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최후 승리 고백
(딤후 4:6-8)
인간에게 있어서 마지막 말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기원전 490년 페르샤의 대군은 알타페르네스와 다티스를 총대장으로 하여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에서 북방 42km 지점인 마라톤 평야에 상륙하게 됩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순간이었는데, 그러나 밀티아테스의 지휘로 아테네는 10분의 1밖에 안되는 군사로 페르샤에 대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마라톤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무명용사가 42km의 거리를 달려가서 "우리 아테네군이 승리했습니다"라는 마지막 승전보를 남기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마라톤 경주의 유래인데, 인간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는 말중에 승리에 대한 고백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마라톤 평야를 달려온 한 병사가 "우리 아테네군이 승리했습니다. 기뻐해 주세요" 하는 승리의 외침이야말로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최후 승리 고백의 메시지를 디모데에게 남긴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 이 말은 5절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해라 왜냐하면 나 사도 바울은 관제처럼 제물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가기 때문이란다" 하는 노사도의 애정어린 권면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라고, 후계자로 택한 것처럼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신앙의 계승자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대의 전면에서 곧 사라지게 될 지는 태양이요, 디모데는 무대의 전면에서 활동하게 될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60이 넘은 나이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눈가엔 주름이 패이고, 기력은 많이 쇠약해진 그야말로 인생의 말기에 다다른 노인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디모데는 혈기왕성한 30대 후반기에 접어든 사람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관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관제'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 위에 제사의 마지막 순서로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죽음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그리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단순한 이별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나도 잠시 사람들과 떨어져 있을 뿐으로, 곧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떠나다"라는 말의 뜻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나타내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해방'을 의미합니다.
선착장에 묶여 있던 배가 닿을 올리고 밧줄을 하나 둘 풀어놓고 바다로 출항하기 위한 모습을 묘사하거나, 군인들이 묵었던 텐트를 철거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떠남'은 육신의 장막을 거두고, 이제 모든 제약과 구속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나라에 입성하는 축복의 순간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단어는 6절의 "떠날 기약"인데, 이 '기약'이라는 단어를 원어에 보면 "카이로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카이로스'란 말은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을 말합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지 모릅니다.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의 최후 승리 고백에 대해 4가지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7절).
영어 성경에 보면 'I have fought the fight'라고 기록이 되 있는데,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후서를 통해 선한 싸움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딤전1:18, 6:12).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로서 악한 마귀와 죄와 불의, 육신의 정욕과 싸우는 그 모든 싸움이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가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다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있다면 선한 싸움의 승리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 8장 37절을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겐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무기로 무장한다면 어떤 전투에서도 우리가 이길 수가 있습니다. 완벽한 방어체제를 갖춘 나라는 상대의 공격을 결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배로 공격하든, 비행기로 공격하든, 미사일로 공격하든 걱정을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전략이 짝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한 싸움"이란 의미에는 레슬링이나 권투등 1대 1의 치열한 싸움, 처절한 노력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믿음의 길에, 나대신 마귀와 싸워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나를 위해 옆에서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큰 힘이 될 수는 있지만 나의 싸움을 그들이 대신 싸워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싸우는 선한 싸움에는 엄청난 노력과 땀이 요구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달려갈 길을 마쳤다(7절).
영어 성경에 보면 'I have finished the race'인데, 달려갈 길을 완료했다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달리기 시합에서 목표지점 즉, 결승점에 도달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내가 달려갈 길을 1등으로 마쳤다" "우승을 차지했다"가 아니라 단순히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만 했습니다. 우승이나 1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경주에서는 끝까지 달리는 완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세요. 신앙의 풀코스 즉, 42.195km를 끝까지 달리지 못하고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처럼 믿음의 파선자들이 있고, 부겔로와 허무게네 또 데마처럼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체육 과학 연구원의 곽창수 박사팀이 1년동안 마라톤 선수들을 연구한 결과, 마라토너들은 달리기 도중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지면으로부터 몸무게의 2.72배에 해당하는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42.195km 풀코스를 완주하는데 평균 3만보를 뛰는데,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자인 황영조를 예로들면, 황영조가 몸무게 55kg이니까 55×2.72×30000하면 4,488톤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3분 1라운드 권투 경기로 치면 알리의 1톤짜리 무쇠주먹을 1초마다 한대씩 무려 24라운드 2분, 총 74분 동안 4,488대를 얻어 맞는 것이 됩니다. 달려갈 길을 마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나긴 길을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던지며 목표지점까지 달려왔던 것입니다(행20:24).
3.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7절).
영어 성경에 보면 'I have kept the faith'라고 하여 그 믿음을 지켜 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말합니다. 그릇된 진리를 믿는 후메네오와 빌레도나 진리의 대적자인 얀네와 얌브레처럼 사이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고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해 받은 그 믿음을 지켰다는 말입니다. 이 '지키다'라는 말은 주로 군사가 성을 지킬 때 쓰는 군사적 용어인데, 또는 처녀가 그 정조를 지킬 때 쓰는 도덕적 용어입니다. 성을 지키든, 정조를 지키든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4.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는데,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사도 바울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8절).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실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후로는"이라는 말은 "이제 남은 것은"이란 말로 해석할 수가 있는데, 이제 세상을 떠나는 사도 바울에게 남은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일 만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이 면류관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머리에 쓰게 될 왕관을 말한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된 상태로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이 세상을 떠난 후에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외치는 불교를 보면 창시자인 부처는 죽음의 순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 나를 사랑해 주는 모든 사람들이여! 언제나 이 말을 기억해다오. 모든 태어나는 것은 멸한다는 것을" 불교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멸하는 무의 종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기독교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더 좋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겐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고대 그리스에선 금은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고작 상록수로 만들어진 월계관을 쓴 올림픽 경기의 승리자들이 도시에 들어오게 되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문으로 들어오도록 성벽의 일부를 헐고, 월계관을 쓴 승리자를 그 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축하 퍼레이드를 열어 줍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해주실 것을 믿고,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GG뉴스 > 문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의 면류관 (0) | 2012.07.30 |
---|---|
상 받는 경주자 (0) | 2012.07.30 |
(31)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숨긴 변개된 성경들 (0) | 2012.07.30 |
너희도 상 받도록 달음질하라(고전9:23-27) (0) | 2012.07.30 |
바울과 올림픽 (0) | 2012.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