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5. 경건(딤전3:16)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22:18

5. 경건(딤전3:16)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는 ‘경건’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는 사람의 태도,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의 태도,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것에 대해서 존경의 태도가 경건이다.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순종하는 태도가 경건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경건을 엄숙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에 나보다 서너 살 집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기도를 할 때는 항상 목소리를 떨면서 했다. 그분은 경건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서울로 올라온 다음에 그 사람이 주도를 해서 그 교회의 전도사님을 쫓아냈고 그 불쌍한 전도사님은 화가 나서 시골의 논밭을 팔아 와서 바로 밑에 교회를 하나 더 세웠다. 여름방학에 내려가 보니까 교회가 둘이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결과였다. 전에도 나에게 와서 그 전도사님을 내쫓자고 했지만 나는 비록 그때 어린나이였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실 것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손을 쓰지는 말자고 했고 그 집사님도 할 말이 없으니까 돌아갔다. 그런데 내가 신학교에 온 후에 바로 작업에 들어가서 그런 불상사가 생겼다.

 

1. 생명의 능력의 내적 원인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함

경건을 외모로만 취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 경건은 생명의 능력의 내재적인 원인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지 겉모양만 엄숙하게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였다. 하나님을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면 당연히 속에서 우러나서 그분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덕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의 태도를 보면 ‘저것이 무엇인데 저 사람들이 저렇게 존중하게 여기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인 것이라도 우리가 만약 성경책을 변소에 놓아두고 그것으로 밑을 닦는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우리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무슨 부적이나 되는 것처럼 성경을 베고 자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지나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면으로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이 맞다. 종교 안에서는 종교가 안보인다. 멀리서 보면 산이 보이지만 산 속에서는 산이 안보인다. 깊은 산에 들어가면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다. 어렸을 때 보길도에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혼이 난 일이 있었다. 보길도는 숲이 굉장히 울창한 곳이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고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갈지 몰라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종교 안에서 종교를 보는 것은 편협될 수 있고 잘못될 수 있다. 기독교가 기독교를 말하는 것보다 세상이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말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지 그들을 지옥에나 갈 놈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눈은 그들이 더 밝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 사람들이니까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다. 믿음에 눈이 어두워졌고 은사에 눈이 어두워졌으며 성경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별별 일이 다 생겼던 것이다. 성경으로 재판을 하고 심판을 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 일들이 다 성경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숲에서는 숲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 안에서는 안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우리 교회의 다른 점이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고 교회 같지 않다고 한다. 교회 같지는 않은데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다. 그 말이 나쁜 말만은 아니다. 나도 우리가 어떤 테두리에 갇힌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초창기에 내가 잠바만 입었던 이유는 목사라는 이름과 그 태도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가도 목사는 표가 난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TV에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잠바만 입고 말씀을 했던 것이다. 평범하고 보통 사람과 같으면서 자기 안에 내용이 있어야 되지 겉모양만 꾸며서 내용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모양만 있고 생명과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

경건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을 표현한 생활이 경건’이다.

 

가. 주 예수님의 실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였다. 이것이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경건의 실례다.

 

1) 그는 육체로 나타난바 되심

그는 육체로 나타난바 되셨다고 하였는데 이 육체는 창세기 6장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셨던 육체와 같은 육체다.

육체가 된 것은 거역의 상징으로 부정적인 말이다. 그래서 ‘육체’라는 말은 하나님을 거역한 상징으로 쓰여졌다.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을 육체가 되었다고 한다. 육체라 해서 우리의 몸뚱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상징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을 지칭해서 육체가 되었다는 하는 것이다. 육체는 자기밖에 모른다. 남이 아무리 배고프다고 해도 나는 배부를 수 있다. 내가 배고프다 해서 남도 배고픈 것이 아니다. 육체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생리적이고 기계적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배고픈데 너는 왜 배가 안고프다고 하느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체는 기계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둘을 합해서 한 덩어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배고플 때 나도 배고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굶어도 더 배고픈 사람이 있고 덜 고픈 사람이 있다. 마른 사람보다 뚱뚱한 사람이 더 배고프다.

육체는 기계적이고 독립적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른다.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고 하나님과 연계되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생명나무를 거절하고 지식의 나무를 먹었다. 지식은 독립적이다. 선생과 제자 사이도 지식으로는 연계가 안된다. 배울 때는 어쩔 수 없이 배우지만 배우고 나면 제자가 선생 위에 올라가는 수가 있다. 지식이기 때문에 연계가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육체는 독립의 상징이다.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은 독립적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같이 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어디서 무슨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구제불능이 된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 고쳐질 수 있는데 무슨 음성을 들었다거나 무슨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절대로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1992년 10월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해프닝이 그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 손바닥에 92년 10월 28일이라는 글자를 새겨주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일본 사람과 결혼한 자매인데 남편은 일본에서 혼자 살게 두고 미국으로 어디로 평생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보니까 기도를 하다가 “나는 너만 사랑한다.”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초창기에 우리 교회에도 몇 번 왔었는데 그 말이 박혀 있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사람이 돼야 사람의 말을 들을 텐데 신이 되어 버렸으니까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육체는 죄악과 거역의 상징으로 하나님과 원수로 행한다. 왜 육체가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그것은 육체의 한계성을 사람이 수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더 넘어가 보려고 하다가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술을 담구고 어느 시기가 넘어가면 초가 되고 마는 것처럼 지나치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있을 때 천사들에게 멸시받았고 하나님께도 버린바 되셨으며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셨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셨다. 육체가 된 사람은 독립적이 되었고 자기밖에 모르게 되었으며 누구와도 연계될 수 없게 되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신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하나님은 영적인 신이라면 사람은 기계적인 신이 된 셈이다.

 

2) 사람은 육체로써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창조되었음

그런데 사람은 육체로써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 육체로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육체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육체가 있는 사람이라야 경건할 수 있지 육체가 없는 사람은 경건할 수 없다. 사람은 육체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자인 것이다. 육체는 거역의 상징이고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의 상징이다. 그런데 바로 그 육체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니 이것이 모순인 것이다.

육체로 표현되지 않은 하나님은 허황해질 수 있다. 인격화되지 않은 하나님은 허황해질 수 있는 것이다. 허황해지면 알라와 여호와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분이 여호와인지 알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지나오면서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지만 그분 자신은 본 일이 없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금방 바알을 섬긴 것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그들에게 혜택을 주던 분을 여호와라고 불렀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보니까 가나안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바알이었다. 그들이 볼 때 여호와나 바알이나 같았다. 그래서 바알을 섬겼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 상황을 보고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하였다.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까 농경민인 그들이 훨씬 더 안정되어 있었고 잘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바알이라는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겼다. 사실은 이름만 바뀐 것이지 내용은 같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가는 사람이 있고 부처님을 믿는다고 절에 가는 사람이 있지만 내용은 같은 경우가 많다. 절에 가서 비나 교회에 가서 비나 빌러 가는 것은 같다. 부처님이 더 영험하다고 생각하니까 절에 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교회에 가는 것뿐이지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육체로 표현될 때만 구체적으로 표현되실 수 있다. 육체가 있어야 구체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구체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긴 이름을 붙인 이유는 구체성 때문이다. ‘하나님’이라고만 하면 누군지 모르니까 구체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로 표현되지 않으면 허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육체로 표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자기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줄 아는 것이다. 그분들은 그렇게 음성을 들었다고 해도 지금 우리는 우리의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을 수 없고 모세와 같을 수 없다. 어떻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되겠으며 어떻게 이백 만이나 되는 민족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겠는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로 표현될 때만 실제적인 하나님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육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가 잡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잡을 수도 알 수도 없다. 알콜을 마시면 취하지만 그대로 두면 날아가서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알콜을 물에 타서 술병에 넣어둔다. 우리가 마실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두면 알콜이 다 날아가 버린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알콜을 보존하는 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술은 물에 알콜을 섞어 놓은 것이다. 물 속에서는 알콜이 날아가지 않고 보존된다. 예수는 하나님을 보존하는 육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실 수 없다. 알콜 원액을 마시면 목구멍이 타서 죽는다. 하나님을 그냥 마시면 죽는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 이유가 그것이다. 물에 적당히 타서 도수를 낮추어야 마시면 기분이 좋게 취하지 95%의 알콜을 그대로 마시면 죽는다.

하나님을 통째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과 직거래하려는 생각은 95%의 알콜을 그냥 마시겠다는 생각과 같다. 진짜 만나지 못했으니까 살아있는 것이지 진짜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 그러므로 육체로 표현된 하나님만 실제적인 하나님이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냐 아니냐에 있다. 여호와나 하나님이나 같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냐 율법이냐 하는 차이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할 수 없다. 어느 하나님이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느냐, 아니면 모세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로 표현될 때만 실제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실제적인 하나님을 떠나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직통해 보려는 것이다. 금식을 하고 철야기도를 해서 무엇을 보았다고 하고 무슨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들이 만나서 교제하는 내용이 다 그것이다. 나도 꿈을 꾸어 보려고 했지만 나는 꿈이 맞지 않는다. 맞는 꿈은 생리적인 꿈뿐이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꿈을 꾸는데 나는 꿈으로 간이 나쁜지 콩팥이 나쁜지 안다. 왜냐하면 어떤 약을 먹으면 몸에 금방 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약이 몸에 효과가 없으면 꿈에 그 약이 어디에 들어가서 어디에 해를 주는지 아니까 내 꿈이 실제적인 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꿈은 절대로 안맞는다. 옛날에 절에 있을 때 이빨이 빠지는 꿈을 꾸었다. 이빨이 빠지는 꿈을 꾸면 부모가 돌아가신다고 해서 하루 종일 초조해 했지만 부고가 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이빨이 왕창 다 빠지는 꿈도 꾸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꿈이 척척 맞는 사람도 있다. 내가 교회에서 나올 때 정 목사님이 푸른 초원이 있고 거기에 고목나무가 있는데 고목나무가 잘리고 거기서 새싹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나에게 좋은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렇게 되었다. 고목은 잘렸고 새 순이 났다. 그러나 꿈은 확실성이 없으니까 우리는 꿈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 꿈이 맞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신뢰를 두면 안된다. C.C.C에 있을 때 이창용 형제가 상담을 하자면서 하는 말이 꿈을 꾸면 그대로 맞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그 꿈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이 맞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점쟁이나 무당을 하려면 몰라도 보통 사람이 생활하기는 어렵다. 만약 교통사고가 나는 꿈을 꾸면 아침부터 하루 종일 교통사고 때문에 걱정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생활이 안된다. 그러나 꿈은 꿈이지 현실이 아니다. 꿈이 잘맞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신뢰하게 되면 공연히 거기 말려들게 된다.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통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거기 말려들어가기 시작하면 인간을 상실하게 된다. 신령할지는 몰라도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성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의 인간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는데 인간성이 상실되면 무엇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겠는가? 우리의 일생은 인간성을 보존해야 하는 시기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성을 보존해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별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참 사람이라고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볼 때는 옳다고 보는데 이방인이 볼 때는 옳지 않다고 보면 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아도 참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이런 사람으로 교회가 건축돼야 건전한 교회가 될 수 있지 신령하다는 것들로 건축해 놓으면 이상한 귀신판이 되고 만다. 실제로 꿈을 꾸었다고 하고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있다. 그러나 뒤로 가면 영적인 난장판이 되고 만다. 서로 자기가 맞다고 하기 때문이다. 계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오고 저런 사람에게는 저렇게 온다. 그러니 누가 맞는지 어찌 알겠는가? 고린도전서를 보면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나온 계시도 있고 뒤에 나온 계시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최근에 나온 계시를 따르라고 했지만 그렇게 되면 옳은 교회가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이나 예언, 병 고치는 능력 등 여러 가지 은사가 있었던 교회다. 그래서 시끄러웠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중심을 잃어버리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 어디로 끌려다닐지 모르는 것이다. 종교생활을 해 보신 분들은 그런 경험을 해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데 한참 끌려다니다 보면 자기 번지수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로 표현될 때만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그래서 이것이 위대한 비밀이라고 한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한 것은 ‘위대하다, 경건의 비밀이여!’라는 것이다. “위대하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비밀이여! 위대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여!”

육체로 표현될 때만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인격으로 표현되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이 되시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닐 때는 불을 내릴지 물을 내릴지 모르는 무서운 하나님이 되신다. 구약성경에서 잘못된 불로 제사를 드리려던 이백오십 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게 하실지 모른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 예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고 하셨으나 그렇게 되면 인격적으로 표현되셔야 한다고 한 성경이 어떻게 응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말 안듣는 놈은 한 방 조져서 “예,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신이 되고 만다. 아무리 전도를 해도 안될 때는 ‘불이라도 한 방 보여주면 믿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알지도 못하면서 빡빡 우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한 번 쳐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때 우리의 인내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죽음이 필요하다. 거역의 육체로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이 없이는 표현이 안된다. 결국은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불을 내려 버리면 그 사람은 무서워서 복종하겠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거역의 육체가 순종의 육체로 바꾸어져야 하는 때가 그때다. 내 생각대로 해 버리면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되고 말기 때문에 내 생각이 죽어야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신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 이것이 경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것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시다. 불을 내리시는 것을 보라!” 하고 표현하게 하려고 나를 부르신 것도 아니고 한 방에 조지는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전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불이나 물을 내려서 표현하려면 나의 죽음이 필요없다. 능력만 있으면 된다. 나도 옛날에는 능력을 간구했다. 교회 집사님들이 기도할 때마다 “우리 전도사님에게 바울과 같고 베드로와 같은 큰 능력을 주셔서 큰 역사를 일으키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고 실제로 그런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 되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능력을 절실히 원했다. 누구나 해 보면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이 전파되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능력을 받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능력을 받는 길은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뜨거운 불이라도 받아야 그것을 써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많이 믿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을 보고 그 신 앞에 엎드리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르다. 그런 일은 어디에도 있다. 모슬렘에도 있고 유대교에도 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것과 다른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주님으로 믿게 하려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표현해야 한다. 불덩어리를 내리려면 예수가 없어도 된다. 말 안들으면 한 방 쳐버리면 되지 예수도, 십자가도 필요하지 않다. 힘으로 눌러서 된다면 십자가가 왜 필요하겠는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내 힘으로 못하니까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 할 수 있으면 왜 내가 죽어야 하겠는가? 육체로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나의 죽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육체로 하나님을 표현하려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예수의 하나님이 되셨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도 인격적인 하나님이라야지 공중에 돌아다니는 막연한 하나님이어서는 안된다.

거역의 육체가 순종의 육체로 바꾸어질 때만 우리를 통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이 증거될 수 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다. 불도 내리고 물도 내리신다.”는 것을 전하는 시대가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새 언약의 일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거역하던 육체를 순종하는 육체가 되게 함으로 하나님을 표현한 생활이고 태도다.

 

3) 하나님은 교회로서 사심

인격적인 하나님은 교회로서 사신다. 교회로서 사신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살아내는 생명이신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시는가? 원론적으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교회로 살아계신다.

우리가 살아내는 생명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로 살아내는 하나님이다. 거역하던 육체가 순종하는 육체로 바뀌어서 살아내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교회의 연합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다른 사람과 연합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연합하려면 나의 죽음이 없으면 안된다. 거역의 본성, 나의 생각과 주장이 죽지 않고 어떻게 남과 연합하겠는가? 내 생각이 있으면 남도 생각이 있고, 내 주장이 있으면 남도 주장이 있다. 내가 잘난 것이 있으면 남도 잘난 것이 있다.

세상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다 자기는 잘났고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한다. 다 남이 못났고 남이 잘못했다고 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연합이 안된다. 그러므로 연합하는 교회생활은 우리의 육체로 사는 생활이다. 영들끼리 만나는 생활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사는 생활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내는 생명이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는 연합된 교회다. 연합되려면 함께 심겨져야 하는데 함께 심겨지는 것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죽는 자리에도 함께 죽고 사는 자리에도 함께 사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요12:24). 심겨질 때 나는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산다. 그러므로 교회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집이요 가족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교회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가!

항상 하나님이 나를 따라다니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신이 내 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계시는가, 아니면 주님이 자기 안에서 말씀하시는가? 요즘은 “주님이 내 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주님이 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거나, “주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한다. 잘못하면 속는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한 것을 말하면서 주님을 담보로 해서 자기 말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속에 들어와서 생각을 해 주시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 있는지 모른다. 중동 국가에서 무역을 할 때도 제일 어려운 것이 그것이라고 한다. 언제 돈을 주겠다고 하지 않고 “알라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알라의 뜻이 언제일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함께 심겨지고,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우리의 생각으로 살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산 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영으로 지으시지 않고 산 혼으로 지으셨다. 산 혼이니까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기능을 갖고 있어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기능이 없으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다. 생각도 못하고 판단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표현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혼은 건전해야 한다. 느끼는 것도 건전하게 느껴야 하고 보는 것도 건전하게 봐야 한다. 그래서 건전하게 표현해야 한다.

색맹은 색맹인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빨간 안경이나 파란 안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정상적으로 보지 못한다. 어려서 성격형성 과정에서 잘못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좋은 것을 보아도 좋게 보지 않는다. 자기 속에 비틀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보아도 정상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도 그렇게 듣는다. 그래서 우리의 혼이 건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혼은 굉장히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혼이 죽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하셨다. ‘목숨’으로 번역된 이 말은 ‘혼’이다.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혼을 잃으면 얻을 것이나 그 혼을 보존코자 하면 잃는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혼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영이 죽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혼이 죽는 것이다. 즉 내 생각, 내 느낌, 내 계획이 죽는 것이다. 타고난 생각, 타고난 느낌이 죽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그 느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람이 건전치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와도 건전하게 듣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듣게 된다. 사람의 기본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가 평생 간다. 그래서 무슨 말을 들어도 정상적으로 듣지 못하고 사랑을 받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항상 의심한다.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는 아이는 결혼을 해도 남편의 사랑을 의심한다.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자가 준비되지 않았고 그 상자 자체가 병들어서 순수하지 못하니까 항상 의심을 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혼을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혼이 건전치 못하기 때문에 처리돼야 하는 것이다. 야곱이 평생 연단을 받았던 것은 혼, 즉 야곱의 생각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혼이 처리된 것이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 하면 될 줄 알았지만 실패했고 자기 생각대로 저렇게 하면 될 줄 알았지만 실패했다. 후사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10년을 기다렸으니 아브라함의 혼으로 생각해서 오래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혼으로 생각해서 당시의 풍습을 따라 하갈을 데려다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우리의 혼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 살이 되었을 때의 아브라함은 자기의 혼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대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살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집이고 가족이다. 하나님의 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교회가 곧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바 된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구름이나 혼령으로 나타나시지 않고 육체로 나타나신다.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 이것이 교회다. 결국 교회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건전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나.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심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셨다.

성경에는 그가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다고도 했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주관적으로 느끼고 들은 것이지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들은1 것이 아니다.

 

1)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롬1:3-4)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셨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다. 로마서 1장 3-4절에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였다. 이것은 객관적으로도 확실하게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이다. 만약 그분이 주관적으로 혼자 느끼고 들은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믿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객관적으로도 확실하게 입증되셨다. 이것이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셨다는 의미다.

종교인들이 잘못되기 쉬운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객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 혼자 “나는 너만 사랑한다.”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하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기는 옳고 좋겠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그를 하나님이 인정하셨다고 보기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인정돼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객관적으로도 인정돼야지 주관적으로 ‘나는 옳다.’고 고집하면 안된다. 아무리 자기가 옳다고 생각해도 남이 옳지 않다고 하면 객관적으로 그 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옳으니까 네가 백 번 말해도 소용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고집불통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남이 말할 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다. 나는 내가 A라고 알고 있어도 남은 나를 A+라고 알 수도 있고 A-라고 알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집불통이 안되려면 남이 하는 말을 인정해야 한다.

 

2) 그 영에 이끌려 마귀와 싸우시고 승리하심(마4:1-11)

예수님은 그 영에 이끌려 마귀와 싸우고 승리하셨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시험을 받는다는 것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잘못해서 사탄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당한 것이고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마귀와 전쟁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영에 이끌려서 마귀와 싸우셨다. 이것은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려면, 정말로 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면 마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로 영이 순수하다면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싸우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그분이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객관적으로 우리가 알게 된 이것은 그분이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셨다는 증거다. 이 영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이다. 마귀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원수다. 우리는 왜 지음받았는가?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지음받았다.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마귀와 싸우게 하기 위해서 구원하셨다. 나를 왜 부르셨는가? 마귀와 싸우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전하게 하나님 안으로 들어왔다면 ‘우리의 일은 마귀와 싸우는 것’이라고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영에 이끌려서 마귀와 싸우려고 광야로 나가셨다. 그리고 그분은 세 가지 시험에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세 가지 시험에서 예수님께서는 능력이나 신비가 아니라 온전하게 인격으로 완전하게 사람으로 사탄을 꼼짝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사탄에게 승리하셨는지 분명히 보았으니까 우리도 인격으로 승리해야 한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격 자체를 내놓으면, 나의 위치를 내놓으면 우리는 저절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분이 이미 승리하셨으니까 우리는 그 승리를 얻어오면 되지 우리가 따로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무장해서 마귀와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우리를 무장한다 해도 마귀보다 강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우리 조상 아담이 마귀에게 속았겠는가? 우리보다 수가 훨씬 높은데 그렇게 해서 마귀를 이길 수 있겠는가? 개가 아무리 훈련을 해도 호랑이를 이길 수 있겠는가? 백날 훈련해봤자 호랑이에게 물리면 한 방에 죽는다. 마귀를 능력으로 이기려는 것은 마치 개가 호랑이를 이기려는 것과 같다. 마귀는 능력으로가 아니라 인격으로 이겨야 한다. 예수님도 능력으로 마귀를 이기려고 하셨다면 광야로 가실 필요 없이 불을 한 방 내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오직 인격 앞에서만 굴복한다.

우리는 그분이 그 영에 이끌려서 마귀와 싸우시고 승리하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의롭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다. 불도 아니고 총도 아니며 능력도 아니다. 우리의 인격으로 마귀를 이기게 하시려고 지으셨다. 그러므로 지으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대로 하신 것이 그분의 의로우심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분을 의롭다고 하셨고 우리도 그분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다.

 

3) 영원하신 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히브리서 9장 14절에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라 하였다. ‘영원(αίὼν)’이라는 말에는 ‘참되다’는 의미가 있다. ‘영원하신 영’은 참 영, 진실하신 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영으로, 진실하신 영으로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자기의 생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영으로 드리셨다.

생각으로는 드릴 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께 생각으로 자신을 드리겠는가?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인데 우리와 같은 혼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겠는가? 그분은 진실하신 영을 통해서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래서 그분은 의로우신 분이다. 자기 혼자 산에서 드렸다면 의롭다고 할 수 없다. 그분은 진짜로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 십자가로 오라고 하실 때까지 드리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를 부르셨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때 그분은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도 아무 말이 없습니까? 나는 이제 떠납니다.’ 하시고 가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살았고 당신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아버지라고까지 부르고 애원해도 대답이 없습니까?’ 하시고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 그 자리를 지나서 골고다까지 가셨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자리까지 가셨다. 그러려면 진즉 돌아서지 왜 원망을 하셨는가? 거기까지 가지 않고 돌아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죽음이 앞에 있는데도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십자가로 가셨다.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 이것이 그분의 의로우심이다.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 사람을 보고 의롭다 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 사람을 보고 불의하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셨다고 인정하게 된다.

 

4)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심(고전15:45)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고 마지막 사람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분은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통해서 입증된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영접하고 알았는데 우리 안에서 다른 생명이 살고 있다. 분명히 껍데기는 그대로인데 속에서는 다른 사람, 다른 인격, 다른 생명이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그분의 영이 와 있다고도 하고 내 안에 새 생명이 왔다고도 한다.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 거듭났고 부활했다.

부활을 기독교에서는 최종적인 부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부활했다고 하면 이상하다고 할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다(고전15:31). 날마다 죽으면 날마다 부활한다. 그렇지만 이 부활은 기독교 안에서는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마지막 부활만 믿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가능하면 우리가 부활했다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말로 인해서 복음이 가리워진다면 굳이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가 증명하는 일이다. 내 생명이 증명하고 내 삶이 증명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주관적인 일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일이다.

 

다. 천사들에게 보이심

1)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수종들었음(마4:11)

예수님께서 마귀와 싸워 이기신 다음에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수종들었다. 천사들이 수종들었다는 것은 천사들에게 보이셨다는 뜻이다. 천사들에게 자기를 보이고 “보라! 사람이 무엇인가 보라!”고 하신 것이다.

천사들은 보았다. 그전까지 천사들은 사람을 무시했다. 천사는 영물이니까 죽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다. 신과 같은 존재가 천사다. 그래서 천사들은 나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을 무시했다. 숨이 코에 붙어 있어서 죽으면 그만인데다 거역하는 육체를 가졌으니 멸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사람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천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다른 것들이 다 떠나갔다.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을 보면 다른 것들은 다 떠나간다. 전에 나는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역을 하다 보니까 그런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인격을 보고 나는 거기서 해방되었다. 기도를 해서 불덩어리가 내려오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런 능력은 나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밟혀서 죽는 것이 낫지 불덩어리를 내리는 굉장한 능력을 행하는 것은 내 영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많은 짐이 벗어졌다. 더 이상 능력을 구걸하려고 기웃거릴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나는 더 좋은 것을 보았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마귀가 떠나고 천사들이 수종드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마귀가 떠났는가? 불덩어리를 보고 마귀가 물러간 것이 아니라 이 인격을 보고 물러난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없는 능력을 얻으려고 애를 쓸 때는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웠는지 이 사람 말도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입신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영계가 혼란되어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이 인격이 보이니까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게 되었다. 번민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어졌다. 그때 내가 대구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구로 오기가 쉬웠던 것이다.

내가 일을 생각했다면 대구로 오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첫발을 동대구역에 내딛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히말라야시다였다. 한 번도 못보던 나무가 축 늘어져 있는데 그 자태가 귀족적이었다. 히말라야 시다를 보면서 ‘이곳이 남국이구나. 참으로 좋은 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로 올 때 나는 아무 부담이 없었다. 두려움이나 염려나 걱정이 전혀 없었다. 그때 울릉도로 가라고 했어도 나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앞에 보인 것이 확실해서 다른 것은 아무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구 생활이 쉬웠던 것이다. 만약 대구에 와서 일을 하려고 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나사렛 형제들은 나를 끝까지 후원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뒤에서 자기들이 도와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 보자고 수근거렸을 것이나 나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돈을 쓸 일이 없으니까 도움 받을 일이 없었다. 나는 말씀만 전하면 되니까 그들이 후원을 하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2년 동안 있으면서 그들에게 손을 벌린 일이 없었다. 일을 하려면 그들의 후원을 받아야 하지만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다면 그들을 달래거나 휘어잡거나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럴 능력이 없었으니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나는 말씀만 전하면 되니까 그들이 오든지 말든지 도와주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우리의 목표가 한 인격이 되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없어진다.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수종든다. 그 이후로 나는 천사에 대해서 늘 비하하고 깎아내렸지만 천사들이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귀신도 붙을 사람에게나 붙지 아무에게나 붙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사람도 아무에게나 술주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마귀도 그렇다. 붙을만한 사람에게나 붙지 아무에게나 붙는 것이 아니다. 붙어도 소용없는 데는 붙지 않는다. 귀신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나 오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천사들의 순종을 받으셨다. 사람은 천사들의 순종을 받을 자다. 천사는 구원 얻을 후사들을 도우라고 만들어 놓으셨다(히1:14).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들의 위치에 있지 않으니까 늘 사람을 비웃고 비난했던 것이나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도울 자들이다.

 

2)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음(계5:6)

사도 요한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서신 것을 보았다.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섰다는 것은 그 중심에 어린양이 섰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확실히 우주의 중심이 누구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우주의 중심, 하늘의 중심에 어린양이 서 있다.

우리의 하늘의 중심에 어린양이 서 있으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사람마다 각자의 하늘이 있다. 하늘은 굉장히 많다. 그래서 하늘들(heavens)이라고 했다. 나의 하늘이 있고 여러분의 하늘이 있다. 김 씨의 하늘이 있고 이 씨의 하늘이 있다. 그 하늘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 나의 하늘의 중심에는 어린양이 서 있다. 그러니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호랑이나 늑대가 서 있다면 문제가 되지만 어린양이 서 있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3) 천사들이 찬양함(계5:11-14)

사도 요한은 죽임을 당하신 이가 찬양받는 것을 보았다. 우리도 죽임을 당하신 이가 찬양받는 것을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바로가 찬양받는 것을 보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지만 어린양이 찬양받는 것을 보면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어린양을 보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바로가 영광을 받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쪽으로 좇아다닌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살림도 다 팔고 사돈의 팔촌의 살림까지 다 팔아서 좇아다닌다. 그 사람 옆에 있는 친척들은 다 피해자가 되고 만다. 사업하는 사람 옆에 있는 친척들도 그렇다. 그 노란 불꽃을 보고 찾아가는 사람 곁에 있으면 같이 불나비가 되고 만다.

우주의 중심은 어린양이고 죽임을 당하신 이가 찬양을 받는 것을 보면 인생이 바뀐다.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어도 이것을 보지 못하면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예배당에 가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보는 것은 세상이니 어떻게 인생이 바뀌겠는가? 어린양이 나의 하늘의 중심에 서신 것을 보고 죽임을 당하신 이가 찬양을 받는 것을 보면 인생이 바뀐다. 인생이 바뀌고 세계가 달라지려면 보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자기의 하늘의 중심에 어린양이 있고 죽임을 당하신 이가 찬양을 받는 것을 봐야 주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라. 복음으로 전파됨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으로 전파되셨다.

1)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이심(요1:14)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왜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인가? 그분은 말씀이 육체가 되셨기 때문에 복음이다. 육체는 저주받은 것이고 거역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의 육체로 나타나신바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거역의 육체, 거역의 인생, 거역의 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육체가 된 것이다.

만고의 인생의 소원은 에덴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에덴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다. 우리는 낙원을 잃었으니까 낙원을 다시 찾아야 한다. 거역하는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낙원을 다시 찾는 것이다. 거역이 그대로 있으면 낙원을 회복할 수 없다.

말씀이 육체가 된 것,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거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그 육체에 하나님이 임하신 것, 그 육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 이것이 복음이다. “대한민국 선수가 올림픽에서 1등을 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쁨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사람도 올림픽에서 1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약소국가였던 옛날에는 올림픽에 나가도 아무 소용없었지만 요즘은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도 따오니까 우리도 훈련을 하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니까 금메달을 땄다는 것이 복음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복음이다. 비록 우리에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니가 우리에게 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죄 사함의 복음도 있고 거듭남의 복음도 있다. 물론 죄인이 죄사함을 받은 것도 복음이고 지옥불에 있던 사람이 천당에 가는 것도 복음이다. 그러나 참 복음은 지옥에 있던 사람이 천당에 간다는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던 이 육체가 순종하는 육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생의 소원을 순종에 둬야 한다. 다른 데 소원을 두면 예수를 믿어도 소용없다. 더구나 우리 교회는 “주십시요.”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으면 헛일이다. 다른 데서는 새벽기도에 가서 얻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면 헛일이다. 내 우주의 중심에 어린양이 서 있고 내 인생의 우주의 중심에서 죽임을 당한 자가 찬양을 받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2)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함(롬16:26)

로마서 16장 26절에는 이것이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라 하였다. 모든 민족을 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버려진 육체를 말씀이 육체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도 ‘나는 안되는데 하나님의 뜻이면 뭐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된다. 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고 원하시기 때문에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6-27).” 하신 말씀이 내 안에서 밝아졌을 때 ‘하나님이 하시니까 되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다. 내가 하면 안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할 때는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다. 깨끗해지려고도 했고 물로 씻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말씀이 들렸다. 내가 하면 안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안되는데 하나님이 된다고 하면 뭐하느냐?’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는 안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되겠구나.’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안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나는 못하는데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때 나는 나를 놓게 되었다. 아이가 흙탕물에서 놀다 와도 엄마는 자기의 필요 때문에 아이를 씻긴다. 아이가 흙을 묻혀서 들어오면 집안을 다 버리니까 아이가 싫다고 울어도 엄마는 억지로 때려가면서 씻긴다. 마찬가지로 내가 거룩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다. 이것만 확실히 알면 안심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필요라고 생각하면 안심이 안된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마지막 소망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다. 그분의 어떠하심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였다. 독생자를 주신 것, 이것이 마지막 선물이다. 그런즉 이 선물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의 선물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생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가 죽지 못하니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러니 다 되지 않았는가! 더 할 것이 없다. 그분의 소원을 따라서 그분의 필요에 맞는 인생이 되면 되는 것이다. 간단하다.

왜 간단하게 정리가 안되는가? ‘나의 필요인가, 그분의 필요인가?’ 하며 재고 있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지어졌다.’고 정리하면 간단하다. 여러 가지 정리가 있겠지만 이 정리가 제일 간단하다. 어떻게 정리해도 이 정리보다 명백한 것은 없다.

 

마. 세상에게 믿어짐(행13:47,48)

사도행전에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하였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이렇게 써 놓았겠는가! 사실은 그때 믿은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여기서 이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들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한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사도행전 시대의 사람들이 정말 신이 났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한 사람만 반응을 해도 온 천하가 다 반응을 한 것 같고 천하를 다 얻은 것 같다. 그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한 것이다.

 

바. 영광중에 올려지심

빌립보서 2장 9-11절에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였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9-11절과 2장 33절에는 예수께서 그때 승천하셨다고 했는데, 빌립보서에는 그때 승천하셨다고 하지 않고 교회가 전파된 다음에 승천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도행전은 역사적으로 쓴 것이고 빌립보서는 실재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영광스러워질 때 예수님이 영광스러워진다고 한 것이다. 교회가 높이 올려지면 예수님도 높이 올려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로 인해서 올려지지 자기 스스로 올려지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했는데 구름을 타고 간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니까 그대로 믿는 것보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왜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다고 써 놓았는가? 비정상적인 사람이 써 놓아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어떤 실재를 말한 것이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교회를 타고 높여지신 것이다. 그분은 구름떼처럼 모여있는 사람들 때문에 자꾸 올려지시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가가 왜 높아졌는가?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식은 왜 올라갔는가? 그것은 중국이 경제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년에 20%씩 성장하는데 주가가 오르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경제가 성장하면 주식은 자연히 올라간다. 예수님은 주식과 같고 교회는 경제와 같다. 예수님은 교회로 인해서 높이 올려지신다. 그리고 교회 역시 그리스도로 인해서 올려진다. 경제만 성장해도 주식이 오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주식이 떠야 돈이 된다. 그래서 주식시장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돈의 영광이 꽃 피는 데가 주식시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로 인해서 올려지고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올려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육체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연장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로 인해서 이 땅 위에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기 때문에 땅에는 그분이 없다. 그런데 그분은 지금도 교회로 땅에 살고 계신다. 교회를 통해 살아낸 그리스도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인 것이다. 그래서 이 비밀이 위대하다고 한 것이다. 교회는 별 것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신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이것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육체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경건은 육체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격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 이것이 경건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 얼마나 시적이고 박동감 넘치는 표현인가! 그는 육체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바 되었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다. 아멘.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셔서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질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거역하던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던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머물지 않겠다고 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우리의 우주의 중심이 어린양이 되었으며 우리의 우주의 중심에서 죽임을 당한 자가 찬양을 받는 소리가 들려오는 세계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거역하던 육체를 가지고 순종하는 육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고 당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교회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경건의 비밀 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