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면류관
본문 -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이곳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마치 달리기 경주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달려갈 길을다 달려간 이에게 주어지는 의의 면류관 그것도 의로우신 재판장이 준다고 한다. 나와 같은 개인에게도 과연 주어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오늘날 과연 이러한 달리기의 광경을 어디에서 보게 되는가? 달리기에서만 보지 않는다.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올림픽과 요즈음 전개되는 신나는 세계 축국 대전에서 전개되는 각종 열광어린 모습들을 보게 돈다. 왜 이렇게 스포츠에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가? 나라에서는 체력이 국력이다 라는 슬로간 속에서 운동에 소요되는 투자 금액도 어마어마할 것으로 본다. 세계 10위권으로 올라서려는 엄청난 노력을 나라에서는 기울인다. 그것이 나 개인에 있어서 믿음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운동 경기에 참여하여 승리하는 자들에 대한 인기와 지명도는 남부럽지 않다. 저들이 부여받는 부와 명예가 꽤나 클 수가 있다. 저들이 승리하여 시상대에 서는 순간에는 세계가 자기를 보는 것처럼 착가에 빠질 수가 있다. 정말로 그 순간은 자랑스러운 순간이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올림픽 경주에서 받는 상급은 아니나 그리스도인 생애의 결과에 주어지는 상급은 실로 그것에 못지않은 힘과 정력이 요구됨이다. 디모데에게 들려준 말씀에 나타난 의의 면류관은 비록 운동선수들이 목에 건너 받는 꽃다발과 금메달이 의의 면류관으로 대치되었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고 얻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바울은 이 말을 명령으로 주었다. 명령의 내용인즉 엄히 명한 것으로 하나님 앞과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날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고 있었다. 우리 주님은 심판주이다.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상기하면서 심판하실 그때와 그의 나라가 임할 순간을 엄숙히 기억하여야 한다. 지금은 숨기어진바 되었으나 주님 오실 때에는 모든 것이 공개된다.
우리에게 무엇을 의식하게 한 말인가? 그의 나타나실 것에 대하여 엄중히 자각시키는 말이다. 그의 하실 일에 대하여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시작될 그 기쁨의 한 순간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할 엄숙한 면을 상기시킨다. 그럼에서 저들이 하여야 할 일에 대한 제시가 따른다.
말씀을 전파하여야 한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항상 힘 쓸 것이다. 중단하지 말고 항상 준비함이다.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 완수의 혼신의 힘을 기울어야 한다.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오래 참음이 필요하고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 이일을 함에 있어서의 행동의 표현 중에 견책, 경계와 권함의 단어를 나열한다. 견책은 잘못을 범한 자를 상대로 깨닫게 함이며 경계함은 견책보다는 더 강한 말이며 권고한다는 권면과 위로가 담겨진 용어이다.
위의 모든 용어는 죄에 관련된 말이다. 따라서 죄의 진정한 폭로를 하기 위함이다. 죄를 견책하고 경계하고 권고함이 한편으로 죄를 떠난 생애를 살도록 함이다. 이 일에 대하여 하는 일이 자제가 요한다.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시 바울은 때가 이르게 될 때에 인간들의 되어져가는 저들의 잘못된 경향을 지적한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며 진리를 떠나 허황된 얘기 듣기를 좋아 한다. 성경의 기록 목적이 사람을 바르게 함이다. 구원에 관한 지혜를 베푸는 하늘의 보고인데 저들은 성경적 교훈을 둘째로 하고 자기의 스승을 많이 둔다. 저들은 귀를 가린다. 귀를 간질나게 한다. 마음 판에 새겨듣는 것이 아니다. 귀를 가리운다 함은 호기심과 충동을 불러일으킴이다. 유혹하는 말이다. 진리와는 무관하다. 저들의 정욕을 채울 수 있도록 하여 주면 된다. 잘 살고 바르게 사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릇된 것에서 만족을 채울 수 있으려면 신령한 교사에게는 맞지 않는다. 진리를 외면한 것으로 불가사의한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황된 얘기들인 공상이나 예술이라 하는 것으로 미화시키고 없는 일들을 있는 일처럼 꾸며 감각을 돋군다.
이상의 모습들은 세상이 흘러가는 모양을 기술함이다. 이와 같이 미래에 되어질 인간들의 그릇된 방향으로 되어감을 경계한 다음, 다시 한번 목회자가 된 디모데를 상대로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여 네 직무를 다하라. 맡은 바 직무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여 온전히 이루게 할 것이다. 근신하는 바는 머리를 맑게 함이란 뜻이다. 모든 일에 침착하고 진실함을 이른 말이다. 늘 신중한 마음을 가지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진리에 대처하는 삶의 모습이다. 사람에게 아부하지 않고, 사람들을 상대로 상상력에 지극하거나 성적인 만족을 위하여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감화력을 주도록 하는 일에 열심하여야 한다.
고난을 받으며는 세상의 기호와 취미와 유행을 따라 사는 생애가 아니라 당하는 어려움들이 필연적으로 따름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고난이란 디모데가 하여야 할 일로 전도의 일이다. 디모데가 할 일은 바울이 하던 일인 순회 전도의 일이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말씀을 전파하여야 함이다. 맡은 바의 직무를 다하도록 당부한다.
바울이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전도인 직무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상기시키는 말로 끝낸 디음, 자신이 여지껏 살아온 모든 결과들을 회상시킨다.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다가온 자신의 죽음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젊은 제가에게 무엇보다 숭고한 사명인 자신의 못다 한 일을 계승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면을 제시함은 효과를 높이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생애가 무엇인 줄을 아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였다.
빌 2:17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믿음의 제물과 봉사라는 말에서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온 믿음의 헌신의 생애가 감옥에서 죽음으로 끝나갈 것이었다. 관제란 제단 주위에 포도주를 붓는 전제의 행위이다.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봉사의 전적인 희생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피를 뿌릴 일이 있는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 떠날 때가 다 되었다 이는 닻을 올리는 때인 출발하는 용어이다. 목적지를 향하여 떠남의 행위이다. 매어있던 것이 풀어지는 현상이다. 자신의 생명이 이 땅에서 생을 마치면 곧장 연결될 영혼의 항구를 의식한 말이다.
다음부터는 그가 여지껏 살아왔던 생애를 요약하고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워 왔다. 싸움이란 말은 별로 기분 좋은 말이 아니다. 당시에 있어 왔던 온갖 경기를 연상케 한다. 육상 경기(마라톤, 마차 경기), 씨름 들 이것들은 명예가 달린 귀중한 행위였다. 상급이 걸려 있었다. 이러한 경기는 인간 한계에 일어나는 초월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 예찬으로 질주한다. 결국 이 일은 인간에 대한 힘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에찬이 아니고 인간을 영웅심을 갖는 것으로 되어진다. 이런 기대를 얻기 위하여 근육강화제라고 하는 것으로 순간 힘을 발휘하게 하는 힘을 촉진시키는 약물을 복용한다. 토핑 테스테에 걸리면 그가 얻은 메달이며 명예 모두가 다 날라가고 만다. 이러한 검사에 대한 규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중이다.
바울은 이러한 싸움과 경기하고는 전혀 대조가 되는 선한 싸움을 제시한다. 그의 싸움이란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길이다. 믿음으로 시작된 생애가 결승 지점이 없는 우리 생애의 마지막 죽음의 시점을 향하기까지 꾸준히 달려가는 믿음의 여정이다. 일생 동안 믿음을 지키는 일처럼 귀한 일은 없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생애로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시험들을 이겨내야 한다. 사실 이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들 모두의 기대하는 바이다. 죽음이 임할 때를 의식하고 변함 없는 마음으로 자신 안에 간직하며 하나님께 직고하며 타인에게 증거할 수 있는 믿음은 대단한 것이다. 그가 간증하는 표현에는 행 20:24에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쉬지 않고 지속하였다. 이러한 생애를 살았던 그였기에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는 것이다.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신다. 의의 면류관은 고대 희랍 세계에서의 몸에 두르게 하는 월계관이다. 오늘날에는 금메달을 걸어준다. 이는 돈으로 셀 수 없는 가치와 영예와 불후의 업적이 가문 대대로 이어진다. 바울은 이보다 못지않은 열려한 바람과 소망과 기대로 면류관 앞에 의를 삽입시키고 있다. 우리가 거룩하여지고 의로워진다.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걸어가 주어진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어서 이것이 자신의 행위만으로 되어진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한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니라고 한다. 바울은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의의 면류관과 세상의 면류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유명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유수한 재능인들 저들이 맞은 종말은 권태스러움이며 공허감 속에도 그 전날의 영예가 다 사라지며 전날의 감회도 새길 길도 없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남긴 말씀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점검하고 살아야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타날 것을 의식하고 주어진 엄숙하게 명한 말씀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 꾸준하게 기회 있는 대로 전하고 또 전하는 일이 필요된다. 핑계할 것이 아니다.
둘째, 세상 사람들의 그릇된 감각으로 되어져 가는 기호, 취미, 유행으로 동화되지 않는 삶이다. 전도인으로서의 맡은 바 직무를 신실히 수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셋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순교의 경지까지 이르도록 믿음을 갖는 확고부동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넷째, 자신의 구원받음을 예찬하며 자랑할 것이 아닌 모든 자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실 영광스러운 환희의 의의 면류관을 염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의 면류관은 금시 사라진다. 모든 사람들이 흥분하고 도취되어 자신들이 가야 할 지녀야 할 거룩한 믿음의 자세를 상실하여 가는 이때에 우리들은 마음 자세를 다시 한번 일깨우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대쟁투 425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열렬한 노력을 통하여 악과의 전쟁에서 마땅히 승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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