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같이 차가운 경제 수치에 매몰된 세상에서 집은 세상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외치는 민초들의 염원입니다. 서울이라고 하는 대도시에서 자기 집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가로등 밤길이 분명 사치스러워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화려한 집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다양합니다.
① 풍우한서를 막고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건물 ② 모든 동물의 보금자리 치는 곳 ③ 칼집, 벼룻집 같이 작은 물건을 끼워 두거나 담아두는 곳 ④ 바둑에서 완전히 자기 차지가 된 곳 ⑤ 가족, 가정 구성에서 불리우는 말 ⑥ 자기 아내를 가리키는 말(집사람) ⑦ 출가한 손아래 여자를 시집의 성(姓)밑에 붙이는 말 ⑧ 물건을 파는 가게를 나타내는 말(묵집, 술집) 등으로 의미전달이 널리 속용(俗庸)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동물들이나 날아다니는 조류들도 집짓기를 먼저하고 짝짓기를 하는가 하면 짝짓기와 집짓기가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집은 이 땅에 사는 인간들과 모든 동물들에게까지 삶의 터전 이상의 가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집은 삶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예외 없이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숙자들에게도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집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최후의 심판 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1. 땅에 있는 장막집이 있습니다.
본문 5장 1절에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장막집 』(스케누스, )은 일시적으로 필요에 따라 치는 천막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장막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인 천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천막에다 비유한 것은 그가 천막 짓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막 집은 무너지는 장막집입니다. 여기 『 무너진다 』는 말 '카타뤼에인'은 개인적인 종말에 따르는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주의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장막을 초라한 인생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4장 20절에 『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유목민들이 장막을 쳤다가 옮길 때에는 다시 걷어서 옮기듯이 우리 인생도 일시적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장막을 치고 살듯이 이 땅에서 일시적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장막처럼 일시적인 처소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에 『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라고 했습니다.
잠시 영혼이 머물다가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장막 집 곧 우리가 가진 육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체는 영혼이 머무는 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나가는 것이고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0-31절에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0-11절에 『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두가 없어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결코 이 땅에 있는 물질은 인간들이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모든 육체는 필연적으로 이미 종말의 한 날을 받아놓고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 예외나 특례는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시편 103편 15절에 『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9편 47-48절에 『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셀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시 146:3). 이사야 2장 22절에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2.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본문 5장 1절에 『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낡아지고 썩는 것처럼 우리 육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가 썩는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도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원히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에 『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 』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육체 밖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기 19장 26절에 『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해서 여기서 말하는 이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실존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하늘의 처소, 즉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천국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천국에는 손으로 지은 장막 집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신 있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늘의 집은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시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은 첫째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미 약속한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부활 신앙에 따른 개연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이 땅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생활환경과 고난당하는 자신의 삶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다보고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영원한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3.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에 사는 자들의 생활 수칙이 있습니다.
1)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5장 2절에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탄식 』은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토해지는 자유와 희망의 몸부림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기를 소망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영원한 집을 사모한 나머지 빨리 이 땅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4절에 보면 분명히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탄식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애원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 속에서 재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살아서 그 몸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주님 고대가'에서 "낮이나 밤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는 가사도 주의 재림을 갈망하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에서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신학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이 잘 정돈되지 아니하면 절대 순교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이 정돈되지 아니하고도 어느 정도의 교회생활을 할 수 있으나 순교적 신앙생활은 할 수가 없습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 5장 6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는 흔히 그 장소의 복락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주님 자신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절에 『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자는 주님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천국을 주님과 관계없이 그냥 천국으로 만족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이원론(二元論)자입니다.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주님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진선미와 복락의 근원체가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가까운 사상이다. 의례히 그 복락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었고 또한 주님이 거기 계신 것 때문에 그 복락이 보존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3)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본문 5장 7절에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는 "『 이는 』(가르, )이라는 말은 물론 이유 접속사(理由接續詞)이다. 몸에 거할 때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곳을 사모하는 마음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믿음에 의하여 아직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볼 뿐이라는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만 관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에 대해서는 앞서간 자들의 증거에 의해서 체험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우리는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증거를 받아 믿게 되는 하늘의 사실들은 지상(地上)의 보이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감히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거룩하고 고상한 것들입니다.
4)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5장 9절에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의요 삶의 목적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대요리 문답 1문). 여기 『 힘쓰노라 』는 말은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에 『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5) 주의 일에 미쳐버려야 합니다. 본문 5장 13절에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집중하게 될 때 비보통한 상태처럼 보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6-17절에 『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사도 바울을 미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4-25절에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생들은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일에 미치든지 세상일에 미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두 곳에 다 미칠 수 없고 두 곳에 다 안 미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6) 오직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본문 5장 14-15절에 『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인의 값을 해야 합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단이 되고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6:19).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육체는 썩어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흙으로 만든 육체로는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몸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체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체 밖에서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곧 하늘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이미 이 땅에 하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심령천국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 땅에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적 집합체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영원한 집을 제공받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 교회는 하늘의 영원한 집과 병행선상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장막 집(육체)에 있을 때는 땅에 있는 교회가 우리의 집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의 집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나 하늘에 있는 집은 모두 우리의 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한 우리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오 집사와 최 집사가 결혼을 했을 때 "we just got married"(우리는 방금 결혼했어요)라고 쓰여진 커플 티를 선물했습니다. 이들은 이 커플 티를 신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신혼 여행지에서 입고 다녔을 것입니다 . 이 문구는 결혼했다는 사실적 명제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충실하게 이루어 가야한다는 당위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집이 있다는 사실은 집의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분명한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한다는 당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명예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아버지의 말씀에 의해 그 수칙과 규범대로 힘써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