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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져도 기뻐할 수 있는가?

은바리라이프 2010. 6. 1. 17:18

한국이 져도 기뻐할 수 있는가?

-월드컵

 

 

 

인류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은? 두말하면 잔소리, 축구다. 특히 월드컵은 전 세계를 열광으로 몰아넣는 축제 중 축제다. 월드컵은 단일 스포츠행사로 가장 많은 인구가 시청한다. 현재 FIFA에 가입된 국가수는 207개국. IOC나 UN보다 많다. 축구는 별 장비도 필요 없고 그저 공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지구상 최고 인기스포츠 축구와 월드컵의 몇 가지 키워드에 대해 살펴본다.

 

 

 

호전성(好戰性)

축구의 유래에 대한 여러 학설 중 하나를 소개하면, 주후 4세기 경 영국을 침략한 딘족을 부족민들이 물리친 후 딘족 장군의 두개골을 차며 승리를 축하했는데, 이것이 축구로 발전했다고 한다. 최초의 축구 경기로 기록된 217년 영국 더비의 경기는 로마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요컨대 축구에는 전쟁의 요소가 짙게 함의(含意)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몽고메리 장군의 말이다. 지난 3,000년간 인류가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단 268년이었다. 국가나 개인이나 인간의 삶이 미치는 곳은 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인류는 늘 평화와 화합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이것은 아담 이래 인간 속에 깃든 죄성(罪性)의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지혜자들은 인간이 ‘지식이 부족해서 다툰다. 인간을 교육하면 평화로워질 수 있다’ ‘무기를 폐기하면 분쟁을 멈출 수 있다’ 주장하지만, 우리들의 가정을 돌아보면 꼭 총칼이 있어야만 싸우는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잠23:29).

 

 

팀워크

단체경기의 생명은 팀워크다. 2002월드컵에서 한국은 개개인의 실력이 더 좋아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강호를 이긴 것이 아니다. 개별적으로는 약하지만 팀워크가 더 강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팀워크는 자신이 돋보이려는 욕심을 버리고 지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때 잘 발휘된다. 뭇사람 중에서 돋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교만이고, 보이지 않는 지체로서의 헌신을 즐겨하는 것이 겸손이다.

 

 

개인성적만 보면 크게 돋보이지 않는 박지성이 세계최고 명문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크게 중용되는 건, 퍼거슨경이 그를 편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헌신하여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그의 성실과 겸손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WBC 야구 월드컵에서 메이저리그 톱스타들로 구성된 미국이 8강에 머무르고, NBA 톱스타들로 구성된 미국의 농구 대표팀이 당연해 보이던 금메달 획득에 실패한 것도 팀워크를 무시하고 자기를 앞세우다 망한 교만의 예일 것이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3:34)

 

 

훌리건, 우리 속의 죄성

<英볼턴스토크 33명 사망, 400여명 부상(1946), 페루와 아르헨티나에서 318명 사망, 800여명 부상(1964), 네덜란드 할렘모스크바 스파르타크 22명 사망, 100여명 부상(1982), 브뤼셀 헤이젤 39명 사망, 454명 부상(1985)>

 

이 기록들은 전쟁 기록이 아니라 축구와 관련된 사고 기록이다. 광적인 응원단을 훌리건이라 부르는데, 사고의 주범인 훌리건들에게 축구는 전쟁이다. 남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축구와 관련해 실제로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유독 축구에서만 사망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축구에는 마치 전투에 임하는 투사와 같은 승부욕과 투쟁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접 뛰는 선수의 (국가에 대한)대표성에다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순위경쟁이 더해져 해당국가의 국민들은,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축구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대~한민국! 짜작자작작’ 하면서.

 

눈에 보이는 역사를 이끈 것은 수면(水面) 아래에 숨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어쩌면 역사는 ‘죄성(罪性)의 승전보’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묵시에 멱살잡혀 있긴 하다. 훌리건은 빙산의 일각처럼 잠재된 인간 본성이 물 위로 드러난 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7:12)

 

 

승리와 영광

성경에는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의 ‘성공’과 ‘실패’란 말이 없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복, 보호, 임재, 은혜, 평강이 성취를 이루며 완전함을 이루는 것이 성공,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은 상태,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신 상태가 실패다.

혹 한국팀이 상대를 이겨야만 기쁘다면 그건 상대가 아직 ‘우리’가 아닌 까닭이다. ‘내 가족’, ‘내 지역’, ‘내 나라’가 다 확장된 ‘나’요, '우리'다. ‘나’만이 잘 되길 바라고 그 외의 대상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이기주의이며,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죄’다. 우리의 상대들도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그들 또한 ‘우리’다.

성도가 성화되는 것은 ‘나’를 버리고, 내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날마다 온전하게 죽는 것이다. 내가 남보다 잘 되길 포기하고 네가 잘 되는 것, 모두가 성공하는 것.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기뻐할 때, 성도의 인생은 ‘성공’을 말할 수 있다.

 

성도의 ‘승리’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속여 패배케 하는 사단과 내 욕심을 극복하고 그로 인한 죄를 면하는 것이다. 골망이 철렁이는 통쾌한 승리라면 좋겠는데, 어째 성도의 승리가 소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늘의 관객들에게 이보다 스릴 넘치는 경기, 통쾌한 승리는 없다.

아르헨티나, 그리스, 나이지리아가 한국을 이겨도 기뻐해 줄 수 있는가? 우리가 사나 죽으나 하나님 것이듯, 이기건 지건 영광 또한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2010. 6월 월드컵 임박한 어느날..   은바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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