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에베소서 강해

은바리라이프 2012. 7. 13. 15:17

에베소서 강해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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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내용 목차

서론5

1장: 교회의 기초6

2장: 교회의 구성원24

3장: 교회의 보편성58

4장: 교회의 일체성71

6장: 교회의 전투성134


서론

에베소서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이다. 이 짧은 서신에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온다(로마서 5번, 고린도전서 22번, 고린도후서 9번, 갈라디아서 3번 등). 대략적으로 말해, 1-2장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3-6장은 교회의 속성들에 대해 가르친다.

1장: 교회의 기초

에베소서 1장은 창세 전 하나님의 선택과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흘리신 구속과 성령의 인치심을 언급하며 찬송한다. 이 영적인 복,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교회의 기초를 이룬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교회가 된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다.

1-2절, 문안 인사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서신의 발신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다. 사도행전 9장이 증거하는 대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자기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의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되었다.

서신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다. 이 서신은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어야 한다. 성도들은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다. 참된 믿음은 곧 신실함이다.

3-14절,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함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면서, 3절부터 14절까지에서 그의 구원을 세 단계로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세 단계란,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과 성령의 인치심이다. 오늘 우리의 찬송 내용도 하나님의 구원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복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이며, 육신적, 물질적 복이 아니고 영적 복이다. 구원받은 것이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복이다. 그것은 육신적, 물질적 복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복이다.

물질적 부요도 복이긴 하다. 건강도 복이긴 하다. 취직도 복이며 진학도 복이긴 하다. 결혼도, 출산도 복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복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복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바로 구원의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는 것이 복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복이다. 그렇지 않으면, 돈도, 건강도, 직장도, 학벌도, 결혼도, 자녀도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복을 사모하고 얻기를 힘써야 한다.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구원은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때는 창세 전이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 속에 있었다. 세상과 인류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셨고 사랑하셨다. 그는 우주만물보다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여기셨다. 아, 우리의 존재 가치가 여기에 있다.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 밖에서는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실로 크다.

하나님의 선택의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의 근본은 미가서 5:2의 증거대로 ‘영원전’이다. 그는 요한 사도의 증거대로 ‘태초부터 계신 분’이시다(요 1:1). 주님 자신도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또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영광을 누렸다’고 증거하셨다(요 8:58; 17:5).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주가 되셨다. 그가 우리 죄를 담당하실 어린양이 되셨다. 죄인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고 죄인의 죄책을 담당할 중보자와 구주가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안에서 한 무리의 죄인들을 선택하시고 용납하셨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구원과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보인다. 사람의 죄는 사람 앞에서는 때때로 감추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상태이었다. 본래 인간은 정직하게 지음을 받았다(전 7:29). 본래 인간은 의롭고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혜와 의와 거룩함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꾀를 내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될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실패치 않고 다 성취될 것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다.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선택의 또 하나의 방법은 ‘그 기쁘신 뜻대로’이었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요 온 세상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된 죄인들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라는 원어(에이스 휘오데시안)는 ‘양자가 되게’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지는 않다. 우리는 단지 양자(養子)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요 1:12).

[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자이시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를 구원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생의 타락을 아셨고 은혜의 구원을 작정하셨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게 하셨다. 우리의 찬송의 제목과 내용은 거의 이것뿐이다. 즉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송하는 것뿐이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선택에서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로 이어진다.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이었고, 속죄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 사역이었다.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가장 큰 복이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7:11은 말씀하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18, 19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였다.

[8-9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이는’이라는 원어(관계대명사 헤스)는 ‘그 은혜를’이라고 번역해야 뜻이 바르게 드러난다.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라는 말은 원문대로 다음 절 초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뜻의 비밀’은 구원의 이치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속의 이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구약 백성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러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기쁘심을 따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음을 증거한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도행전 4:12은 증거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앞절에서 언급한 대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시간표가 있음을 보인다. 아담 후 6천년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 아담 후 천년 경에 노아라는 인물이 태어났다. 아담 후 2천년 경에는 아브라함이 출생했다. 아담 후 3천년 경에는 다윗이 출생했다. 아담 후 4천년 경이 되어 ‘때가 찬 경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본절을 다시 직역하면, ‘때가 찬 경륜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이다. ‘통일되게’라는 원어(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는 ‘모이게’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 말대로 ‘통일되게, 정돈되게’라는 뜻일 것이다. 이제 복음에서 밝혀진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는 지금 천국에 올리운 성도들의 영혼들이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 한 몸, 한 가족, 한 교회, 한 나라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온 우주도 그리스도 안에서 정돈된다.

[11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본절에 잘 증거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 우리의 예정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였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

[12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원어는 6절이나 14절의 말씀과 동일한데, 그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먼저 바랐던(혹은 믿었던) 우리로’라는 뜻이다.

[13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다. ‘너희도’라는 말은 앞절의 ‘우리로’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너희 에베소 교인들도 구원의 복음 진리를 듣고 그 복음과 복음 안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는 말은 ‘그를 믿어’라는 뜻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을 때, 혹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중생할 때,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택과 구속(救贖)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세번째 단계이다. 성령의 인치심은 구원의 보장이다.

[14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호스, 남성 관계대명사)이라는 말은 앞절의 성령을 가리킨다. 남성 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격성의 한 증거이다.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라는 원어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의 때까지(에이스 아폴뤼트로신)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번역해야 정확할 것이다.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은 성도의 끝까지 견딤의 중요한 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주께서 피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은, 모두 다 끝까지 보존되며 영광의 구원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4절까지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세히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인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된 것이다. 그 목적은 우리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속히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으라.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우리의 찬송의 이유요 내용이다. 우리 모두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자. 부활과 천국을 소망하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자.

15-19절,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함

[15-16절]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절에 말한 에베소인들의 구원받은 사실을 인하여라는 뜻이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라는 말은 ‘주 예수께 대한 너희 믿음과’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성도의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이다. 또한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은 그의 믿음이 순종하는 믿음 곧 참된 믿음이라는 증거이다.

바울이 에베소인들로 인하여 감사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믿음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진실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도의 참된 감사가 있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인한 감사보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과, 그의 믿음이 자라고 강하여지는 것을 인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의 참된 감사의 이유가 여기 있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라고 불렀다. 본서신 1:3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고 말했다.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께서’이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의 ‘아버지’이시다. 요한복음 20:17에 보면, 주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무덤에서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표현하는 대로 ‘사람’이시고(딤전 2:5), ‘의인’이시고(행 7:52),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이시다(고전 15:45, 47).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영광의 아버지’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부자(父子) 관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셨다. 요한복음 17:5에 보면, 주님 자신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증거하셨다. 그래서 성경 두어 곳에서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표현하였다(고전 2:8; 약 2:1).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은 서너 가지이었다. 우선 본절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구하였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요한복음 17:3에서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제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혹은 영]’이 필요하였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했다. 또 ‘계시(啓示)’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1:27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마가복음 4:12에 보면,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신앙 생활의 시작에도, 그 이후의 진행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 지식을 얻었으나, 그 지식은 자라고 확고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알고 더 아는 것이 영적 복이다.

[18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는 말은 앞절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라는 기도 내용과 비슷하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뿐 아니라 또한 마음의 눈이 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22, 23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 ‘네게 있는 빛’이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의 눈을 가리켰다.

또 요한복음 9:39-41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육신의 눈이 먼 자만 장님이 아니고 영적 눈, 마음의 눈이 먼 자도 장님이다. 이 세상에는 영적 장님이 많다. 여러분 가운데도 혹 영적 장님이 있을지 모르겠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히셔서 다음 두세 가지를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첫째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둘째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셋째는 19절에 말한 대로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이 중에 첫째와 둘째는 서로 통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한다. 에베소서 4:4도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부르셨는가? 그는 우리를 썩어질 세상, 불타 없어질 세상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永生)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이며 성도의 확실한 소망이다. 하나님의 구원 곧 죄로부터의 구원은 바로 이 소망으로의 초청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혹은 성도에게 주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한다. 그 기업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활한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과 거기서 누릴 영생복락(永生福樂)이다. 그것을 로마서 8:18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말했고, 고린도후서 4:17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1:10, 11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저주받은 지구에 사는 죄인들을 건져 영광의 천국, 풍성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구원이다.

[19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는 구절은 ‘믿는’이라는 말에 연결되는 것 같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심히 무감각해졌던 우리를 깨우쳐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는 그의 능력의 일이시다. 그 능력이 아니고서는 죄로 죽었던 나의 영혼이 다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은혜로 역사하셔서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시다.

결론적으로, 15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한 바울 사도의 기도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기도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과,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자.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할 수 있으며,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20-23절, 그리스도와 교회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役事)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심으로 나타났다. 능력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표현이었다. 죽음은 인류 역사 수천년 동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처럼 보였다. 죽음은 모든 인생의 여러 종류의 절망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절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가장 큰 절망을 단번에 정복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과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심 또한 놀라운 사실들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의 승천에 관하여, 구약 성경은 에녹과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 이미 예시한 바 있었다(창 5:24; 히 11:5; 왕하 2:11). 예수님 자신께서도 자신의 승천에 대해 언급하셨었다(요 6:62; 16:28). 특히 누가복음 24:51과 사도행전 1:1, 2, 9-11은 이 사실을 증거하였다. 또 신약 성경의 다른 서너 곳에서도 승천의 사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눅 9:51; 엡 4:8-10; 딤전 3:16; 히 4:14).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 이 사실도 사도들의 글들과 특히 히브리서에서 밝히 증거되어 있다(롬 8:34; 골 3:1; 벧전 3:22; 히 1:3; 8:1; 10:13; 12:2).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신 의의(意義)는 다음 두 절에 언급되어 있다. 첫째는,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심이고, 둘째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심이다.

[21절]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자기 오른 편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는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그들 중 어떤 천사들은 선하지만, 어떤 천사들은 악하다. 베드로전서 3:22은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말씀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다. 빌립보서 2:9-11은 말씀하기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물론, 이 사실은 아직 불완전하게 보인다. 이 사실은 아직 다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불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무시하고 있고, 이방 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권세가 어떠하시며 그의 영광이 어떠하심을 증거한다. 무지한 세상이 그를 인정치 않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 뿐이지, 그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동등한 권세를 가지시고 동등한 영광을 누리신다. 그는 지금도 진실한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영광과 찬송을 받으신다.

[22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오른 편에 앉게 하심은 또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이시다. 만물은 그의 발 아래 있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 만물 중에는 인류의 원수인 사탄도 포함된다. 사탄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발 아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발 아래 굴복될 것이다. 시편 110:1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고 증거하였다. 또 로마서 16:20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했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 곧 우리의 발 아래 굴복되는 때는 바로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때이다.

지금은 모든 이들이 그 앞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재림의 때가 되면, 인류의 원수 사탄이 그 앞에 굴복되는 그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 5장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5:13은 증거하기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했다.

그러면,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는 원어(에도케 케팔렌 휘페르 판타 테 엑클레시아)는 ‘교회에게 만물 위의 머리로 주셨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만물 위의 머리’라는 표현은, ‘머리’라는 말이 ‘우두머리, 통치자, 주’라는 뜻임을 보인다.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도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하였는데, 그것들은 다 통치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머리이시므로, 교회는 그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의 참된 지휘자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시다.

‘머리’라는 말은 유기체적 의미도 가진다. 머리와 몸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이다. 머리가 없는 몸은 죽은 것과 같다. 에베소서 4:15, 16은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고 표현하였다. 이 말씀은 이런 유기체적 의미를 보인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생명적 관계에 있다. 교회는 잠시라도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이요 힘이시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깊은 진리를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개인이지만, 또한 새로운 인류이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를 ‘마지막 아담’ 또는 ‘둘째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45, 47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가 선택되었다(엡 1:4).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며 정돈된다’(엡 1:10).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엡 2:15).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다(37-40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또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충만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는 ‘충만케 한다’ 또는 ‘완전케 한다, 완성시킨다’는 뜻을 가진다. 즉, 이 단어는 ‘충만’이라는 뜻과 함께 ‘완성’이라는 뜻을 가진다. ‘충만케 하시는’이라는 원어(플레루메노스, 현재 중간태 분사)는 정확히 번역하면 ‘자신을 위해 충만케 하시는’ 혹은 ‘자신을 위해 완성시키시는’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충만과 완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측면에서 이해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요 완성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온 세계적으로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창세 전의 하나님의 선택과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께서 죄인을 중생시키시고 성화시키시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전도, 곧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기지(基地)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인 것이다.

교회의 충만과 완성은 숫적인 면에서도 이해된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가 다 구원받을 것이다. 그것은 숫적으로 충만한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7:9은 증거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하였다. 성경과 역사가 증거하는 대로, 교회는 쇠퇴하는 단체가 아니고 숫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여져 가는 단체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받은 자들로 충만케 하고 계신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이다.

결론적으로, 20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정돈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아 지금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천사들과 모든 인간들의 이름들 위에 뛰어나신 이름이시다. 세상은 그를 모를지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찬송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바로 인식하고 그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참된 지도자이시며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교회의 본분은 오직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몸의 충만과 완성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영적 성장과 교회 전체의 영적 성장 뿐만 아니라, 또한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립해야 하고 충만케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로 말미암아 힘있게 완성되도록 그에게 충성해야 한다.

2장: 교회의 구성원

1-5절, 다시 삶

본문은 성도의 구원받기 전, 과거의 상태에 대해(2절, ‘그 때에 너희가’; 3절, ‘전에는 우리도’) 자세히 언급하면서 구원이 영적 죽음으로부터 다시 사는 것임을 증거한다.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과거의 상태는 한마디로 ‘죄로 죽었던’ 상태이었다. 여기에 ‘허물과 죄’란,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소위 ‘원죄’(原罪)와, 또 이 원죄의 죄악성 때문에 각 사람이 실제로 짓는 ‘자범죄’(自犯罪)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롬 6:23). 죽음이 죄의 형벌로서 세상에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첫 명령에서(창 2:16, 17) 밝히 언급되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영적인 의미이다. 구원받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라도, 영적으로는 다 죽은 자이다. 영적인 죽음이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지와 부도덕이다. 영적으로 죽은 모든 영혼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의와 선을 행하지 못한다. 이 영적인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다.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가운데서’라는 말은 앞절에 언급한 ‘허물과 죄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구원받기 전 에베소 교인들은 허물과 죄 가운데 살고 있었고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죄 가운데 사는 삶의 인도자는 이 세상 풍속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었다. 이 세상은 죄악된 세상이며, 세상의 삶의 방식은 곧 죄 가운데 사는 삶을 이끄는 표준이요 원동력이다. 또 이 세상을 주관하는 자는 사탄이다.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되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 보면, 그는 또한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이 세상 신’(고후 4:4)이라고 표현되었다. 또 요한일서 5:20은 ‘온 세상은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한 것이라’고 말씀했다.

본절은, 사탄이 지금도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씀한다. 고린도후서 4:3, 4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씀했다. 믿음과 순종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맺으시는 열매이지만, 불신앙과 불순종은 사탄과 악령들이 맺는 열매이다. 불순종의 죄성(罪性)은 이 세상 풍조와 악령들의 역사(役事)와 연결되어 있다.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 교인들의 과거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전에는 우리도’라는 말씀은 바울 일행도 과거에 그러했음을 간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그 가운데서’라는 말씀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본절은 죄성을 또 표현하기를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육체’라고 번역된 원어(사르크스)는 로마서나 다른 곳들에서 흔히 ‘육신’이라고 번역된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소마)를 가리키기보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죄악성’을 가리킨다. 육신의 욕심 곧 본성의 죄악성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죄악된 일들뿐이다. 야고보서 1:15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라고 말씀했다. 그 죄악된 욕심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돈에 대한 탐욕과, 이성에 대한 정욕, 및 세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다. 이것들은 다 세상적이요 죄악되다.

성도의 과거의 상태, 곧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죄 가운데 살았고,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살았고, 육신의 죄악된 욕심에 사로잡혀 살았던 상태의 결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이었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죄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의 현상태이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의 궁극적 운명이다. 하나님의 진노! 요한복음 3:36도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했다.

[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런데 이 진노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 우리에게 왔다. 성도가 구원받은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 다른 원인은 없었다. 인간 속에는 어떤 원인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무능력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고 말씀했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했다(렘 13:23). 성경은 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씀했다(롬 3:10-12).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표현되고 확증되었다.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구원은 ‘다시 살리심’으로 표현되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이 구원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에게 영적 생명, 곧 새 생명을 주신 사건이 구원이다. 이것을 중생(重生, 다시 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이 가리킨 구원이다(요 3:5).

본문은 성도의 다시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은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택자들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새 생명을 이루신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다. 우리의 부활은, 먼저는 중생(重生)으로 났고, 그 다음에는 몸의 영화로운 부활로 장차 나타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5절까지의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의미하는 지를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구원은 죄 가운데 살던 자가 새 삶을 시작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을 받았는가? 아직도 이런 구원을 경험치 못한 자들은 이런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기인한다. 우리 속에 어떤 원인이 있지 않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사탄과 악령들의 이끌림을 받지 말고, 육체의 죄악된 욕심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6-10절, 은혜의 구원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본절은, 앞절과 함께, 죄인들의 구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예수의 역할을 증거한다. 그것은 대리적(代理的) 역할이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살리셨고’(5절), ‘함께 일으키셨고’(6절),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6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은 중생(重生)의 새 생명을 주시고 미래의 부활을 확증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기업을 함께 상속받는 자가 되게 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은 우리의 구원과 그 특권에 대한 상징이요 성취요 확증이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7절로 9절은 특히 구원의 은혜성을 강조한다. 본절은 구원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적 역할의 목적을 말씀하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를 나타내려 하심임을 말씀한다. 구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적 역할이 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인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단지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의 고난 후에 온 것인데,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피흘리신 죽음은 순전히 우리 죄인을 대신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으심은 우리의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큰 죄들, 많은 죄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끈질긴 연약과 실수와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각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해결책이었다. 대리적 속죄물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 죄의 대속물(代贖物)이 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큰 희생과 손실이며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책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지극히 풍성한 그의 은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4절)이 여러 세대, 여러 시대 동안 전파되어 왔다.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의 소식이 벌써 2천년이나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고 있다.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의 이유를 설명한다.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며 그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셔도 된다.

로마서 9:15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의 구원이 전적으로 주권자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말하기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하였다.

그는 에베소서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고(4, 5절), 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했다(11절).

그는 디모데후서 1:9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본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믿음이 구원의 수단임을 보인다. 믿음이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1:12)이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6:35, 37)이라고 표현하였다. 로마서 6:17은 믿음을 ‘마음의 순종’으로 표현하였다. 믿음은 전(全)인격적 신뢰이다. 그것은 지식과 찬동과 의지를 다 포함한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으로 표현된다. 호세아 14:2은, 하나님께 돌아온 이스라엘이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고 고백할 것을 말씀했다. 로마서 10:9, 10은 말씀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마음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믿음이 아니다. 마태복음 7:21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헛된 신앙고백의 무가치함을 증거하는 동시에, 구원하는 참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진실한 행위로 나타나야 함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참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로마서 4:5은 말씀하기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다. 믿음은 분명히 율법 순종의 행위와 대조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마치 빈 손과 같다고 자주 비유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선 빈 손이 필요하지만, 빈 손은 자랑할 만한 어떤 공로가 될 수 없다. 회개하는 상한 심령과 진실한 믿음은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회개와 믿음이 공로가 될 만한 무엇은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믿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정상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며,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악이다. 요한복음 1장은 증거하기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또 요한복음 3장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원을 얻었나니.

‘구원을 얻었다’는 원어(세소스메노이, 완료 수동태 분사)는 믿는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불결하고 흠과 부족과 결함이 있는 인격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8:29, 30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며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또, 빌립보서 3:20, 21은 말씀하기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완전하다. 고린도전서 1:30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라고 했다. 또 히브리서 10:12-14은 말씀하기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했다. 여기에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테텔레이오켄)는 완료시제이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하며, 성도는 이미 그 완전한 구원을 법적으로 얻은 자가 되었다.

성경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미래적 표현도 있다. 로마서 5:9, 10에서 바울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과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을 의미한다.

또 성경에 ‘구원을 이룬다’는 현재적 표현도 한 번 나온다. 빌립보서 2:12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로마 천주교회가 그들의 행위주의, 공적주의 교리의 기초로 삼은 구절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경의 은혜의 복음의 명백한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구절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혼잡시키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훌륭한 개혁주의 주석가 매튜 풀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들이 구원의 충족하고 공로적인 원인이라는 교황주의자들[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 . . 교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다른 곳에서 죄사함의 복을 말하고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행위로가 아님을 말한 바울의 교리와 반대된다. . . . 바울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의 일에 게으르지 말고 우리가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협력은, 그리스도께만 합당한 구원의 획득이나 공로에 관계되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완성하신 것의 적용에 관계된다”(Matthew Poole, III, p. 691).

[8-9절] . . .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실’을 가리킨다. 구원은 부분적으로라도 우리 속에서 나오지 않았고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으로 인하여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값으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롬 3:24). 그래서 로마서 8:30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다.

찬송가 가사처럼,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184장).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절은 구원의 목적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재창조하신 목적은 ‘선한 일들을 위하여’이며, 그는 우리가 그것들을 행하도록 미리 작정하셨다. 디도서 2:14도 말씀하기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무엇이 성도가 행할 선한 일들인가? 그것들은, 성도의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며, 특히 아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의 일, 곧 영혼 구원의 일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의 본문은 세 가지의 사실을 계시하였다. 첫째는, 구원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곧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고 성취하고 확증하였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구원의 은혜이다.

둘째는, 구원의 은혜성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에 기인하며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에 의거하지 않는다. 이 은혜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우리가 믿음으로 이미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하며, 성도는 이미 그 완전한 구원을 법적으로 얻었다.

셋째는, 구원의 목적이다. 그것은 ‘선한 일들을 위하여’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선한 일들,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힘써야 하고 특히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에 힘써야 한다.

특히, 우리는 구원의 은혜성이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자신의 나태와 교만과 불성실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그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마땅히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구원은 참된 구원이 아닐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헛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선한 행위로 나타내어야 한다.

[보충적 설명]

앞에서 증거한 “은혜의 구원”에 대해 그 요점을 강조하며 좀더 부언해 두고자 한다. 은혜의 구원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전성’이다. 히브리서 10:10-14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구원은 완전하다. 그는 우리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우리를 단번에 ‘거룩케 하셨고’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은 우리의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고, 우리의 육체의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딤전 1:1). 그는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는 구주가 아니시고, ‘우리’, 곧 영육의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의 영육의 온전한 구원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장차 영광스러운 그의 부활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의 육체의 부활, 영광스런 부활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미래의 그 영광스런 육체의 부활의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다. 우리의 행위는 심히 보잘 것 없다.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8-40). 바울 사도는, 우리가 몸의 구속(救贖) 곧 부활의 구원을 소망으로 이미 얻었다고 표현하였다(롬 8:23, 24). 또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예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했다(롬 8:29, 30). 칭의(稱義)와 영화(榮化)는 한 구원의 두 요소에 불과하다. 칭의가 없이는 영화도 없다. 그러나 칭의가 있은즉 영화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완전한 구원, 영광스러운 구원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완전한 구원을, 회개하고 예수 믿는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편에서는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복이다.

이것을 우리는 법적인 구원이라고 부른다. 이 법적인 구원이 장차 영광스럽게,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소망으로 얻은 몸의 구속(救贖)(롬 8:23)이다. 이 법적 구원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는 재림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 미래의 영광의 부활은 이미 얻은 이 법적인 구원의 당연한 결과이다.

이 구원은 모든 진실한 성도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구원이요 영광이요 부활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비유에서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구원의 동등성, 동일성을 ‘한 데나리온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다(마 20:1-16).

또 바울 사도는 성도의 성실한 믿음의 생활의 결과를 단순히 ‘영생’이라고도 말씀하였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전성,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영광의 구원을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장차 주실 ‘상급의 차등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에 대해 말씀하고 그 상급은 차등(差等)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마 5:12; 눅 6:23; 히 10:35; 계 22:12).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 므나의 비유(눅 19:11-27)는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그러나 이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하지 못한 부족한 자들임을 고백해야 하며 우리의 선행이 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고백해야 한다. 주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고난을 당했던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우리의 순종과 선행이 우리의 당연한 의무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며, 또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라고 진술했다(16장). 우리는, 요한계시록 4:10의 24장로들의 모습과 같이, 상급으로 받을 우리의 면류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화의 은혜성을 참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성화의 동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뿐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우리의 성화의 방법은 오직 성령의 은혜로이다.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가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성화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한복음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로마서 12:1, “. .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린도전서 6:19, 20, “. .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경쟁심에 근거한 선행은, 비록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많이 하게 할지는 몰라도, 그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므로 잘못이고, 그 방법이 성령의 은혜만 구함이 아니므로 인위적, 인본적이며, 그래서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바른 동기, 바른 방법, 바른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진실히 예수 믿는 모든 이들은 마땅히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참된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 의무를 게을리하는 자는 아마도 구원의 참된 생명이 없는 자이거나, 영적으로 심히 병든 자일 것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진지한 순종의 행위가 없는 자는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 겸손히 순종하며 응답할 것이다.

성실한 순종의 행위는 구원받은 참 성도의 마땅한 증표이지만, 우리는 자기를 의지하거나 내세우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고, 이 불경건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1-13절, 그 때를 생각하라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생각하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2장 앞부분에서 말한 구원, 중생(重生), 새 피조물됨과 연결된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살았으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라는 뜻이다.

‘생각하라’는 원어(므네모뉴오)는 ‘기억하라’는 뜻이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될 것도 있고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잘못들이나 남에게 받은 은혜들은 기억해야 될 것이지만, 반대로 자신의 잘한 일들이나 남의 잘못한 일들은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본절에서 기억하라는 것은, 우리의 과거의 신분과 상태가 어떠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신분과 상태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에베소 교인들은 당연히 그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구원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에베소 교인들은 구원받기 전 과거에 어떤 신분과 상태에 있었는가?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일곱 가지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이었다. ‘육체로 이방인’이라는 말은 다음에 나오는 할례를 암시한 것 같다. 유대인들에게는 육체의 표가 있었으나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표가 없었다. 육체적으로 이방인은 유대인들과 구별되었다. 혹은 ‘육체로’라는 말이 단순히 ‘혈통적으로’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방인의 특징은 육체의 할례가 없는 것 뿐만 아니라, 다음에 열거된 모든 점들을 다 포함한다. ‘이방인’이라는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참 지식과 소망과 생명이 없는 모든 영적 어두움과 절망과 죽음의 그늘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과거에 다 이방인들이었다.

둘째로, 에베소 교인들은 전에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다. 할례당은 ‘할례받은 자들’이라는 뜻이고, 무할례당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맺으셨던 언약의 표시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남자 아이들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언약 백성의 표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다 내면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아니었다. 육신적 할례는 외적, 법적 표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공식적 표이었다. 유대인의 표는 할례이었고, 이방인의 표는 무할례이었다. 그러므로 무할례는 곧 영적으로 어두움이요 절망이요 죽음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무할례자들이었다.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셋째로, 에베소 교인들은 그 때, 곧 구원받기 전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구약 백성들에게 율법에 암시된 중보자이었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로마서 3:20은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다. 구약 백성은 구약 율법 중 제사법들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 틀림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밖에’라는 원어(코리스)는 ‘상관 없이’라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중보자가 없었다. 그들은 중보자를 알지 못했고 중보자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넷째로, 에베소 교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이요 그의 언약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셨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 나라에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었다. 그 나라 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들을 체험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규례 밖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과 상관이 없는 자들, 곧 하나님의 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도 과거에 그러하였다.

다섯째로,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外人)’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복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복이다(창 17:7, 8; 렘 30:22; 31:33; 겔 11:20; 14:11; 36:28). 그것은 또한 영생과 평강의 복이다(신 5:33; 잠 3:16-18).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가 할례이었다. 할례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러한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영생과 평강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다.

여섯째로, 에베소 교인들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소망이 있는가? 인간의 모든 소망이란 일시적이어서 결국 다 시들고 없어지는 것들이 아닌가? 인생의 늙음과 쇠잔함, 질병들과 죽음, 인생의 이 허무함을 극복할 소망이 무엇인가? 그러나 구약성경은,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씀했고(잠 14:32), 시편 저자는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고백하였다(시 73:24). 신약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는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하였다(벧전 1:3, 4). 그렇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이러한 참된 소망이 없었다. 과거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슬픔이 많은 인생, 허무한 인생일 뿐이었다.

일곱째로, 에베소 교인들은 전에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신에 대한 약간의 의식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대체로 헛된 우상들을 신인줄 알고 섬겼다. 그들은 그 헛된 우상들을 의지하고 바랐던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식의 시작이지만, 이전의 그들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 무지와 흑암 속에 살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돌보심도 받지 못했다. 과거의 우리가 바로 그러하였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이제’이다. ‘전에 멀리 있었다’는 말은, 구원받기 전의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복된 세계, 영원한 생명과 평강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이루신 대속(代贖)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와졌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평강을 받고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이 에베소 교인들이 받았던 구원이다.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의 구원받기 전 신분과 상태로부터 어떻게 구원 받은 신분과 상태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모든 이들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이 크신 구원의 일을 기억하자.

과거에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과거에 무할례자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고 신약 아래서 언약의 표인 세례를 받은 자가 되었는지 기억하자.

과거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 밖에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이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는지, 과거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던 우리가 어떻게 이제는 영적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이 되었는지 기억하자.

과거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들어와 언약 백성이 되어 언약의 복들 곧 구원과 영생과 평강과 하나님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지, 과거에 세상에서 소망 없던 우리가 어떻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 소망, 곧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살았던 우리, 불경건했고 영적 고아와 같았던 우리가 어떻게 이제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시시때때로 받으며 누리며 살게 되었는지 기억하자.

죤 뉴톤은 찬송가 405장 가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놀라운 구원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처럼 넘치는 감사를 드릴 것이며, 또 풍성하신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보답하려는 자원적 헌신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구원받기 전, 예수를 알기 전의 그 때를 생각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고 놀라우신 구원을 기억하자.

14-18절, 한 새 사람

13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전에 멀리 있었던 에베소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씀했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이전에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과도 멀리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과도,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과도, 가까워졌다.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앞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인들이 왜 하나님과 그리고 이스라엘과 가까워졌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안과 화평이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없어졌다. 혈통적 구별은 남겠지만, 영적 특권의 차이는 더 이상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진실히 부르는 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이 받으신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것이 신약 교회이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구별 없이 다 포함한다. 이 교회가 오늘날 참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이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며 믿는 자들이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15절]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은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므로, 과거에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 정죄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진정한 교제는 불가능하였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은 죄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는 심각한 구별과 적대적 관계가 있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이런 구별과 적대 관계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라는 말은, ‘의식법의 규레들로 된[혹은 표현된] 계명의 율법’이라는 뜻일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들, 예를 들어, 성막이나 제사나 절기 그리고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등에 대한 법들은 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시키는 법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식법들은 다 성취되었고 따라서 그 법들은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로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신약 교회는 이렇게 구성되고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교회에 속한다. 이제는 유대인의 교회가 따로 없고 이방인의 교회가 따로 없다. 이제는 둘을 다 포함하는 한 교회가 있을 뿐이다. 신약 교회는 어느 한 민족의 독점물이 아니고,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를 다 포함하는 세계적 단체가 되었다.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용납되는 일은 구약 시대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평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 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된 관계이다. 이것은, 아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 베드로가 기도 중에 본 환상의 내용과 같았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그 때 또 소리가 있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였다. 후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차별치 아니하셨다’고 했고, 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말했다(행 15:9, 11). 이제 신약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관계이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사람들은 서로 불화하는 상태, 원수된 상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내면적으로는 이방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의 역사가 증명하는 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못지 않게 우상숭배적이었고 부도덕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은 서로 원수 관계에 있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셨고 죄를 지은 인간들도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를 꺼려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하셨다(요 3:2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신 것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화목, 즉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케 하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셨고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원수 관계를 다 소멸하셨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로마서 5:10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했다.

[17-18절]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먼 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론하고 모두들에게 평안의 복음, 화목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간에, 이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고 한 성령의 은혜 안에 거하며 한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어서 그의 위로와 격려와 권면을 받는다.

구약 시대에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다. 죄인은 오직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를 섬기며 그의 복주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크신 대 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친히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한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의 피를 믿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히브리서 10:19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였고, 또 히브리서 4:16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구원은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1)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부터 완전하게 그것을 계획하셨고, (2)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택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셨고, (3)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을 주셨고, 계속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며 인도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준비하셨고 또 우리 속에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관계를 폐하셨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둘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음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화목 곧 인간 관계의 화목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참으로 깨달은 자들이라면, 어떤 이가 우리를 혹 미워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미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관계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더욱 중요하게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구원이다. 이것은 참으로 필요한 구원이다. 인간들의 근본적 문제는, 그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그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된 것이다.

신약 교회는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들의 연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신 화목의 사역이다. 이 구원은 한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고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주어진다. 신약 교회는 세계적 교회가 되었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19-22절, 신약 교회의 구성원, 기초, 목표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본절은 신약 교회의 구성원을 보인다. 그것은 이미 앞 절에서도 말한 바 있다. 15, 16절에 말한 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을 당신 안에서 ‘한 새 사람’을 만들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곧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이제부터, 너희 이방인들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이방인들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만 그렇게 된다. 주 예수를 믿지 않은 자들은 구원의 복에서 제외된다. 이것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참 감람나무에서 꺾이운 가지들과 같다고 표현하였고, 이방인들은 본래 돌 감람나무이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은 가지들과 같다고 했다(17-24절).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은, 믿는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곧 그들과 함께된 동료 시민이다. 또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가족이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요 1:12). 바울 사도는, 로마서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에 해당하고 그를 믿는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가족들이다.

여기에 신약 교회의 보편성, 세계성이 있다. 이것이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구약 교회는 하나의 민족인 이스라엘 중심의 교회이었지만, 신약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다 포함한다. 신약 교회는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는 자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참으로 에베소서 1:23의 말씀대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다’(엡 1:23).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본절은 신약 교회의 기초를 보인다. 본절에 의하면, 신약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 그것은 교회의 기초를 증거하는 마태복음 16장이나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신앙고백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신 후, 이어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16-18절). 주께서 당신의 교회의 기초로 언급하신 ‘이 반석’이란, 문맥상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그가 고백한 진리를 가리킴에 틀림 없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은 자이며 아볼로나 다른 목회자들이 그 터 위에 집을 건축하는 자들이라고 비유하였다(10절). 그는 어떤 목회자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세우고, 다른 이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다고 말한다(12절). 그는 목회자들의 바르고 성실한 교훈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에 비유하고 그렇지 못한 교훈을 나무나 풀이나 짚에 비유하였다고 본다(칼빈, 촬스 핫지). 그런데 그는 그 비유에서 그가 닦아 둔 교회의 터, 곧 이 닦아 둔 것 외에 아무도 다른 터를 닦아 둘 수 없는 그 터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1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터요 기초이심을 말한 것이다.

본절에서 교회의 터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말한 것도 내용적으로 위의 말씀들과 동일하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한 자들인가? 그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해설한 자들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로 그 분이시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 예수의 증인들이었다. 교회는 그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증거 내용은 신약 교회의 기초인 것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모퉁이 돌’은 건물의 기초석 중에 모퉁이에 놓여지는 돌로서 건물을 구성하는 모든 돌들의 기준점이 된다. 그것은 한 건물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대표적인 돌이다. 그 돌은 건물을 지탱하고 결합시키는 역할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모퉁이 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께서 모든 성도들의 머리이시며 그들의 믿음과 생활의 기준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그들 모두를 결합시키시고 온 교회를 붙드시는 주님이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은 신약 교회의 목표를 보인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건물마다’라는 말(파사 오이코도메)은 단수명사로서 여러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의 건물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다(엡 4:4). 교회는 하나다. 그것은 성전과 같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지만, 또한 신약 교회를 가리켰다. 신약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곧 교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바울은, 신약 교회가 성전이 되어 간다고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성전이 되어 간다’는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요, 둘째는 개인의 성화이다.

교회는 아담 이후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한 명의 영혼을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다(요 10:16). 전도는 성전 건립의 일이다. 한 명의 택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은 건물의 벽돌 한 장이 쌓이는 것과 같다. 모든 영혼들이 다 돌아올 때 이 성전은 완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전 건립은 외적 예배당 건축이 아니고, 한 명의 영혼을 회개시키고 주 앞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 개인에게 있어서 영적 성장 혹은 성화(聖化)도 필요하다. 성도는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를 받았다(고전 1:30; 롬 3:23, 24; 10:4).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제사로 거룩케 되었고 완전케 되었다(히10:10, 12, 14). 그러나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구원을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경건 그리고 의와 진실과 선함의 도덕성을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의 진실성, 복음의 진리성에 합당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구원은 이론뿐일 것이며 복음은 허상(虛像)에 불과할 것이다.

에베소서 4:11-13은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이런 성전 건립의 일을 위해 어떻게 목회자들을 사용하시는가를 증거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 성도들이 성전, 곧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된다는 사실은 실로 신비한 일이다.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원히 모시고 살겠는가? 그러나 그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셨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함을 증거한다(요 15장; 고전 6:17).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자들이 된다(롬 8:17).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세계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온 세상의 각 민족, 각 나라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된다. 교회는 한 민족이나 사회의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종류,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글인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이 기초를 떠나지 말고 이 기초를 다시 닦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은혜만 붙잡고 진행해야 하며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만 읽고 묵상하며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의 목표와 임무가 영적 성전 건립임을 인식하고 그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영적 성전 건립이란, 전도와 영적 성장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여러분 주위의 영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또한,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지식과 경건, 그리고 의와 진실과 선함의 도덕성을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내기 위해 성실해야 한다. 성도의 영적 성장 또는 성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성실히 힘써야 한다.

3장: 교회의 보편성

1-13절,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1절]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이러므로’라는 말은 앞장 후반부에 언급한 진리에 관계된다고 본다. 바울은 앞장 후반부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고 언급하였었다. 이것은 특별히 이방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은총이었다.

이방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이 은혜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고 옥에 갇히기까지 한 것이었다. 본절을 직역하면, “이러므로 너희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인 나 바울은”이다. 그는 자신을, 이방인들을 위해 사역하다가 옥에 갇힌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라고 표현한다.

우리 본문에 1절 끝에 말줄임표가 있다. 그것은 1절과 그 다음 절들 간의 연결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사용되었다. 전체 문맥상, 2절부터 13절까지는 삽입적 내용에 해당하고, 1절은 14절로 이어지는 것 같다. 원문에, 14절 초두에도 1절과 똑같이 ‘이러하므로’라는 말(투투 카린)이 나오는 것은 그런 생각을 지원한다.

[2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경륜’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는 ‘관리, 직무, 혹은 계획’이라는 뜻을 가지는 말이다. 우리말에 ‘경륜’은 ‘잘 계획하고 다스림’을 가리킨다. 이 말은 오늘날 잘 쓰이지 않지만, 원어에 뜻에 가까워 보인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그 은혜의 계획’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경륜이라는 말을 바울에게 주어진 복음 전도자로서의 직무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본문에서 그렇게 읽어도 뜻이 통한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란 앞장 후반부에서 말한 그 내용을 가리킨다. 즉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3절]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바울은 그것을 ‘비밀’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구약 백성들에게 감취어 있었던 내용이었다. 물론 구약에서도 이방인의 구원은 암시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창 12:3). 시편 저자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라고 외쳤었다(시 117:1). 그러나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아무도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 동등한 은혜가 주어질 것을 도무지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바울에게 알려졌다. 물론,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려졌다. 바울은 이미 앞장에서 그 내용의 대략을 증거하였다.

[4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은혜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의 증거한 내용들을 읽는 자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사실과 그가 깨달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알았다. 이미 증거한 대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의 특권이다.

[5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에 ‘선지자’는 2:20과 4:11에도 나오는 말로서 신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도들과 더불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바울이 받고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 곧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진 은혜의 복음 진리는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으로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의 진리는 다른 세대 곧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게 하지 않으셨던 진리이었다. 신약의 복음 특히 교회의 보편성의 진리 곧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단체가 아니고 또한 이방인들도 참여하는 단체라는 진리는 구약 성경에도 암시된 바이었지만, 밝히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는 비밀이었다.

[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그리스도의 비밀의 내용이 다시 언급된다. 즉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이 말하는 이 비밀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이방인 편에서 볼 때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비밀이 계시된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기업을 이어받는 자들이 되고, 함께 몸의 지체들이 되고, 함께 복된 약속 곧 부활과 영생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은 주께로부터 이 복음을 받았고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일이었다. 바른 직분은 하나님의 은사를 따라 받는다. 인위적인 직분은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세움을 받은 자마다 그 동일한 은혜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택하신 것은 바울이 남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믿는 진실한 성도들을 핍박했던 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외식적인 입술의 고백뿐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겸손한 자이었고,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는 자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들어쓰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들어쓰실 수 없다.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자신을 크게 여기는 자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울에게 바로 이런 은혜가 임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겸손한 봉사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며 그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름과 영광에만 관심을 둘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결국 그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될 것이다.

[9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부터’라는 말은 ‘감취었던’이라는 말 앞에 두어져야 하며, 그 뜻은 영어 성경들의 번역대로 ‘오랜 시대 동안’이다. 전통사본에는 ‘만물을 창조하신’이라는 말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이 있다. ‘드러내게 하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이다. 본절을 다시 정확히 번역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오랜 시대 동안 감취었던 비밀의 계획이 어떠한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 하심이라”이다.

[10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이라는 말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었음을 보인다. 그러나 이제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그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깊고 넓은 지혜가 알려진다. 피조물들은, 심지어 하나님 곁에 있는 선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눈치채지 못했다.

[11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일 즉 이방인을 포함하는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창세전 곧 영원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전 의논을 상상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전 의논과 작정대로 온 세상에 충만한 이 구원의 일이 시작되었고 성취되고 있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복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그리고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 5:1의 말씀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또, 히브리서 10:19의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러한 은혜에 근거하여,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을 위해 당한 자신의 여러 환난에 대해 낙심치 말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달았다면, 환난의 현실을 인해 낙심치 말아야 한다. 환난은 의례 있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도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주의 진실한 종들이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 것이다. 예로부터 주의 진실한 종들은 항상 핍박과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주께서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셨다. 주의 종들의 고난은 주의 참된 성도들의 영광이다. 환난 중에 가지는 바른 믿음과 충성은 보배로운 믿음과 충성이다.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요점을 기억하자. 첫째로, 우리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기억하자. 이 비밀이 이제 사도들을 통하여 밝히 계시되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달은 바울의 겸손을 본받자. 참된 헌신은 겸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헌신은 단순한 열심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참으로 바쳐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결코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기를 소원하자. 참된 헌신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헌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헌신자와 봉사자의 바른 태도이다. 우리는 봉사의 댓가를 바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거저 주를 섬기며 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가 고난을 받을지라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한다.

14-21절, 바울의 기도

[14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러하므로’라는 말은 3:1의 ‘이러하므로’라는 말에 이어지는 것 같다. 그것은 앞장 후반부에 언급되고 3장 앞부분에서도 다시 반복해서 언급된 이방인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유대인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는 말씀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하늘에 있는 가족은 이미 믿고 죽어 천국에 들어가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고, 땅에 있는 가족은 현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늘에 들어간 이들은 승리하여 안식을 누리고 있고, 땅에 사는 우리들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살고 있다.

[15절]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전통사본에는, ‘이름을 주신’이라는 말 다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말이 있다. ‘이름을 주신’이라는 말을 볼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원본의 본문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이름이 있다. 사도행전 11장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얻었던 이름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삼위일체적 관계를 보인다. 이 명칭은 성경의 다른 몇 곳에서도 나타난다. 로마서 15:6,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고린도후서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거나 우리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가 친히 온전히 이루시는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필요성이 있다. 바울 사도는 단지 에베소 성도들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의 선한 결심이나 성실한 노력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밖에 없다. 나의 힘만으론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바울 사도의 기도의 첫번째 내용은, ‘성령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뜻일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인 것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성도 속에 오셔서 인치시고 ‘보혜사’로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신다. ‘속사람’이라는 말씀은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새 성향’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구원받은 영혼 속에 심겨진 의와 새 생명의 원리이다.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라는 말씀은 중생한 성도들의 속사람에게 연약의 도전이 있음을 암시한다. 중생한 사람은 영적 갓난 아이와 같아서 점점 자라가야 한다. 히브리서 5장 끝부분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는’ 영적 어린 아이 곧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의 확신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성도들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 곧 의의 말씀을 체험하고 선악을 분별하며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대조시켰다. 베드로전서 2:2은,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함으로 자라가야 할 것을 가르쳤다. 또 베드로후서 3: 18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했다.

성도의 연약은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육신의 연약’이라고 표현하였다(롬 6:19; 7:18, 22-24; 8:3). 이것이 속사람에게 도전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의 도전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런 연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신다. 그래서 확실한 지식과 믿음, 의와 선과 진실의 인격으로 굳게 서게 하시는 것이다.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바울 사도의 기도의 두번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이미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성도 안에 계신다. 그러나 성도는 또한 의식적(意識的)으로도 그와 연합해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15장에서 주께서 교훈하신 바이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 5).

믿음은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적, 의식적 태도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더욱 인격적, 의식적 연합을 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5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속에 늘 계시고, 그의 진리, 그의 십자가의 의(義), 그의 이름이 우리 속에 늘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믿음의 성도는 늘 하나님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바울 사도의 기도의 세번째 내용은, ‘사랑 가운데 굳게 서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말씀에서 ‘사랑’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본문의 ‘사랑’은 또한 그 사랑에 응답한 성도의 사랑도 포함할지도 모른다. 성경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했고(롬 13:10) 사랑은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귀한 덕목이라고 표현하였다(고전 13장).

바울은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구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어렴풋이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확실히 깨닫고 그 속죄의 복음을 확실히 믿고 그 사랑 가운데 확고하게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확실히 알고 믿지 않는 자는 예수를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

[18-19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원문과 영어성경은 우리 말 성경과 어순이 다르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말 성경은 원문이나 영어 성경의 본문에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고 보아서 순서를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뜻이 잘 통하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말은 앞절에서 말한 ‘사랑’ 곧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성도와 함께’라는 말씀은 모든 성도가 다 이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이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충만히 깨달아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넓이’란 하나님께서 각 민족, 각 나라에서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들에게 구원의 사랑을 베푸심을 보인다. ‘[그] 길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지속적이게 사랑하심을 보인다. ‘[그] 높이’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고상함과 가치를 보인다. ‘[그] 깊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심오함, 곧 인간의 머리로 다 측량할 수 없고 인간의 가슴으로 다 느낄 수 없는 그의 사랑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것은 곧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증거되었다. 그의 사랑은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주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몸과 생명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주셨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그 십자가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는 마지막 말씀은 특히 사랑에 관계하여 말씀한 것 같다. 즉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충만케 되기를 구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이다.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전통사본에는 ‘교회 안에서와’라는 말씀에서 ‘와’라는 접속사(카이)가 없다. 그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표현하였다. 야고보서에는 하나님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어 있다(약 1:5).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육의 것들을 넉넉히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요긴한 기도 내용이다. 이 내용을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하여 기도하자. ‘하나님이시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시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사랑 가운데 굳게 서며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4장: 교회의 일체성

1-3절, 겸손, 인내, 단합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라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과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표현은 실제로 신앙과 봉사의 삶을 사는 자로서, 즉 주를 위해 그리고 이방인들을 위해 자신을 바친 자로서 사심(私心) 없이 말하고 있음을 보인다. ‘권한다’는 표현은 냉정하기만 한 마음으로 딱딱하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뜨거운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권함을 보인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였다. 누가 그들을 부르셨는가? 창조주 하나님, 온 세상의 유일하신 대 주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그들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악된 몸과 마음을 가진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 어디에 이르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 빛의 세계, 곧 참된 지식과 도덕성이 있는 세계에 이르게 하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외적으로 그들의 귀에 들려지는 전도의 소리를 통해서가 아니고, 또한 내적으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고 구주 예수를 알고 믿게 하심으로써이었다. 이것이 에베소 교인들과 우리가 경험한 참된 구원이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4장과 5장에 걸쳐 그것이 바로 사랑과 거룩의 삶인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사랑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것을 그는 겸손과 인내와 단합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라’고 말한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온전한 겸손’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분적인 겸손이 아니고 모든 면에서의 겸손이며 일시적인 겸손이 아니고 항상 겸손함을 가리키는 줄 안다.

성도는 왜 겸손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과거에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이었고(엡 2:1)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에게 어떤 선한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엡 2:8).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참으로 깨달은 자라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도에게는 교만하거나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겸손은 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마태복음 11:29에서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빌립보서 2:6 이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속죄물로 주신 것은 겸손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마땅하다.

본문에서, 둘째로, 바울 사도는 ‘오래 참음으로 행하여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한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했고 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했다(4, 7절). 오래 참음이 사랑의 속성이라는 말은, 조급한 사랑은 부족한 사랑이라는 말이다. 참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린다.

오래 참음은 특히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준다. 잠언 10:12에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씀했고, 잠언 17:9에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말씀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8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다. 마치 탕자를 오래 기다리시며 참으시며 용납하셨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용납하시는 사랑의 심령이다. 하나님의 이 오래 참으심과 사랑과 용납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를 향해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할 것이다. 부족과 허물은 부족과 허물이지만, 그 부족, 그 허물을 용서해주고 덮어주려는 마음가짐이 참 사랑이다. 자신의 잘못을 참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는 언제든지 용서하는 것이 성도의 사랑의 인간관계이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단합과 일치를 말한다. 우리에게는 평안의 매는 줄이 필요하다. ‘평안’이라는 말은 또한 ‘화평’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불화와 분열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악된 일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10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일치와 단합이다. 갈라디아서 5:20에 보면, 성경은 육신의 죄악들 가운데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열거하였다. 어리석은 교만과 이기적 욕심에서 분쟁이 생기는 법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이다(요일 3:15).

본문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원어(헤노테스 투 프뉴마토스)는 ‘성령의 하나이심(oneness or the unity of the Spirit)’이라는 말인데, 아마 우리 말 번역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성령은 한 분이시며 모든 성도는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13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했다.

본문에 ‘힘써 지키라’는 말은 인간의 연약성을 암시한다. 성도들도 인간이며 교회도 인간들의 모임인지라, 교회가 분열하기 쉽고 성도들이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 빠지기 쉬움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주님의 교훈의 중심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주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것은 서로 용서할 것을 보이신 행동이었다. 서로의 잘못과 허물을 용서해야 단합이 가능하고 그래야 서로 사랑함을 나타낼 수 있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의 제자된 표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사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요 참된 교회의 표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단합은 진리 안에서, 의 안에서, 믿음 안에서의 단합이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의 단합이나, 의와 불의의 단합이나, 믿음과 불신앙의 단합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류의 단합을 허용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말씀했다(고후 6:14-16).

참된 일치와 단합은 진리 안에서와 의 안에서의 일치와 단합이라는 것이 에베소서 4장 후반부 이하에 나오는 교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11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교훈하였다.

참 사랑은 성결한 사랑이다. 불결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적 사랑, 정욕적, 감정적 사랑, 이기적 사랑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교훈하신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3절까지에서 강조된 겸손과 인내와 단합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겸손과 인내로써만 단합이 가능하다. 이로써 교회의 일체성이 유지된다. 참된 교회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으로 단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온전한 겸손과 온유가 필요하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함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성령께서 이미 주신 영적 일체성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이 겸손과 오래 참음으로 교회의 일체성을 힘써 지키자.

4-6절, 일곱 가지 하나

본문은 하나인 것 일곱 가지를 말함으로써 교회의 일체성을 증거하였는데, 이 일곱 가지가 다 교리적 주제이므로 교회의 일체성의 교리적 성격을 잘 증거하였다. 교회의 일체성은 영적인 동시에 교리적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은 하나이다.’ 이것은 교회의 일체성 즉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각 성도가 소속한 지교회는 달라도 구속받은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한 교회의 회원이다. 각 민족, 각 나라, 각 방언마다 각 교회가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다. 현실적으로 교파들이 여러 종류가 있어도 교회는 하나다. 택함 받은 죄인들은 중생과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한 몸 안으로 들어온다. 교회의 세례 의식은 한 몸 안으로 들어옴을 상징한다. 교회가 제명, 출교하여 교회 밖으로 내어쫓기 전까지 우리는 다 한 몸 안에 속한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진리와 비진리가 하나될 수 있는 것처럼 오용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은 하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인격적 영이시다. 그는 삼위일체의 제3위이시다. 성령은 인간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죄인을 중생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은 주로 성령의 활동이시다. 그는 우리 모든 성도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 격려자, 권면자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인도하시는 자이시며 교회를 부흥케 하시는 자이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성령 말고 다른 영들도 많이 있다. 사탄과 악령들이 그 영들이다. 그들이 곧 이단의 영들, 비진리의 영들, 미혹의 영들, 속이는 영들, 거짓말 하는 영들, 배교(背敎)의 영들, 혼돈의 영들, 더러운 영들이다. 오늘날 은사 운동은 성령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비진리의 포용과 속임과 혼돈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시므로(요 14:17)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운동은 진리 운동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그는 성경을 넘어서서나 성경에서 이탈해서나 성경과 배치되게 일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은 성경에 충실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진정한 성령 운동은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연구하고 강해하고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성경 말씀의 충실한 해석과 순종이 없는 운동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일에 관계치 않으신다.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부르셨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우리의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의 영생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이나 물질이나 돈이나 현재의 세상이나 세상의 부귀, 영화를 바라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으나 장차 영광 가운데 드러날 일들을 바라며 산다(고후 4:16-18). 모든 성도는 다 이 동일한 소망을 갖고 살고 있다.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시다.’ 다른 예수는 없다. 오늘날 불신앙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상상하는 예수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예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증거되신 대로의 주 예수, 그 분 한 분뿐이시다. 그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예수이시다. 그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예수이시다. 그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요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냄새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이시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이시며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이시고 부활하신 지 40일 만에 승천하신 예수이시다. 그는 하늘로부터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이시다. 그 외에 다른 예수가 없다.

그는 인간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은 예수이시다. 그는 참으로 ‘샤론에 핀 장미꽃’과 같은 예수이시다. 그는 죄가 없는 인격이시고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예수요 우리의 경배와 찬송과 기도의 대상이신 예수이시다. 그는 참으로 놀라운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한마디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대신 속량하신 구주이시다.

‘믿음도 하나이다.’ 물론 이단적 믿음과 정통적 믿음은 다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과 개신교의 신앙은 다르다. 현대 자유주의의 신앙과 보수주의의 신앙은 다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이단 종파들의 신앙은 다르다. 하나님과 사탄이 일치가 될 수 없듯이, 이 두 종류의 신앙들은 서로 일치가 될 수 없다.

또 개신교회들 내에서도 교파들간의 신앙적 차이가 있고, 심지어 한 교파 내에서도 작은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신앙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신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본질적 내용의 일치가 있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하는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는 데 일치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 그의 피의 대속, 부활,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 사역에 근거한 죄인들의 중생과 칭의, 성화, 영화, 그리고 마지막 심판과 몸의 부활과 영생과 지옥과 천국 등을 믿는다. 여기에 믿음의 일치가 있다.

‘세례도 하나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요일 1:7). 다른 이로서는 죄인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행 4:12).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혹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베풀어진다. 구원이 하나이듯이, 세례도 하나이다.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은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참된 세례는 예수의 이름으로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세례 하나밖에 없다.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다.’ 영원 자존하신 참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제1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방 나라의 모든 신들과 우상들은 다 거짓된 것들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계시된 분이시다. 참 하나님의 지식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와 신약교회를 통해서 이어져 왔다. 이방종교들에도 신에 대한 명칭이나 형식은 남아 있지만, 그 내용은 매우 잘못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참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고 참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라고 했다(요일 2:23).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는 ‘만유의 아버지’시다. 여기에 ‘만유’라는 말은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만유 위에 계시고’라는 말은 ‘모든 이들 위에, 초월하여 계시고’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와 능력을 보인다. ‘만유를 통일하시고’라는 말은 ‘모든 이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라는 뜻이다. 모든 일들을 사람이 결정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고 하였다(잠 16:33). 또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다(빌 2: 13).

전통사본에는 맨 마지막의 ‘만유 가운데’라는 말 다음에 ‘우리’라는 말이 있다. 즉 ‘우리 모든 이들 가운데’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와 동거(同居)하시고 동행(同行)하시고 동역(同役)하심을 증거한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일체성은 이런 일곱 가지의 하나에 근거한다. 우리가 한 하나님, 한 주, 한 성령을 믿고 섬기기 때문에, 우리가 한 소망, 한 믿음, 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이런 일곱 가지의 교리적 주제들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면서, 즉 교리적 일치를 추구하고 건립하면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일치와 단합을 이루어야 한다.

7-12절, 목사의 직분

[7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완성하기 위하여, 주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한으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신다. 이것은 특히 봉사의 직분에 있어서 그러하다. 성도들의 직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에 따른 것이다.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것은 다윗의 시편 68:18의 인용이다. 이 시는 메시야의 사역을 예언하였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킨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라는 말은, 다윗 당시에는 그의 원수들 곧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가리켰을 것이나, 오늘 본문에서는 메시야의 원수 곧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가리킬 것이다. 시편의 본문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는다’고 표현했으나,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셨음을 말한 것이다.

[9-10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전통 사본에는 ‘땅 아랫 곳으로’라는 말 앞에 ‘먼저’라는 말이 있다.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고, ‘그가 먼저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키든지 그가 무덤 속에 묻히신 것을 가리킨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들어가신 천국은 지극히 높은 하늘임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 곧 낙원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하였다(2, 4절).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충만히 이루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어떻게 충만히 이루시는가? 그것은, 그가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의 은사들과 직분들을 각 사람에게 주심으로써 이루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충만히 이루시기 위해 지금도 하늘에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신다.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은사와 직분은 ‘사도’이었다. 사도는 열 두 제자에게와 바울에게 주어진 은사요 직분이었다. 예외적으로 바나바도 두 번 사도라고 불리운 적이 있다(행 14:4, 14). 사도들은 복음의 선포자요 해설자로서 일하였다(롬 1:1). 열 두 사도들은 주께서 지상에 계실 때 세움을 받았으나, 주의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능력으로 사역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선지자’는 사도들과 더불어 복음 진리의 계시와 은혜를 받은 직분이었다. 선지자의 사역은 주로 미래의 예언보다 현실적 교훈이었던 것 같다. 유다와 실라 등은 선지자이었다. 사도행전 15:32은 기록하기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사도들과 더불어 신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불렀다(엡 2:20).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이다.

‘복음 전하는 자’는 빌립, 디모데, 디도 등과 같이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행전 21:8은 초대 교회가 뽑았던 일곱 사람 중의 하나인 빌립을 ‘전도자’라고 불렀다.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4:5에서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했다. 오늘날도 복음 전파의 특별한 사명을 느끼고 그 일에 전념하는 자들, 국내외 선교사들과 개척 전도자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 전파에 전념할 신실한 자들이 많이 요구된다.

‘목사와 교사’라는 원어(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는 한가지 은사와 직분을 가리키는 것 같다(원문에는 정관사가 하나만 나온다). 그것은 오늘날 목사와 장로에 해당한다. 성경적으로 목사와 장로는 한가지 은사와 직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둘은 다 본문의 ‘목사’에 해당한다. 본문의 ‘목사’라는 원어(포이멘)는 ‘양이나 소를 치는 자’ 곧 목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양무리를 돌보는 감독 곧 장로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4-16). 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치라’는 말(포이마이노)은 ‘돌보다, 인도하다, 다스리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장로와 감독의 직분을 보인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감독의 일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는 똑같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당회가 하는 일이다.

특히 목사와 장로를 ‘교사’라고 부른 것은 목회의 일에 있어서 설교가 중요함을 보인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장로들 중 특히 신학 공부로 훈련된 목사들의 주된 임무이다. 디모데후서 1:11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복음 전파자와 교사’라고 불렀다. 목사의 직분은 양들을 돌보고 성경 말씀으로 성실히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와 장로가 다같이 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며, 특히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 지식을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자들로서 성경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너무 천박한 실용주의(實用主義)에 물들어 있는 것 같다. 많은 교회들과 목사들은 성경 말씀에 대한 성실한 연구와 강해들보다, 육신적 만족과 외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불변적 진리와 교훈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인간들의 즐거움과 만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심히 비정상적이다. 교인들도 속화되고 교회들도, 목사들도 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참된 목사들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계시된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가감 없이, 바르게, 성실하게 가르치기를 힘쓸 것이다.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본절은 목사의 직분이 목표로 하는 세 가지 일을 증거한다. 그 세 가지 일이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온전한 영적 성장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1:28, 29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어그러진 인격을 완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한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 맞는 인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일이요 영적 성장의 일이다. 이것이 목회가 목표로 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오늘날도 설교와 성경공부는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오늘날도 성경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들과 목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믿는다(딤후 3:16, 17).

본절은 이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온전케 되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온전한 인격자들이 되게 하여 당신의 여러 가지 일들에 쓰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필요로 한다. 이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돌볼 교사들이 필요하다. 누군가 이 일을 위해 자신을 드려야 할 것이다. 또 교회 안에는 성도들을 서로 돌아볼 권찰들이 필요하다. 또 교회 안에는 교회의 여러 가지 문서사역을 위해 봉사할 전문적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들이다.

본절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숫적으로, 질적으로 다 해당하는 말이다. 숫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성도들은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을 주께로, 구주 예수께로, 교회로 인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한 명의 영혼이 주께로 돌아올 때마다 교회라는 영적 건물의 벽돌이 한 장 쌓여져 간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영혼들이 다 구원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은 숫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질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성도들은 각자 지식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온전케 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온전한 영적 성장은 온전한 몸의 건립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목사들을 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방법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최선용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도 참된 목사들은 시대의 풍조에 물들지 말고 성실히 성경 말씀만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길만이 교회가 부패치 않고 바르게 진행하고 부흥하는 길이다. 또한, 교회들은 신실한 젊은이들을 목사 후보자로 선택하여 바른 신학교육으로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들의 미래를 위한 좋은 준비이다. 이 준비가 없다면 교회들은 미래의 소망이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목사의 직분과 그 목표에 대해 밝히 증거하고 있다. 목사는 양무리를 돌보며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요, 그의 사역의 목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하게 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자들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의도하신 이 뜻과 이 방법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도 교회들이 목사들을 통하여 성경 말씀의 바른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성도들이 온전케 되고 하나님의 일들이 부족함 없이 받들어지며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13-16절, 완전한 사람

원문에서 이 부분은 12절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보충 설명하는 내용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목표가 ‘한 완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본절 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까지 이르리니’이다. 장성한 분량과 충만함은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인격이시며, 그에게는 도덕적 덕성이 충만하시다.

주께서 교회들에게 주신 목사들의 직분을 통하여 당신의 몸을 세우시는 목표는 무엇인가? 본문은 그것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완전한 사람이 되기까지’(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라는 말은 이러한 목회의 목표가 단순히 개인적 성화와 온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적, 단체적 완전에 있음을 보인다. 골로새서 1:28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지만, 그 곳에서는 각 개인의 온전함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개인의 온전함보다 단체적 온전함이 강조된다. 즉 온전한 사람들에 대한 강조보다 ‘한 온전한 사람’에 대한 강조이다. 목회는 성도 개개인을 온전한 사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를 전체적으로 ‘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말은 이러한 영적 완전함이 믿음과 지식의 일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뜻한다. 믿음과 지식의 일치, 곧 믿는 내용의 일치, 구원 지식의 일치, 신앙 사상과 신앙 고백의 일치, 신학의 일치는 완전한 교회에 필수적이다. 그것이 영적 온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역사적 신조들과 신학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이런 지식과 믿음의 일치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본절은 온전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비교하였다. 마치 어린 아이의 키가 자라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의 분량에까지 자라야 한다. 본절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충만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충만함을 가리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충만함을 본받을 수는 없으나 그의 인성의 충만함을 본받을 수는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덕, 즉 그의 의와 진실과 사랑은 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과 충만함은 교회의 영적 성장의 목표이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교회에게 이러한 영적 온전함이 필요한 까닭은 모든 인간적 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들은 과거에 어린 아이들과 같아서 사람들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방황하였었다. 사람들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사상들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들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인다. 그러나 이제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께 돌아왔으니 다시는 인간들의 교리들, 교훈들, 신조들, 사상들을 따라 방황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제 바른 지식과 믿음을 동반한 온전함이 필요하다. 교회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이라는 말은 14절과 대조시키는 말이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은 온전케 되는 과정을 보인다. ‘참된 것을 한다’는 원어(알레듀오)는 ‘참된 말과 참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사랑과 진실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아담과 하와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그 본래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을 잃어버렸고 심히 죄악된 사람으로 타락하였다. 그것이 ‘타락’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악된 옛 성품을 다 버리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 자라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은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인 것을 보인다. 교회는 자라가되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교회는 말씀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 그리스도의 말, 그리스도의 행동, 그리스도의 믿음,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거룩, 그리스도의 온유,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스도의 충성,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성화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의 이치를 사람의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몸을 자라게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머리가 상하면 몸이 자랄 수 없다. 그러나 건전한 머리는 몸을 성장케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좋은 머리, 이상적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몸된 교회는 정상적 상태에 있다면 머리 되신 그를 통하여 자라간다.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건립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힘의 근원이 되심을 잘 보인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성도들과 자신을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비유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나무로부터 도움을 입음으로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이치를 말씀하셨다. 물론 주께서는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실 것이다. 참으로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성장과 온전함은 단순히 인위적 행위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곧 성령의 도우심과 힘 주심으로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목사의 직분의 목표 곧 목회의 목표인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보충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목회의 목표가 교회를 단체적으로 ‘한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완전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장성한 분량의 완전이며 곧 그의 충만함이다. 교회는 이런 완전에 이르러야 한다. 즉 교회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영적 성장의 목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완전해져야 한다. 이러한 온전함은 일치된 믿음과 지식 안에서, 사랑과 진실 안에서, 또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이 밝히 보이는 대로, 우리 모두는 신앙생활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전체적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 즉 ‘한 완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일치된 믿음과 지식 안에서, 사랑과 진실 안에서,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이런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이신 교회의 목표가 이와 같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성경을 성실하게 가르치고 배우며 또 개인적으로도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7-24절, 옛사람, 새사람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본절은 이 부분 전체의 주된 내용이다. 그 요점은 ‘너희는 이방인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부터는’이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이 부분 전체에서 이방인의 특징들, 곧 구원받기 전 상태의 특징들을 여덟 가지로 표현하였다.

첫째로,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원어(누스)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이방인들은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 그러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후부터는 허망한 생각을 따라 사는 이방인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둘째로, 이방인들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져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다.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총명한 사람들도 참으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깨달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무지함 가운데 있다. 그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하나님도, 그가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의 목적도, 참된 도덕 원리도, 내세의 소망도 모르고 있다. 인간들 가운데 가장 박식한 학자들이나 위대한 사상가들도 이런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넷째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살며 하나님의 진리, 영원한 진리를 진지하게 찾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은 비교적 순수한 편이어서 어릴 때 바른 진리의 지식이 잘 전달된다. 그러나 성년이 된 후에는 그 고집스런 마음이 부숴지기가 참으로 어렵다.

다섯째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멀리 떠나 살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서 참된 거룩과 의와 선을 찾아볼 수 없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여섯째로, 이방인들은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도덕 감각이 없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있는 것 같지만, 자기의 이익을 따라서 그 도덕 감각은 억눌리고 마비된다. 만일 그들에게 도덕 감각이 있었다면, 그들은 도덕 사회를 건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심히 비도덕적이며 죄악되다. 마치 영적 나병환자처럼, 인간들은 도덕 감각을 잃어버렸다.

일곱째로, 이방인들은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고 있다. ‘방탕’이라는 원어는 ‘육욕, 호색’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인간 관계의 죄악들 중 첫번째는 음란이다. 부도덕한 인간의 모습은 한마디로 음란이다. 인간은 마치 육욕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자와 같다.

여덟째로, 이방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 ‘모든 더러운 것’이란 온갖 죄악들을 가리킨다. 죄악들은 도덕적인 불결이다. 그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인격을 더럽게 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부부관계, 가족관계, 나아가 이웃관계를 더럽힌다. 죄 없는 사회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지만, 죄악된 세상은 여러 가지 정신적인, 육신적인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의는 깨끗한 옷과 같고 죄는 더러운 옷과 같다.

이런 여덟 가지의 묘사들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이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런 이방인의 모습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방인처럼 행해서는 안된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처음 구원받았을 때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배웠을 때, 그는 우리가 이 모든 죄악된 것들로부터 떠나야 함을 가르쳐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님과 구주가 되셨다. 우리는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과거의 죄를 회개했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 곧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삶으로부터 회개하는 것을 그리스도께 배웠지, 이방인들의 행위를 따라 사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요 14:6). ‘그에게서 듣고’라는 원어는 ‘그를 듣고, 그에 대해 듣고’라는 뜻이다.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그에 대해 많이 들었다. 또 예수 안에서, 즉 예수의 진리 안에서, 그에 대한 믿음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본절 끝의 ‘받았을진대’라는 말부터 24절까지는, ‘받았으니 곧 . . . 입으라는 것이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즉 22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내용, 즉 복음의 결론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구원 초청이다.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구습(舊習)을 좇는’이라는 원어(카타 텐 프로테란 아나스트로펜)는 ‘이전의 생활 방식(혹은 행실)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썩어져가는’이라는 원어(프데이로메논)는 ‘부패되어 가는’이라는 뜻이다. ‘유혹의 욕심’이라는 원어(타스 에피두미아스 테스 아파테스)는 ‘속이는 욕심들’이라는 뜻이다. 욕심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너희는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이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자아(自我)를 말한다. 이것은 앞절들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모습들을 요약한 것과도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삶이었다. ‘벗어버리고’라는 원어(아포데스다이)는 과거 부정사로서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 자아를 가리키며,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구원받을 때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구원 사건이다. 구원은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이다.

[23절]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심령으로’이라는 원어(토 프뉴마티 투 노오스 휘몬)는 직역하면 ‘너희의 생각의 영’이라는 말이다. 영의 기능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이다. 본절에서는 그 중에 지식 혹은 생각이 강조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진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생각의 변화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었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는 현재 부정사로서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된다. 성화는 일차적으로 깨달음의 변화이다. 인간의 연약한 성질은 잘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깨달음은 많이 변했다. 하나님을 아는 생각, 자신의 부족을 아는 생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져간다. 심령의 새로움은 평생 계속된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은 새사람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의 내용임을 보인다. ‘진리의 거룩함’이라는 말은 ‘참된 거룩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의와 참된 거룩함’이다. 그것을 흔히 ‘본래의 의(義)’라고도 부른다. 구원은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입으라’는 원어(엔뒤사스다이)는 과거 부정사로서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그것은 지금 성도에게 명령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 믿기 전에 우리가 받았던 구원 초청의 내용이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구원 초청은 바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이었다.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사람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단회적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우리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 완전한 거룩함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물론 이 법적인 의와 거룩은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인격과 삶 속에서 의를 나타내어야 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자들은 실제로 새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화(聖化)다.

그러나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은 점진적이다. 물론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불완전한 의 때문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때문에 영광의 상태에 이른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첫째로,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생활과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활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두 길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죄악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의와 거룩의 길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은 전혀 다르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어진 구원의 변화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우리가 배운 바 구원의 초청은,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되어 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생각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명령대로 회개하고 우리의 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셋째로,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방인들을 따라 행하지 말고 옛사람의 모습으로 살지 말고, 날마다 성경 진리대로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처럼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자.

25-28절, 거짓말, 분, 도둑질에 대해

에베소서는, 교회가 (1)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세계적 단체요(교회의 보편성), (2)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한 몸, 한 완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하는 단체요(교회의 일체성), (3)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거룩한 단체임(교회의 성결성)을 증거한다. 에베소서 4장 후반부터는, 교회의 이 세 가지 속성들 중 세번째 것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그런즉’은 ‘그리스도를 배웠은즉, 새사람을 입었은즉 즉 구원을 받았은즉’이라는 뜻이다. 본절은 우리에게 거짓을 버리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거짓말로 불의한 이익을 취하여 물질적 부요를 누리려는 악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요즈음에는 어려운 자들에게 취업을 알선해준다고 속여 등록비를 취하는 악한 자들도 있다. 거짓은 항상 남에게 해를 준다. 거짓말로 남에게 잘못된 기대와 소망을 심어주었다가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날 때 그에게 큰 슬픔과 허탈함과 고통을 주는 일들이 있다. 거짓 결혼으로 신부와 신랑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일들도 있고 심지어 직업 소개소에서 젊은 여자들을 윤락가에 팔아넘기는 일들도 있다. 세상에는 거짓말장이들, 사기꾼들이 많다.

그러나 거짓말은 참으로 나쁜 악이다. 비록 세상이 거짓될지라도 사람들은 거짓말 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사람들은 정치가들이 거짓말을 잘하는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거짓말에 능숙한 것을 미워한다. 남녀 사이에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조금의 가치도 없다. 거짓보다 무서운 악은 없다. 사랑하는 친구인 것처럼 가장한 원수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하셨다(요 8:44). 거짓의 근원은 마귀이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였었다. 거짓은 마귀의 본성이다. 마귀는 거짓으로 가득한 자이다. 세상은 마귀의 손 아래 있으므로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거짓말 하는 자들을 반드시 철저하게,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 하는 자들이 많지만, 그들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계 21:27; 22:15). 그들은 다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성경에 밝히 선언되어 있다(계 21:8).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짓말은 지극히 합당치 않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삼가야 한다. 우리의 옛 죄악성은 거짓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에 익숙하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 덕목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생각하며 말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만을 말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참된 것만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본절은 우리가 분을 낼 때 조심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내어야 할 때가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며 엄히 책망해야 한다. 그것은 바른 신앙 교육에 필수적이다. 마태복음 5:22의 전통사본에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는 주의 말씀은 이유 있는 분노가 있음을 전제한다. 야고보서 1:19에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말씀도 정당하게 분노하는 것을 인정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죄악된 일들에 대해 진노하신다.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경건한 성도들로부터 강제로 이익을 취하는 종교 장사꾼들의 소굴이 된 것을 보고 격노하셨다(마 21:12, 13). 우리도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의분해야 한다. 우리가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분을 낼 때 말이나 판단이나 행동에 실수를 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과격한 감정, 미움, 지나친 말의 실수, 부족한 판단으로 인한 정죄, 심지어 살인까지 가능하다. 우리는 분노가 날 때 우리의 감정이 지나치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치우치지 않도록 조금 멈추어 생각하고 혹은 기도하면서 신앙적, 이성적 판단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죄악에 대한 우리의 분노가 형제 미움의 죄에 빠지는 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요한일서 3:15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분노할 수 있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잘못을 범치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 본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첨가하여 말한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분노의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상대가 깨닫지 못하고 사과하지도 않고 고치지도 않는 때라도,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로마서 12:19은 말씀하기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분노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 자기에게 해롭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하겠다.

[27절]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만일 사람의 분노의 감정이 미움, 과격한 말, 술취함, 과격하거나 파괴적인 행동, 살인 등으로 발전될 때 그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할 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은 항상 온유와 평화로 단장되어야 할 것이다.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도 신중히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할 것이며, 분노 중에라도 마귀가 우리를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본절은 도둑질하는 자가 돌이켜 제 손으로 수고하여 구제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도둑질은 보통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과 탐심, 또 쉽게 살려는 불성실한 마음에서 생기는 일이다. 돈 벌기가 어렵고 땀흘려 일하기는 싫기 때문에 남이 벌어놓은 것을 훔쳐서 쉽게 쓰려는 것이 도둑질이다. 이것은 불의한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다.

오늘날 사회 각 분야에는 도둑질이 가득하다. 기업인들은 이중 장부를 사용하여 기업의 이익을 자기 앞으로 몰래 옮겨놓는다. 피고용인들은 성실히 일하지 않고 부당한 이익을 얻기를 좋아하고, 때로는 심지어 불의한 이익을 취하려 한다. 이러한 일은 노사간의 불신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기업 전체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되었다. 기업주도 피고용인들도 다 성실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에게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치 못했다.

학교에나 지식 사회에는 지식 도둑들, 글 도둑들이 많다. 학생들은 성실히 공부하지 않고 부정행위를 통해 쉽게 점수를 따려고 한다. 이것이 지식 도둑질이다. 또 남이 수고하여 쓴 글들을 그대로 베껴 써내는 학생들이나 남의 글들을 그대로 표절하는 지식인들도 많다. 이것은 글 도둑질이다. 또, 오늘날 청소년들, 청년들, 심지어 지식 있는 어른들 세계에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불법복제하는 소프트웨어 도둑들이 많다. 이것들이 다 도둑질이다.

교회 내에도 때때로 도둑이 있다. 기증한 찬양대용 찬송가책들의 수가 줄어들고 방문자용 찬송가책과 성경책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 도둑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도둑질이라고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것, 허용되지 않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도둑질이다. 심지어 목사들의 세계에도 도둑질이 있다. 남의 설교를 마치 자기 것처럼 하는 것은 설교 도둑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도둑질을 다 버리고 회개하고 청산해야 한다. 우리는 성실한 수고의 댓가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시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했다(시 128:1,2). 이것이 바른 일이다.

그런데 본절은, 성도들이 이 정도에 머물지 말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는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교훈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 머물지 말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도둑질 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한다.

결론적으로, 25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내용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을 버리고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사실대로만 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분노의 감정은 잘못하면 지나치거나 치우치기 쉽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도둑질 하던 자들은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자기들의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항상 진실하고 의롭고 선한 자들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29-30절, 덕스러운 말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더러운’이라는 원어(사프로스)는 ‘썩은, 부패한, 나쁜, 불건전한’이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5:22에 보면, 주께서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라 하는 말은 아람어로 ‘빈 머리, 바보’라는 욕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형제에게 ‘라가’라고 말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33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는 또 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바알세불이 들렸다, 귀신의 왕이 들렸다고 비난하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책망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35절에서, 또 그는 계속 말씀하시길,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하셨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밖으로 흘러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격이 참 중요하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말은 인격과 함께 간다.

36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무익한’(아르고스) 말이라는 것은 ‘부주의한 말, 별 생각없이 내뱉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계획적인 악한 말은 엄한 심판을 받으려니와 부주의한 말도 심판날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마음에 찔리는 말씀이다. 우리가 조심을 하여 다듬어진 좋은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쁜 인격이라는 말씀이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말에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혀는 불과 같다. 혀를 잘 사용해야 한다. 모든 싸움은 혀에서 나온다. 혀가 잠잠하면 싸움이 날 것이 없으나, 혀를 한 번 잘못 놀리면 금방이라도 싸움이 생길 수 있다. “혀는 우리의 지체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고 표현했고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다루기 힘든]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했다. “이것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전통 본문--이와 같이 한 샘이 짠물과 단물을 함께 내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셨을진대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되겠는가? 더러운, 썩은 말은 우리의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좋은 말만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잠언 12:18에는,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한다’고 말씀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예절 있는 말을 해야 하고, 나이 든 분들에게 존대말을 사용해야 한다. 또 아내도 남편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좋다. 성경에는, 부모라도 아이들을 격노케 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세상적으로 흠 잡힐 것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 일에도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도록 성실해야 한다. 예절에 있어서도, 말씨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보다 못하면 어떻게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에베소서 본문은, 무릇 더러운 말들,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들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한다. 지키기가 어렵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절은 아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무엇을 건립한다’는 말로서 우리의 인격의 집을 건립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인격은 법적으로, 원리적으로는 이미 100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20점이나 30점 밖에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까지 배울 점이 많고 고치고 가다듬어야 할 점들이 많은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우리 자신의 인격 건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 말로 덕을 세운다는 것은 내가 말을 해서 남에게 유익을 끼쳐 남의 인격 형성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덕을 세우는 말’은 건설적인 말을 가리킨다. 덕을 세우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파괴하는 것이다. 함부로 말해서 남의 마음을 칼로 찌름같이 아프게 하는 말은 파괴적인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나쁜 인격자이다.

잠언에 보면,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다고 했다. 의인의 혀는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한 번 말을 하면 가치 있는 말만 나온다. 그러나 악인의 입에서는 가치 없는 말만 나온다. 악인의 말은 사람들이 좀 안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말인 반면, 의인의 말은 은과 금같이 가치 있는 말, 유익한 말이므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다. 또 잠언 12:18에는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고 했다. 양약은 좋은 약을 말한다. 우리는 천은 같고, 양약 같은 말을 하는 의인들이 되어야 한다.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원문에는, 30절이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된다. 더러운 말을 입밖에 내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더러운 말을 입밖에 내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게 된다는 것을 잘 암시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물론 말 때문에만 근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불경건한 행위, 죄악된 행위에 대하여 근심하신다.

본문에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특별하다. 성령께서는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 어떤 때는 ‘성령,’ 또 어떤 때는 단순히 ‘영’이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의 성령[거룩한 영]’이라는 특이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또 도덕적으로 성결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또 우리들을 거룩케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일이다. 죄인을 변화시켜 의인되고 성자되게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

‘영’하면 실감이 나지 않지만, ‘정신’하면 실감이 난다. 거룩한 정신이시며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신성의 영이 오셔서, 그 정신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서, 우리에게 거룩한 정신을 주시고 거룩한 마음, 거룩한 생각을 주시고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말씀한 것이다.

‘근심시키지 말라’는 것은 성령께서 인격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성령께서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안이나 혹은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오늘날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성령에 대해 두려움 없이 함부로 언급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힘이나 세력이나 기운이 아니시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근심시키지 말라.” 비인격적 존재는 근심시킬 것도 없다. 인격자만 근심할 수 있다. 인격은 지정의(知情意)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지식도, 감정도, 의지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기뻐하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신다. 스바냐 3:17에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즐거이 부른다’는 말을 영어 성경에는 ‘노래하신다’고 번역했다.

이런 말씀이 있는가 하면, 성경에 보면 반면에 근심하는 하나님이 나오신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 시편 78:40에는, “저희가 광야에서 저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라고 했고, 이사야 63:10에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말씀했다. 말로 죄를 짓든지 행위로 죄를 짓게 될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근심하시게 된다. 근심하시면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또, 본문은, “그[성령]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했다. 여기 ‘그 안에서’라는 말은 ‘그로 말미암아, 그에 의하여’라는 말이다. 즉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하여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이 곧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결재할 때 도장을 꺼내서 찍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나는 너를 구원하였노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과 같다.

그러면 그 효력은 언제까지인가? 그것은 ‘구속의 날까지’ 효력이 있는 인치심이다. 우리가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으셨는데, 그것은 우리의 성화(聖化)도 보장하고 우리의 영화(榮化)도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동일한 선상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법적으로 보장하셔서 실제로 예수 믿는 우리 중의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본문의 ‘구속의 날’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 즉 영화를 말한다. 우리는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지금 성화의 과정 속에 있고, 비록 이 성화가 지상에서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화 곧 영광스런 부활이 예정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지만 때때로 죄를 짓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갈등이 생긴다. ‘내가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이렇게 연약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 마음 가운데 진실히 주님을 믿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중심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염려할 것이 없다. 우리에게 혹시 부족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장하시고 우리의 100점 구원을 보장하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성령께서 오셔서 인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 8:30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자를 불러서 의롭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했다. 과거형으로 ‘영화롭게 하셨다’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영화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6:37이하에서,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자만 내게로 올 수 있고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복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제1 원인이신 하나님께서 긍휼로 선택하시고 은혜로 이끌어주셔야 된다. 이렇게 믿게 된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몸의 구속 곧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게 된다.

주님의 구원은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다. 주님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이 아니고 완전한 구원이다. 주님의 구원 계획은 다 그대로,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그 보증이 성령의 인치심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육신의 성질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성실함과 순종이다.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서 이제는 주님 뜻대로 살고 뒤돌아서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주께서 오라 하실 때 가기를 원한다. 주께서 오라하시니 회개하고 주를 믿는다. 또, 주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간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수가 많아도,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지 우리 자신은 알 것이다.

요한1서 2:15에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판연히 다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기분이 상해서 귀를 닫고 ‘너무 극단이다. 세상도 필요하지’라고 말하는데, 그것부터 깨지지 않으면 예수를 못믿는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그 두 길은 판연히 서로 다르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는지, 아니면 내가 세상을 좋아해서 ‘세상 없으면 못산다, 물론 예배당도 좀 갔다 와야 마음이 편하지만 세상 없으면 못산다’고 생각하는지 본인은 알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믿는 것 같아도, 심지어 예배당에도 잘 나오고 헌금도 꼬박꼬박 잘 드리는 것 같아도, 속이 텅 빈 교인도 있을 수 있다. 가룟 유다같이 주를 진심으로 믿지 않고 세상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진 교인이 있을 수 있다. 본인은 알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 엎드려 ‘하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요?’라고 여쭈어보면,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실 것이다. ‘그래, 그렇다’라고 하시든지, 아니면 ‘너는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믿지 않고 있다’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다가 그것들과 함께 지옥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영생의 복락을 누리기를 원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과 주 예수밖에 없다. 나의 행복은 하나님밖에 없다. 나의 보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요한1서 3:9, 10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했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고는 못산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의를 행치 않고는 못산다. 때때로 넘어지기는 하지만 또 다시 일어나지 않고는 못산다. 죄는 멸망이요 의는 생명의 표시이니,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좋은 사람 되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고자 하는 바른 중심이 우리 속에 있다.

본인의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 하고, 만일 없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진심으로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없는 구원은 없다. 구원을 받았으면 생명의 변화가 있다. 아멘의 응답이 있다.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심이 있다.

구원받은 증거는 성실함과 순종이다. 성실하게 순종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불성실하고 불순종하며 사느냐?--이것은 구원을 분별하는 기준과도 같다. 그러나 배교의 시대는 매우 혼란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성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고 불성실하게 살아도 되나보다는 인상을 가진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는 이런 자들로부터 돌아서야 했다. 그들과 같이 교제하지 말아야 했다. 또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말세에 사람들이 바른 교훈 듣기를 싫어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구원 받은 자들이 아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천국 갈 자들이 아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난다. 불순종은 믿음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자신에게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알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세상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알 것이다.

31-32절, “악독, 긍휼, 용서”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이라는 원어(피크리아)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뜻으로서 악독한 생각을 뜻한다. 거기에서 ‘노함과 분냄’이 나온다. 분노의 감정은 분노의 생각에서 나온다. 분노의 감정은 또한 ‘떠듬과 훼방’으로 발전한다. ‘훼방’은 남을 비난하는 악한 말을 가리킨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악의(惡意)’라는 말은 남을 해치려는 소원과 계획을 가리킨다. 이것은 남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을 해치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상의 악들은 점점 악화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모든 악독’이요, 그 다음에는 ‘노함과 분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의’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옛사람의 성질들이다. 이것들은 이미 새사람이 된 성도들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하다’는 원어(크레스토스)는 ‘유익하다, 온유하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프랑크노스)는 ‘다정하다, 인정이 있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인간 관계에서 취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인정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본문은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가르쳤다. 용서는 사랑의 인간 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만일 인간 관계에 있어서 서로 용서함이 빠진다면, 인간 관계는 삭막하고 황폐하여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도덕적 결함과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서로 용서함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인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서로 용서함에 대하여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 자리에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들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그 때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실 수 없다고 주께 말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주의 말씀을 듣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요청했다. 그 때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람이 거듭남으로 근본적인 죄씻음을 받은 후에는 날마다의 부족과 실수의 용서를 받으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주께서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서로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말씀을 하신 후에,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 사실은, 서로 용서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 요소임을 잘 보인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라고 말씀했다. 우리의 용서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8:23-25에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일로 비유하셨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데나리온을 60,000원으로만 계산해도 일만 달란트는 약 3조 6천억원이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며 보통 사람으로서는 결코 갚을 수 없을 금액이다. 지옥갈 우리의 죄는 이런 큰 죄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를 짓는 동료들의 죄는 100데나리온의 빚이라고 주께서는 비유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심히 큰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잘못하는 자들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는지, 한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는지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흔히,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며 열은 충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은 단순히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고,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용서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의 잘못을 무한히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원받기 전 상태 곧 옛사람의 성질들인 모든 악독, 노함과 분냄, 떠듬과 훼방, 모든 악의(惡意)를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옛사람의 잔재들이다. 우리 속에 참으로 구원의 새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우리의 옛것들을 다 추방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정 있는 자들이 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다. 특히,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옥갈 우리의 죄악들을 용서하신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정도의 잘못을 행한 자들을 용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5장: 교회의 성결성

1-2절, 사랑

[1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고, 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救贖)하신 것과, 성령께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중생(重生)시키신 것도 그러하였다. 선택과 구속과 중생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행위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실상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였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특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목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도덕성,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신 사랑이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그의 사랑은 참된 사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제물과 생축’이라는 원어(프로스포라 카이 뒤시아)는 ‘예물과 제물(혹은 제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가장 귀한 예물과 제물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사랑을 본받아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교훈은 주께서 친히 주신 새 계명의 말씀과 동일하다. 요한복음 13:34에 보면, 주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것은 주의 사랑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합당한 삶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곧 그의 선택과 구속과 중생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그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3-7절, 음행, 더러움, 탐욕

우리는 빨래할 옷들을 깨끗한 옷들 중에 두지 않는다. 우리는 설겆이 할 그릇들을 깨끗한 그릇 중에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죄악된 말들과 행실들은 주의 피로 거룩케 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합법적 결혼 관계 이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합법적 결혼 관계란 본인들의 동의와 일반적으로 부모들의 동의와 목사의 주례와 결혼 서약으로 이루어진 결혼 관계를 말한다. 결혼 관계에서의 성행위는 아름다운 사랑의 방법이지만, 결혼 관계 이외의 성행위는 음행의 죄악이다. 그것은 레위기 18장에 언급한 근친상간적 행위나 남녀의 동성애나 심지어 짐승과의 성행위도 포함한다. 물론 창녀들이나 혹은 남창(男娼)들과의 관계도 포함한다.

‘온갖 더러운 것’은 모든 종류의 더러운 악들을 가리킨다. 많은 경우에 성적인 부도덕에 관계될 것은 물론이다. 죄악된 것을 보고 들음으로써 생각과 감정이 더러워지는 것에서 시작하여, 말이나 행위의 불결까지 모든 더러운 악들을 포함한다. 말과 행위의 불결은 생각과 마음의 불결에서 나오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8), 또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했다(잠 4:23).

‘탐욕’은 좀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주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돈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의 영광,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탐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물질이 그들의 바라는 것 전부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은, 실질적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자라는 이름이라도 불리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 사람은 음란하다, 저 사람은 부도덕하다, 저 사람은 탐심이 있다’는 오해나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잠언에 보면,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고 말씀했다(잠 20:11). 우리는 모양으로라도 그런 부도덕하다는 오해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처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라고 본문은 말씀했다. ‘성도’라는 말(하기오스)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거룩은 도덕적 성결이다. 음란과 더러움과 탐욕은 거룩에 반대된다. 예를 들어, 거룩은 정당한 부부관계에서 가능하다. 성도들은 결혼을 존귀히 여기고 부부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해야 한다. 또 성도들은 일시적이고 헛된 이 세상의 것들 곧 물질과 세상 영광과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 곧 장차 이루어질 새하늘과 새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원어(아이스크로테스)는 ‘단정치 못함’이라는 뜻이다. ‘희롱의 말’은 농담을 가리키는데 특히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단정치 못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은 다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성도답지 못한 말들이다. 성도들은 이런 말들을 버리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여 그에게 감사하고 또 우리에게 선을 베푼 자들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5절]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리고 또 단정치 못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함을 너희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절은 말씀한다.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탐심이 돈과 세상을 신으로 섬기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 곧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진리이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 사도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했다(고전 6:9, 10). 갈라디아서 5장에서도, 바울 사도는 육체의 일들인 여러 가지 죄악들을 열거한 후에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했다(갈 5:19-21).

요한계시록도 이런 사실을 확실히 증거했다. 요한계시록 21:8은 말씀하기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21:27은 또 말씀하기를,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다. 또 요한계시록 22:15은 말씀하기를,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했다.

우리가 이런 진리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죄를 떠날 것이다. 우리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릴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힘쓸 것이다.

[6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헛된 말’이란, 예를 들어, ‘웬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 정도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갈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그것은 속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우리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일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모든 죄악들을 버리려 할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쓸 것이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죄악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 등의 죄악들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끝까지 참고만 계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가득한 사람의 죄악들에 대해 일어나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7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우리도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들과 함께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거룩하게 살고 절제하며 하나님이 주신 현실에 만족하며 오직 천국 소망 중에 감사해야 한다.

8-14절, 빛의 자녀들

밤과 낮, 어두움과 빛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다. 검정색과 흰색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영적 세계에서도 어두움과 빛은 밝히 분간할 수 있다.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 절과 연결된다. 즉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두움 자체이었다. 어두움은 무지(無知)와 부도덕(不道德)을 가리킨다. 즉 앞 부분에서 말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단정치 못함,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그들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므로 빛 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은 빛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었다(마 5:14). 어두움과 반대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으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이 빛의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과 의, 선과 진실로 단장되었고 오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사실이 이러하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한다. 그것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진 삶을 말한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생의 제일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기를 힘써야 한다.

[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 절의 내용을 보충 설명하고 있다. 문맥상 본절은 보충적 내용이다. ‘빛의 열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성령의 열매’라고 되어 있다.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인격과 행위의 열매이다. 그것은 빛의 열매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롬 8:14), 그 열매는 도덕적인 삶이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본절에 ‘시험하여 보라’는 단어(도키마존테스, 현재분사)는 내용적으로 8절 하반절과 연결된다. 즉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다. 빛의 자녀들다운 삶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의 기쁘신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과 행위를 시험하여 그것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지 확인하고 만일 그렇다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암 5:6),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14). 또 그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24). ‘공법’이라는 말은 ‘공의’를 말한다. 아모스의 말씀은, 하나님을 찾는 참된 경건과 의와 선을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라는 것을 밝히 증거한 것이다.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원문에서 본절은 ‘그리고’라는 단어(카이)로 시작한다. 이것은 내용적으로 앞에 나오는 명령어들과 이어진다. 즉 7절,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라’; 8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11절, ‘그리고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란 어두움의 일들이 열매 없는 일들임을 말한다. 어두움의 행위들은 선하고 유익한 열매들이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한 행위들이다. 죄악을 사랑하는 인간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헛된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한다. ‘책망한다’는 원어(엘렝코)는 ‘책망한다, 폭로한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어두움의 일들의 헛됨과 무가치함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책망해야 한다.

[12-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어두움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은밀하게 행한다. 공공연하고 뻔뻔스럽게 악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을 행할 때 자신의 행위의 악함을 느끼면서 행한다. 그러므로 그 악이 폭로될 때면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우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 ‘빛으로 나타난다’는 말(휘포 투 포토스 파네-루타이)은 ‘빛에 의해 나타난다’는 뜻이다. 죄의 죄악됨과 헛됨과 사악함이 책망될 때, 그것과 대조하여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난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는 믿는 자들 가운데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던 영혼이 거듭난 자들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은 깨어 불신앙의 세상 속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그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도덕성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지식 있는 삶,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한다. 첫째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둘째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의 생활을 미워하시고 빛의 생활을 기뻐하신다. 주께서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런 삶을 실천하려고 애써야 한다.

세째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열매 없는 헛되고 무가치하고 사악한 어두움의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행위들을 드러내고 책망해야 한다. 우리는 빛의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과 행동과 처신을 통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죄악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는 자들이 되자.

15-21절, 지혜 있는 자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원문에서 ‘자세히’라는 말은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처럼 ‘행할 것’이라는 말 앞에 두어야 한다. ‘자세히’라는 원어(아크리보스)는 ‘정확히, 부지런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옛날 영어성경은 ‘조심하여’라고 번역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 단어는 모두 ‘자세히’라고 번역되었다(마 2:8; 눅 1:3; 행 18:25; 살전 5:2). 본문에서는 ‘정확히’ 혹은 ‘조심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정확히 혹은 조심하여 행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지혜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나타낼 것이다. 지혜는 성도다운, 빛의 자녀다운, 구원받은 자다운 바른 행동들로 나타나고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성도답지 않은, 어두움의 사람들 같은, 세상 사람들 같은 그릇된 행동들로 나타나고 그것들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할 것이다.

[16-17절]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시간을 사라’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말 번역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장 잘 사용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 다음에,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이니라.’

악한 시대는 우리를 세속화시키려 한다.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는 성도들을 죄에 빠뜨리려 한다. 물질적 탐욕과 육신적 쾌락은 성도들의 믿음을 변질시키려 한다. 또한 악한 시대는 우리의 신앙적 열심을 식게 만들려 한다. 세상의 염려들은 성도들의 믿음을 약화시킨다. 세상의 바쁜 일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점점 주의 일에 참여치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악한 시대는 때때로 참된 성도들을 핍박한다.

덧붙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 악한 세상은 전도의 일을 크게 방해하고 있다. 오늘날 대중매체인 TV는 참된 하나님 지식과 구원의 진리 외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있다. 특히 죄악된 세상 풍조들, 옷차림, 술, 음란, 심지어 귀신 이야기들까지 전달하는 매체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구원 진리만은 제외되고 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다 전달될 수 있다. 단지 하나님의 진리 외의 모든 것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것이 악한 시대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정확히 맞는 행동을 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의 뜻은 일차적으로 구원받는 것이며,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모든 내용이다.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요 그렇지 못한 것이 어리석은 삶이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은 흔히 육신적 기쁨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잊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이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술 취하는 것은 방탕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거기에 방탕이 있으니’이다. 술 취함은 자기 통제력을 잃게 만들고 실수하게 하며 방탕에 이르게 한다(잠 23:29-35). 그러므로 성경에는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쳤다(고전 6:10; 갈 5:21).

성도들은 술 취함 대신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은 구원에 내포된 하나님의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위로자, 격려자, 돕는 자’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 참된 위로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엔 프뉴마티)는 ‘성령으로 계속 충만함을 얻으라’는 뜻이다.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어(플레루스데, 현재 수동태)는 계속적, 반복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가지는 일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일이다. 또 이 명령어는 수동적, 피동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에 있어서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우리는 성령에 피동되는 것뿐이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지혜의 삶은 성령 충만의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행위로 나타난다. 본절의 ‘시’는 시편을 가리킨 듯하고, ‘찬미’는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찬미 혹은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 그리고 그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신령한 노래들’은 ‘영적인 노래들’이라는 말로서 성도들의 신앙 생활 속에서 나오는 간증적 노래들을 가리킬 것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서로들에게 말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성도들을 향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생활에 교훈과 유익을 주게 하고 그래서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나타낸다. 본절과 비슷한 교훈인 골로새서 3:16은 원문을 직역하면 ‘모든 지혜로,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말씀했다.

본절에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우리의 입이나 목에서만 나와서는 안되고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할 것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주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그를 찬송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찬양대는 세상의 일반 합창단과 다르다. 그 의미가 다르고 그 가치도 다르다.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범사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즉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욥은 고난 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 벌거벗은 몸)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하였다(욥 1:21). 로마서 8:28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다.

본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한다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요 중보자이시며 그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그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고 우리의 삶의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로마서 8:32은 말씀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전통사본들의 일부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그리스도’ 대신에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피차 복종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 희생하는 것, 자신을 주어 남을 섬기는 것이다. 피차 복종하면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고 상대방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죄짓는 일은 하지 못한다. 죄짓는 일 외에는 피차 복종하여 오직 서로를 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15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지혜 있는 자들이 될 것을 교훈한다. 지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에 충실할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을 늘 받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항상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하고, 또 피차 복종하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우리도 지혜 있는 자들이 되어 성령의 충만을 늘 받아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하고 피차 복종하자.

22-33절, 아내와 남편의 의무

[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의 말에 대항하고 남편들과 충돌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비록 오늘 시대의 풍조에 비추어서는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아내들의 의무를 명백히 저버리는 행위이다. 우리가 주 예수께 그렇게 대항하거나 충돌할 수 없는 것처럼, 아내들은 주께 대한 복종의 태도와 똑같은 복종의 태도로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23절]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 곧 우리 모두의 구주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은 이치이다. 머리는 우두머리 곧 명령하는 위치를 뜻한다. 우리의 몸의 경우도, 머리가 명령하면 몸의 지체가 움직인다.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몸은 행동한다. 마치 머리는 군대의 사령관과 같고, 몸의 지체들은 부하 군인들과 같다. 사령관이 명령하면, 부하 군인들은 절대 복종하며 또 그러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들은 그들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사령관에게 복종치 않는 군인이 없어야 하듯이, 남편들에게 복종치 않는 아내들이 없어야 한다.

[24절]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그러나’라는 대조를 나타내는 말(알라)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에 관계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친히 구주가 되셨고 자신을 십자가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런 친밀한 사랑의 관계라고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대해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와 같이,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범사에’라는 말은 아내들의 복종이 무조건적, 절대적 복종이어야 할 것을 보인다. 남편들의 생각과 요구가 아내들에게 이해되지 않거나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라도,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들에게 필요한 단어는 오직 ‘예’라는 단어 한가지이다. 아내들은 조용히, 온유한 마음과 태도로 남편들의 말에 ‘예’라고 대답하면 된다. 아내들은 ‘예’라는 말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단지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의 경우이다.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죄 되는 일을 명하거나 요구할 경우, 아내들은 그 남편들의 말에 ‘예’하고 복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크신 주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내들이나 남편들에게 더 크신 주님이시며 그의 뜻과 명령은 우선적이다. 그러나 죄 되는 일 외에는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아내들은 그 남편들에게 ‘예’하고 복종해야 한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한편, 남편들은 아내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한다. 교회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치 못할 조건, 사랑치 못할 경우란 없을 것이다. ‘내게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 사도는 남편들의 의무를 설명하다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말씀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교회란 성도들의 연합을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영혼들이 이 속죄의 복음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얻어 거룩하게 되고 당신 앞에서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를 원하셨다. 그의 구원 사역의 의도는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주의 피로 구속받고 그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법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렇게 법적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비록 지상에서 이러한 노력은 불완전할 것이며 우리의 의와 완전은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지만, 우리는 교회들의 거룩과 완전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나 교회가 사상에 있어서나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성도들답지 못하며 지극히 교회답지 못하다.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을 실제적으로도 나타내기 위하여 성실해야 한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 즉 아내는 남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에서 보이신 진리이었다.

[29-30절]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0절에 ‘그 몸의 지체’라는 말씀은 전통 사본 본문에서 ‘그 몸과 그 살과 그 뼈의 지체’라고 되어 있다. ‘그 살과 그 뼈의 지체’라는 표현은 첫사람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말을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창 2:23). 물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육신적 관계가 아니고 영적 관계이므로, ‘그 살과 그 뼈의 지체’라는 표현은 비유적 표현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자기 몸을 사랑한다. 자기 몸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또 옷을 입혀 몸을 보호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이처럼 보호하시고 양육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31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말씀은 결혼의 원리를 보인다. 결혼이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일이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결혼이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독립 가정을 이루는 일임을 나타낸다. 결혼한 이들은 부모에게 의존적이어서는 안된다.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결혼이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는 한 몸이 아니지만, 부부는 한 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결혼을 통하여 이렇게 친밀한 독립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바울 사도는 결혼의 관계를 큰 비밀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래서 성경에는 종종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의 비유로 표현하였다(고후 11:2; 계 19:7, 8; 또한 구약성경의 아가서를 참조할 것).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생명과 풍성한 생명’(요 10:10)을 얻는 것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 큰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또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경외해야 한다. ‘경외하라’는 말씀은 존경하고 존중하라는 뜻이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을 경외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내들이 남편들을 말로나 생각으로나 행동으로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내와 남편의 의무는 복종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범사에 대항하지 말고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하며, 또 그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존경하고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편들은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남편들에 대하여 죄 되는 일 외에는 항상 ‘예’라고만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남편들은 아내들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그리고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남존 여비(男尊女卑)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가정의 질서에 대해 가르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서 남자가 머리가 되고 여자는 그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질 때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 가정에 머리는 하나이어야 한다. 가정에 머리가 둘이 될 때 갈등과 분쟁이 생긴다. 그러나 가정의 머리는 자기 몸을 사랑하는 머리이어야 한다. 즉 가정은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사랑이 있을 때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관계는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고 이런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 가정은 행복하다.

성도들이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실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 아내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가정 생활 속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고, 남편들의 믿음은 아내들을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 가정 생활 속에서 복종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섬기는 자들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복종과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자.

6장: 교회의 전투성

1-4절, 자녀들과 부모의 의무

[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원문에는 두번째 문장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옳기 때문이니라.’ 자녀들이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의 내용이며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생활 원리다.

신명기 21:18-21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기 27:16은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씀했다. 잠언 30:17도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했다.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저주받을 큰 죄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하라는 말씀은 첫째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근거와 이유를 보이고, 둘째로 부모에게 대한 순종의 한계성을 보인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방황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목자 되신 하나님께 돌아왔으니 이제는 우리의 주님 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자녀들에게 명령하며, 자녀들은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순종은 주 안에서의 순종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 부모보다 더 높으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대한 자녀들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순종이어야 한다. 만일 부모의 요구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수 없다. 그 때에는 순종보다 오히려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행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2-3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부모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들을 낳으시고 기르시고 교육하신 분들이시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의 그 사랑과 수고에 대하여 보답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일이다.

또 부모 공경의 계명은,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열 가지 계명들 중 다섯번째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사실 부모 공경의 계명은 인간 관계에 관한 계명들 가운데는 첫번째의 계명이다.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이 계명에서는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준 땅에서 오래 살리라’는 약속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의 계명을 강조하셨다. 사람이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과연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며 공경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잘 되고 오래 사는 복을 받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비들아’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주체, 즉 누가 자녀들을 교육해야 하는가에 대해 보여준다. 자녀 교육은 정부나 학교에 맡겨진 일이 아니다. 자녀 교육은 심지어 교회에 맡겨진 일도 아니다. 자녀 교육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맡겨진 일, 그것도 어머니에게가 아니고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이다. ‘아비들아!’ 아버지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 자녀 교육의 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자녀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비인격적인 행위들은 자녀들에 대한 학대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예를 들어, 자녀들을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무리하고 부당한 명령을 하거나 강압하고 위협하거나 또 감정적으로 때리는 행동 등이 비인격적 행위들이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 오히려 해가 되며 자녀들을 빗나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이중적 인격이 되기 쉽다. 그들은 부모에게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고 단지 겉으로나 가식적으로만 순종할 것이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지나친 체벌을 가진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나 전혀 체벌이 없는 자유방임적 교육의 양극단이 다 잘못임을 보인다. 우리는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교양’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교육, 훈련, 교훈, 징계 등’의 포괄적 의미를 가진 말이다. ‘훈계’라는 원어(누데시아)는 ‘경고, 훈계, 충고 등’의 뜻을 가진다. 우리는 주께서 성경에 가르쳐 주신 말씀을 따라 교훈하고 훈련하고 때때로 잘못을 경고하고 훈계해야 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또한 성경은 자녀들이 잘못을 행했을 때 정당하게 징계하고 체벌할 것을 가르쳤다.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늦기 전에]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 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은 자녀와 부모의 의무에 대한 것인데,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공경해야 하며,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함을 가르쳤다. 자녀들의 순종과 부모의 바른 양육,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다. 죄인들의 가정들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들의 마음이 부패되어 악하고 거역하며 배은(背恩)하며 거칠고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은 심령의 변화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들에게서 이런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기대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모에게 대해서는 좋은 자녀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해서는 좋은 부모들이 되어야 하겠다. 예수 잘 믿는 자들은 가정 속에서 그 믿음과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5-9절, 종과 주인의 의무

이 교훈은 물론 옛시대에, 노예 제도가 있었을 때에 종들과 주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신약 성경도 구약 성경과 같이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사회 제도의 개선은 좋은 것이지만, 성경은 혁명과 같은 사회 제도의 과격한 변화를 추천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의 기존적 질서를 존중하면서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종들과 주인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직장에서 하급자와 상급자의 관계가 종과 주인의 관계는 아니지만, 우리는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뜻이 거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5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종들’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직책상 아랫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종들의 의무는 한마디로 주인에게 대한 순종이다. 종들은 주인에게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가?

첫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종들이 주인을 존중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순종하라는 뜻일 것이다.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순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려면 먼저 주인을 향해 두려워하고 떠는 마음이 필요하다.

둘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성실한 마음’이라는 원어(하플로테스 테스 카르디아스)는 ‘마음의 단순함, 성실함, 혹은 너그러움’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나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말고 오직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것이 종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기 위해 성실히 힘써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사회 윤리이다. 육신적 주인이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러나 종들은 육신적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순종해야 한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에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한다.

[6-7절]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넷째로, 종들은 주인을 ‘단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앞의 세번째 교훈에 대한 보충과도 같다.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할 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고 또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순종하고 주를 섬긴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의 순종과 봉사, 즐겁고 기쁜 순종과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교훈대로 사회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직업의 현실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주를 섬기는 일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주께서는 사도를 통하여 우리의 선한 행위들이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보상은 단지 종교적 봉사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세속적 직업에서의 선행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에서 감사하게, 성실하게, 보람되게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보상은 마지막 날에 주실 보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도 기대할 만한 보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대로 착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현세와 내세의 복을 약속하셨다(딤전 4:8).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종들에게만 두려움과 성실과 단 마음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주인들에게도 상당한 것을 요구하셨다.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종들이 주인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보인다. 그것은 주인들이 종들에게 이중적으로 행하지 말고 공의롭고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종들이 주인에게 정당하고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듯이, 주인들도 종들에게 그와 같이 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들이 종들을 정당하게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잠언 29:21에는,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주인들이 종들에게 부당하고 무리한 책망이나 위협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인정 없는 윗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며 주인의 직분을 남용하거나 악용해서도 안될 것이다.

주인들이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될 이유는, 땅의 주인들의 참 주인, 크시고 높으신 주인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또한 너희 자신의 상전[주]’이라고 되어 있다. 하늘에 참 주인께서 계시다. 그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살진대, 어떻게 주인들이 종들 앞에서 교만하고 부당하고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5절부터 9절까지의 요지는, 첫째로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주 그리스도께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단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선행에 대하여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말고 진실하고 공정하고 선하게 다스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크시고 참되신 주인께서 계시고 그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오늘 우리의 세속적 직업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훈이다. 우리의 처한 현실이 무엇이며 우리의 직업과 직장이 어디이든지 간에, 우리가 아랫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윗사람들에게 이런 원리로 행해야 할 것이다. 즉 두려움과 떨림으로,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단 마음으로 주를 섬기듯이 윗사람들에게 순종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윗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아랫 사람들에게 같은 원리로, 즉 위협하지 말고 부당하고 무리한 책망을 하지 말고 공정하게 진실하고 선하게 겸손하게 처신하며 그들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 본문의 교훈대로만 한다면, 세상 생활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되며 직장들이 얼마나 밝아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사회 윤리를 주셨는가?

10-24절, 교회의 전투성

에베소서의 이 마지막 부분은 교회의 전투성에 대해 계시한다. 교회는 세계적이며 하나이며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상에서는 전투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교회의 일부분은 이미 천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10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전쟁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힘이다. 전쟁은 대체로 힘의 대결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 영적인 전쟁도 그러하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신앙 인격에 있어서 강건함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 인격이 어리고 약하면 작은 어려움에서도 불안해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 인격이 자라서 강건하면 불안이나 낙심이나 좌절이 없고 어떤 싸움에서든지 인내하며 승리할 것이다.

성도들이 강건해질 수 있는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그는 천지의 대주재, 주권자이시며 통치자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빌 4:13, 전통 사본). 그의 힘은 전능의 힘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거하는 자들, 그로 말미암아 힘을 공급받는 자들은 능력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증거하기를,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하였다(사 40:28, 29).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이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한다. 마귀는 지혜와 능력이 있는 천사이다. 마귀는 궤계 곧 간교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대적하기 위하여’라는 원어(스테나이 프로스)는 직역하면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완전 무장해야 할 필요성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져서 넘어지지 않고 이겨서 서기 위함이다.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본절은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싸움의 성격이 어떠함을 보인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다음 절들에서 설명하는 대로 영적이고 도덕적인 무장이다. 성도들에게 그런 무장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싸움의 성격은 영적이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인간들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이 세상 나라들의 권세자들과 그들 배후에 있는 악령들이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를 범죄케 한 이래 인류 역사상 줄곧 온 세상을 주관하고 죄악된 세상이 되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날도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혼란시키려고 열심을 다하고 있다.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사탄과 악령들이 참된 교회들을 대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악한 날, 곧 배교와 혼돈의 날, 환난과 핍박의 날이 올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주께서 명하신 모든 일을 다 완수하고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지 않는 자들은 그 날에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범죄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입는 모든 성도들은 이기고 서게 될 것이다.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본절 이하에서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첫째로, 그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고 말했다. ‘진리’라는 말은 ‘진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세계는 진실의 세계이다. 성도에게 진실이 없으면 그는 이미 성도가 아니며 그의 영적 싸움은 이미 진 것과 다름이 없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며 거짓말의 명수이다. 거짓은 곧 마귀 자녀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필요한 무장은 무엇보다 먼저 진실이다. 진실로 허리띠를 띠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어렵다.

둘째로, 본문은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말씀했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마귀는 불의와 죄악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도전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의롭게,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 안에서 의만을 추구하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은 이미 마귀와의 전쟁에서 진 자들이다.

[15절]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셋째로, 바울 사도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말했다. ‘평안의 복음’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복음’이라는 뜻인줄 안다. 사탄과 악령들은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평의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서 신을 신고 다니듯이 그 은혜를 꼭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이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넷째로, 바울 사도는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말했다. 불신앙은 인류의 근본적인 죄이었다. 불신앙에서 결국 불순종이 나왔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행위들은 여전히 부족 투성이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모든 불화살들을 막아낼 길은 구주 예수를 믿는 믿음밖에 없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다(요일 5:4, 5).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다섯째로, 바울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말씀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리킨다고 본다. 투구를 쓴 자들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은 마귀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귀의 밥이다. 우리는 구원의 투구를 쓰듯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 자들을 마귀가 어떻게 하겠는가?

여섯째로, 사도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했다.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다. 그것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하여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서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 하시며 구약 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 성경이 이처럼 중요한 무기라면,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듣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는 이들은 칼 없이 전쟁에 나가려는 자들과 같다.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그들의 전쟁 결과는 보나마나 실패이다. 많은 이들이 실패의 삶을 살면서도 성경 읽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일곱째로, 사도는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마지막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라는 말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많이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무시로’라는 원어(엔 판티 카이로)는 ‘항상, 언제나’라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을 암시한다. 과연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 중에 기도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는가?

기도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휴전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귀는 결코 휴전하지 않을 것이다. 마귀에게 휴전은 없다. 마귀는 결국 기도하지 않는 이들을 자기 밥으로 삼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신앙의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기도는 성도들이 꼭 갖추어야 할 무장이다.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를 무서워한다.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는 말씀은, 원문을 직역하면,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한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며’이다. ‘모든 인내로’라는 원문은 기도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함을 보인다. 주께서도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눅 18:1-8).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치 말고 오래 참으면서 기도해야 한다. 또 ‘깨어 있으며’라는 원문은 기도가 곧 깨어 있는 일임을 증거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자이다.

기도의 내용에 관하여, 본문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먼저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선한 일인가?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이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행할 수 있는 선행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신앙 생활과 더불어 다른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위하여 기도하자.

[19-20절]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특히, 대사도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매인 사신’으로서, 자신의 전도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것 또한 복음 사역자들을 위한 가장 좋은 협력의 일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기도보다 더 중요하고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복음 사역자들, 곧 목사들을 위한 기도란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전해야 할 복음 진리의 내용을 담대히 말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리킨다.

목사와 그의 설교를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없다. 왜냐하면 설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며 영혼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고전 1:21; 골 1:28, 29).

[21-22절]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바울 사도에게는 진실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두기고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바울의 모든 사정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러한 진실한 형제들과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위해 뜻을 같이할 충성된 자들이 필요하다.

[23-24절]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 사도는 이 편지에서, 다른 편지들과 달리, 특이한 인사로 끝을 맺었다. 보통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었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그는 은혜와 평강과 더불어 ‘믿음을 겸한 사랑’을 첨가하여 기원하였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성도들에게 꼭 있어야 할 요긴한 덕들이다(고전 13:13).

또한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하였다. ‘변함 없이’라는 원어(엔 아프다르시아)는 ‘신실하게, 순수하게, 항상’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은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신실하게, 순수하게, 항상 사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치 않는 자는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10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은 교회의 전투성 곧 성도들의 영적 싸움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들이 아니고 마귀와 악령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의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하겠다. 둘째로, 성도들의 싸움의 목표는 그 싸움에서 져서 넘어지지 않고 이겨서 서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 특히 복음 전도의 일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의 목표도 바로 알아야 하겠다.

셋째로, 성도들의 싸움의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해지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 의, 하나님과의 화목, 믿음, 구원의 확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복음 사역자들 곧 오늘날 목사들의 설교를 위한 기도가 교회의 전투에서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싸움의 방법을 바로 알아서 주 안에서 강해지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자!



저자 소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B.A.).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 (B.D. equiv.).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 졸업 (Th.M. in N.T.).

미국, Bob Jones University 대학원 졸업 (Ph.D. in Theology).

계약신학대학원 교수, 합정동교회 담임목사.

[역서] J. 그레셤 메이천, 신약개론, 신앙이란 무엇인가? 등 다수.

[저서] 기독교 교리개요(7판, 2008), 기독교 윤리(3판, 2007), 현대교회

문제(3판, 2007),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2008),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2004), 신약성경강해(2005), 구약성경강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여호수아, 사사기-룻기, 사무엘서, 열왕기,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기독교 신앙입문, 이단종파들 등.

에베소서 강해

2000년 3월 5일 초판

2011년 7월 25일 수정

저 자

김 효 성

발 행 처

옛신앙 출판사

Old-time Faith Press

www.oldfaith.net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합정동교회

02-334-8291, 9874

oldfaith@oldfaith.net

등록번호: 제10-1225호

ISBN 978-89-951985-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背敎)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옛신앙 출판사 서적 안내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제3판]. 176쪽. 6,000원 (보급가 3,000원).

김효성,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171쪽. 6,000원 (보급가 3,000원).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330쪽. 6,000원 (보급가 4,000원).

김효성, 기독교 윤리. [제3판] 229쪽. 4,000원. 6,000원 (보급가 3,000원).

김효성, 신약성경강해. 18절판. 1192쪽. 26,000원 (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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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전도서 강해. 86쪽.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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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이사야 강해. 496쪽.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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