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85 - 성령잡기   (요16:12~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4. 12:37

85 - 성령잡기

 

(요16:12~15)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우리는 지난주에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사역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과 우리 안에 여전히 오염의 상태로 잔존하고 있는 세상의 찌끼들을 고소하신다고 했지요?

그렇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죄가 무엇인지, 의는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 누가 과연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깨우치고 알려주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해 알려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것을 시인하게 해 주십니다.(고전12:3) 그렇다면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요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영원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과 하나로 연합된 삶을 사시기 위해 천국이라는 곳에 당신의 거처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와 함께 영원을 사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 안에 미리 하나님 나라와 함께, 그 나라에서 우리 안에 내주하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성령과 함께 하나가 되어 사는 연습을 미리부터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성령이 들린 사람이 아닌 귀신이 들린 사람들처럼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님을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로 인정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잘 배우고 있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 안에서 나오는 마귀 적 언행과 의심, 심지어 불신 등은 우리를 당황케 하고 아연케 합니다. 도대체 그러한 현상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 안에 귀신이 함께 거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우리 안에서 그 더러운 귀신의 행실과 생각과 언사가 튀어 나올까요?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그것을 알게 하신 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십니다.(마16:17) 우리는 그 순간 베드로의 마음을 주관하시던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금방 예수님으로부터 ‘마귀’라는 욕을 먹습니다. 금방 하나님의 간섭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사람이, 어느새 마귀에게 조종이 되어 사단의 행사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이란 말입니까? 금방 하나님의 영향을 받다가도 어느새 마귀에게 붙들리기도 하고, 또 다시 하나님께 붙들려 성령의 행사를 하곤 하는 그런 꼭두각시 같은 존재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붙들리는 그 순간 마귀는 우리에게 범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일5:18)

18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 하느니라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에게서 나오는 마귀 적 사고와 마귀 적 행동, 마귀 적 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신앙생활의 현실과 실체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이 세상은 지금 한 마디로 용과 양의 전쟁터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용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의 세력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계12:9)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그렇지요? 그 용이 온 천하를 꾄다고 하는데 어떻게 꾈까요? 용이 아담과 하와에게 꾀었던 그 내용으로 천하를 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였지요? ‘휘브리스’ 교만이지요? 피조물이 제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여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게 하는 것을 ‘휘브리스’라 말합니다. 용은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가치를 참 가치라 속이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그들에게서 감추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양은 누구입니까? 양은, 용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목숨까지 바쳐내신, 십자가의 삶의 증인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참 가치요 힘으로 여기며 오직 그곳에서만 행복을 찾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와,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자신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 거기에서 희로애락과 행과 불행을 얻는 세상 힘의 원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게 용과 양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그 용과 양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투는 세상을 가르는 전투임과 동시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이기도 한 것입니다.

양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 안에 잉태된 새 생명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고, 용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아담의 후예들이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자원과 이 세상의 힘으로 행복, 즉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인격과 육체에 쌓아놓은 습관과 성품과 집착과 중독 등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것들이 귀신처럼 성도의 몸에 잔존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고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더 이상 참소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 우리의 삶 속에서 마귀적인 언사나 행동, 마귀적인 사고를 격동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성령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순간에도, 마귀의 격동에 휘말려 마귀 적 언행과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언제든지 귀신의 세력에 속한 자처럼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마치 귀신들린 자와 방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이라는 것은 가상의 동물입니다. 용은 토템을 숭배하던 고대시대에 주변 나라들을 정벌한 어떤 왕이 각 부족이나 나라가 섬기던 각각의 짐승들의 특징을 잡아 그려낸 것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가장 강력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은 다른 것들을 다 정벌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앉은 이 세상의 왕의 상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용이라는 짐승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은, 자신들의 힘과 이 세상의 힘으로 하나님도 넘어서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죄 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용으로서의 왕의 얼굴을 용안이라고도 하고, 왕의 침상을 용상이라고도 하며, 왕의 옷을 용포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용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욕구는 우리 일상생활에도 아주 깊숙이 침투해 있고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등용문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중국 황하 상류의 용문이라는, 급류가 흐르는 여울목 이름이 용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잉어가 거꾸로 그 여울목을 타고 올라 급류를 이겨내면 용이 된다고 합니다. 힘써 등용문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용문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귀신들린 삶에 너무나도 중독이 되어 있어서 ‘개천에서 용 났다, 미꾸라지 용 됐다’는 등의 말을 칭찬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건 칭찬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칭찬의 말은 ‘개천에서 양 났다, 미꾸라지 양 됐다’여야지 용이 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절대 칭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전부 용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부립니다. 그 용의 잔재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오신 성령하나님은 양의 삶을 가르치시며, 양의 삶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오늘 본문 13절 이하를 보세요.

 

(요16:13-15)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이 오셔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듣는 것만을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듣는 것이란 ‘내 것’ 예수님의 것이랍니다. 예수님의 것이 뭡니까? 어린양, 십자가, 자기부인, 순종입니다. 14장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요14:26)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는 이 땅에서 제자들을 향해, 세상에 어린양으로 가라고 하셨고,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고, 용서하라 하셨고, 섬기라 하셨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그 가르침이 왜 옳으며, 어떻게 옳은가를 가르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르치시는 성령과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용의 잔재가 늘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 내면의 다툼 속에서 자꾸 양의 편을 드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약3:14~16)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야고보가 교회에게 한 말씀입니다. 시기와 다툼을 경계하라 하면서 그러한 지혜는 마귀 적이라 합니다. 분명 우리 안에서 귀신 적 발상과 귀신 적 사고, 귀신 적 행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귀신들린 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의 삶은 다른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과 야망과 비전을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모든 삶이 다 귀신들린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이 뭡니까? 여의주입니다. 여의주(如意珠)는 내 뜻이 내 마음과 같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구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여의주를 얻은 듯 무슨 일이 뜻대로 잘 되어 가는 때에 여의보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용과 여의주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세우고 자기의 뜻대로 이루며 사는 것을 힘이요, 행복이요, 구원이라 생각하는 모든 이 세상의 죄인들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는 한 편으로는 성령의 삶을, 다른 한 편으로는 귀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하나님을 어떻게 깊이 인식하며 그 분의 뜻을 꼭 붙들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고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령을 붙들 수 있는 팁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헬라어 ‘프뉴마’입니다. 그 단어는 ‘숨, 호흡, 바람’으로도 혼용해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한 문장 안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쓰인 곳이 있습니다.

 

(요3:8)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 하니라

 

여기에서 주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람이라고 번역이 된 말과 성령이라고 번역이 된 말이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번역을 해도 무방합니다.

‘성령은 임의로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그 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람을 잡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성령을 잡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천지만물에 우리 성도들이 배워야 할 하늘의 비밀을 모형으로 감추어 두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지요? 그러면 바람은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요? 그래야 성령을 붙들 수 있잖아요?

손바닥을 넓게 펴고 있다가 바람이 살랑살랑 손바닥에 와 닿으면 그 때 콱 움켜쥐면 되나요?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드려 보겠습니다. 바닷물을 그물에 붙잡아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물을 올려 버리면 되나요?

톨스토이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습니다. 그물 속에 바닷물을 담아 두려면 그물을 바닷물 속에 담가두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그물 안에 바닷물이 담기게 되는 것이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을 잡기 위해서는 바람에 자신의 전 존재를 노출시켜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으로 바람을 붙들어 놓을 수는 없지만 바람과 연합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니까요.

톨스토이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포착하려 하는 이들에게 그물의 비유를 써서 이렇게 충고를 합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려 하고 포착하려 하는 것은 그물로 바닷물을 잡으려 하는 것이나 손바닥으로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성령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의식되어지거나 포착되어질 수 없다. 그냥 전 존재로서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노출 시킬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때로는 돌풍처럼 강하게 불기도 하고, 때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약하게 불기도 하지만 공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바람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은 편재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가 그 바람 같은 성령님을 포착하고 붙들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우리의 전 존재로 서게 될 때 우리는 그 분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 분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성령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러내 놓을 수 있을까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대충 살다보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벼락같은 성령의 임재가 느껴질 날이 오게 되는 것일까요? 달라스 윌라드는 그러한 신앙을 ‘우연의 신앙’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을 포착하게 되는 것은 맑은 날 벼락 맞는 것보다 더 희박합니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는 노출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의 노출 방법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제시하는 것이 ‘말씀, 기도, 성례’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고도 하지요.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며, 수시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례가 행해질 때 빠지지 말고 참석을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의 공적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성령을 포착하고, 성령을 인식하며, 성령의 뜻을 분별하여 좇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를 하는 이유를 ‘은혜를 받기 위하여’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불같이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하여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닌데 예배를 하는 자에게는 은혜가 쏟아 부어집니다.

지금은 수요일 저녁 8시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얼마든지 다른 일들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할 수도 있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회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재미있는 스포츠 경기를 보실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TV드라마, 예능 프로들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푸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여러분의 육의 피로를 푸는 것과 육의 행복을 위해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여러분의 영적 유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 앞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 앞에 여러분을 노출시키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난 후의 여러분의 일상과 허다한 세상 일로 시간을 보낸 후의 여러분의 일상이 과연 같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바람 같은 성령 하나님을 온 몸으로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의 삶이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반복하여 일어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용과 양의 전쟁에서 양의 편을 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파워를 의지하지 않은 채 그냥저냥 벼락같은 은혜를 우연에 의지하여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은 용의 미혹에 수시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게 귀신들린 삶입니다. 성령을 안에 모시고 귀신들린 삶과 방불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여러분, 코끼리를 어떻게 길들이는지 아세요? 쉽습니다. 코끼리의 목에 굵은 쇠사슬을 걸어놓고 며칠을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평소 자기 힘에 대해 자신이 있는 코끼리는 쇠사슬쯤이야 하면서 요동을 쳐 보지요.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 그 목줄에 서서히 주눅이 듭니다. 결국 코끼리는 자포자기하고 쇠줄에 순응하게 됩니다. 그렇게 코끼리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 그 다음에 쇠줄을 빼고 얇은 동아줄을 코끼리 목에 겁니다. 그 뒤부터는 코끼리가 그 얇은 동아줄로도 제어가 됩니다. 용은 우리의 실수와 넘어짐을 우리 눈으로 목도케 함으로 해서 우리를 자포자기의 상태로 몰아가는 수법을 씁니다. 실수와 넘어짐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용의 유혹에 더욱 더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 때 우리를 흔들어 깨워, 우리를 돕고 계시는 막강한 바람이신 성령을 경험케 해주는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와 예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 용의 유혹을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안에서 폭로되는 용의 삶이 우리에게 반드시 해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과 함께 하면서도 용의 삶을 사는 것을 폭로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여러 가지 유익도 줍니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용의 삶을 직면하면서 우리의 티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의로울 수 없으며, 단 한순간도 선할 수 없다는 것을 거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드러나는 귀신의 삶에 당면할 때 불안함과 안타까움과 죄스러움과 당혹스러움과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양의 삶의 고귀함과 가치 있음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용의 삶이 주는 쾌락과 거기에 비례하여 오게 되는, 하늘 백성들이 겪는 심적 고통을 함께 겪게 해 주심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이들이 용의 삶을 살게 되면 어떠한 피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지를 직접 경험케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출간이 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자서전 ‘와서 내 빛이 돼 주소서’에 테레사 수녀님의 편지들이 몇 개 실려 있는데, 참으로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내용이라 제가 몇 가지 소개를 좀 해 드리려 합니다.

“주께서 제 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 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끔찍한 상실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둠과 외로움, 어둠이 너무나 깊어서 제 마음으로도, 이성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영혼 안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1979년 노벨평화상 수락 연설에서 “신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속에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고백에 의하면, 사랑과 용서의 힘을 설파하던 그 순간에도 자신은 내면에서 ‘포착되지 않으며 느낄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해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1948년에 쓴 편지에서는 ‘제가 얼마나 더 신을 느끼지 못하는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썼고, 1959년에 쓴 편지에서는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인간의 영혼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가?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는 내가 영혼을 위해 일을 한다고? 신이 없다면 영혼도 없다.’

1960년에 쓴 편지에는 ‘내 미소는 가면이고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망토’라고 했습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님이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평생 헌신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천국 입장 티켓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내면에서는 이러한 갈등과 의심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심지어 부정하며, 그렇게 불명확한 신의 뜻을 좇아 사는 것보다 자기 내면의 육의 소리를 청종하며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따라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 마귀 적 발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의심과 고민과 번민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성령과 함께 거하고 있는 우리 안에서 귀신의 삶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세요? 자유로우십니까? 즐겁고 명랑한가요? 아니지요? 고통스럽고 고민스러우며 괴롭습니다. 귀신의 삶이 괴롭다는 것은 여러분 안에 이미 성령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고민과 고통과 번민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말씀과 기도와 예배라는 탈출구를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폴 틸리히가 이야기한 것처럼 의심과 번민과 고민은 믿음의 일부입니다. 그 말은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기 위한 의심과 번민과 고민은 필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 인해 성도가 겪는 고통과 불안은 너무나 큽니다.

그러한 것들을 늘 한 아름씩 가슴에 안고 있을 수는 없지요? 경험하고 배우고 인식을 했으면 이제 하나하나 버리면서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야지요.

아울러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함께 좋은 신앙의 친구들과 자주 만나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예외 없이 밝을 때와 어둘 때, 충만할 때와 쳐질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영적 리듬이 다른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함께 모여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되면, 성령의 임재에 더 자주, 더 많이 노출될 수 있게 됩니다.

 

간단하게 성경에 나오는 에피소드로 예를 들어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에 가셔서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 하나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이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물론 이 에피소드의 중심 메시지는,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폐하신 예수님이 이방인에 대한 차별 또한 철폐하시는 것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 귀신이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을 한 부분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개라고 부르신 것, 그리고 그녀가 그러한 주님의 처사에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개 됨을 인정한 것 등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귀신이 들린 사람을 둘로 봅니다. 하나는 정말 귀신이 들린 그 여인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딸의 귀신들림이라는 상태에 의해 불행해 하고 있는 그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살펴보았듯이 귀신이 들린 자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외의 이 세상 다른 것에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 빼앗기고 있는 상태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딸이 귀신 들린 것에 의해 행과 불행을 넘나드는 그 여인 또한 귀신들린 상태인 것입니다.

 

(요일2:22)

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는 것은 예수만이 구세주이시라는 것, 즉 예수님만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의 주체이심을 부인하고 다른 세상의 힘들에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수여받는 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거짓말하는 자요, 적그리스도, 즉 마귀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가리켜 주님은 ‘개’라 부르십니다. 물론 거기에서의 ‘개’는 구속사 속에서의 유대인의 선택적 위치에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에 관한 메시지의 측면에서 그 단어를 이해하게 되면 그 ‘개’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서의 하나님 자녀 됨을 거부하고 돈, 자식, 명예, 인기 등에 마음을 빼앗긴 아담의 후손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가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로서의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세상의 힘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다가 가야할 존재들이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굳이 이 여인이 이방 여인,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저히 불가능한, 자타가 공인하는 ‘개’에 불과한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메시아이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에게 무엇을 부탁하는가 하면, 자신이 자신의 딸에게 매어있는 상태를 끊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딸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딸에게 매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 상태를 ‘개’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다른 것에 묶여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 자유스러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개’의 상태에 있는 여인이 떡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떡이라도 먹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에피소드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이 오병이어의 사건이고 바로 뒤이어 나오는 사건이 칠병이어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하늘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형하고 있는 에피소드들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그 여인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분의 살과 피가 자신에게도 부어져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교회의 대표로 거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에 찬사를 보내십니다. ‘메갈레 피스티스’ 메가톤급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칭찬하시는 메가톤급 믿음이란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다른 것들에 묶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켜 ‘개’라 인정하고, ‘귀신 들린 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그 분의 떡 되심을 믿는 믿음 뿐임을 알고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귀신이 나갑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귀신들렸던 그 여인의 딸이 침상에 누워있었다는 구절이 굳이 들어가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침상에 눕다’는 개념은 종종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그 귀신들렸던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떡 되심의 은혜로 이 세상에 대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축귀(逐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전히 귀신들린 자, 개의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그러한 모습이 여러분의 내면에서 폭로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괴로우세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좀 이 ‘개’의 처지에서 구해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를 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의지하여 그 ‘개’의 삶을 조금씩 몰아내고 계세요?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기도를 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의 삶을 사실 수가 없으시거든 그냥 교회가 모이는 자리에 나오셔서 가만히 앉아 계세요. 그리고 믿음의 동지들을 자주 만나셔서 그들의 삶을 들으시고 여러분의 삶을 나누세요. 그렇게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조금씩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숙은 우리에게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을 포착하고 인식하며 그 분의 뜻을 꼭 붙들고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향한 우리의 열심이 반드시 수반 되어야 합니다.

 

(약4:7)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러분 안에서 용의 세력으로 자꾸 여러분을 미혹하려 하는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의 대적에 마귀는 여러분을 피하여 물러간다고 성경은 분명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 이니라

 

마귀는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물려고 달려듭니다.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성도간의 교제로 이겨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