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6. 믿음(주관적 믿음)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22:19

6. 믿음(주관적 믿음)

 

디모데전서 1장 4절의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 즉 그리스도의 신실성이고 5절의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주관적인 믿음이다. 주관적인 믿음은 우리 보통 말하는 믿음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의미한다. 대상은 같아도 반응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다. 객관적인 믿음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지만 이 주관적인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1. 구약에서

 

1.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

구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쳐오는 환경에서 오직 여호와만을 믿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민족적인 문제를 해결해 왔다. 창세기 15장 6절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대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신명기 1장 32절에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믿음이 점점 시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여호와를 믿지 못한 것이 저주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셨다고 하였다(신1:34).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많은 조건들을 주셨어도 그들의 믿음은 그때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믿지 못했던 것이다.

주관적인 믿음은 이런 폐단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믿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못했다. 증거를 주시면 믿다가 증거가 희미해지면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끝없이 증거가 있어야 했다. 하다못해 감기라도 계속 낫던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의롭다 하시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노하셨다. 그렇게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그런 사실을 역력히 알 수 있다. 그들은 금방 증거를 보았어도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나. 율법을 순종하고 준행하는 믿음

그리고 율법을 순종하고 준행하는 것이 믿음이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행사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을 믿으려면 율법을 순종하고 준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그 백성을 향한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순종하고 준행하는 것은 여호와 자신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이 율법을 준행하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하셨던 것이다. 시편 119편 1-2절에는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행사만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땅 위에서 인생과 함께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어떻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다닐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고 그것을 순종하고 준행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하셨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여호와를 따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곧 여호와를 믿는 증거였던 것이다.

율법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 안에 강림해 계신다는 실재였다. 그들은 허공에 있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실재가 되신 분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단순한 계명 이상의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시는 형태였던 것이다.

 

2. 신약에서

그 개념이 발전해서 신약에서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과 영생을 위한 절대조건이 되었다.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은 같지만 구원에 있어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호와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 신뢰도 완전하지 못했고 믿음도 온전하지 못해서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을 기초로 해서 그 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렵게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혜택을 기준으로 하는 구원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단위에서 인류 전체로 바뀌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이스라엘이 잘살려면 여호와를 의뢰해야 하고 여호와를 의뢰하려면 율법을 순종하고 준행해야 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혜택을 주셨어도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실패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서 전 인류, 즉 사람의 구원으로 대상이 넓어졌다. 아직도 유대교는 그 백성에게 국한되어 있지만 예수 이후로 사도들의 시대 안에서 사람에 대한 구원으로 시야가 바뀌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여호와를 필요로 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구약에서처럼 홍해를 갈라주시거나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은 예수님이 없어도 구약에서 있었던 일이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오면 배고픔은 해결되지만 인간의 구원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홍해가 갈라진다 해서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만나를 먹고 홍해를 건너도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많은 이적신앙들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적을 경험해도 그것으로는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회복시킬 수 없다. 그보다 훨씬 큰 이적들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나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 먹었던 사건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놀라운 사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유일한 방법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신약에서 구원의 길은 예수 안에 있다.

 

가. 의지하고 소원하는 믿음

예수님 시대에도 의지하고 소원하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셨고 사람들은 그 이적을 보고 병이 고쳐지기도 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고 하셨고, 사람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오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9:23).”고 하셨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은 어떤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말이나 여기서 조금만 빗나가면 신념이 되고 만다.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믿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만든 믿음은 신념이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중공업에 대한 신념을 가졌고 그 신념대로 현대중공업을 일으켰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도 잘못하면 어떻게든 자기 안에서 신념을 만들어서 어떤 이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신념의 마력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떤 신념을 굳게 가지면 그 신념에서 놀라운 능력이 나온다. 전에 유리겔라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눈으로 보기만 해도 젓가락을 휘게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서 그렇게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나 신념에서 그런 초능력이 나온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 날 한 시에 똑같은 마음을 가지면 뉴욕 맨하탄을 물 속에 가라앉게 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사람의 신념은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분은 이에 대해서 아담이 만들어질 때 그런 능력이 주어졌다고 말했다. 아담에게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려면 그런 능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문화화 되고 이성화 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그런 능력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연마하면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있다. 불교에는 이적을 행하고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 안에도 그런 일이 있다. 그런 놀라운 일을 보면 감동을 받기도 하고 믿음이 생기기도 한다. 안이숙 씨가 쓴 책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회에 가서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전단을 뿌려 줄 것을 부탁받은 안이숙씨는 부산에서 배를 타려고 했지만 일본 경찰이 일일이 짐을 다 검사해서 도저히 통과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기다렸는데 자기가 통과할 때는 아무 검사도 안하고 통과시켜주었다는 것이다. 그때 일본경찰이 눈이 멀어서 믿음으로 지나갔는데도 검사하지 않고 보내주어서 일본에 갔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놀라운 일들이 있다. 그런 일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꼭 하나님이 행하셨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다 신뢰하기는 어렵다. 의지하고 소원하는 믿음은 이방인들도 갖고 있는 믿음이다. 어느 종교에도 다 그런 믿음이지 기독교 안에만 특별히 있는 믿음이 아니다.

 

나. 영접하는 믿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초반에는 “믿으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지만 후반에는 “나를 먹으라.”고 하셨다. 왜 믿으라고 하지 않고 먹으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그분 자신을 받아들여서 영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니까 내 아들을 고쳐주실 것이다.’라고 믿기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에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자기를 신뢰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증거를 듣고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다(요4:39). 이때 ‘믿었다(believed in him).’는 것은 그분을 영접했다는 뜻이다. ‘into him’, 즉 그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하신 것도 마찬가지로 영접하라는 뜻으로 ‘into’라는 전치사를 사용했다. 요한은 특별히 이 ‘εις’라는 전치사를 많이 사용했다.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쓸 때는 이미 다른 복음서가 쓰여졌고 교회가 상당한 역사를 지난 후였기 때문에 의지하고 소원하는 믿음의 한계가 왔고 그 믿음으로서는 안되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특별히 이 ‘εις’라는 전치사를 썼던 것이다. 이 전치사를 쓰면 ‘예수 안으로 믿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 믿음은 먹음으로 표현되었다. 요한복음 6장 47-48절에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믿기만 해서는 안되고 먹어야 하는 것이다. 떡이 있다고 믿었으면 먹어야 내 뱃속으로 들어온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다. 믿는 자, 곧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6장 51절에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갓바위 부처를 믿듯이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분은 능력이 많으니까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믿어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자기 속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예수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이것이 영생이다.

의지하고 소원하는 믿음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 그런 믿음을 통해서는 병을 고치거나 이적을 행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것은 의지하고 소원하는 믿음으로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해 들이라는 뜻이다.

그를 영접하면 그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다. 그래서 이것을 떡으로 표현하셨는데 떡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떡을 먹으면 그 떡은 내 속에 있다. 그분과 내가 한 떡이 되는 것, 이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된 삶이다. 영어성경에는 영생을 ‘eternal life’로 번역했는데 어느 영어번역본에는 ‘timelessness’, 즉 시간이 없는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번역이 정확한 번역이다. 영생은 시간이 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영생은 길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여 멸망과 영생이 대조된다. 영생의 반대는 짧게 사는 것이 아니라 멸망이다. 동산에 있던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정녕 죽으리라.” 하신대로 멸망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생한다. 멸망에서 구원된다. 그러므로 영생은 질적인 의미이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영생을 살 수 있고 천 년을 살아도 멸망을 살 수 있다.

 

다. 믿음의 최종적 실재

그러면 믿음의 최종적인 실재는 무엇인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자신이다.

처음 단계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을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순종하고 준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는 것과 아들을 영접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율법이고 나는 나니까 때문에 내가 율법을 행할 수도 있지만 행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규칙이 있어도 내가 그 규칙을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 된 것은 나눌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이혼하듯이 갈라낼 수 없다.

사람은 남자라는 물질과 여자라는 물질이 합해졌기 때문에 이혼해서 갈라설 수 있다. 두 물질이 합하면 이혼이 가능하지만 두 영이 합하면 이혼이 불가능하다. 미국 사람은 이혼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재산을 반 갈라줘야 하기 때문에 이혼하기가 쉽지 않다. 아랍에서는 손뼉만 세 번 치면 여자가 나가야 한다고 하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여자를 내 보내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요즘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위자료를 줘야 한다. 왜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나는 나고 율법은 율법이니까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을 주신 것이다.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아들을 먹으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행하시던 일을 아들에게 맡겼으니까 아들에게 기도하고 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아들을 먹으라는 것이다.

 

1) 하나님 마음을 표현하여 그의 뜻을 이루는 신성한 인격과의 연합

구약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문서였지 인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인바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 신성한 인격을 보내신 것이고, 그 신성한 인격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 하셨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다. 이것은 모두 그분과의 연합, 즉 그분과의 하나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신성한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

신성한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분을 영접하는 것도 그러하다. 영접은 내가 하려고 하면 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영접했으면 내가 나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 가슴에 왕좌를 두고 편리할 때는 예수님 의자를 놓아 두었다가 불리하면 의자를 갖고 나가라고 한다. 그러면 자기 속에 예수님이 앉을 의자가 없다. 그래서 수시로 그분을 불러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늘 불러들였다가 나가라 했다가 한다면 예수님이 피곤해서 어떻게 그런 데서 사시겠는가? 집을 전세 놓더라도 일 년이나 이 년을 줘야지 수시로 들어오라고 하고 나가라고 한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한 달을 살라거나 일 년을 살라거나 하면 살지만 설령 집세를 내지 않더라도 언제 들어오라고 할지 모르고 언제 나가라 할지 모르는 집에서 어떻게 살겠는가? 이사 비용 때문에라도 공짜로 살라고 해도 못산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신성한 연합을 이루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포함하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를 포함한 자리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 것이다(롬6:8). 이 연합은 그분이 이루어 놓으셨다. 그분이 우리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내가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내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자리로 나를 이끌어 놓으신 것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받아들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그분이 무엇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 하셨다. 그러면 무엇이 죽었다는 것인가, 육신이 죽는다는 것인가?

사람이 볼 때는 육신이 죽는 것이 죽는 것이다. 요즘은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공동묘지에라도 묻힐 수 있다. 어느 응급실에서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죽으니까 의사 한 사람이 오더니 눈도 까보고 호흡이 멎은 것도 확인하더니 “아무개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사망했습니다.”라는 선고를 하고 갔다. 그것이 정식 사망선고다. 자기가 죽었어도 의사가 사망선고를 하지 않으면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동사무소에서는 의사의 사망진단서를 보고 매장허가를 내준다. 그 허가를 받아야 공동묘지에 묻어준다. 요즘은 죽어서 공동묘지에 묻히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 사람을 관 속에 넣고 와서 묻어달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의 사망진단이 필요한 것이다.

육신이 죽은 것은 의사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아담 시대에 의사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육신이 죽는다고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먹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생명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남남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에게는 의지하고 바라는 것만 남게 되었다. 생명의 관계가 있으면 생명의 공급을 받았을 텐데 생명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의지하고 바라고 요청하게 된 것이다. 내 집에 있는 것은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남의 집 냉장고에 있는 것은 내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 먹고 싶으면 그집 주인에게 물어보고 먹어야지 남의 집 냉장고에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먹으면 안된다. 아담이 동산에 있을 때는 자기 집이니까 언제든지 냉장고를 열고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산밖으로 쫓겨난 후에는 자기 집이 아니니까 항상 요청을 해서 승낙을 받아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 이전의 생활, 연합 이전의 생활이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하나님과 사람은 영원히 분리된 상태로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요청하면 하나님께서 냉장고 문을 열어주셔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자기 집 냉장고 속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먹으라고 할 사람은 없다. 더구나 자기 집 금고에 있는 돈을 아무에게나 마음대로 갖다 쓰라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는 금고라도 맡겨 놓고 쓰고 싶은대로 갖다 쓰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 조건을 갖추기가 어렵다. 아무리 친해도 금고는 맡기기 어렵다. 사람도 자기 금고를 맡길 수 있으려면 어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금고를 우리가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으려면 얼마나 조건이 더 어렵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마음대로 못하고 항상 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할 때도 반드시 조건이 있어야 했다. 무릎이 깨질 정도로 구하든지 해야 되지 그냥 “좀 주십시요.”라고 해서는 되지 않았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지만 보통 두드려서는 열리지 않는다. 하도 두드리니까 안에서는 귀찮아서라도 열어 준다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어떤 과부가 와서 애걸복걸하니까 귀찮아서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고 하셨다. 죽기를 각오하고 매일 와서 시끄럽게 하니까 자비심에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믿음을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이 쉬도록 기도한다. 기도원에 갔다 오면 목이라도 쉬어서 와야지 놀다가 목이 멀쩡하게 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나도 목이 쉬도록 기도하지 못해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구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다. 모르니까 어렵지 알기만 하면 쉬운 일이다.

로마서 10장 4절에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게 되었다. 수속을 밟아야만 혜택이 오도록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다. 아들을 보낸 것은 우리와 아들이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니까 우리와 아들이 하나가 되면 아들에게 맡긴 모든 것을 우리에게도 맡기시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그러므로 내가 아들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은 아들과 똑같이 나에게도 금고문을 마음대로 열 수 있는 권리를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신 의미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병원에서 죽거나 사고로 목이 부러져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인가? 그렇지 않다.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원인은 거역이고 불순종이다. 그 불순종과 거역이 끝난 것, 이것이 죽음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흔히 쓰는 말로 “어떤 형제는 진짜로 죽었는데 그 형제는 아직 안죽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질이나 자기 주장이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것은 가장 가까운 부부끼리 제일 잘 안다. 남편은 자기가 죽었다고 해도 아내는 ‘덜 죽어 놓고 무엇이 죽었다는 말이냐?’라고 생각한다.

육신의 죽음은 공동묘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전까지 같이 숨 쉬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 것을 보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죽고 나면 인생이 가졌다 하는 것도 헛일이고 섰다고 하는 것도 헛일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실감이 날 수도 있고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달을 수도 있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 같으면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 것이 아니구나.’라고 각성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믿지 않는 사람도 가능하다. 아주 우둔한 사람은 옆 사람이 죽건 말건 자기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돼지처럼 살지만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진짜 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서로 죽이고 죽고 하다 보니까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지만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월남전이 끝난 다음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미국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피 흘리는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전쟁 당시의 참상이 기억에 남아서 악몽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런 것이 인간의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런 죽음이 아니다. 그분은 병이 들어서 죽은 것도 아니고 맞아 죽는 것도 아니며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거역을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다. 그분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거역을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의롭고 옳다 해도 거역의 본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분은 바로 그 거역의 본성을 가지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거역이 끝난 것이 진짜로 죽은 것이다.

육신으로 죽어도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말이 많던 사람도 죽고 나면 말이 없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시끄러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끄러운 사람이 없으면 세상이 조용해진다. 시끄럽게 하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끄러운 사람도 죽으면 조용해진다. 그러나 죽었다고 해도 시끄러운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죽지 않은 사람이다. 육신의 죽음은 금방 표가 난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고 남을 욕하던 사람도 죽으면 조용해진다. 확실하게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녕 죽으리라.” 하신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다. 그러니까 거역이 끝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역과 불순종이 끝난 죽음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역을 인한 죽으심, 예수님의 거역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거역을 짊어지고 죽으신 그 죽음 안에서 발견돼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거역 때문에 죽으셨다고 알아야 한다. 이 죽음은 운명적인 죽음과 다른 죽음이다. 내가 늘 말하던 흙의 운명은 우리에게 정해진 죽음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으셨으니까 우리는 어차피 한 번 났다가 죽는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죽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그와 같은 원리로 예수 안에서 우리의 거역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완전하신 분도 우리의 죄를 짊어진 자리에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워 죽게 하셨다는 뜻이 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에게 죄를 짊어지워서 죽게 하시겠는가? 이것은 제자들의 해석이다. 제자들이 그분을 볼 때 그분은 절대로 불의가 없는 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이것을 제자들은 ‘그분은 우리의 죄를 끝내려고 죽으셨구나. 우리 때문에 저렇게 되셨구나.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구나.’라고 해석한 것이다.

갈보리 산에는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있었다. 좌우에는 강도들이 있었고 가운데는 그분이 있었다. 좌우의 강도들을 보고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지 않아야 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볼 때 그분의 죽음은 해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구약 전체를 놓고 해석해 보아도 해석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구약 전체의 요점은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로 의인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약속하셨던 여호와께서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의인이 부르짖어도 여호와는 응답이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그래서 사도들에게 이런 계시가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 분은 죽을 이유가 없는데 우리 때문에 죽으셨구나!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거역을 끝내려고 죽으셨구나.’ 이렇게 해석이 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변화가 온 것이다.

만약 ‘예수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죽었구나.’라고 알았다면 제자들에게 변화가 올 수 없었을 것이고 나에게도 변화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니까 예수도 죽는구나. 나도 언젠가는 죽겠구나. 인생은 허무하니까 발버둥치고 살 이유가 없다.’라고는 알겠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없다. 그렇게 알고는 하나님께 순종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인간의 거역 때문이라고 알아야 나의 거역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거역은 없어지지 않는다. 죽어도, 죽어서 공동묘지에 가도 거역은 없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인류가 살다가 죽었는가!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렇지만 거역은 그대로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해서 비로소 그 거역이 없어졌다. 한 사람이 죽었지만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를 짊어지고, 우리를 포함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거역을 포함하고 죽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역하는 우리를 포함하고 죽으신 것이다.

사도들은 이것을 보았을 때 울었을 것이다. ‘유대인이 죽인 줄 알았고 종교가 죽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구나.’ 이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선하다고 해서 거역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롭다고 해서 거역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선한 사람 속에도 거역이 있고 의로운 사람 속에도 거역이 있다. 놀라운 신통력을 가진 사람 속에도 거역이 있고 도를 다 통한 사람 속에도 거역이 있다. 늙어서 죽든 병들어서 죽든 운명적으로 죽는 죽음 안에서는 아담의 거역이 없어지지 않는다.

죽는 것도 아무나 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제물을 드릴 때 아무 것이나 드릴 수 없고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했다. 흠이 없는 제물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100점짜리가 시험에 낙방했으면 그 학교에 있는 100점 미만의 학생들은 응시 원서를 낼 필요도 없이 낙방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 낙방이구나. 원서를 낼 필요도 없구나.”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100점짜리가 낙방한 학교에 꼴찌인 학생이 같은 응시해서 낙방했으면 다른 학생들이 무어라고 하겠는가? “우리는 다 낙방이구나.”라고 하지 않고 “저놈이 우리 학교를 망신시키는구나!”라고 할 것이다. A라는 고등학교에서 100점짜리 학생이 S라는 대학에 원서를 내서 떨어졌으면 다른 학생들은 모두 ‘우리는 다 낙방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꼴찌가 S라는 대학에 원서를 내서 떨어졌으면 모든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저놈 자식이 우리를 다 모욕했구나. 우리는 능히 합격할 수 있는데 저놈 때문에 우리도 다 떨어진 꼴이 되었구나!’라고 할 것이다. 꼴찌가 떨어졌어도 A고등학교 학생은 다 떨어진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꼴찌는 우리를 대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안되기 때문이다. 꼴찌는 떨어져도 다른 학생은 될 수 있으니까 꼴찌는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뽑을 때 제일 뛰어난 선수를 뽑는다. 그러니까 그런 선수가 올림픽에서 떨어지면 그 이하의 선수들은 ‘우리는 올림픽에 도전이 불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력도 없는 선수가 체육회에 로비를 해서 올림픽에 출전해서 떨어지면 그 보다 실력이 나은 다른 선수들은 ‘저것이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을 다 물먹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 꼴찌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저 사람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망했다. 인류는 다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볼 때 완전하고 흠이 없는 분이 죽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포함하셨다. 우리가 볼 때 100% 완전한 분으로서 우리를 포함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람은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포함된 우리도 완전한 것이다. 설령 꼴찌가 합격했다 해도 그 안에 포함된 우리는 꼴찌다. 꼴찌가 나를 대표해서 합격했다면 나도 역시 꼴찌다. 시원찮은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선수들은 그 선수의 수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준이 곧 우리의 수준이다. 우리가 그분처럼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수준 안에 우리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육상경기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해서 올림픽 육상종목의 금메달을 전부 한국이 딴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육상 강국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올림픽 때에도 육상종목에 한국 선수가 나오는지 아닌지를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선수가 나오면 자기들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포함된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우리가 믿으면 믿을수록 복이 된다.

로마서 10장 4절에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 즉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고 하였다. 그분은 완전한 분으로서 거역을 종결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율법을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롬10:10).

이제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으로만 믿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의로우신 분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의로우신 분을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다. 진짜 보석을 보고 진짜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지만 진짜 보석을 보고도 그것이 가짜라고 우기면 보석상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놈은 불의한 놈이구나.’라고 할 것이고, 보석값을 깎아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분을 의롭다고 인정하기만 해도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 이것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다.

형제들 안에서도 그렇다. 어떤 형제를 인정하기만 해도 의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도저히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 형제를 인정하지 못하면 누구를 인정하겠는가!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 누군가를 인정하는 사람이 발전이 되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발전이 안된다.

물질적인 기술도 그렇다. 자기보다 나은 기술을 인정하면 발전할 수 있지만 자기보다 나은 기술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혼자 창조적으로 해 보겠다고 하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된 것도 우리보다 나은 기술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우리는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일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발전해서 지금은 우리가 생산을 하는 나라가 되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일본의 기술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이 발전을 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의 기술과 발전을 인정하고 우리나라를 경제개발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급속한 경제발전의 모델이다. 이것을 중국은 시인하고 인정했고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연구했던 것이다. 중국은 우리나라가 작다고 무시하지 않고 인정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선포하고 선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포함으로써 그 나라를 누리게 된다. 로마서 10장 13절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주 예수여!”라고 부르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을 믿고 그것을 신뢰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실재’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실재를 의미한다. 김 아무개나 이 아무개 같은 우리 이름은 사람에게 숫자나 기호를 붙여 놓은 것과 같은 것이지만 히브리 사람들의 이름은 소나무나 잣나무라는 이름처럼 기호가 아니라 그 실재다. 우리가 ‘소나무’라고 하면 그 나무를 알고 ‘잣나무’라고 하면 그 나무를 알듯이 그 이름은 그분의 실재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누구든지 소나무를 부르면 소나무의 실재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소나무를 좋아하면 소나무 숲에 갈 것이고, 잣나무를 좋아하면 잣나무 숲에 갈 것이라는 말과 같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어느 제품이 만들어질 때 많은 과정을 거치지만 마지막 단계에 오면 완제품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만 내고 완제품을 사오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다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려면 어느 세월에 만들겠는가? 우리 집에서 TV를 만들려고 한다면 어느 세월에 되겠는가! 내 평생에도 할 수 없고 우리 가문에서도 할 수 없다. 몇 대를 연구해도 TV를 만들기 어렵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과정을 거쳐서 연구를 해 놓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어떤 제품이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우리 안에서 실험을 거친 예수 그리스도, 인생의 구원을 위해 실험을 거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영생을 누린다. 지금은 아주 쉬워졌다. 초창기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주 쉬워졌다. 그러나 지금도 믿지 못하고 자기가 처음부터 하겠다고 한다면 자기 대에도 못하고 자기 후손 대에도 하기 어렵다.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후손까지 망하게 되는 것이다.

 

4)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인격에 대한 갈망에 따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인격에 대한 갈망에 따른 것이다.

사도들은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보고 그분이 우리의 거역을 끝내셨다고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분의 인격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인격에 대한 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분이 하신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구나. 완전하구나.’라고 시인했기 때문에 ‘그분은 왜 죽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분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라도 어그러진 것이 있었다면 ‘그는 결함이 있어서 죽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셨기 때문에 그는 죽었구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볼 때 완전했다. 그런데도 그분은 거절당하셨고 죽으셨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그분의 죽으심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답은 없었다.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구나.’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분의 인격에 대한 신뢰와 갈망 때문에 있을 수 있다. 그분을 영접하려고 해도 그분에 대한 갈망과 신뢰가 있어야 영접할 수 있지 신뢰도 없고 갈망도 없으면 그분을 영접할 수 없다. TV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TV를 팔고 있어도 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TV를 멋지게 진열해 놓아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늘 구경하러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TV를 사고 만다. 왜 늘 구경하러 가는가? 관심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마찬가지로 관심이 있고 갈망이 있어야 되지 관심이 없으면 안된다. 이방인들이 안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가) 그리스도의 행사에 대한 믿음은 그분의 죽으심 앞에서 모두 무산되고 말았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에 대한 믿음, 그분께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 그리고 구약시대부터 내려왔던 모든 것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 끝나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원인무효되고 만 것이다. 그 사람에게 구해 봤자 무엇을 주겠는가! 십자가에서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구해서 응답을 받겠는가! 그러니까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멍해지고 만 것이다.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그런 기대를 가지고 따라갔다. 그분이 무엇인가를 이루시면 자기들도 그 밑에서 한자리씩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랐지만 마지막에 보니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던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 앞에서 모든 것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우리도 여기서 끝나야 한다. 아직도 자기의 기대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 안에 있는 이런 일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만나 보면 이상하게도 그 이상의 진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입문하는 단계라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믿어지고 그분을 영접하는 단계까지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들과 대화를 해 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계속해서 구하고 받는 것만을 원한다.

그것은 은행과 거래하는 것과 같다. 제일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과 제일은행에 투자를 하는 것은 별개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 놓으면 내 마음대로 돈을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다. 그 사람은 그 은행의 고객이다. 그에 비해 그 은행에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한 사람은 그 은행과 함께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한다. 예수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분에게 계좌를 개설해 놓고 필요할 때는 돈을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분에게 투자를 해야 망하든 흥하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되려면 통장을 개설해서 돈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일은 무산되어야 한다. 그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예수의 고객밖에 안된다. 구약시대의 여호와의 고객이 예수의 고객으로 바뀐 것뿐이다.

 

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을 사모하는 자에게 찾아왔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격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왜 빌라도에게는 가지 않으셨는가? 빌라도에게 보였으면 대박이 터지지 않았겠는가? 제사장들 앞에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였으면,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흰 옷을 입고 나타나서 “보라! 내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다.” 하고 손을 내밀었으면 대박이 터지지 않았겠는가! 다 엎드려서 경배하고 “우리가 당신을 믿겠나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간 일이 없다. 그분은 그분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보이셨다. 누가 그분을 가장 사모했는가? 제자들이 아니고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먼저 보이셨던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먼저 보이신다. 부활하신 인격은 그분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배정된다.

 

c)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만 배당됨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만민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만 배당된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그렇지만 그 영은 그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만 배당되지 그를 사모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배당되지 않는다.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것도 다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지 그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으셨다.

제일은행에 돈이 엄청나게 불어나면 그 돈은 누구에게 배당되는가? 그 돈은 주주에게 배당되지 계좌를 개설한 고객에게는 배당되지 않는다. 그 은행과 아무리 많은 돈을 거래해도 고객일뿐이지 주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행이 잘되면 투자를 한 주주에게 배당이 돌아간다. 예수가 잘되어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생명 주는 영은 누구에게 배당되는가? 계좌를 개설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분에게 투자한 사람에게 배당된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구약시대에도 여호와는 그 백성에게 의지하는 믿음만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을 신뢰하기를 원하셨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그분을 의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기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에 투자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투자가 많으면 자기자본이 늘어나지만 계좌만 개설해서 돈을 맡겨 놓으면 빚이 늘어난다. 그래서 은행은 투자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 이익이 배당되겠는가? 투자한 사람에게 이익이 배당된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는 말이 있는데 어디서 믿음의 종교라는 말이 나왔는가? 의지하고 소원하는 데서 믿음의 종교라는 말이 나왔다. 불교에 대해서는 자력종교라고 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의타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단계는 아주 초보적인 단계다. 마치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과 같아서 고객은 되지만 주주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처음에는 계좌를 개설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계좌만 개설하지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좌 개설로 끝낼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모든 것을 같이 배당받을 수 있다. 투자를 하지 않고는 그분의 모든 것을 배당받을 수 없다. 자기 것을 맡겼다가 찾아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분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

객관적인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실성 자체고, 우리의 주관적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은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과 연합이 이루어지는 믿음이다. 믿음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투자자를 구하고 계신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방식만 다를뿐이지 이 원칙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주가 되자. 예수의 주주, 그리스도의 주주가 되자.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이 인생을 어디에 투자하든 투자해야 하지 않겠는가! 투자하지 않는다 해서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투자하려면 유망주에 투자해야 되지 않겠는가! 신용 있고 확실하게 보장된 유망주에 투자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을 곳, 절대로 망하지 않을 곳에 투자하는 것이 지혜다. 예수의 인격에 투자하는 것, 이것이 지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언제까지나 적대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밖에 안될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부르셔서 예수와 하나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신 이 놀라운 비밀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역을 끝내고 우리를 포함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의 거역이 끝난 것을 발견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