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일이 철저히 경쟁 원리를 따른다. 우리는 말이 자유경쟁이지 실은 경쟁에서 뒤지는 사람은 사회에서 영영 낙오되기 십상인 아주 살벌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쟁의 승자와 패배자 사이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가끔씩 신문에 보도되는 생활고와 실직을 비관한 이들의 자살, 얼마간의 회전자금을 구하지 못해 결국 부도를 내고 자살에 이르는 이 땅의 중소기업 사장들의 안타까운 사연들…. 십 년 전만 해도 이런 자살 사건 하나가 국민들에게 주는 충격은 컸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인간애가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요즘은 신문 한 모퉁이에 이런 자살 사건이 보도되어도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1960년대 이래로 추진된 경제개발 계획으로 외견상 우리나라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눈부신 경제 성장의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고층 아파트 그늘 아래 있는 허름한 집들에 살고 있는 빈민들이 부지기수이며, 1년에 수조 원의 음식 쓰레기가 양산되는 속에서도 끼니를 걸러야 하는 결식 아동들과 노인들이 수천 수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이 땅의 그리스도교는 어떠한가?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 역시 남보다 내가 잘나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경쟁심과 이기심에 물들어 자기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쉽게 외면하기 일쑤다. 오늘 우리 주변의 웬만한 규모 이상의 교회들을 보면 어느 교회가 더 멋지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지 끝없는 경쟁을 벌이는 듯하다. 아직도 꽤 쓸 만한 교회를 허물고 무리를 해서라도 결국은 호화스런 새 교회를 짓고야 마는 꼴을 보면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울분이 솟구친다.

다른 교회도 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경쟁적이고 이기적이므로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핑계들은 잘도 댄다. 하지만 남들이 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도 그래야 한다는 게 충분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교회만큼은 그릇된 사회 풍조에 맞서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피눈물 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수제자인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노골적인 욕설을 퍼붓는다. 이것은 '수난당하지 않고도 우리의 일을 풀어 갈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며 잔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불호령이 아닌가.

무식하기는 해도 의리 하나는 누구 못지 않았을 우직한 뱃사람이었던 베드로. 어쩌면 그는 사랑하는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순수한 인간적 마음에서, 죽음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는 예수의 발걸음에 제동을 걸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는 이런 베드로의 진심을 눈치채고 내심 고맙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난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길과 어떻게든 수난을 피하는 방향으로 일을 풀어 가고 싶은 인간의 길은 상호 모순된다.

예수를 따르는 믿음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생길이다. 불의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소시민의 길이 아니라 불의한 현실에 과감히 맞서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길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야기하는 복음서에서 돋보이는 것은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고난의 신학이다. 그런데도 오늘 이 땅의 대다수 목회자와 신자들은 고난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고 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일지도 모른다!

정연복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