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3. 바른 교훈(딤전1:3-11)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22:16

3. 바른 교훈(딤전1:3-11)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중요한 요점 세 번째는 다른 교훈이다. 바울이 디모데전서와 후서를 쓴 이유는 바른 교훈을 주기 위해서다. 지금이나 그때나 교회 안에는 늘 그릇된 교훈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권고한 것이다.

 

1. 그릇된 교훈들

 

가. 꾸며낸 이야기, 끝없는 족보 이야기

바울 당시의 그릇된 교훈들은 꾸며낸 이야기나 족보 이야기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족보 이야기는 아마도 누가 아브라함의 정통 후손이냐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의 정통이 이삭이라고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아들들이 많았다. 우리 교회에도 전주 이씨들이 많지만 왕은 처첩들이 많으니까 자식도 많았다. 그래서 누가 진짜 왕비의 아들이고, 후궁의 아들 중에서는 누가 왕과 가까우냐 하는 문제들과 같은 것이 끝없는 족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 자기가 더 낫다는 식으로 꾸며 만든 이야기다.

이란 사람들을 만나 보고 알았는데 아랍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알아도 이삭은 모른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아랍 사람들의 조상이지만 그 밑에는 많은 자손들이 있기 때문에 각기 자게 계파의 족보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계보는 유대인의 계파다. 이스라엘 중에는 여러 지파가 있는데 열두 지파 중에 마지막까지 남은 지파는 유다 지파다.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해 놓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다고 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의 족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밖에 모른다. 신약을 쓴 사람은 예수의 족보를 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모슬렘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 이스마엘은 느바욧을 낳고…….”라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마호멧을 낳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끝없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교회 안에 왜 있을까? 천주교에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천주교에는 그런 이야기가 아주 많다. 성인들이나 이적들에 관한 이야기다. 성모상에서 피눈물이 났다는 파티마의 기적 이야기나 어느 성자가 기도를 했는데 성모가 나타났고 그래서 거기에 성모상을 세우고 성당을 세웠다는 식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자기들끼리 주고받는다. 그렇게 함을 통해서 유대를 강화하고 신앙적인 전통을 유지하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들이 믿는 천주교에는 이적이 있고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가 다 그런 데 속하는 것들이다.

 

나. 율법 교사가 되려 함

그리고 율법 교사가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율법을 떠날 수 없다. 내 안에서 생명의 성장이 없으면 율법이 있어야 한다. 율법이 없으면 야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를 가나 어느 종교에 가나 마찬가지다. 불교에도 율법적인 스승들도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깨달음이나 참선을 가르치는 스승들도 있다.

디모데전후서에는 부도덕한 문제들과 부덕한 문제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비상식적인 생활을 경계한 것이다. 종교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문제가 이것이다. 종교에 편향하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는 열심인데 상식밖의 생활을 하고 상식밖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이 아주 무서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단이라는 이유로, 교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파문을 하고 심지어는 산채로 불에 태워죽이기까지 했던 것들이 그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지도 않고 사회에 큰 누를 끼친 일도 없는데 단지 교리적인 이유나 교회 전통상의 문제로 사람을 정죄하고 불구덩이 속에 넣거나 사자 굴에 넣었던 것은 인간 상식밖의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자행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이 되면 비상식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을 많이 볼 수 있다. 종교적이 될수록 비상식적인 인간이 된다. 더 보수적이고 더 종교적일수록 이상하게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무식한 사람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유식한 사람, 외국 유학까지 갔다온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종교 안에서 생각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상식을 벗어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를 경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그리스도 이외의 것, 한 인격 이외의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좋은 것이고 선교에 도움이 되고 교회 발전이 도움이 된다 해도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 그릇된 교훈으로 넘어갈 소지가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때는 그런 방식의 그릇된 교훈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고도로 심화된 그릇된 교훈들이 더 많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올바른 교훈을 한다며 정통교리를 믿어야 한다며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원수처럼 생각한다.

서울에서 집을 얻으러 다녀 보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절에 다니는 사람에게,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집을 세주지 않았다. 같은 인간인데 다른 종교를 믿는다며 그렇게 차별한다. 순수한 인간 의식 구조가 종교로 인해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이번에 들으니까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일생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해인사에 데리고 갔었는데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사천왕상을 쑤시면서 “이게 뭐야?”라고 했다. 종교적인 사람이 보았으면 ‘어떻게 저런 아이가 다 있느냐!’ 난리를 쳤을 것이다. 자기가 이상한 줄 모르고 아이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 바른 교훈

종교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을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게 하기도 한다. 종교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바른 교훈을 위해서 디모데를 권고하였다.

 

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함

바른 교훈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구속과 건축이 그 핵심이다.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구속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핵심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구속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게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난 것은 다른 교훈이 될 수 있다. 사람의 필요를 위한 것들이 다른 교훈이다. 종교적인 필요는 다 인간의 필요다. 사람에게는 이런 것도 필요하고 저런 것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위하다 보면 근본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는 것이다.

성경 안에는 그런 예들이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예를 보면 아브라함은 백 세에 이삭을 낳았는데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 다 끝났고 기력이 다 해서 심지어는 그 좋던 믿음까지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아브라함에게는 후손을 낳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구속이 나왔다. 완전하게 죽어서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피조물의 자리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의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생명이 들어오면 움직이고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 이것이 산 혼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들어온 후에 아브라함은 구십구 세를 살았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산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도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아담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을 끝내고 새로운 씨를 주시려고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죽음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에게서 십자가로 완성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구십구 세가 되어도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이 십자가였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끝났다. 더 이상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구속, 곧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삭은 누구인가? 이삭은 누림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삭은 그냥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삭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다(창26:3). 하나님은 그 아비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이삭에게 축복하셨다. 이삭은 아버지를 누리는 아들의 형상이다. 이건희 씨는 이병철 씨가 돈을 많이 모아 놓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 이병철 씨로 인해서 삼성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그래서 이건희 씨는 아버지 이병철 씨의 어떠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삭은 부활로 다시 난 새 생명을 누림의 예표다. 새 생명은 죽음을 거쳐 왔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부활을 누린다.

야곱은 어떠했는가? 그는 평생 연단을 받았다. 왜 이렇게 연단이 필요한가? 그것은 건축 때문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구속되어서 원위치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삭은 그것을 마음껏 누렸고 가는 데마다 창대했다. 이삭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 편안하고 안전했다. 적이 왔다가도 오히려 도망하거나 화친을 요구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야곱은 일생동안 연단을 받았다. 그것은 건축 때문이다. 야곱은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열두 명의 아들들을 낳았다. 그는 오직 라헬과만 살고 싶었다. 처음부터 라헬과 결혼했더라면 그는 다른 여자들과 결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라헬과 결혼하지 못하고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아가 먼저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레아와 라헬의 종들에게서 자식들을 낳았지만 만약 라헬이 아들을 낳았다면 그는 다른 아들들을 낳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만 자식을 낳아 열 명을 채웠던 것이다. 그 후에 라헬을 통해서 낳은 두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이다. 그렇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열두 명이 필요했던 하나님은 야곱의 성격과 기질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열 명의 아들을 낳기 전에는 라헬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여덟 명의 아들을 낳은 후에 라헬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면 그는 더 이상 아들을 낳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열 명을 채우고 마지막에 라헬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렇게 연단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12는 새 예루살렘성의 숫자, 건축의 숫자다. 건축을 하려면 꼭 12이 있어야 한다. 3X4가 돼야 하는 것이다. 동서남북으로 문이 세 개씩이니까 꼭 12개의 문이 있어야 한다. 11개여도 안되고 10개여도 안된다. 네모난 성에 똑같이 문이 있으려면 12가 꼭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왜 열두 명을 선택하셨는가? 그것은 건축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해서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이스라엘은 야곱부터인 것이다. 야곱의 새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그 민족의 이름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된 이유는 그로부터 건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목표는 구속을 통한 건축이다. 아무리 구속이 되고 누림이 있다고 해도 건축이 안되면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무를 아무리 잘 키워놓았어도 집을 짓지 않으면 헛일인 것과 같다. 벽오동을 심는 뜻은 딸이 결혼하면 농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오동나무는 농이 되지 않으면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건축이다. 구속을 위해서 지으신 것도 아니고 부활이나 누림을 위해서 지으신 것도 아니다. 문제는 건축이다. 그러므로 건축이 안되면 다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만다.

건축을 위해서는 연단을 통한 순종이 필요하다. 야곱은 생각이 너무 많고 재주도 너무 많아서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단을 받아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연단이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하다. 타고날 때부터 순종하는 사람은 없다. 성격상으로 순한 사람이 있지만 그것과 순종은 다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순종하려면 타고난 것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는 순한 것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목적과 다르기 때문이다. 목적이 다르면 순종이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절대로 다른 사람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누구와 싸운 일도 없었고 원수진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내 사전에는 싸우는 것, 원수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 오니까 그것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순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연단을 통한 복종이다.

연단이 없이는 건축에 쓰여질 수 없다. 아무리 잘났어도 안된다. 아무리 구속을 받고 부활을 했어도 복종이 안되면 건축에 쓰여질 수 없다. 복종이 안되는데 어떻게 건축이 되겠는가? 나무가 잘리지 않으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낙락장송이 되어 독야청청할 수는 있어도 건축에 들어올 수는 없다. 건축에 들어오는 것은 죽는 것이다. 자기가 끝나는 것이다. 우리집은 나무로 지은 집이어서 나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 나무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미송이니까 미국에서 온 소나무겠지만 고향이 어디인지 그 족보가 무엇인지 모른다. 족보도 고향도 없이 단지 우리집에서 통나무 집이 된 것뿐이다. 자기 이름도 없고 족보도 없다. 복종이 되려면 자기 이름이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 타고난 사람으로는 안된다. 연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야곱이 선택된 것이다.

바른 교훈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없다. 다른 것을 가르치면 문화나 종교에는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방해를 줄 뿐이다. 기독교는 세상에 종교를 통해서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주었다. 심지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칼빈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정도다. 칼빈주의의 골자는 우리가 타고난 모든 재능, 즉 달란트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사용해서 극대화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고난 재능을 100% 발휘해서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가 왕성해질 때 이것이 기반이 되어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 개발을 했다. 그래서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기독교 없이는 서구사회를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치 우리나라 문화나 민족성을 불교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서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의식구조는 기독교가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욕을 해도 ‘God damn.’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다. 기독교는 그만큼 그들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런 영향을 준 기독교는 세상에서는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는 것을 보니 우리와 차이가 많았다. 가죽신을 신고 가죽잠바를 입고 호른을 불면서 행사를 하는데 너무 생생했다. 우리와 너무 달랐다. 캐롤이 퍼지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 그렇게 문화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기독교의 영향이다. 지금 그들에게는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 문화가 더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사회보장제도가 너무나 잘되어 있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전하게 보장되어 있다. 실직을 하면 실직 수당이 나온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서 한다. 그러니 하나님, 예수가 필요없게 되었다. 기독교 문화가 그들을 그렇게 좋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것인가? 그렇다면 북유럽의 나라들은 지상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속을 통한 건축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아닌 다른 교훈들은 다른 교훈이고 그릇된 교훈이다. 구속과 건축에 관계되지 않은 것은 바른 교훈이 될 수 없다.

 

나. 순수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딤전1:5)

두 번째로 바른 교훈은 순수한 마음이고 선한 양심이며 거짓 없는 믿음이다.

1) 순수한 마음

순수한 마음은 혼합되지 않은 단일한 마음이다. 혼합된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혼합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인생에서 유일한 목표, 오직 한 가지 목표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도둑질이라도 오직 한 가지 목표만 가지고 있다면 순수하다. ‘나는 대도(大盜)가 되겠다. 대도만 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결심하고 밤낮으로 대도가 되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순수한 것이다. 금은 금대로 순수하고 구리는 구리대로 순수하고 강철은 강철대로 순수하다. 그러나 금과 강철이 섞여 버리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불순한 것이다. 그런즉 유일한 목표로 그리스도만을 취하는 것이 순순한 마음이다.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을 가져 보려고 마음 수련을 하고 선(禪)을 행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순수한 마음이 되겠는가? 순수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견물생심이라 해서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 수련을 해서 자기 혼자 아무 욕심이 없는 청정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해도 견물생심이다. 눈을 감고 살면 몰라도 보면 마음이 생긴다.

유일한 목표를 그리스도로 취하면 순수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도 목표로 세우면 불순해진다. ‘주 예수만이 목적인 마음’, 이것이 순수한 마음이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있는 곳마다 믿음이 강조되었다. 믿음을 강조하고 어떻게든 믿음을 더 굳게 가져 보려고 한다. 나도 그것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믿음을 가지려고 하니까 너무나 어려웠다. 믿음이라는 것이 한계가 없으니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나을 것이라는 믿음과 암이 걸렸을 때 나을 것이라는 믿음은 다르다. 감기에 걸렸을 때 믿음으로 나았다 해도 암이 걸렸을 때는 믿음으로 낫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믿음을 제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도 믿어야 하고 성경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이렇게 중요하다.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믿어야 되지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게 되면 순수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만 가지려고 노력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옛날에 그리스도는 모르고 어떻게든 믿음을 더 가져볼까 하는 것만 생각했다. 더 나은 믿음, 더 순수한 믿음, 더 온전한 믿음, 더 큰 믿음을 원했던 것이다. 일을 하고 선교를 하려면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아침에 전도를 하러 나가려면 누가 나의 말을 들을 것인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충주에 있을 때 보험회사 사무실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들은 보험 세일을 하지만 우리는 복음 세일을 해야 하니까 복음을 팔아야 한다. 그렇지만 전도를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예정이 없으니까 항상 불안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을 강화해야 했다. ‘나는 그냥 가지만 성령이 반드시 역사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부름받아 나선 이몸’을 부르면서 갔다. 보험회사도 아침마다 난리를 쳤다. 박수치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쳤다. 노래를 하는데 찬송가 곡에 보험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부르고 파이팅을 외치며 난리를 힌 후에 세일을 하러 나갔다. 보험 세일을 하려면 용기를 가지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 방에서는 ‘부름받아 나선 이몸’을 부르며 나갔고 한 방에서는 ‘신인(新人)합시다. 신인합시다.’를 부르며 나갔다. 새로운 보험모집인을 데려오자는 것이었다. 그 사무실에 가 보니 온벽에 벽보와 노래가사가 붙어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용기를 불러일으킨 다음에 보험 세일을 하러 나갔던 것이다.

그런 것이라도 한 가지만 평생 생각하면 순수한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해 보면 믿음이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되지 그리스도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게 된다. 이미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니까 믿음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순수한 마음이 될 수 없다.

죄사함도 물론 중요하다. 죄인은 죄사함을 받아야 자유할 수 있다. 여러분도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많이 보셨을 것이다. 그들은 일생동안 그것만 한다. 나는 그들을 젊었을 때 만났다. C.C.C.에 있을 때니까 내가 삼십대 후반이었을 때 그들이 찾아왔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초지일관으로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만 강조한다. 평생 그것만 말하고 있다. 책을 써도 그것이고 집회를 해도 그것이며 모든 것이 다 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순하다. 물론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그분의 인격이 목표가 안되니까 수십 년을 했지만 그 사람은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일은 엄청나게 커졌다. 처음에는 사람이 열댓 명 정도밖에 안됐는데 지금은 수십 만인지 수백 만인지 모를 정도로 전세계에 퍼졌다. 그들은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것만 가지고 저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과 그리스도가 유일한 목표인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목표일 때는 그 사람 자체에 변화가 생긴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대상을 만나서 그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목표가 된 것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찾고 좇는 것이다. 학생이 선생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1학년에 들어가면 선생을 만나는데 그 선생은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선생이 나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니까 공부를 하는 것이지 자기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공부를 못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은 늘 나아지지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어울리면 우선은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발전이 안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낫다고 알아야 발전하지 자기와 똑같다고 알면 발전이 없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인 자리가 있고 그리스도와 내가 다른 자리가 있다. 그분과 내가 하나인 자리는 운명이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그분이나 나나 똑같다. 그러나 따라야 할 대상으로서는 영원히 다르다. 이것이 혼동되어서 자기와 예수가 하나라는 것만 생각하다가는 거기서 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면의 그분을 알고 있어야 한다. 분명히 그분과 우리는 운명이 하나다.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는 운명이 하나다.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지만 그분은 겟세마네로 가신 분이고 나는 지금 겨우 가창동산에 왔을뿐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분과 한 운명 안에서 누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지만 내가 따라야 할 분으로서는 항상 따라야 할 분이다. 나는 항상 그분보다 작은 자다. 그분 앞에서 나는 무엇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내 길도 가기 바쁜 사람이 누구를 보고 잘했니 잘못했느니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내가 어떻게 누구를 정죄하겠는가? 불가능하다. 나도 겟세마네에 갈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정죄하겠는가!

옛날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고 충성을 다 해야 할 사람인데 과연 하나님이 나를 십자가로 부르시면 내가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로서는 의지나 생각이나 어느 것으로 보아도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꼭 필요로 하시면 나를 억지로 붙잡아다 십자가에 못박으시면 죽으면서까지 후회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때는 죽으면서까지 원망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주님이 부르시면 십자가에 못박히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로 가신 것을 공짜로 생각하거나 놀러가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가 “할렐루야” 할 때 그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6장과 7장, 그리고 16장과 17장에서 그분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아무 차별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은 아무 차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저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분은 겟세마네로 가셨는데 제자들은 따라가지 못했던가? 그것은 이것 때문이다. ‘꼭 저렇게 해야만 하는가? 저렇게 가야 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났던 것이다. 왜 이런 의문이 났던가? 그것은 자기들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분이 가시는 길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게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분을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나는 그를 모른다.” 이것은 자기가 살려고 그분을 부인해서 한 말이 아니다. 진짜로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아무리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천당에 갈 차표를 사 놓았다고 해도 우리는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인생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십자가로 오라고 하시겠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은 교회 건축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작은 일 같지만 이것도 하나의 죽음이다. 건축이 되려면 자기 이름이 없어져야 한다. 우리집 미송은 북미에서 왔는지 남미에서 왔는지 모른다. 건축 안에서 자기 이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미송이 북미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틀란타에 가니까 미송이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다. 미송은 목질이 겨울이 오면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연하다. 그런데 바로 그 나무가 우리집에 있는 통나무다. 그것이 아틀란타에서 왔는지 토론토에서 왔는지 모른다. 이미 우리집 건축 안에 들어와서 자기는 없어지고 통나무 집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교회다. 왜 교회가 십자가인가? 내 마음에 딱맞는 사람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날마다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교회는 다양하니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나는 처음에 학생 선교회에 있었는데 그것이 좋았고 희망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젊으니까 일을 잘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학생 선교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학생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오고 말았다. 나는 학생 선교가 소원이었으나 10년 동안 못하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 형제들과 그 다음 세대들 사이에 10년의 틈이 생겼다. 만약 학생 선교만 했다면 젊은 사람들끼리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구조도 다양하고 형편도 다 다르고 생각도 다 다르다. 그래서 아주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이렇게 돼야지 학생들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만 있으면 그것은 학생 단체지 교회가 아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다르고 저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다르다. 사람마다 문이 다르다. 내 문으로는 못들어오는데 다른 사람의 문으로는 들어올 수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누구든지 내 문으로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내 문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문으로는 들어온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문이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와도 들어갈 문이 있는 것이 새 예루살렘이라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우리 교회는 문이 많다. 열두 문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12로 제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3과 4가 계속 곱해져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있는 무한대의 문이 있어야 한다. 간증을 들어 보면 이정령 자매를 통해서 들어오는 문이 있다. 이정령 자매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라고 하신 열린문이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정령 자매가 강단 위에 앉아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강단 위에 앉아 있어도 되느냐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왔다고 한다.

문은 많을수록 좋다. 우리는 많은 문들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목표로 취하는 길로 들어왔다. 문이 많아서 각각 다른 문으로 들어왔지만 안에 들어와 보면 정금길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뿐이다. 믿음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죄사함과 거듭남을 통해서 올 수도 있으며 구원을 받아서 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들어올 때는 그 문으로 왔을지라도 들어와 보면 정금길이다. 정금은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라야 하는 것이다. 믿음도, 죄사함도, 거듭남도, 구원도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금길 안으로 들어오면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2:8). 여기서 다른 어느 것이라도 중요하게 되면 빗나가게 된다. 믿음이 중요해져도 빗나가게 되고 죄사함도, 거듭남도, 구원도, 그 무엇이든지 그 인격 자체가 아닌 것은 빗나가게 된다. 그런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인데도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2) 선한 양심

선한 양심은 거리낌 없는 마음, 상식에 맞는 마음이다.

거리낌이 없으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은 마음이다. 십자가에 가면서 가져갈 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마음은 거리낌이 없다. 나를 내려 놓으면 거리낌이 없다. 내 소원, 내 생각, 내 계획이 없으면 거리낌이 없다. 왜 거리낌이 생기는가? 나의 어떠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거리낌이다.

상식에 맞는 마음이라 함은 인간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되는 것인가? 천당에 가서 귀신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으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예수를 믿어서 무엇이 되는 것인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늘을 날고 별 것을 다 한다 해도 인간이 안되면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 데 가 보면 어제 밤에 꿈을 꾸었다거나 환상을 보았다는 식의 말을 한다. 그런 사람들은 귀신처럼 알아맞히기도 한다. 점쟁이 같은 사람들로 남자들보다 여자 권사님들이 많다. 알아맞히기도 하고 물어 보면 기도해 보고 응답해 주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령한 것이 아니라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가던 것을 그들에게 가는 것이니까 점쟁이 노릇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에 맞는 사람, 상식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

 

3) 거짓 없는 믿음

거짓 없는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 반응하는 믿음, 이것이 거짓 없는 믿음이다. 진짜 믿음이다. “무엇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며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에 반응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자기 혼자 ‘나는 은행에 돈을 얼마든지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은행의 신용에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다. 자기 생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은행의 신용에 반응하는 믿음이 정상적인 믿음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께만 목표가 있게 한다.

거짓 없는 믿음은 그리스도에게만 목표가 있게 하는 믿음이다. 믿음에는 종류가 많고 사람마다 믿음이 다르다. 나는 옛날에 “주여, 믿습니다!” 하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그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 나는 항상 실패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인격에 대해서는 믿음이 생겼다. 이 인격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하나님이 백 살까지 기다리셨으며 하나님이 야곱을 다루셨고 야곱에게 축복하셨으니까 그분으로 인해서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분으로 인해서라면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다른 믿음이 안돼서 고민하던 사람이다. C.C.C.에서 일하다 보니까 정말 믿음이 필요했다. C.C.C.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데였다. ‘금년 여름에는 일만 명을 모아서 집회를 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으면 그 목표를 위해서 기도해야 했다. 그런 일이 나에게는 어려웠는데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큰일을 할 것이나 나는 큰일을 할 사람이 못된다. 그래서 늘 담력을 키우듯이 믿음을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나서는 금방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이 되게 하려고 지금까지 나를 이끄셨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니 전부 하나님이 나를 이런 사람이 되게 하려고 이끄신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당연히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고 다른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일체 마음을 놓게 되었다. 다른 믿음은 내가 타고난 것이 아니니까, 다른 믿음도 있으면 좋겠지만 이 믿음이 생기고 나니까 다른 믿음은 없어도 상관이 없게 되었다. 일이나 사업에 대한 성취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고 오직 이 한 가지만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구로 올 때 쉽게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일을 생각했다면 쉽게 대구로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제천에서 집사람이 양장점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충주에 있다가 갑자기 대구로 오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청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충주보다 청주가 더 크고 학생도 많으니까 청주로 가는 것이 더 좋았고 충북선을 타고 집에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여건이 청주가 좋았다. 그리고 청주로 가기로 내약이 되어 있었고 수속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준곤 목사님은 갑자기 나에게 대구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미리 수속을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러 들어갈 때 청주로 가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전임 간사가 말하기를 자기가 미리 다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김준곤 목사님에게 재가만 받으면 된다고 하기에 당연히 청주로 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먼저 들어갔다 나오면서 나에게 “이 목사님은 더 큰 데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들어가 보니까 다른 말은 아무 말도 없이 대구로 가라고 하셨다. 그때 만일 내가 일을 생각하고 믿음을 생각했다면 ‘대구로 어떻게 가야 하나? 사돈의 구촌도 없는 곳에 가서 무엇을 하겠나?’ 하며 주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한 사람이 목표가 되니까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구로 와서 나는 고생을 많이 했다. 몇 년 동안 토요일 오후 5시에 동대구 역에서 출발하면 영천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타고 새벽 2시에 집에 도착했다. 그 기차는 부산에서 구인사에 가는 보살님들 때문에 영천에서 갈아타는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참 피곤한 그 시간에 서서 가야 했다. 그 보살님들은 단양에서 다 내렸다. 그렇지만 자리에 앉아서 20분이 지나면 제천역에 도착했다. 하도 피곤해서 영진 구론산을 마시면서 다녔다. 그거라도 마셔야 조금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일로 한 번도 불평을 해 본 적이 없다. 목표가 하나니까 대구로 가기 전에도 그런 일에 대해서 염려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이 되게 하려고 나를 대구로 보내시는구나. 나는 대구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이 사람 때문에 나를 보내시는구나!’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거짓 없는 믿음이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목표가 있는 믿음, 이것이 거짓 없는 믿음이다.

 

다. 분명한 목표 안에 있는 교훈(6:6)

바른 교훈은 분명한 목표 안에 있는 교훈이다.

1)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와 교회

하나님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다. 한 인격, 한 사회, 한 왕국이다. 이 이상의 계시는 없다. 성경 전체의 계시의 목표가 여기 있다.

옛날에 이 목표를 몰랐을 때는 성경을 아무리 뒤적여도 무엇이 무엇인지 몰랐다. 호랑이가 보릿대 짚을 뒤적인다는 말이 있다. 보리타작을 하고 나면 보릿대 짚을 쌓아 놓는다. 어쩌다가 왔는지 몰라도 호랑이가 와서 보릿대 짚을 밟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나니까 거기 무엇이 있는 줄 알고 계속 뒤적이며 찾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목표를 모르고 성경을 보면 그렇다. 이것도 중요한 것 같고 저것도 중요한 것 같아서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다. 시행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가 보여졌고 그것이 목표가 되니까 열 번을 보나 한 번을 보나 똑같았다. 오직 한 가지 외의 것은 취할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1:11)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은 무엇인가? 첫째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 즉 새 예루살렘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생을 구속하여 사탄을 멸하려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런데 오히려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 이것이 영광의 복음이다.

전에 우리는 육신을 벗기를 원했다. 육신 때문에 늘 사탄에게 속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수 없었다. 육신 때문에 순종도 안되니까 육신만 벗어버리면 될 것 같았다. 육신을 벗는 것, 이것이 모든 종교인들의 소원이다. 불가에서도 육신을 벗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다. 달마대사는 9년 면벽의 참선 수행을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일몰관이라 하여 하루 종일 해만 보는 수행을 한다. 다른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그런 모양이나 그렇게 하면 눈을 못쓰게 된다. 참선을 하면서 졸지 않기 위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이마 앞에 목침을 달아놓기도 한다. 고행을 하면서 어찌하든지 육신을 극복하고 떨어 내 보려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고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의 복음이 아니라 치욕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육신으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육신으로 안된다면 치욕이 아닌가!

육신으로 된 인생을 구속해서 육신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탄을 박멸하는 것, 이것이 영광의 복음이다.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자 앞에서 아담은 꿀려서 “그러면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다가 망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얼마나 당당한가! 이것이 사람의 영광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내게 절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주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영광의 복음이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그러면 천사들이 너를 옹호해서 받아줄 것이다.”라고 했을 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인생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신처럼 되는 것도 아니며 벽 뒤에 있는 것을 다 알아맞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인생의 영광인 것이 아니다. 육신을 가지고 사탄을 박멸하는 것, 이것이 영광의 복음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1:15).”고 하였다. 무엇을 하게 하려고 죄인을 구원하셨는가? 죄로 고민하고 있으니까 구원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죄로 인해서 고민하다가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고민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교회에서 죄에 관해서 배우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이 날 수 없다. 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예수를 죽게 했다는 것인가? 나는 교리적인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그런 데 물들지 않았다. 신학교에 가서 교리를 배웠는데 그때 예수님이 인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죄도 없고 나쁜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죄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죄 때문에 고민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도 교리적으로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 때문에 서양 사람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죄의식이 깔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 사람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우환지심이 깔려 있어서 ‘잘못하면 안된다.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이 밖에 나갈 때마다 늘 조심하라고 한다. 우황지심이 깔려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환지심은 있지만 죄의식은 없었다. 옛날에 엄청난 죄를 지었던 사람이 회개해서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었다는 간증을 들으면 부러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그 사람처럼 화끈하게 죄를 지었다가 화끈하게 회개하면 화끈한 부흥사가 될 것 같은데 나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안지은 것도 아니라서 답답했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부흥회에 가면 첫날 죄를 회개하라고 한다. 부흥회 첫날은 회개하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회개를 하려 해도 몇가지 하고 나면 회개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회개해도 나는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죄 때문에 고민하다가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몇 달 동안 발이 땅에 닿는지 안닿는지 모르고 다녔다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된다. 정상적이라면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안에서 그런 교리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자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울 사람은 없다. 나는 신학을 하면서도 몰랐고 목회를 하면서도 몰랐는데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거역한 자였고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한 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은 육신인 인생을 구속해서 사탄을 멸하려고 하신다. 그래야 인생을 육신으로 지으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죄인을 구원해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세상을 정복하고 있는 사탄을 멸하시려는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온전히 아는데 이르게 함(2:4)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른 교훈이다.

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그분의 죽음 이외의 다른 죽음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되었을 뿐이지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따라갈 수 없다. 우리는 그분만큼 죽을 수 없다.

예수님처럼 죽겠다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다. 필리핀에서는 고난주간에 그런 행사를 한다. 그 해에 어떤 사람을 선정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몸으로 체험하려고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예수를 체험하겠는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구속을 받았을 뿐이지 우리는 그분 만큼 죽을 수 없다. 자기 십자가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억울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 버리고 왔다고 하지만 버리긴 무엇을 버렸다는 것인가? 자기로서는 다 버렸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별로 버린 것도 없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보시면 어떻겠는가! 우리가 억울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래, 네가 억울하구나.”라고 하시겠는가? “그것이 네게 마땅하다.”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그 안에 가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진리(진실)임(딤전2:5)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진실이다. 그분만이 온전한 진실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였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실 수 있는가? 그것은 그분만이 완전하게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으로 죽으셨다.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그 양은 절대로 흠이 없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제물이 될 수 없다. 흠이 없는 양, 이것은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온전한 사람이 죽어야 구속이 될 수 있다. 온전한 죽음 안에만 구속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다. 그가 누군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예수는 그의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가 되셨다.

 

라. 상식적인 사람이 되게 함(2:8~)

바른 교훈은 상식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교훈이다. 상식적인 교훈으로 상식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른 교훈이다. 종교적인 사람이 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디모데전서 2장 8절 이하는 남자들에 대하여, 여자들에 대하여, 감독의 직분에 대하여, 집사의 직분에 대하여 권면한 말씀이다. 시대마다 사정이 다르니까 그때와 지금이 같을 수 없다. 그때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딤전2:11).”고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요즘 절대로 복종할 여자가 있겠는가? 우리 교회 자매들도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옛날에는 그것이 정상이었으나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윤리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부부가 같이 직장에 나가야 하는데 남자는 가만히 앉아서 여자에게 밥을 차려 오라고 하면 되겠는가? 여자가 전업주부라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둘 다 똑같이 바쁜데 가만히 앉아서 “여자는 밥을 해야 한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남자들에 대하여, 여자들에 대하여, 감독의 직분에 대하여, 집사의 직분에 대하여는 읽어 보고 참고하시기 바란다.

 

1) 모든 것, 모든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함

사람은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 종교나 교리나 제도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이것이 상식이다.

이것을 알았으면 중세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보다 교리가 더 중요했고 교회 제도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 그 숫자가 네로가 죽인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종교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방인을 몰살시킨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들은 그것만 보았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필요했지만 중세 시대에 교황들이 그것을 그대로 적용해서 사람을 죽었던 것이다. 교황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신교도 그러했다. 그러나 모든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일이나 교리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니까 사람이 더 중요하다. 설령 교리가 틀렸어도 사람이 더 중요하다.

 

2).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님

종교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필요해서 종교를 만들었는데 중세시대에는 마치 종교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렇다. 사람이 성경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이지 성경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도 그렇다.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사상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며 잔소리를 하는 자들에게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3) 종교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교리나 제도는 사람보다 중요할 수 없음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종교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교리나 제도는 사람보다 중요할 수 없다. 그런데도 교리나 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다 보면 사람보다 그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호교론자들은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포악해져서 교회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사람 죽이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게 된다. 그 추종자들은 오백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일을 회개하지 않고 있다. 교리나 제도가 종교나 제도를 유지하는 데는 필요하겠지만 사람을 살리는 데는 무용하다.

 

4) 사람 이외에 하나님의 거처는 없음

하나님은 오직 사람을 구원하여 자신의 백성이 되고 자신의 거처가 되게 하신다.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 없다.

사람들은 좋은 종교나 좋은 교회, 좋은 제도나 좋은 교리가 있으면 하나님이 거기 거하실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데 거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만 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 안에만 거하실 수 있지 교리나 제도나 의식으로 구성된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다. 생명은 생명 안에만 거할 수 있지 생명이 아닌 데는 거할 수 없다. 로얄제리는 꿀 속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생명은 생명 안에만 보존된다. 아무리 교리나 제도나 의식으로 하나님을 손상시키지 않고 하나님을 옹호하고 영광을 돌리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들 안에 거하실 수 없다. 그것들은 종교를 옹호하고 종교를 세우는 데만 필요할뿐이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 이것이 비상식적인 것이다. 그 근원에서 모든 것이 파생되어 각 분야에서, 모든 분야에서 사람은 비상식적이 되고 말았다. 종교에 빠지면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그래서 바른 교훈, 건전한 교훈이 필요한 것이다. 바른 교훈, 건전한 교훈은 무엇인가? 피조물은 피조물이라는 것, 피조물은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당이나 박수는 반드시 죽이라고 한 것이다(레20:27). 무당이나 박수는 인격 밖에 있는 사람이다. 신접을 해 버리면 그 사람의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죽이라고 한 것이다. 피조물은 피조물이다. 인생은 피조물이다. 인생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인간이 되게 하는 구원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바른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이렇게 정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교훈이다. 장로교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정통 교리도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면 사람이 정상적인 인간이 돼야 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하다 보면 빗나갈 수밖에 없다. 꿈을 꾸고 환상을 보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에 각북에 살 때 그 집주인이었던 분은 이대 영문과를 나오신 분이다. 그런 사람이 꿈꾸는 목사에게 걸려서 지금은 단양 골짜기에 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목사에게 물어보면 점쟁이처럼 꿈을 꾸고 해답을 준다고 한다. 많이 배우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분이 그런 것에 휘말려서 산골짜기에 살고 있다. 신령한 체하다가는 귀신처럼 되기 쉽다. 아예 안하는 것이 좋지 잘못 하다가는 무당처럼 되기 쉽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가면 순수한 것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상적 인간이 되도록 바른 교훈으로 가르쳐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정상적인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가 우선 정상적인 사람, 상식적인 사람이라야 한다. 바른 교훈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교훈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다 아담의 영을 받아서 아무리 바로 살려고 했어도 비정상적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당신의 진실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이제는 진실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피로, 당신의 생명으로 구속하셔서 당신이 거하시는 그 진실 안으로 회복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양육을 받아서 당신의 뒤를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 앞에 당신이 없다는 우리는 갈 곳이 없지만 우리 앞에 당신이 계셔서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당신과 같이 못하고 당신에게 미치지 못할지라도 당신이 우리 앞에 계심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주님이 영원히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가 따르고 사모하며 영원히 추종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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