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디모데전서의 요점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22:14

디모데전서의 요점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자기의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로 그 내용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즉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다(딤전1:4). 그리고 디모데후서는 교회의 타락에 대한 예방대책에 대한 말씀이고 디도서는 교회 안에서의 질서 유지에 대한 말씀이다. 그래서 이 세 서신을 목회서신이라고 한다. 순서대로라면 데살로니가전서로 넘어가야 하지만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교회생활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다.

 

디모데전서의 한 가지 목적은 교회를 삼일 하나님의 합당한 표현으로 보존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벌써 여러 가지 사상과 교훈들이 들어와서 혼란이 생겼기 때문에 이런 편지들이 쓰여지게 된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접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조류와 풍속과 사상, 그리고 다른 종교의 영향이 밀려들어오게 되어 있다.

 

기독교는 유대땅에서 시작되었는데 희랍에 들어가서는 희랍의 영향을 받았고, 로마에 들어가서는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영국에 가서는 영국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에 가서는 미국의 영향을 받았는데 한국에 와서는 한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 교회가 무엇이며 참 믿음이 어떤 것인지 구별하지 않으면 그런 풍조에 밀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새로운 종교가 만들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가면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되고 말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 끌려가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경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영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문화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사람을 예로 보아도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상과 관념이 알게 모르게 다 박혀 있다. 특별히 지금 우리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도 다 그런 것들이 박혀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사람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는 한국에 와서 기복신앙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그것은 한국 사람의 기질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어디론지 실종되어 버렸고 오직 그것만 흥성하고 있다.

 

기독교 방송에서 목사님들이 나와서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뿐이다. 아마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복을 빌러 절에 다녔던 것이 은연 중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까지 엉뚱하게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안에 있으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런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빗나가 있는 것인가!

 

디모데전서를 쓴 한 가지 목적은 교회를 삼일 하나님의 합당한 표현으로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와 그 인격이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화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일제시대 때 일본에 가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그 때 받은 영향이 박혀있고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미국적인 사고방식이 박혀 있다. 교육의 영향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순수한 사람이 아니라 단군 할아버지에서 시작해서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나이를 굉장히 많이 먹은 사람들이다. 우리 속에는 온갖 것들이 다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 사람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 마치 수풀 속에서 금을 찾아낸 것과 같고 모래 속에서 금을 찾아낸 것과 같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디모데전서에는 이 목적, 즉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보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번에 디모데전서를 다시 보면서 이 기본적인 요점을 말씀드리려고 한다.

 

 

Ⅰ. 믿음(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성)

 

첫째는 믿음인데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과 주관적인 믿음 두 가지가 있다. 객관적인 믿음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고 주관적인 믿음은 그분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만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신심이라고 하지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신앙(信仰)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믿음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신심(信心)이라고 한다. 수양을 통해서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신념을 키우는 것이 불교다. 그들은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세상은 구름 같은 것이라는 신념, 육신은 소용없는 것이라는 신념을 키운다. 그러니까 산 속에 들어가서 수도를 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과 믿음은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하였다(딤전1:14).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내 안에 있는 생각, 내 안에 있는 믿음은 곧 나이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1. 하나님의 신약경륜에 따른 완전한 복음의 내용, 즉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는 것

하나님의 신약경륜에 따른 완전한 복음의 내용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죄를 사함받는 것이나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신약경륜데 따른 완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갖는 것, 그분 자신과 하나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구약 안에서는 복음이 여러 가지다.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것도 복음이고 홍해를 건너온 것도 복음이다. 위기에서 구출받은 모든 것이 복음이다. 죄를 사함받는 것도 복음이고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도 복음이지만 신약경륜에 따른 완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것이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나도 옛날에 목회까지 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중심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큰 믿음을 가지고 큰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능력을 받고 사람을 많이 모아서 교회를 확장시키는 것이 목회하는 사람들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중심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었고 목회가 잘됐다면 나는 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것이 잘 안됐다. 큰 믿음을 가져 보려고 해도 안됐다.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가? 앉은뱅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가 낫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이 겁이 나서 못했다. 그런데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그런 일을 겁 없이 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도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니까 광주 지구의 C.C.C 간사는 회관을 지을 땅을 보아 두고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매일 아침마다 그 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곱 바퀴씩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항상 ‘저렇게 좋은 믿음이 있는데 왜 나는 믿음이 없는가?’ 하는 열등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무슨 일을 할 텐데 나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하고 줄 것으로 믿어야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큰 일을 못할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나는 열등생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 그 인격이라는 말씀을 듣고 나서 열등감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에서 내가 해방되었다. 경륜의 중심이 그리스도 자신이니까 다른 것은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까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것을 놓아두고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썼으니 얼마나 상식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가! 그렇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너무나 큰 물결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그 일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그것이 틀리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해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 모든 일에서 다 해방되었고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디모데전서 1장 4절에는 “그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보다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것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대인들이 해 왔던 족보 이야기나 옛날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쓰여있는 것만 알지만 그들에게는 성경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온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우리가 단군왕검에 대한 신화를 갖고 있듯이 그들도 많은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 데 착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고 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커져 버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인 인격이 무시당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위하여 믿음과 진리 안에서 전파자와 사도로 세워졌다(딤전2:7).”고 한 것이다. ‘믿음과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진리도 그리스도고 믿음도 그리스도다. 그리고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했는데(딤전3:9), ‘믿음의 비밀’은 주관적으로 갖는 믿음의 비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믿음을 그리스도로 바꾸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믿음(faith, belief)’은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어떠하심, 그분의 실실함이다. 이 믿음의 신약경륜의 중심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객관적인 것으로써 그리스도 자신의 어떠함(신실하심)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객관적인 것이다.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어떠함도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어떠함이다. 나에게 신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어떠함의 문제다.

옛날에 우리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만 붙잡고 살았다. 그래서 얼마나 믿어야 완전한지, 어느 만큼 믿어야 깊은 믿음인지 한계가 없었다. 앉은뱅이를 놓고 기도하는 믿음을 보고 큰 믿음이라고 하겠지만 다른 데 가서 보면 그보다 더 큰 믿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얼마나 믿어야 정말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객관적인 것으로 예수님 자신의 신실성이다. 주관적인 믿음과 객관적인 믿음은 우리가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길 수 있는 믿음과 은행의 신실성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 우리는 은행의 신실성을 보고 돈을 맡긴다. 아무리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은행에 돈을 맡긴다. 그것은 은행의 신실성 때문이다. 오로지 신용으로 먹고 사는 것이 은행이다. 은행에서 남의 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자를 100원 주고 그 돈을 대출해 주어서 150원의 이자를 받는 것이다. 그러려면 남의 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용이 있어야 한다. 은행은 신용으로 먹고 사는데 지금 미국에서는 은행이 부도가 났다고 한다. 그 은행에 돈을 맡기면 못찾는다고 소문이 나게 되면 맡겼던 돈을 다 찾아간다. 그러면 은행도 부도가 난다. 미국에서는 집을 살 때 20%의 다운페이만 내면 나머지 80%를 은행에서 융자해 준다. 그런데 미국에서 집값이 하락해서 은행에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집값을 1000만원으로 잡고 융자를 해 줬는데 집값이 700만원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은행 부도가 나게 된 것이다. 은행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고는 너도나도 돈을 빼내 갔기 때문이다.

은행이 신실하지 못하면 아무도 돈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은행에 돈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있다면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신용이 없는 은행에 돈을 맡길 수 있겠는가? 아무리 믿음을 갈고 닦아도 신용이 없는 은행에는 돈을 맡길 수 없지만 나에게 아무 믿음이 없어도 그 은행이 신용이 있으면 돈을 맡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그분이 얼마나 신실한 분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나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 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으나 말짱 헛일이다. 은행이 망해 버리면 믿음이 큰 사람이 더 크게 망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은행에 돈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맡길 수 있는 은행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은행은 내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돈을 맡기려면 그 은행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는 믿음이 있을 수도 있고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거기 매여 있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선물일 뿐이다. 그런데도 교회생활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것보다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 하며 점검하기 쉽다. 자기 안에 기쁨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는 그분의 어떠하심이 가장 중요하다. 그분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다. 그분이 아니면 교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분의 어떠하심이 있어야 교회가 작든지 크든지 알짜가 되지 아무리 좋은 교회를 만들어도 그분이 없으면 다 사이비가 되고 만다. 그분이 있어야 교회가 죽지 않고 산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객관적인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생각할 일도 아니고 무엇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라고 생각할 일도 아니다. 은혜는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보다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였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그 은혜를 인하여’가 빠져 버리면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 되고 만다. 어떤 유명한 분도 자기가 그래서였는지 믿음은 신념이라는 말을 했다. 믿는대로, 신념대로 된다는 것이다. 병을 고치는 것은, 사업에 성공하는 것은 믿는대로 될 수 있다. 정주영 씨는 신념으로 현대중공업을 일으켰다. 그분은 조선소를 시작할 때 ‘된다. 내가 가서 설득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영국의 은행가를 찾아가서 돈을 빌렸던 것이다. 큰 믿음이 있으면 큰 일을 할 수 있다. 신념이 없이는 절대로 일을 못한다. 나 같은 사람은 신념이 없기 때문에 큰 일을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약경륜은 우리의 믿음이나 신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되시는 그분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하심으로 믿음이 되심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되셨다. 그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된 것이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곧 우리의 믿음이다.

 

1) 침례받으심에서(마3:15)

그분은 침례받으심에서 신실하셨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침례를 베풀 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나왔고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레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거절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셨다(마3:15). 예수님으로서는 침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도 물에 들어가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이야 더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시대적인 요구였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백성이 나와서 회개하고 침례를 받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것이 그분의 신실하심이다. 그것이 좋든지 싫든지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를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침례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회개의 침례를 받는 것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였다. 호렙산에서 나올 때는 그때의 요구가 있고 홍해를 건널 때는 그 때의 요구가 있다. 그러므로 나 혼자 앞서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요구에 우리는 응해야 한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려는데 자기 혼자 잘난 체하고 배를 타고 건너거나 도술을 부려서 훨훨 날아간다면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가 망가져 버린다. 그 시대에는 누구든지 다 홍해를 건너가야 했다. 물이 갈라질 때 홍해를 건너가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다.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를 거부하고 자기 혼자 배를 타고 가면 안된다. ‘배를 타고 건너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홍해를 걸어서 가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그러면 안되는 것은 그 시대에는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 물이 갈라졌을 때 건너가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이 편리하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꼭 물이 갈라져서 건너가야 의미가 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의 사이가 영원히 갈라지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배를 타고 건너면 좋지만 그러면 애굽 사람도 배를 타고 올 수 있다. 그리고 광야에 갔다가 목이 마르면 다시 배를 타고 애굽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시대적인 요구에 응해야 한다. 이것이 의다. ‘의’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에 따르는 것이 의다. 지금은 홍해를 건널 필요가 없지만 그때는 홍해를 건너야만 이스라엘 백성 앞에 두신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작할 때, 그리고 중간 중간에 우리에게 정해졌던 길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길대로 가는 것이 의다. 그 시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였다.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될 것 같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꼭 그렇게 해야 했다. 경주를 할 때는 정해진 코스로 달려야 하는 것처럼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다.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을 따라서 가야 한다. 이것이 의로운 길이다.

그분이 침례를 받으신 사건은 그분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해 준 사건이다. 그분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요구가 있으면 그대로 따르셨다. 그것이 자기 이치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를뿐이었다. ‘나는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침례를 받으라고 하시면 받으셨다.

 

2) 시험받으심에서(마4:1-11)

그 다음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주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는 세 가지 말이 나왔다.

사탄이 시험한 것은 너도 하나님 같이 되어 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아담에게 한 말도 “네가 왜 그러고 있느냐? 네가 흙으로 지어졌다고 네 인생을 산 혼으로 마칠 판이냐?”고 했던 것이다. “네가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 인생으로 마칠 작정이냐? 그러지 말고 하나님 같이 되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자기와 같이 되어 보라는 것이다. “천사인 나에게는 너 같은 장애물도 없고 너 같은 제한도 없고 너 같이 불편한 것이 없으니까 나 같이 되어 보라.”고 하니까 아담이 부럽기는 한데 그렇게 될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너 같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신과 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탄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자기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신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것도 그와 같은 시험이었다. 사탄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하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은 ‘네가 신(神)이라면’이라는 의미다. “네가 신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담에게 했던 시험을 실제화, 구체화, 극대화한 것이다. 아담에게 한 말은 간단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그런데 아담은 그때 이 시험을 받았던 것이다. 돌이 떡이 되도록 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담은 할 수 없으니까 당연히 손을 들었고 “어찌하면 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면 되느냐?”고 묻지 않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떡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만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짐승도 떡으로 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떡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쉽지 않은가! 떡을 먹고 사는 것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왜 개나 소를 보고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개나 소를 보고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람인지 분명하게 구별하면 간단하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천사는 몸이 없으니까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나 하늘에서 뛰어내리나 깨질 일이 없다. 그래서 아담은 “그러면 나는 깨질 텐데 어찌하면 되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그래서 사탄이 먹으라고 한 것을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다. 사람은 사람으로 지어 놓으셨고 천사는 천사로 지어 놓으셨다. 사람을 천사로 지어 놓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성전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하겠는가! 소는 소로 만들어졌고 개는 개로 만들어졌다. 다 정해진 운명인데 개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린다고 개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는 피조물이다. 나는 만들어진대로 산다.” 하신 것이다. 콧구멍이 둘로 만들어졌으면 둘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콧구멍이 하나로 만들어졌으면 하나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콧구멍이 둘이라서 불편하니까 하나로 통폐합시키려고 하거나 수영할 때 불편하다고 콧구멍을 뒤꼭지에 만들려고 할 수 있겠는가? 뒤꼭지에도 콧구멍이 있으면 물에서도 가라앉을 일이 없겠지만 우리는 만들어진대로 살아야 한다. 물에 가라앉는다고 비관할 일이 아니라 수영을 배우면 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대로 사는 것이 사람이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한 것이다. 아담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고 나서 자기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갖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먹으라고 한 것을 먹었던 것이다. “어찌하면 되겠느냐?”고 하다가는 시험에 걸린다. ‘어찌하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느냐?’고 하면 시험에 걸린다. ‘어찌하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느냐?’, ‘어찌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질 수 있느냐?’고 하면 시험에 걸린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지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의 영광이다.

그분이 시험을 받은 자리에서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참 사람이고 신실하신 분인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거품이 하나도 없는 사람, 100% 자기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100% 자기 자본을 가진 회사는 100% 신뢰할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일반은행에 권고하는 자기자본비율은 8% 이상이다. 은행은 신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자본비율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8% 이상의 자기자본비율이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한국의 은행들에게 BIS 비율을 맞추라고 해서 IMF 때 그 난리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자본비율이 넘치는 분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자본비율이 넘칠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천사처럼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진 것이니까 우리가 사람으로 내려오면 자동적으로 자기자본비율이 높아진다. 내실을 기하려면 거품을 빼야 한다. 거품을 완전히 없애 버리면 내실만 남는다. 예수는 완전히 내실이 충만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볼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진짜 사람이고 그 사람 같이 되는 것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심판받으심에서(마26:36-27:50)

마지막으로 심판받으심에서 그분은 신실하셨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마27:46).”라고 하셨다.

겟세마네 동산부터는 심판의 자리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과 종교와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심판을 받는 자리에서 그분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셨다. 자기 변명이 없다. “내가 이러했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마지막에 십자가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는 피조물입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침례받으심에서와 시험받으심에서, 그리고 심판받으심에서 완전하게 신실한 사람임을 보았다. 그는 참 사람, 순전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가 되고 우리의 내용이 되며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의 생활이 되신다.

사람이 되려고 하면 이 사람이 필요하다. 성공하려고 하면 예수가 필요하지 않지만 사람이 되려고 하면 예수가 필요하다. 이 기준이 있어야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되는 데는 기준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람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과 같은 기준이 있다. 세종대왕을 기준으로 하면 잘돼 봐야 세종대왕과 같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가야 할 목표다. 그가 우리의 내용이 되고 생명이 되며 생활이다.

다른 기준은 다 어렵다. 세종대왕과 같이 되기도 어렵고 박태환 같은 수영선수가 되기도 어렵다. 박태환 선수는 얼마나 수영을 잘하는지 한국 남자의 자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박태환 선수가 내 인생의 기준이었으면 내 인생은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차라리 고래가 되는 것이 낫다고 할 것이다. 세상의 누구를 내세운다 해도 나는 참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은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만다. 거지를 내세워도 불행하고 장군을 내세워도 불행하다. 무엇을 내세워도 나는 참 인생을 살 수 없다. 예수가 나의 표준이 돼야 참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업이 표준이 되고 목표가 돼도 참 사람이 될 수 없다. 세계 선교에 목표를 둔다 해서 참 사람이 되겠는가? 그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이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다 할 수 없다.

예수님도 다른 것은 한 것이 없다. 참 사람이 되는 것 외에 예수님 사업은 다 실패했다. 사람도 많이 데리고 다녔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에 오천 명이 모였으면 대단한 숫자다. 마이크도 없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다 들리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다 가버렸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보면서 고개를 흔들고 갔던 사람 중에는 떡을 먹을 때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고개를 흔들고 가버렸다. 예수님은 모든 사업에 다 실패했다. 오직 한 가지만 순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 성공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구주가 된 것이다. 그분이 사업에 성공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사람, 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도 여기 목표를 두지 않고 다른 데 목표를 두면 아무리 믿어도 소용없다. 끝이 없는 길을 가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물론 좋은 말, 지혜로운 말은 들을 수 있다. 그런 것이 생활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은 믿으나마나 마찬가지다. 좋은 말, 지혜로운 말은 다른 데 가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심으로 믿음이 되심

그는 우리에게 확고하게 믿음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된다.

어떻게 그분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시는가? 왜 박태환 선수는 나를 포함하지 못할까? 그가 나를 포함할 수 있다면 나도 유명한 수영선수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는 나를 포함할 수 없다. 내가 그에게 포함되고 싶어도 포함될 수 없고 그가 나를 포함시켜 주려고 해도 포함시킬 수 없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는 성도 이름도 모르는 나를, 이천 년 후의 나를 포함하실 수 있는가? 그분이 박태환 선수처럼 어떤 기능이나 능력을 가졌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이 나를 포함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거품없는 참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가질 수는 없어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대로는 있을 수 있다. 더구나 그것도 잘안되니까 아예 죽게 하셨다. 죽으면 다 똑같아진다. 그러면 그 안에 다 포함된다.

참 인생 안에는 모두가 포함된다. 아담 안에는 왜 내가 포함되지 못했던가? 그것은 그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각기 자기대로 조작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런데 예수는 조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다.

그분은 죽으심에서 참 인생이심을 증거하셨다. 기능과 능력으로 참 인생이 된 것이 아니다. 기능과 능력으로는 참 인생이심을 증거할 수 없다. 수영을 잘한다고 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마라톤을 잘한다고 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며 공부를 잘한다고 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으로는 인간을 증명할 수 없다. 머리가 좋으니까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코끼리보다 낫고 원숭이보다 낫다고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 것으로 인간이 증명된다면 얼마나 비참한가!

참 사람이라는 이 증거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하셨다. 우리는 이 안에 와 있다. 그래서 평안한 것이다. 기능과 능력을 요구하면 불편하다. 다 다른데 일률적인 기능을 요구해도 불편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요구해도 불편하고 어렵다. 그런데 그분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고 그분의 참되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안에 오면 평안해지는 것이다. 그분이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으니까 평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요구를 하지 않고 30년을 지내왔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요구하려면 대단히 어렵다. 처음부터 요구했으면 적응이 돼서 아예 요구하는대로 하려고 할 텐데 너무 요구를 하지 않아서 사업에 지장이 생긴다.

스스로 무엇인가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종교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종교적인 요구를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고민을 갖고 있다. 죄 사함이나 구원에 대한 문제, 그리고 천당에 가는 문제가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습겠지만 자기에게는 그것이 굉장히 고차원적인 고민이다. 그래서 그것이 큰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남이 모르는 내면적인 그런 고민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는 우리 교회에 와서도 그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의 짐은 ‘나는 누구와 같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나도 원선이나 한성 형제 같이 되고 싶다.’고 하면 짐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다른데 어찌 똑같이 되겠는가? 유시형 형제와 같이 되고 싶은 형제도 있을 것이나 그 욕 잘하는 입을 어떻게 닮겠는가? 다른 사람이 욕을 하면 밉지만 유시형 형제는 욕을 해도 밉지 않다. 그것도 은사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닮으려고 입을 잘못 놀리다가는 얻어맞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과 같이 되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만 표준이 돼야 한다.

참 사람만 표준이 되면 모든 짐이 벗어진다. 천당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짐도 벗어지고 죄 사함에 대한 짐도 벗어진다. 모든 종교적인 짐이 벗어진다. 참 사람이면 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고민도 그렇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고민도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런 고민은 있어도 괜찮다. ‘저녁은 무엇을 해 먹을까?’ 하는 고민도 없이 그냥 차려 놓으면 안된다. 저녁때가 되면 무엇을 먹을지 걱정해야 그래도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런 걱정은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버스 안에서 짐을 이고 있는 사람처럼 전혀 쓸 데 없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포함되기 어렵다. 이리 가도 안되고 저리 가도 안된다. 이 모임에 가도

포함되는 자리는 한 자리뿐이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이다. 엄지손가락이 어찌 새끼손가락처럼 되겠으며 새끼손가락이 어찌 엄지손가락처럼 되겠는가? 엄지는 엄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다 용도가 있다. 기능과 능력이 다르니까 다 쓸 데가 있는 것이지 다 같으면 어찌 되겠는가? 방송실에서 일하는 형제들이 있는데 이런 형제들이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런 일을 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어서 저런 일을 못한다. 그래서 방송실은 엉덩이가 무겁고 말이 적은 형제들이 주관하고 있다. 방송실에 가 보면 하루 종일 적막강산인데도 자기들끼리는 전혀 문제가 없다. 최선애 자매 같으면 말을 하고 싶어서 한 시간도 앉아있지 못할 것이다. 다 같을 필요는 없다. 기능과 능력을 다 달라도 된다. 다를수록 좋다. 그런데 생명은 하나다. 예수 안에 있는 한 자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자리, 참된 자리 하나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니까 기능과 능력은 많을수록, 다양할수록 좋다. 교회 안에서 ‘지체는 여럿이나 몸은 하나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포함할 수 있는 분으로 우리 앞에 증거되셨다. 그분 안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보니까 내가 그 안에 포함된다.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그분은 그 이상의 사람도 아니고 그 이하의 사람도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거기 포함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나도 상관없고 못나도 상관없다. 못난 사람만 그분 안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기능과 능력의 문제지 운명의 문제도 아니고 생명의 문제도 아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누구라도 다 포함될 수 있는 자리를 증거하신 것이다.

요즘 정미자 자매가 뜨고 있는 것은 정미자 자매에게 가면 포함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포함이 잘 안되는데 정미자 자매에게는 포함이 잘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그 자매가 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포함되지 못하면 거기 포함되면 된다. 한 자리에 포함되면 된다. 기능이나 능력에 포함되면 안되지만 운명의 자리에 포함되면 다 하나다. 나무를 보면 엉덩이에서는 감이 열리지 않고 끝에서 열린다. 잎이 나는 데가 따로 있고 감이 열리는 데가 따로 있고 수액을 빨아들이는 데가 따로 있다. 그렇지만 한 나무 안에서는 다 하나다. 잘라지면 달라도 한 나무 안에 있으면 다 하나다. 가지가 뿌리 없이 열매를 맺겠는가? 가지에서 열매가 맺는다고 가지만 꺾어다 놓으면 열매가 맺겠는가? 뿌리에서 공급하니까 가지에서 열매가 맺는 것이다. 뿌리는 가지를 통해서 열매를 맺고 가지는 뿌리를 통해서 공급을 받는다. 그래서 한 몸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생명이 되심으로 믿음이 되심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생명이 되기 때문에 믿음이 되신다. 어떻게 그분이 생명이 되는가? 그것은 연합이 되기 때문이다.

 

1) 죽으심에 연합한 자는 삶에서도 연합됨(롬6:1-5)

그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는 생명 안에서도 연합된다. 로마서 6장 5절에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같은 모양) 연합한 자(심겨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자라남)가 되리라.” 하였다.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 안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 그와 같이 심겨졌으면 그와 같이 자라나는 것이다.

자라는 것은 생활이다.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면 살으심에도 연합한 자가 된다. 어떻게 연합한 자가 되는가? 그것은 포함되기 때문이다.

기능과 능력으로는 연합할 수 없다. 생명이 있어야 기능과 능력들이 연합된다. 내 몸의 지체가 다 다르지만 내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 연합되어 있다. 손도 발도 다 한 몸 안에 있기 때문에 함께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떨어지면, 생명이 끊어지면 연합이 안된다. 그러므로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살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갈2:20)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다.

포함되었는데 연합되고 연합되었는데 살아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신약경륜이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해서 교정을 받았지만 신약에서는 율법을 통한 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살아지는 삶이다. 목표는 같지만 방법이 다른 것이다. 구약경륜이나 신약경륜이나 목표는 하나다. 어차피 사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방법은 다르다. 하나는 교육적 방법이고 하나는 생명의 방법이다. 그리고 생명은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같이 살려면 그분과 연합해야 되는 것이다.

구약처럼 교육을 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가셨으니까 사마리아로 가자고 하거나 예수께서 이러하셨으니 이러해야 한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구약의 방법이다.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셨으니까 우리도 사마리아로 가야 한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사랑을 하셨으니까 우리도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나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셨으니까 우리도 가난한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과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방법은 그런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 대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다.

구약경륜과 신약경륜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법이 있어서 그 법에 맞춰서 사는 생활이고 하나는 생명 안에 연합됨으로써 그분이 나 대신 사는 생활이다. 그분이 내 대신 사시니까 좀 어설프기는 하지만 결과는 완전하다. 율법은 완벽하지만 결과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생명 안에서의 연합은 어수선한 것 같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완전하다. ‘죽으심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살으심에서도 연합한 자가 된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 내 운명이 있고 나는 거기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까 알쏭달쏭하니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고 알아듣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는 설교만 듣던 사람은 알아듣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구약적인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구약과 완전히 달라졌다. 법조문을 내놓고 그대로 살라는 것이 구약의 경륜이고 방법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는 안되니까 생명을 바꾸겠다고 하셨다. 다른 방법으로는 생명을 바꿀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 안에 우리를 포함시키셨다. 물귀신처럼 우리를 끌고가서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게 하셨다. 그러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사람으로 살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이 나온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

우리가 소와 함께 죽었으면 소와 함께 살 것이고, 개와 함께 죽었으면 개와 함께 살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 죽어도 나 혼자 죽어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 자기 혼자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못한다. 죽어서 염라대왕을 만나고 왔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 앞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죽을 때도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살 때도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와 함께 죽어야 그와 함께 살지 그와 함께 죽지 않으면 그와 함께 살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그래서 이제는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가 나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자가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점점 확고해지고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 믿음이 점점 내 생명이 되고 내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믿음이 되심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통일되는 것이다.

어떻게 통일되는가? 그의 머리 되심 안에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다(골1:18). 그가 없으면 교회는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통일되기를 원하신다(엡1:10).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서 다 한 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냥 죽었다 살아가지고는 안된다. 천당에 갔다와도 안되고 극락에 갔다와도 안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 포함돼야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 통일된다.

때가 찰 때에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이 없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다른 것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그분이 머리가 되셔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이 아니고는 만유를 통일할 머리가 없다. 왜냐하면 기능이나 능력으로 안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 자기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아무나 공자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처럼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면서도 천연스럽게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를 꾸었는데 그것을 갚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나 그렇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나왔지만 그 사람들을 머리로 해서는 통일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공자님 같은 분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공자님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그 제자들은 공자님이 생이지지(生而知之)했다고 하였다. 그런 사람이 머리가 되면 어떻게 만유가 통일되겠는가? 석가모니는 뼈만 남을 정도로 수도를 하다가 우유 한잔을 마시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들의 머리되심 안에는 만유가 통일될 수 없다.

예수의 머리되심 안에만 만유는 통일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너무나 확실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 있는 교회! 이것이 하나님 경륜의 중심인 것이다. 아직은 안됐지만 앞으로는 코끼리도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에 통일될 것이고 호랑이도 그리 될 것이다. 교회는 그 중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인 교회에 있는 것이다.

 

2) 사탄의 머리는 상하게 됨(창3:15 마4:1-10)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사탄의 머리는 상하게 되었다. 사탄의 머리는 상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게 되었다. 그래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 즉 믿음을 만든 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원래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 안에는 믿음이 없는데 그분이 우리 안에 믿음의 창시자가 되신 것이다. 은행이 나에게 믿음의 주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처럼 예수는 우리의 믿음의 주, 인격의 주가 되셨다. 그런즉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 믿음의 주가 되시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는 예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 가면 팔을 하나 잘라야 한다고 하고 저기 가면 다리 하나를 잘라야 한다고 하며 이곳에 가면 눈을 하나 빼야 한다고 하고 저곳에 가면 이빨을 빼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손이 문제가 된다고 하면 손을 자르라고 할 것이고 발이 문제가 된다고 하면 발을 자르라고 할 것이고 이빨이 문제가 된다고 하면 이빨을 빼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를 온전케 하신다. 우리의 거품을 빼고 참 사람이 되게 하신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온전케 된다. 그러나 다른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디가 잘려도 잘려야 한다. 부처님 같이 되려고 하면 팔이라도 하나 잘려야 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온전하게 손발을 다 가지고는 부처님 같이 되지 못한다. 혜가 스님은 팔 하나를 잘랐고 그 스승인 달마대사는 9년 면벽수련을 했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만 보는 일몰관(日沒觀)을 하다가 눈이 못쓰게 된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해서 도를 통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머리 되심 아래 있다면 눈이라도 빼서 줘야지 공짜가 없다.

공짜는 예수 안에만 있다. 그런즉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분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나 그분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3) 사탄은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인정되어 교회의 머리가 되심

그래서 사탄은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 그분이 시험을 받으신 자리에서, 그분이 죽으신 자리에서, 그분이 부활하신 자리에서 사탄은 완전히 부끄러움을 당했다. 사탄은 머리가 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인정되어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제하는 표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통제와 표준 되심 아래 있다. 우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어떠하심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에서 지극히 당연한 위치를 회복하셨다. 그리고 그 안에 구속을 성취하여 구속된 자들을 포함시키셨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서 생명과 생활을 통제하는 표준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원위치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되더라도 원위치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원위치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실하심으로 믿음의 창시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이분에 의한 믿음만이 참 믿음이다. 세상에는 믿음이 많다. 이런 믿음도 있고 저런 믿음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참 믿음이고 영원한 믿음이다.

나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여러 가지 다른 것들도 있지만 마지막에 믿을 수 있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그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석가모니 같은 분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렇지만 나는 그분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의 경지가 너무 높아서 내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분이 나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분을 따라갈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셨다. 나 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믿음을 주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어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허황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계속 믿었으니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것 같다. 세례를 받으라고 해도 부담스러워서 받지 않았다. 세례를 받는다고 무엇이 되겠느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받는데도 나는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겸손해서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니까 세례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무슨 의미로 받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세례를 받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교회에서 시행하는 것이니까 그 시대의 하나님의 요구는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세례를 받으면 뭐하느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따졌지만 그렇게 따질 생각이 없어졌고 교회에서 하는 것이니까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세례를 받자마자 바로 서리집사를 시켰다.

나 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믿음을 주셨다. 그때는 하나님의 특이한 능력으로 나에게 믿음을 주셨지만 지금은 예수를 알면 알수록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이 믿음이 생기니까 다른 믿음이 부럽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는 다른 믿음이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부럽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다. 전혀 동요가 생기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는 무슨 하나님의 시대적 요구가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요구가 있어서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 복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믿음과 상관이 없다. 나에게는 이 믿음,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다른 믿음은 없었지만 이 믿음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워치만 니가 나에게 준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사람이 사람 되는 믿음이다. 만약 다른 믿음으로라면 나는 지금도 안되고 공연히 헛소리만 하다 말았을 것이다. 나도 안되는 것을 남에게 믿으라고 한다고 되겠는가?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성경대로 해야 하니까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기름을 바르고 한다. 야고보서에 보면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했기 때문이다(약5:14).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을 하려면 어색했다. 뭔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만큼은 처음부터 확신이 생겼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 되게 하시려고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때 인격이 확립되어서 내가 요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경륜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것이 확고하게 되면 다른 것들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복잡하고 험한 세상 속에서 그리고 많은 종교의 이론들이 있고 혼란이 있는 가운데서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집중시켜 주신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신약경륜으로만 우리를 몰아넣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없도록 해 주시기를 원하고 이것 외에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자랑이 되며 이것만이 우리의 사명이 되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