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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에 앞장섰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은바리라이프 2010. 6. 28. 21:18

애국에 앞장섰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 6월, 호국 보훈의 달에 가볼만한 곳 - 주기철 손양원 이기풍 목사 등의 순교현장
현승미 기자 smhyun@igoodnews.net

민족계몽부터 복음 전도까지
전국 곳곳에서 뿌리내려

매년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지켜지고 있다. 특히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그로 인해 교회가 불타고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정에서 또는 교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잊혀져가는 우리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문화 유적지를 찾아가 보자.

 

 

#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 목사’

   
▲ 진해 웅천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끝내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총 5년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그야말로 ‘일사각오’의 자세로 일제에 항거했으며, 결국 1944년 4월 21일 금요일밤 9시 감옥에서 순교했다.

진해 웅천은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며 웅천교회는 그가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이다. 호주 장로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1900년에 개척한 교회이다.

13세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그의 원래 이름은 주기덕이었으며, 16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를 철저히 믿겠다는 의미의 ‘주기철’로 본인자신이 개명했다고 한다. 교회 내에 마련된 작은 역사관에는 웅천교회의 역사자료들이 잘 보관돼 있다. 이 곳에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

한편,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비는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안에 있다.

 

 

 

 

 

# 인민군의 희생양 ‘손양원 목사’

   
▲ 애양원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 순교했다. 특별히 올해는 손양원 목사가 순교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로, 많은 이들의 관심이 여수로 쏠리고 있다.

손양원 목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여수 애양원이다. 애양원은 1909년 미국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가에 버려진 한센병 환자를 데려다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나병원이다.

애양원교회는 손양원 목사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7월 2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1950년 9월 28일 순교할 때까지 나병환자들을 위하여 봉사했던 교회이다. 광주나병원 병실하나를 예배장소로 마련하고 탈메지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했으며, 여수로 옮기면서 한센병 환자가 증가하자 전담교역자로 시무했다.

이어 1939년 전도사 시절의 손양원 목사가 시무 중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청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애양원교회로 돌아왔다.
일제에 항거하며 힘든 삶을 살았던 그는 결국 미평 과수원에서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 순교했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어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내가 얼마나 부끄럽게 생활을 했는지 저절로 회개의 기도가 나온다.

 


# 극심한 고문을 받은 ‘이기풍 목사’


   
▲ 우학리교회
이기풍 목사는 장로회 초대 목사 7명 중 한 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다. 1908년 제주도에 부임, 온간 어려움을 이겨내며 복음 전파에 전념했다.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목사로 전임된 이후 1921년 순천중앙교회 시무 중 장로회 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순천과 제주 등에서 사역하다 1934년 70세의 나이에 우학리교회에 부임했다. 돌산과 완도 등 도서지방을 돌며 전도하고 교회 개척에 힘썼다.

그러나 일제는 1938년 그를 신사참배 거부 및 미국 스파이 죄목으로 체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 병보석으로 출감해 우학리교회에서 요양과 사역을 하다 1942년 6월 20일 주일 아침 8시 목사관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학리교회는 금오도라는 작은 섬에 자리잡고 있다. 여수만 남서쪽에 있으며, 섬의 지형이 자라를 닮았다 하여 큰 자라 ‘금오도’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국내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는 다도해 국립공원에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 배울거리가 풍성하다.

 


# 열 아홉 꽃다운 나이 ‘유관순 열사’


   
▲ 매봉교회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당시 동료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하얀 두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으며, 결국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처음 5년형을 받았으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기념으로 형이 1년 6개월로 줄었다. 그러나 모진 고문으로 방광이 파열돼 결국 순교했다. 당시 이화학당의 교장이 간신히 시체를 넘겨받았지만, 이미 시체는 손톱도 없이 토막 난 채로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다.

매봉교회는 유관순열사가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교회로, 유관순열사 생가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감리교에서 스웨러 선교사에게 공주 천안지역을 순회 전도하게 했다. 이때 스웨러 선교사가 목천, 병천을 순회 전도하다가 1899년에 지령리에 도착,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인 1901년 박해숙 전도사에 의해 복음이 전파돼 교회가 세워졌다. 매봉교회는 두 번씩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교회가 불타버렸고, 해방 될 때까지 철저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핍박을 받았던 교회이다.

해방 후 유관순 열사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재건립했다. 지금의 건물은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교회 남부연회의 후원으로 새롭게 지은 것이다.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이며 지하 1층에 유관순 열사의 전시관, 1층에 교육관과 사택, 2층에 예배공간이 있다.

유관순 열사를 기리기 위해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1974년 정동 이화여고에 ‘유관순 기념관’을 건립했다. 1층에는 2천여 석의 좌석을 갖춘 강당이 있고, 2층에는 유관순의 사진과 유품들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교정에는 동상과 함께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남아 있다.

 


# 독립 위해 목숨 바친 ‘안창호 선생’


   
▲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95년 서울에 와서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에서 3년간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인이 됐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전덕기 목사, 신채호, 이동휘와 함께 상동교회에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만들어 전국을 다니며 애국연설을 하는 등 민중을 각성 계몽시켰다.

1913년에는 민족운동을 주도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흥사단’을 조직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서리로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 의거 당일 체포된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수감된 그는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질병인 위장병과 폐결핵이 악화돼 60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도산공원에는 1973년 망우리에서 도산의 묘를 이전하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와 합장한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도산 안창호기념관과 기념비, 말씀비 그리고 기념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도산안창호기념관에는 일기를 비롯해 도산과 관련된 각종 자료 160여 점이 비치돼 있으며 영상실과 도서실은 도산의 애국정신을 배우는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