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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일확천금의 꿈

은바리라이프 2010. 8. 3. 00:09

로또, 일확천금의 꿈

 

 

 

 

8,145,060분의 1

호기심에라도 한번쯤 복권이나 로또를 구입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점집을 찾는 심리와도 비슷하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 운명론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다. 또 그것은 도박과도 닮았다. 일상의 지루함을 깨는 오락, 패를 확인할 때의 짜릿함, 높아지는 심박수, 대박의 꿈과 (추첨을 기다리는 동안의)무한하고도 즐거운 공상, 게다가 투자 대비 수십만배를 바라보는 수익성,..

 

 

그런데 모든 미사여구와 환상을 걷고 보면, 로또는 유형의 재화를 지불하고, 소유할 수 없는 무형의 ‘꿈, 공상, 쾌감’ 같은 정신적 만족-이걸 ‘만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정도의 상품을 구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4등 이내의 당첨확률도 0.1% 정도, 6개 숫자가 모두 맞아야 하는 1등 당첨확률은 무려 814만 5060분의 1이기 때문이다. 벼락 맞아 사망할 확률이 50만 분의 1이라니 혼자서 벼락을 16번 맞을 확률, 곧 ‘제로’다.

 

이론상은 그렇지만 벼락 맞아 죽었다는 뉴스는 드물어도 매주 누군가, 그것도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당첨되지 않느냐,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5등조차 2% 남짓 확률이니 돈 잃을 확률 97-98%. 이런 확률을 ‘잃거나 따거나’의 반반 확률로 보면 곤란하다. 이 정도는 ‘갖다 바치는’ 수준이다.

 

 

 

복권의 기원

복권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100년경 중국 진나라에서 만리장성 건설을 위해 복권을 발행했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공공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연회에서 복권을 팔고 노예나 집, 선박 등을 경품으로 나누어줬다.

 

로또의 기원은 1519년 이탈리아에서 비롯됐다. 제노바 시의 지방의회선거에서 후보자 90명 가운데 5명을 제비뽑는 방식으로 선출했는데, 베네데토 젠틸이란 사람이 이에 착안해 숫자 90개 가운데 5개를 추첨하는 게임을 만들었다. 그는 이 게임의 이름을 ‘운명’이란 뜻의 ‘Lotto’로 명명했다.

 

 

우리나라에선 복권과 비슷한 각종 ‘계’의 전통이 있었다. 통 속에 계원의 이름을 적은 알을 넣고 통을 돌리다가 빠져나오는 알로 당첨을 결정한 산통계(算筒契), 그리고 100, 1000, 10000 단위로 일정번호를 붙인 표를 팔고 추첨한 작백계, 천안계, 만인계가 있었다.

어느 나라건 나름의 복권 역사가 있는 걸 보니 인간의 탐심과 일확천금에의 욕구는 비슷한 모양이다.

 

 

 

어풀루엔저 신드롬

어풀루엔저(affluenza)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풍부한'을 의미하는 ‘어풀르언트(affluent)’와 유행성 독감을 뜻하는 ‘인풀루엔자(Influenza)’의 합성어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상속자, 졸지에 큰 돈을 번 사람,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증상 내지 현상을 가리킨다. ‘지나친 풍부’는 애초에 추구하던 건전한 삶의 목적을 잃게 하고, 생활 자체를 무기력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땀 없는 돈, 철학 없는 재물은 오직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의 결국은 십중팔구 파멸이다.

 

과거 미국에서 ‘1,000만 달러(100억 원)를 준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가족을 버린다’와 ‘교회를 버린다’가 각각 25% 득표로 공동1위에 올랐다. 이는 인간이 현세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가족과 내세의 최고 가치인 천국조차도 거침없이 버릴 수 있을 만큼 돈의 힘이 큼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1000만 달러 이상 복권 당첨자들의 ‘그후 5년’을 조사했더니 당첨자 70명 가운데 56명이 갖가지 이유로 이전보다 더 불행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줄 알았건만 오히려 거액의 당첨금은 눈물의 씨앗, 불행의 원천이었다.

 

 

970만 파운드(160억원)의 로또에 당첨된 바 있던 마이클 캐롤이란 젊은이는 당첨금을 8년만에 다 날리고 최근 주급 200파운드(30만원)의 환경미화원이 됐다. 그는 말한다. "가난해졌다고 전혀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술과 여자에 빠졌던 과거의 내 모습이 더 부끄럽다. 다시는 그런 부유한 인생을 꿈꾸지 않는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솔로몬 왕이 만년에야 깨달은 인생의 진리를 20대에 깨달았으니 실상 캐롤은 복 있는 자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세상의 복과 성도의 복은 다르다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걸림돌이 될지언정 디딤돌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며 만악(萬惡)의 뿌리다.

돈이 행복을 준다고 착각하여 밤낮 돈을 생각하다가 그의 종이 되는 것이 희극이고,

탐욕과 탐심이 비극이다.

 

탐심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는 것과 같은 우상 숭배다.

로또의 번호를 적는 그 순간이 돈을 사랑하고 탐하는 순간이고,

하나님 한 분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선언의 순간이다.

 

그 순간 돈은 신이 되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버린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며 돈의 힘을 인정하고 경계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어쩌면 ‘복(福)’에 대한 오해가 재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복과 성도의 복은 완전히 다르다. 동음이의어처럼 다른 복의 가치를 혼동하여 성도가 세상의 복을 부러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내 백성아, 나오라!

하나님은 성도를 갈대아 우르와 애굽, 곧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고자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떠나온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성도의 복은 세상의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 자녀로 칭함을 받고, 그 관계가 천국까지 이어지는 것이 참된 복이다.

 

 

천국을 소유한 성도는 이미 ‘복 있는 자’다.

영생을 얻은 자가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가 다른 무엇에 마음을 뺏기는가.

적어도 그가 진정 그 보화의 가치를 안다면 말이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8-9)

 

은바리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