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4. 생명 - 영원한 생명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22:17

4. 생명 - 영원한 생명

1. 생명은 교회를 위한 필수적 조건임

디모데전후서의 요점 네 번째는 생명이다.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은 교회를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교회는 교리나 제도나 의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없이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이 생명이 아닌 것은 교회일 수 없는 것이다.

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하여(딤전)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실행되려면 이 생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국가를 건설하려면 일단은 국민이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이 다 있어도 국민이 없으면 국가가 안된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이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국시가 생명인 것이다. 생명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나. 교회 타락의 추세에 맞서기 위하여(딤후)

디모데전후서는 교회가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쓰여졌다. 이것은 교회 하락의 추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 생명 대신에 교리를 선택하고 교리를 선택해서 교회를 보존해 보려고 했지만 생명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교회를 어떻게 교리나 제도로 보존하겠는가? 교회가 하락하지 않으려면 이 생명을 붙잡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하락에 맞서기 위해서 생명에 관한 말씀을 한 것이다.

다. 교회 안에서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딛)

생명은 교회 안에서의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했지만 교회는 이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를 보신 분들은 대부분이 겉으로 보면 소란한 것 같은데도 그 안에 질서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다. 율법도 아니고 규칙도 아니고 법률도 아닌데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평화로운 교회, 사랑의 교회, 좋은 교회’와 같은 슬로건이 많지만 이 생명이 없이는 안된다. 이 생명으로만 교회는 온전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2. 생명의 개념과 의미

가. 구약에서

구약에서 생명의 개념은 단순하게 움직이고 느끼며 의식이 있는 상태다. 그렇지만 꿈틀거린다고 해서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기계도 꿈틀거린다. 그리고 느낌만 있다고 해서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식물인간이 된 사람도 느낌이 있어서 꼬집으면 아파한다. 그렇지만 식물인간은 의식이 없다. 움직임도 있고 느낌도 있고 의식도 있어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으로 의식화되어야 하느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동물적으로는 움직이고 느낀다. 그러니까 거기에 어떤 의식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이런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저런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죽는 것은 어떤 것인가? 구약성경은 혼이 떠나는 것이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은 혼이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보고 혼이 되돌아왔다고 했다(왕상17:21). 혼은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이다. 이것이 떠나가면 죽은 것이다. 느끼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며 판단하지도 못하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혼이 다시 돌아왔다고 한 것이다. 죽었다가 소생했다는 것은 혼이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죽음의 도입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를 먹고 난 후에 죽음이라는 것이 들어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 이것이 죽음이다. 인생의 본질에서 끊어진 것이고 목표에서 빗나간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가 아주 명백하게 내려졌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죽음은 육신과 관계된 죽음이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지만 육신이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팔백 년 구백 년을 살았다.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아담은 인생의 본질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목표가 없어졌다. 이것이 죽은 것이다.

2) 죽음의 길

죽음의 의미가 이렇게 정해졌는데 사람들은 육신을 가지고 살았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한다.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도 불가피하다. 호흡은 떠나간다. 육체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서 왔으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 개념으로 볼 때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 89편 48절에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라고 하였다. 죽음을 보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죽음의 상태

죽은 상태를 구약성경에는 여러 가지로 묘사했는데 욥기 3장 17-19절에는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라고 하였다. 잠, 안식, 어둠, 침묵, 생각과 기억이 없음과 같은 상태가 죽음의 개념인 것이다.

죽음은 실존의 종말이다. 실제적인 영혼의 소멸이다. 인간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다(전1:2).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니까 허무한 것이다. 사람 자체를 놓고 보면 아무 소망이 없다. 사람은 살았을 때 뿐이지 죽으면 아무 소망이 없다.

4) 구약의 소망

가) 살아계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 구약의 소망이다. 이것이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이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은 이방인의 생각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개념은 사람은 죽으면 완전히 없어지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하나님에게는 창조적 능력이 있고 섭리하는 행동이 있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창조하는 능력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오신 섭리하는 행동이 있다. 그 백성을 인도하신 역사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 자체 속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애굽인의 생각이다. 히브리인의 생각은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소망이 없는데 하나님만 살아 계시면 뭐 하느냐?’ 이것이 이방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야 한다. 이방인들의 생각대로 우리가 영생불멸하는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불멸은 아무 소용이 없는 불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없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야 한다. 인생은 주님께 달려있지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동양에서는 인간에게서 불멸하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육체 속에서 멸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식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호흡만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은 동양 사람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대추만 먹고 오백 년을 살았다거나 바둑 한 판을 두고 내려왔는데 몇 대가 지나갔다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불멸하는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은 사람은 불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 이것이 맞는 말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살겠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은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세포가 계속 재생된다는 그럴듯한 이론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죽는가? 다른 세포는 다 재생되지만 전혀 재생이 되지 않는 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심장은 일정 기간 동안만 성장한 후에는 더 이상 재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명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육신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는다. 육신은 절대로 영원히 살 방법이 없다. 옛날보다 평균 수명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는 120살까지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200살 300살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의 생각이 정확하다. 사람은 죽는다. 죽으면 완전히 없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시편 73편 26절에는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였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특색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특색도 이것이라야 한다. 그런데도 희랍화의 영향으로 엉뚱한 것이 들어왔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은 히브리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이삭의 자손이며 야곱의 자손이다.

히브리인들은 후사를 통해서는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아들을 낳으면 내 씨는 계속 남아 있다. 모든 생물은 다 자손을 통해서 영원히 살고 있다. 이 사상이 더 발전해서 이스라엘은 영원하다는 사상이 나왔다. 개인은 영원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지만 민족의 생명, 국가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현실적인 생각이다. 영혼불멸을 믿었다면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영혼불멸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한 것이다.

나) 도덕적 양자택일

그래서 도덕적으로 의는 생명이고 악은 사망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의는 생명을 지향하고 악은 사망을 지향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육신을 말한 것이 아니다. 육신은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살고 죽는 것을 육신에 두지 않고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데 둔 것이다. 그래서 한 단계 비약을 하게 된 것이다.

의는 생명의 길이고 악은 사망의 길이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다 죽는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의를 생명의 길이라고 한 것이다. 아모스 5장 14절에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육신이 살기 위해서 의를 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 속에 불멸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이 불멸하는 것을 개발하고 키우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불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개념이 다른 데로 넘어가서 의를 구하는 것은 사는 길이고 악을 구하는 것은 멸망하는 길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영생과 멸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양자택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기서 실패했다. 여기서 구약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소망이 나왔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사람은 죽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이것이 구약의 유일한 소망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 백성은 영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기는 죽어도 백성은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출애굽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광야에서 물이 없어도 살았고 곡식이 없어도 만나를 먹었다.

나. 신약에서

그런 개념이 신약에 넘어온 것이다. 신약에는 비오스와 죠혜라는 두 가지 말이 나오는데 비오스는 삶의 과정 또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일반적인 생명을 의미할 때 사용했고(마12:44, 딤전2:2, 1요3:17), 죠헤도 비오스와 같이 쓰였는데 사도요한의 책에서는 부활생명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많이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전부 죠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원래 죠헤라는 말은 특이한 말이 아니었지만 사도요한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지 육신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개념에서 하나님과 관계된 자는 죽었을지라도 산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가복음 20장 38절에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고 하셨다. 이것은 육신이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육신적인 것에서 다른 것으로 생명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2) 영원한 생명(참 생명)에 대조되는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생명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은 죽음이다. 에베소서 4장 18절에는 “저희 마음이 굳어 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것, 이것이 죽음이다. 멸망이요 사망이다.

영원한 생명, 부활생명은 참 생명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이 아닌 것은 멸망하는 생명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여 멸망과 생명이 대조된다. 영생이 아닌 것은 멸망이고 멸망이 아닌 것은 영생이다.

3) 예수께서 멸망할 생명을 한꺼번에 처리하셨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 멸망할 생명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리로 한꺼번에 처리하셨다. 멸망할 생명은 거역하는 생명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한 역사가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의 역사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역하는 생명을 우리를 대신해서 처리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거역하는 생명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도를 통했다는 사람도 있고 빛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는 거역이 없어져야 한다.

거역이 없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아무리 육신이 죽어도 거역이 없어지지 않으면 죽은 것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여기서 죄는 거역이다. 그분은 거역을 알지도 못하는 분이다. 그런 분을 거역을 삼으셨다. 그래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거역이 끝나야 의가 된다.

4) 예수께로 회개하는 것은 생명으로 옮기는 것임

거역이 끝나지 않으면 교회가 되지 않는다. 거역은 멸망이지만 그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신령해도 거역이 끝나지 않으면 교회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 회개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죄를 뉘우치는 것도 회개이지만 예수께로 회개해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야고보서 5장 20절에는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였다. 죄인은 거역한 본성을 가진 아담이다. 거역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가슴을 치면서 회개를 해도 거역의 본성은 그대로 있다. 회개하면 옳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거역의 본성이 그대로 있으면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바뀌고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지 그 생명이 바뀐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도 악한 것보다 선한 것이 좋다. 생각이 없으니까 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선한 일을 한다. 게으른 것보다는 부지런한 것이 유익하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 보면 게으른 데서 부지런한 데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을 깊이 해 보면 싸우는 것보다 평화가 좋으니까 싸우는 것을 회개할 수 있다. 매일 싸우던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생각을 깊이 해 보면 회개하고 싸우지 않게 된다. 싸우다 보면 지치기 때문이다. 늙기도 어려운데 싸움까지 하려니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그래서 회개하지만 그렇다고 생명으로 옮겨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악이 더 좋은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다. 악이 자기에게 괴로우니까 회개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려면 예수께로 회개해야 한다.

5) 믿는 자는 죽음을 만나지 않음

예수께로 회개한 사람을 가리켜서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8장 51절에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죽음의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역할은 불멸의 생명 실현

복음 전파의 핵심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셨다 해서 우리가 무엇을 한 뭉치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잘못하면 그렇게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생명을 받았으니까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 나를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 하신 생명의 떡은 예수님 자신이다.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떡은 그분 자신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 생명의 회복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창세기 3장에서 잃어버렸던 참 생명의 회복이다. 이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를 회복하신 분이다.

이 생명을 육신의 생명으로 오해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 인생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그분은 영혼은 구원했지만 육신은 구원하지 못했으므로 예수님의 구원은 불완전하다. 그러니까 영혼과 육신을 다 구원하는 구원이 완전한 구원이다.” 그 사람은 자기가 제 3의 아담이라며 나섰고 죄인의 피를 의인의 피로 갈면 죄가 없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도 무죄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나온 유명한 사람이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생명을 육체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고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동산에서 쫓아내셨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셨기 때문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되었는데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면 또 하나님 같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아담은 동산에서 추방된 것이다. 이 이후로 사람에게는 생명나무의 길이 막혔다. 먹고 싶어도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아예 생명나무라는 개념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른 생명을 찾게 된 것이다.

가) 생명나무의 길을 회복하심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나무의 길을 회복하셨다. 생명나무의 길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다. 교회 회복의 때에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주신 약속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는 것이다. 교회의 회복은 생명나무가 회복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생명나무로부터 교회는 건축된다.

교회는 왜 하락하고 타락했는가? 생명나무가 없이 교리와 제도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생명나무가 없으면 하락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교회가 회복되려면 더 좋은 제도 더 완전한 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교회가 회복된다. 참 생명이 있어야 회복된다.

나) 새 예루살렘의 일상 양식

생명나무는 새 예루살렘의 일상적인 양식이다. 요한계시록 22장 2절에는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생명나무 열매를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이것은 동산이 발전적으로 회복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생명을 회복하려고 오셨다. 우리의 육신을 영원히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을 회복하려고 오셨다.

영생이라는 개념, 즉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개념은 애굽의 바로에게서 나온 것이다. 바로가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했겠는가! 데모하는 사람도 없고 적도 없는 안정된 사회였다. 정확한 때에 나일강은 범람해서 농토를 적셨고 높은 산지에서 내려온 퇴적물을 깔아주었다. 그렇게 좋은 곳에서 바로는 천년만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 호화로운 생활을 놓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아깝겠는가! 그래서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피라밋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서 명태처럼 말라서 영원히 살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영생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사자(死者)의 서(書)에는 죽은 자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살아서 그 책을 읽고 죽은 후를 미리 연습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히브리인들의 영생의 개념과 다르다. 그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인들과 같은 땅에서 살았다. 그들은 그 땅에서 무엇을 소망했겠는가? 그들은 노예였으니까 해방을 소망했다. 바로에게는 영생이 필요하지만 노예에게는 영생이 아니라 해방이 필요하다. 얽매어 있으니까 바로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죄로부터의 해방,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의 영생 개념도 이방인의 영생 개념이다. 동양에서는 어떻게든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했고 서양에서는 영혼불멸 사상을 만들어 냈다. 영혼불멸 사상에서 이원론이 나왔다. 그러나 사람이 영혼불멸의 존재라면 우리는 굳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다. 구더기로 살든 지옥불에서 튀겨지든 살아 있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정말로 죽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고문을 계속 당하고 있으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는데 그분도 고문을 많이 당했는데 고문을 당할 때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것이다. 노예로 매일 얻어맞으며 살다 보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검투사로 매일 죽느냐 사느냐 하며 살다 보면 ‘차라리 죽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 아닌가?’라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구더기로라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해도 그렇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론지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을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다면 이 지구가 미어터지지 않겠는가? 이로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으로도 죽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이 잘하신 일 같다.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가면 그 자손이 나와서 산다.

3. 영생은 교회에 필요한 생명임

영생은 어디에 필요한 것인가?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려고 성경에서 영생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영생은 교회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그 나라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되려면 이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생명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생명이 필요하고 교회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 생명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생명이 필요하다.

가. 영원한 생명

1) 생명나무 과실을 먹음으로 얻음

이 영원한 생명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음으로 얻는다. 그러나 아담은 생명나무를 먹지 못함으로 이 생명을 놓쳐버렸다. 이 생명은 잃어버린 생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생명이 없었다.

원래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산 혼으로 지어졌으니까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밥을 먹어야 산다. 한 번 밥을 먹었다 해서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을 먹었어도 점심을 먹어야 하고 저녁을 또 먹어야 한다. 사람은 생명을 먹고 살도록 되어 있지 한 번 먹었다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선악과도 먹고 생명나무도 먹었다면 하나님 나라가 파괴되는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먹고 살도록 만들어졌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는 생명인 것이다.

2) 나무에 달린 예수를 믿음으로 얻음

그러면 어떻게 영생을 먹게 되는가? 요한복음 3장 14-15절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하셨다. 예수께서 나무에 달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그냥 믿기만 해서는 안된다. 나무에 달린 그분을 보고 믿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독사의 골짜기를 지나다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는데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다. 그래서 뱀에게 물린 자마다 구리 뱀을 쳐다 본 사람은 살았다(민21:6-8). 이 고사를 인용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어떻게 그 예수를 믿으면 사는가? 그것은 그 예수가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우리의 옛 생명은 거기서 끝났다. 십자가는 우리의 옛 생명이 끝나는 곳이고 새 생명이 발아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그분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3) 보내신 이를 믿음으로(요5:24)

요한복음 5장 24절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하였다. 보내신 이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은 아들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보냄을 받아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4) 산 떡이신 이를 먹음으로(요 6:30-51)

산 떡이신 이를 먹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하셨다. 산 떡이신 이를 먹으면 영생한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를 먹으면 영생한다. 그분을 일상적인 양식으로 먹으면 영원한 삶을 산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오래 사는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질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생명은 참 생명이다. 예수를 먹으면 참 생명을 살게 된다. 예수를 양식으로 삼아 살면 참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나의 거역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나는 거역 때문에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이 나의 거역을 끝내셨다.’고 알고 그분을 받아먹으면 진실한 삶을 살게 된다. 자기가 거역한 사람이라고 알면 더 이상 거역할 수 없게 되어 진실한 삶을 살게 된다.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 곧 참 생명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나. 부활 생명 - 영생의 회복

부활생명은 영생의 회복이다.

1) 옛 생명은 예수와 함께 죽었음(롬 6:6)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거역에 대해서 죽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대해서까지도 거절당한 것은 거역의 본성 때문이다. 거역의 본성을 가진 옛 생명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8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은즉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하였다. 어떻게 예수와 함께 죽었는가?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산다는데 어떻게 예수와 함께 죽는가? 시어머니에게도 죽어지지 않고 아들에게도 죽어지지 않고 교장선생님에게도 죽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죽는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성경은 죽으려고 고민하라고 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써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은즉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롬6:8).”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장대에 높이 달린 예수를 왜 보는가? 그것은 거기서 내가 죽은 것을 보기 위해서다. 예수의 죽음만 보면 소용이 없다. 거기서 자기도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죽었다. 더 올라가서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죽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실 때 이미 죽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와 함께 죽었으니까 이제 다른 길은 없다. 그와 함께 죽었으니까 그와 함께 사는 길밖에 없다. 그와 함께 사는 것, 이것이 부활이다. 참 생명이다.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참 생명이고 참 생활이며 진실한 생활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님은 옛 사람 전체를 대표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나는 이래서, 나는 저래서’라는 변명이 가득 차 있다. 말이 많아지는 이유는 변명을 하고 자기 변호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 변명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발견되면 변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다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죽을 것이 죽었기 때문이다. 잘난 것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것이 죽은 것이다.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그분이 이미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거절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실 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분을 거절하신 것이다. 왜 예수를 거절하셨는가? 그것은 나 때문이다. 그 안에 포함된 나 때문에 거절하신 것이다.

나는 거절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보다 더 완전하신 이가 거절당했으니까 나는 자동적으로 거절당한 것이다. 예수는 흠이 없는 양, 흠이 없는 제물이다. 그런 분을 거절하셨으니까 그 이하는 볼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잘못 생각하고 ‘나는 그래도 이점만은 괜찮다. 하나님은 이것은 인정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남아 있다. 그래서 변명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은 한 치도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이 없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과일을 먹었을 때 이미 인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인정할 수 없게 되었는가? 그 사람으로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하다고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의롭다고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결과인 거역이 없어져야 연합이 되고 하나가 된다. 우리는 이미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었을 때 탈락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우리 보다 훨씬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의로우셔도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는, 교회를 세울 수 없는 옛 사람으로서는 거절당하신 것이다.

악은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선은 왜 거절당해야 하는가? 교회 건축에는 오히려 선한 것이 더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 건축이 아니면 거절당할 이유가 없다. 꼬불꼬불하게 생겨서 멋있는 소나무는 관상용으로는 좋지만 집을 짓는 데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좋은 나무지만 기둥으로도 쓸 수 없고 서까래로도 쓸 수 없어서 버려진다. 우리는 이런 것이 좋고 저런 것이 필요하다가 생각하지만 연합의 길에는 그런 것들이 전부 방해가 된다.

교회 회복의 때에 맨 처음으로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교리적으로도 틀림없었고 행실도 틀림없었다. 다 좋았고 선했고 옳았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처음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나무의 과실이다. 그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다. 오늘날 교회들이 에베소 교회와 비슷하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고 어쩌면 에베소 교회보다 더 완벽하고 보수적일지도 모른다. 경건하고 그럴듯한 교회들이 많다. 가톨릭은 정말 완벽한 교회다. 종교인이 되어 종교생활을 하려면 가톨릭에 가는 것이 낫다. 가톨릭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어 있다. 사람들은 잘 되어 있는 그것이 다인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면 연합이 돼야 하는데 연합이 안된다.

교회가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가 없이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한다. 성경이 개인을 위해서 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위한 책이다. 영생도 그렇다. 영생은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개인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 혼자 영생을 누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영생은 개인이 오래 살고 잘살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 건축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영생이 좋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즉 이제는 개인을 위해서는 포기하고 교회를 위해서는 취해야 한다. 구약시대 사람들의 개념이 맞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생명나무는 지금도 낙원에 감추어져 있다. 지금도 믿는 자를 위해서 있다. 먹을 사람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오늘도 생명나무의 과일은 얼마든지 공급될 수 있다.

2)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롬 6:2)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어떻게 죽은 자인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 죽었다 해서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죄는 무엇인가? 거역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거역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거역에 대해서 죽은 자가 죽은 자다. 성질을 부리던 사람이 성질이 없어진 것을 보고 “아무개는 죽었다.”고 한다. 물론 성질도 없어져야 하지만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거역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서 거역은 없어진다. 야곱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해서 그 안에 있는 거역이 없어졌다. 거역은 다루심을 통해 없어지지 타고나면서부터 거역이 없는 사람도 없고 말 한마디로 거역이 없어질 사람도 없다. 거역의 뿌리는 잡초처럼 끈질기다. 잡초는 아무리 뽑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끈질긴 거역의 본성이 한꺼번에 없어지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안에 거역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누구에게나 거역의 본성이 있다.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지 기회만 만나면 거역이 나온다. 바짝 말라 있으면 잡초가 없어도 비만 오면 금방 무성해진다.

멀쩡하던 산에도 벌채를 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진달래가 핀다. 진달래가 언제 와서 뿌려졌겠는가? 나는 진달래 씨를 보지 못했다. 아무리 진달래 씨를 보려고 해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언제 그렇게 퍼졌는지 모른다. 불이 난 산에는 고사리가 무성하게 난다. 그놈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모른다. 거역의 생명도 이렇게 조건만 맞으면 튀어나온다. 그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죽으심이다. 거역에 대한 죽으심이다. 우리도 거역에 대하여 죽은 것이 죽은 것이다.

육신에 대하여 죽을 수도 있고 혼에 대하여 죽을 수도 있다. 육신에 대하여는 가만히 있어도 죽게 되어 있으니까 죽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혼에 대하여 죽는 것도 까다롭기는 하지만 죽을 수 있다. 생각이 죽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생각이 죽어 없어질 수 있다. 참선을 잘하면 생각이 없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생각이 없어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어야 진짜 죽은 것이다.

로마서 6장 2절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고 하였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 의 안에서 살게 된다. 육신이 죽어도 의 안에 살 수 없고 혼이 죽어도 의 안에 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만 의롭게 살 수 없다. 죄의 반대, 거역의 반대가 의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디에 대해 죽으셨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다.

3)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로마서 6장 5절에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하였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는 ‘그의 죽으심과 같이,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다.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와 함께 심겨지고 그와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심겨지고 자라난 자는’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심겨지고 부활로 자라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심겨졌다. 거기서 우리는 다 죄인으로, 거역하던 자로 심겨졌다. 그와 함께 빼도 박도 못하게 심겨졌으니까 싹이 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땅에 떨어져서 죽으니까 다시 싹이 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와 같은 모양으로 심겨진 자가 되면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싹이 난다.

부활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교회를 위한 생명이다. 교회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필요가 없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 해도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니까 교회가 되지 않고 자기대로 살면서 영생을 누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영생은 없다. 아침을 먹은 것이 점심이 되면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정말 지혜롭게 창조해 놓으셨다. 만일 우리 같은 인간에게 영생이라는 것을 심장처럼 집어넣어 주셨다면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멋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누가 농사를 짓겠는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이 농사를 짓는 것이다. 영생도 그렇다. 생명나무를 먹지 않으면 영생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도록 만들어졌다. 우리가 하나님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 삶을 살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먹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예수를 먹지 않으면 예수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먹도록 해 놓으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요6:56).” 하셨다.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필요가 있어서 주신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영원한 생명이 없다. 우리에게는 죽을 생명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기계적 생명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취하려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어야 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이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살려니까 영어가 필요한 것이지 한국에 살려면 영어를 못해도 충분히 살 수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교회에 필요한 생명이다. 형제와 연합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이다. 그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해 필요한 생명이다. 세상에서 살려면 영원한 생명이 필요없다. 세상 사람이나 우리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죽는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살았다고 하신다. 우리가 볼 때는 죽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살았다고 하신다. 우리는 죽어서 썩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았다고 하신다.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나사로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고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는 산 자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 해서 무조건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가 영원히 살면 하나님도 어찌 하실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도 우리를 잡아두실 수 없게 되면 어찌 되겠는가? 죽을 사람은 죽어야 하고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야 한다. 잡혀가야 할 사람이 너무 힘이 세서 잡혀가지 않고 있으면 안된다. 그 사람을 잡으려면 탱크를 동원해야 한다. 그러면 멸망이 더 커진다.

하나님과 관련된 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관련된 자를 산 자로 간주하신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지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죽음과 삶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기가 막힌 말씀이다.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 산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이 산 것이다. 이것이 참 삶이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 “나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서만 산 자다.”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도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젊어서 죽으나 늙어서 죽으나 죽는 것이 마찬가지라면 하나님을 향하야 살아야 한다.

아무리 오래 살고 죽어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으면 영생과 관계없다. 그것은 참 삶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한 사람은 인정하시고 한 사람은 인정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생활에서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생활을 해 보면 참 생명을 가지면 교회생활이 잘되지만 참 생명이 아닌 것으로 살면 교회생활이 시끄럽고 안된다. 교회는 이렇게 신기한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것이고 세상 속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은 교회 안에서 검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영생인지 아닌지도 교회 안에서 검증된다.

새 생명은 교회를 위해서,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 필요하다. 참 생명은 새 예루살렘의 일상적인 양식이다. 오늘 교회 생활의 일상적인 양식도 참 생명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시고 우리 옛 사람을 대신해서 대표적으로 처리해 주시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영원히 살기를 바랐지만 육신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산 것이 산 것임을 보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여호와 성전의 문지기로 하루를 지내는 것이 세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사람, 거역에 대해서는 죽고 순종에 대해서는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교회에 대해서는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고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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