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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뱀을 바라볼 때 -신종플루

은바리라이프 2010. 5. 27. 23:38

놋뱀을 바라볼 때

-신종플루

 

 

 

불안의 시장(市場)

사방이 거울로 된 방에 들어갔다가 죽은 개 이야기가 생각난다. 개는 수백, 수천의 개들이 자기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에 놀라서 죽었다. 고장으로 냉동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냉동창고에 갇혔다 얼어 죽은 사람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그들에게 닥친 문제 자체보다 두려움이란 ‘감정’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문제보다 문제를 바라보는 감정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신종플루는 세계에서 약 6000명의 희생자(10.30현재)를 냈다. 그러나 아직 연간 독감사망자 30만명에는 한참 못 미친다. 해마다 100만명씩 죽는 말라리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외면받고 있다. 세균성·바이러스성 위장염으로 매년 160만명(어린이 100만명)이 숨지지만 역시 별 관심을 받지 못한다. 수백만, 수천만명이 죽는 질병도 많다. 과거의 전염병과 비교해 봐도 신종플루는 아직 왜소하다.

그런데도 신종플루는 거침없이 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다. 왜일까? 상상 초월의 빠른 전염성? 치료약 미개발, 백신 부족? 이유야 많겠지만 현상과 가능성이 같은 무게로 대접받는 느낌이다. 히트곡 한곡에 레전드 대접이라고 할까. 아마도 각종 매체의 발달로 질병이나 테러, 전쟁 등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진 탓도 있으리라. 게다가 그 매체들을 증폭기 삼아 불안감을 키워 이익을 챙기는 이들-예컨대 군수, 경호, 제약, 언론 등-도 보인다. 불안의 수익성은 날로 커진다. 좋은 시장이다.

 

 

역사 속의 전염병

전염병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BC 5세기, 아테네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끌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장티푸스로 추측되는 ‘아테네 역병’에 의해 끝장났다. 전력이 우세했던 아테네는 역병의 창궐로 전력이 약화되어 패퇴했다. 싸운 것은 역병이었고, 스파르타는 승리를 줍다시피 했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1세 때인 6C 중반, 그의 이름을 딴 ‘유스티아누스’란 전염병이 유행했다. 한창 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루에 1만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이후 8C 중반까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라인 강 유역, 영국, 덴마크 등을 휩쓸며 유럽 인구를 반토막 냈다. 이 역병의 정체는 ‘선 페스트(腺-pest)’였다. 14C 중반, 몽골군은 크림반도로 진격해 페스트 감염 시체를 성안에 던져넣었다. 그 결과, 6년간 유럽 전역에서 약 3,000만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신32:24)’

 

1918-1920년의 스페인독감은 범지구적으로 창궐하여 약 5천만명이 사망했다.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도 ‘무오년 독감’으로 불리며 740만명 감염에 14만명 사망했다. 스페인독감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은 매개체가 철새였기 때문이었다. 최근의 조류독감은 이 스페인독감의 재발로 보고 있다.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91:3)’.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염병’을 심판의 도구로 쓰신다. 출애굽 때 강퍅한 바로를 깨우치기 위해 전염병과 각종 재앙을 내리셨으며(출 9:3). 고라가 모세를 반역했을 때 염병으로 1만4700명을 죽였다(민16:49). 다윗이 인구를 계수했을 때는 사흘간의 온역으로 7만명이 죽었다(대상21:14). 또한, 사사기를 보면 우상숭배에 빠져 행악하는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이방인들을 채찍으로 삼아 이스라엘을 벌주는 장면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종플루가 범유행, 대유행 단계다. 하루에 9천명이 발병하고, 전염병재난단계는 최고 단계인 ‘심각(Red)’에 올랐다. 전세계 인구 중 1/3이 위험할 거라는 예측도 나온다. 뉴스를 보자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게다가 운 좋게 이 환란을 잘 넘겨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땅이 저주받고 물이 오염되고 있는 한 새로운 ‘신종플루’는 계속 출현할 터이니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인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는 증폭기를 통해 들려오는 각종 경고음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육신의 두려움은 영생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린다. 우리가 집중할 곳, 바라볼 곳은 우리의 본향인 하늘이다. 전쟁과 흉년, 각종 전염병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불순종의 벌이자 심판의 도구이며, 죄악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사인이다.

돌이킨 백성은 정신없이 불뱀에 쫓기지 않고,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볼 수 있다. 원하기만 하면 깨끗하게 될 수 있다(눅1:40). 병과 악에 대해 다스리는 권세를 갖는다. 두려움을 떠나서 평안에 거할 수 있다. 병과 구원의 주권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2:9)’.

 

하나님도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성경을 통해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366번이나 주셨다. 1년 365일 한마디씩만 들어도 하루치가 남는다. 이를 깨달은 범브란트란 목사가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1년은 365일인데 왜 366번입니까?"

"사랑하는 종아, 4년마다 한 번씩 윤년이 돌아오지 않느냐.”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4년에 한번 놀라는 것조차 원치 않으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09.11 은바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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