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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으로 본 가야

은바리라이프 2010. 5. 27. 23:35

<선덕여왕>으로 본 가야

 

 

복야회는 실재했나

천명공주의 급사 이후 덕만은 왕권 쟁취 경쟁에 뛰어들었다. 왕실과 조정의 외면에도 꿋꿋하게 스스로 공주의 위상을 세우긴 했지만 상대는 막강한 미실이다. 그런데 외로운 덕만에게 뜻밖의 원군이 가세했다. 가야의 회복을 꾀하는 비밀결사대 ‘복야회’가 바로 그것. 복야회와 덕만을 중재한 것은 가야 출신 김유신이다. 여기서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과연 가야의 무장해방조직이 실존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610년대는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으로부터 불과 반세기 지난 시점으로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드라마에서처럼 1000명 이상의 전사들을 보유한 대규모 무장조직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또한 복야회의 수장인 월야도 허구의 인물이다.

 

신라의 가야인들

가야 멸망 후 가야인의 위상에 대해서는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서 엿볼 수 있다. ‘제10세 풍월주 미생 편’에 ‘화랑도의 기층세력인 낭도들 사이에 5대 파벌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가야 출신 가야파’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또, ‘제17세 풍월주 천광 편’에선 가야파가 화랑도의 주도적 파벌이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626년 이후부터 최소 10년 이상은 가야파가 화랑도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 집권기 동안 가야 출신들이 신라에서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며 김유신이 부상한 것도 이때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의 증손이다. 조부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대공을 세웠지만 벼슬은 아찬에 머물렀다. 그러다 유신의 부친 서현이 왕족인 입종의 딸 만명과 결혼함으로써 주류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잡았다.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가야 유민에 대해 신라는 적대하지 않는 포용정책을 썼고, 가야인들 또한 신라의 체제 안에서 적응과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비주류로서의 차별은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다.

 

천지화랑의 참뜻

원래 화랑제도는 조선 제13대 단군 흘달(屹達) 시대로에 시작됐다. 흘달은 조선 곳곳에 천지화(天指花)라 하는 환꽃을 많이 심게 하고 소년들로 하여금 심산유곡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신단련에 힘쓰게 했고, 이를 국자랑(國子郞)이라 불렀다. 그들이 다닐 대는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신라에 이어진 이 화랑제도는 법흥왕이 불교를 도입하면서 폐지됐다가 진흥왕이 다시 시행했다. 그러나 불교에 심취한 진평왕은 낭도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다가 불교를 적대시 할까 두려워했다. 그러던 차 원광법사가 화랑의 도를 불교와 관련시켜 세속오계를 만들었다. 이때 원광은 “불계로는 보살계가 있어 이를 십계로 삼고 있으나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라고 하여 이미 남이 만든 계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세속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살생유택(殺生有擇) :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특히 화랑들에게 강조된 계율은 임전무퇴였다. 야막성에서 귀산과 추항 이래 전장에서 죽는 것이 화랑의 전통이 됐으며, 계백과의 싸움에서 죽은 반굴과 관창은 화랑의 귀감이 됐다. 심산유곡을 찾아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현묘한 교()가 자살특공대, 전사 양성소로 변질됐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하나님 섬기는 신앙이 사라지면서 무당의 푸닥거리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무당들은 삼위의 하나님을 삼신으로 바꾸고 단군을 당굴귀신으로 만들었다. 왕실도 하나님께 기도드리던 나을신궁을 주의 종묘처럼 죽은 왕의 귀신을 모시는 집으로 만들었다. 화랑은 이제 신명을 받지 않고 귀신에 사로잡히게 됐다.    


가야에 임한 도마의 복음

서기 40년경,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로 하나님을 섬기던 동이족의 일부가 한반도로 유입됐다. 수로(首露)의 일행은 한반도 남쪽, 지금의 낙동강인 황산강 하구 신답평에 도착했다. 변한의 족장들이 수로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가락국이라 했다. 수로의 직할지를 금관(金官)이라 명한 것은 수로가 가락국의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킨 것과 관련 있다.

 

금관은 고구려, 신라, 백제는 물론 선비, 후한, 왜까지 철을 보급한 제철대국이었다. 후일 이곳이 김해(金海)로 불린 것은 가락국이 바다를 통해 철을 공급한 해상 왕국이었음을 뜻한다. 어느날 바다로부터 수로의 배필이 찾아왔다. 멀리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었다.

허황옥은 붉은 돛을 단 배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남쪽 바다에 나타났다. 허황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은 주포(主浦), 즉 ‘주님의 포구’로 명명됐다. 그 이유는 공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허황옥은 수로에게 자신의 신분과 찾아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아유타국의 왕과 왕비인 그녀의 부모가 꿈에 함께 상제(上帝)로부터 ‘나의 택함을 받은 가락국왕 수로를 등극케 하였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는 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제는 하나님을 뜻한다.

 

이 시기 인도는 사도 도마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이 각기 선교지역을 분담할 때, 도마는 파르티아(안식국), 인도 지방을 담당했다. 도마는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한 후 인도의 카라미나에서 순교했다. 허황옥는 도마로부터 복음을 접한 인도의 왕족이었다.

 

땅 끝에 임한 하나님의 손길

김해 수로왕릉의 정문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있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사용된 암호였다.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말의 이니셜이 ‘익투스’인데, 공교롭게도 익투스의 뜻이 물고기인지라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 됐다. 수로왕은 허황옥과 결혼하면서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 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경북 영주의 도마 석상. 목이 잘려있으며 오른쪽의 네모 형태가 히브리어로 ‘도마’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에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 바로 도마 석상(문화재자료 제474호)이다. 이 석상엔 히브리어로 ‘도마’가 새겨져 있고, 예수의 한자어인 야소(耶蘇)도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도마의 복음이 오래 전에 이 땅을 밟은 것이 분명하다.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제 십자가와 마리아상(일명 마리아 관음상) 등도 이땅의 기독교를 증거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지리적·영적으로 동떨어져 살았을 것 같은 한민족이지만 알고 보면 이 먼 땅끝에도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이 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