다고 인정을 받은 것을 ‘옳음, 의’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의’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칭의’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이 우리의 ‘칭의’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온 세상이 담합을 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린 예수님이 아버지께 살아서 올라가신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세상이 다 틀렸고 예수만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이는 오직 예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모두 편을 먹고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세상이 다 틀린 거니까요. 게다가 천국은 의로운 자만 들어갈 수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최초의 의로운 존재로 천국에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육신 중에 의로운 이는 하나도 없다고 선언을 해 버렸습니다.

 

(롬3:10~12)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놓으신 하나님 백성들의 천국 입성을 수수방관하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옳음’ 그 ‘의’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하셔서 그 ‘의’를 전가 받도록 하셨습니다.

 

(롬3:20~24)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성도들에게 ‘의’에 대하여 가르치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가리킴과 동시에 ‘의’는 예수의 의를 의지하며 그 의의 전가를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들의 옳은 행실이나, 착한 행위, 선한 삶 등을 의로 내 놓는 자들은 모두 고소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의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롬10:2)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인데 거기에 자기의 의를 조금이라도 보태고 있는 자들은 다 불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는 ‘열심’으로도 격발이 되는데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열심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해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십니다.

 

(요16:11)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세상 임금은 세상 권세 잡은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면 남은 것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멋지게 때려죽인 것처럼 지금도 성도는 세상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심판을 받은 것이듯이 우리 성도들도 세상에게 지는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마치 성도들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세상은 절대 성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심판에 대한 고소입니다.

잘 보세요. 죄, 의, 심판 모두 무엇을 기준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잣대로 하여 그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믿는 이들은 무죄로, 의로운 자로, 심판을 면하는 자로 삼아 주시는 것이고,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믿으며,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 권세 잡은 자의 편에서 힘의 원리를 지향하는 이들은 죄인으로, 불의한 자로, 심판 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누구를 책망하십니까? 바로 세상과 세상속의 자기 백성을 책망합니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고 살아가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에 대해 책망을 받으십니까? 예수님의 행함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책망을 받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심판임을 책망 받으십니까? 책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령과 함께한 삶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속에는 불의가 가득 차 있는데 성령이 내 안에 오신다면 불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끊임없이 양심의 고소를 당하셔야 하고, 성령에 의해 고발 당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도 ‘내가 원래 이렇게 악한 자였나?’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자괴감에 흔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한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책망당하면서 날마다 의로우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의의 행위만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며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과 은혜를 평가했던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책망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자들은 열심히 자신을 부인하며, 세상의 힘을 부정하고, 오직 행복과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만을 의지하며, 예수만을 믿고, 예수만을 붙드는 것임을 경험하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성령하나님에 의해 끊임없이 옛 사람의 잔재를 고소당하며 그러한 것들을 끊어가고 해체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의 힘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들을 유명한 자, 큰 자로 만들어 주지 않는 하나님을 고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는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로 확정이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또한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계13:8)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여기에서 ‘창세 이후로’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는 ‘쓰다’라는 단어 ‘그랍호’와 ‘죽임을 당한’이라고 번역이 된 ‘애습하그메누’ 둘 다에 걸리는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창세 때부터(창세전에) 이미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녹명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게 된다.’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양 예수는 창세전, 즉 영원 속에서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확정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천지와 시간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확실하게 공부하고 오라고 하나님은 천지와 시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배우고 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의, 심판이 모두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힘에 마음을 두는 것을 끊어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을 죄라 하고, 우리의 옳음이 아닌, 하나님의 옳음을 그저 인정하고 믿고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의이며, 예수님을 때려죽인 이 세상의 힘에 빌붙어 사는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모여 있다는 교회에서 끊어버려야 할 세상의 힘을 얻어내는 것에 몰두하고,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흥과 영광을 추구하며, 교회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의 습득을 도와주고 있다면 이 어찌 코미디가 아니겠습니까?

 

성도는 캠핑장에 와 있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캠핑장에 터를 잡고 집을 짓고 살려고 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불행한 것입니다. 타잔이라는 영화를 아시지요? 타잔은 멀쩡하게 생긴 백인입니다. 그의 부모는 귀족입니다. 타잔의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임지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아프리카에 표류를 하게 되고 타잔만이 원숭이에게 구출이 되어 원숭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타잔이 철이 들면서 심각한 고민이 생깁니다. 자기의 엄마와 아빠, 형제와 자매들은 시커먼 털이 온 몸을 덮고 있는데 자기의 몸에는 털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원숭이 들은 서로의 털을 솎아주며 그 안에서 이도 잡아먹고, 벼룩도 잡아먹고 하는데 자기만 늘 소외된 채 홀로 바나나만 까먹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는 다른 원숭이들처럼 나무도 잘 타지 못하고 원숭이 소리도 잘 내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타잔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참 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건 사람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원숭이의 고민을 머리가 빠지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잠깐 내려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공부하러 온 하나님 나라 왕자들과 공주들이 이 세상의 힘을 근거로 행과 불행을 판단하고, 그러한 힘의 축적의 실패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타잔이 원숭이의 고민을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털 좀 없으면 어때요? 이와 벼룩, 그까짓 거 좀 못 먹으면 어떻습니까? 나무 좀 늦게 타면 어때요? 사람은 사람의 고민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일로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입니다. 성령은 바로 그것을 도우러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기적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지요?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분이 도맡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근심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예수님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오는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그 사실이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16:5)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제자들이 정말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은 적이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요13:36)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이렇게 베드로도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물었고 14장에서 도마도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끼칠 불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 정작 예수님이 걱정이 되어서, 혹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말미암을 영적 유익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떠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닥칠 영적 유익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구나’ 하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영광과 번영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것입니다. 내가 성령을 보내서, 보이지 않는 성령을 보내서 너희들을 반드시 세상의 적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반드시 세상의 미움을 받는 자가 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것을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도움으로 세상과 친구가 되려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세상에서 으뜸가는 자가 되려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복음입니까?

여러분,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역사와 인생의 결국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의 상황들과 사실 들을 대하는 자세와 해석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Fact를 말합니다. 그 객관적인 Fact가 나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그 사실이 나에게 주관적 감정으로 연결이 되는 것을 현실이라 합니다.

10년 전에 중국에 할빈이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은 저에게 사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곳에 선교를 하기 시작한 뒤부터 그 할빈은 저에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현실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부터 오는 영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똑같은 사실을 접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현실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갔을 때,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가 그 상황을 얼마나 황당하게 받아들였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감옥엘 들어가고 하는 것이 모두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데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에게 그 사실들과 상황들이 어떤 현실로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마 똑같이 힘든 상황이었지만 감사와 기쁨의 현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론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 이 땅에 잠시 내려와 학습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 공부 다 마치고 나면 여러분은 의의 새 옷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완전하게 입성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여러분의 인생에 요셉의 감옥행과 같은, 팔려감과 같은 어이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게 여러분에게 어떤 현실이 되어야 합니까?

모든 사실은, 모든 상황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의 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예수님이 영원히 자기들 곁에 남아서 기적이나 일으켜 주고 힘으로 보호해 주는 것만을 복으로 생각하며 예수님의 엑소더스를 근심으로 받아 들였던 제자들처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로만 행복의 재료로 삼으려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승천의 증거로 내려오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고소를 하여, 참된 의가 무엇이며,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떠한 자들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죄와 의와 심판의 내용을 잘 배우셔서 다시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을 수 있는 자로 완성이 되어 하늘나라로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엉뚱한 목적 다 걷어치우시고 성령 하나님의 고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배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