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길위에 서다>란 주제로 촬영을 위하여 간 이스라엘 여정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유대인 가이드와 광야를 투어한 것이다. 가기 전 부터 그 여행은 기대를 갖게 하였다. 일반적인 차로는 갈 수가 없어서 랜드로버를 타고 광야 깊숙히 들어갔다. 길이 없는 광야를 아무데나 차로 올라가고 내려가면 길이 되는 그런 짜릿한 여행이었다. 촬영을 위해 버드나무의 동생들과 아내지연, 딸 지우만 갔기에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유대광야 깊은 곳과, '아골골짝 빈들'...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사셀의 산'등이었다. 광야는 딱 내 체질이다. 갈수록 느끼는 것은 그 단순하고 황량함이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자유를 준다. 드디어 아사셀의 산에 올랐을 때에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는데... 십자가와 보혈로서 우릴 구속하신 예수님의 가장 극명한 상징과 그림자를 그 산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산은 광야의 가장 높은 산이라고 가이드는 말했다. 그래서 '망대의 산'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실로 아사셀의 산은 예루살렘과 사해, 요단과 여리고와 유대광야를 다 포옹한채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아사셀 산 위에서 본 여리고의 모습>
그 땅들이 다 이 산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언약의 절정은 어린 양 그리스도다. 그 정상에 서자 모든 것이 조망되며 사방의 시야가 활짝 열렸다. "예수님이 여리고 근방...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 유대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다 하나로 연결된 것이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였다. 그 광야는 요단과 여리고 길갈, 아이, 아사셀, 그리고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였다. "저기가 바로 헤로디움입니다. 헤롯이 산을 깎아 만든 궁전이지요." 선한 유대인 가이드 우리가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보자 예루살렘 바로 옆 방향으로 정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이 보였다.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성 헤로디움- 최근 여기에서 헤롯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헤롯이 인근의 산들을 깎고 그 돌과 흙들을 가져다가 만든 인공산성이었다. 참으로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 "어떻게 그 당시에 산을 깎아서 새로운 산을 만든단 말인가?" 그것은 광야의 아사셀의 산과 예루살렘의 시온산,감람산 사이에 자신의 영화와 사치, 안위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작은 바벨처럼 느껴졌다. 문득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막11:22,23
예수님이 감람산 동편 베다니 마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베다니에서 광야를 조망하면 날이 좋은 날엔 이 헤로디움이 선명히 보인다. 그 당시에 그 헤롯의 궁전산은 우뚝 솟아 있었다. 어느 학자는 주님이 가리킨 산이 헤로디움을 보고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 던져질 '바다'는 헤로디움 옆 방향의 '사해'라는 것이다. 아사셀의 정상에 서자 그 주장이 충분히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제는 진리일지라도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대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전체를 조망하고 그 언약의 본질로서 구릉과 길들과 계곡을 탐구해야 한다. 주님은 자주 실물교육을 하셨으므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그 헤롯의 궁전산을 비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하나님의 믿음'이 부어지면 이 인간이 세운 산을 다시 허물어서 바다에 던질 수가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다. 충분히 근거가 있는 학설이다. 그 헤롯의 궁전은 헤로디움만이 아니라 여리고 옆 아사셀의 산자락에도 있다. 헤롯은 곳곳에 궁전을 지은 것이다. 아직도 그 궁전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매우 엄청난 규모였을 것으로, 위에서 내려다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마귀가 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 마4:8,9
라고 했던 그 장면을 상상케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마귀가 산위에서 보여준 그 화려한 영광이 바로 그 아래에 있는 헤롯의 궁전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헤롯궁에 대한 복원도를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났다. 정말 엄청난 크기에 대단히 화려한 궁전이 여리고 땅에 옆에 지어진 것이다.


<여리고 헤롯의 궁전터와 복원도>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간 지극히 높은 산이 어디인가?' 뜬끔없이 그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리고에는 시험산이라는 곳이 있어서 전통적으로 거기서 마귀가 이 시험을 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고대로 부터 그것을 기념하는 수도원이 그 산에 지어졌고 케이블 카로 그곳까지 갈 수가 있다. 나도 그곳을 간 바있지만 아사셀의 산에 오르자 생각지 않은 것이 치고 올라왔다. "이 아사셀의 산은 광야의 가장 높은 산이고....그 아사셀은 악령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가이드 '우리'의 말이 생각났다. 분명히 성경은 '지극히 높은 산'이라 표현했다. 주님은 오직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라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예수님의 경배와 섬김의 극치는 '십자가의 순종'이다. 확증은 없지만 그 '지극히 높은 산'이 이 아사셀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이 산 아래에 해롯의 궁전이 있기 때문이다. '아사셀'(Azazel)이란 고대 유대교에서는 '악령의 우두머리'라는 개념도 있다. 자신을 상징하는 산에서 거기에 바쳐진 어린 양 예수께 시험을 한 것이라는 생각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하나 아직 감추인 것이 너무나 많다. 기도하며 탐구하고 발품을 팔아서 밭에 감추인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보화들을 캐내어야 한다. 성경을 좀더 구체적이고 온전히 보려면 그 땅을 한번 밟아 보아야 한다. 많은 성도들이 관광을 위해 외국에는 수없이 나가면서도 이 주님의 땅을 향하지 않는 것은 참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아사셀의 산에 오르자 말씀들이 더욱 입체적으로 손에 잡히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예수님이 여리고 근방의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 이유를 이곳에 서니까 지리적으로 이해가 되는구나." 하는 것이다.
 <광야의 가장 높은 산 아사셀>
그 요단강 부근의 지형들은 온통 예수님을 증거하는 언약들의 보고(寶庫)였다. 그 땅이...그 지명에 얽힌 말씀들이 소리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듯 보였다. "길갈은 어디인가?" 통역과 진행을 하던 진상에게 물었다. "저...여리고 위편이 길갈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여리고에서 멀지가 않았다. 지극히 높은 산에 오르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갈'은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놀라운 언약을 품은 땅이다. 그 땅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보게 해달라고 구하자 성령님은 많은 것을 열어 주셨다. 아사셀만큼이나... 적어도 내게는 그러한 땅이다.
14.
'길갈'은 두 정탐꾼이 여리고를 정탐한 후에 요단강을 건너 첫번째로 진을 친 곳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 예수님의 길에 중요한 곳이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12지파에서 대표를 뽑아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여리고 동쪽 길갈에 진을 쳤다(수3:19,20)고 성경은 증거한다. 여호수아 3장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의 물을 밟고 멈추면 그 창수(昌水)가 멈추어 한곳에 쌓였다고 한다. 그 물이 없는 강을 이스라엘이 건너간 것이다.
'요단강 한복판에 서 있는 언약궤'.... 나는 그것에서 그 언약궤의 본질인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요단강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 결단코 예수님이 요단강 줄기 중에 이곳에 서신 이유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적을 기념하여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게 하셨다. 이 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요단의 물을 마르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수4:24
길갈에 돌을 세운 의미가 그것이다. 나는 이 기록에서 '여호와의 손'이라는 말을 주목하였다. 모세에게 임하시어 애굽을 심판하셨던 그 '여호와의 손',... 홍해를 동풍을 불게하여 가르게 하셨던 그 손.... 그 강하신 팔을 알게 하고 영원히 기념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촘촘히 읽으며 영혼 깊은 희열을 느꼈다. 그전에 대강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갈의 의미가 너무나 강렬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나의 적용을 위해 한 구절들만 골라서 보거나, 무심히 읽어가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면서 섬세히, 자세히, 통전(通全)적으로 예레미야처럼 엄중(嚴重)한 말씀으로 읽어만 한다.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 렘23:9
예레미야의 이 기록이 가슴을 떨리게 한다. 예레미야는 진정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하기에 그 뼈까지 떨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선지자들과 재사장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엄중하다"고 입으로만 외치면서 믿지를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다..재앙은 없을 것이다."라고 거짓 예언을 한 것이다(렘23: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들이 화려하고 위로를 주는 것 같으나, 진정 그들의 묵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셨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우리도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 우리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믿는 자들을 보기는 어렵다. 성경전체의 언약적 흐름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읽어내고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갈망해야 한다. 성령님께 주님의 길들을...그 언약의 본질들을 보여 달라고 여행의 순간마다 구하고 구하였다. 그전에는 크게 생각도 하지 않던 '길갈'이 이토록 엄청난 메세지로 나를 향해 돌진할지는 생각도 못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것.... 그것은 하나님이 강한 팔로 홍해를 가른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여호수아는 선언한다. 요단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 가치처럼 크기와 규모로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느냐 아니냐로 좌우되는 것이다. 요단은 '약속의 땅'을 넘는 경계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것을 건너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건넌 요단강 - 여호수아때는 이보다 훨씬 크고 깊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여호와의 강한 손'이라고 여호수아는 선포한다. 이 구절을 읽으며 흥분한 이유는 이것이다. 성경에서 언약의 본질인 메시아(그리스도)는 '여호와의 강한 손, 팔'로 예언(사51:9)되어 있다. 결국 길갈에 세운 그 열두돌은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이 요단에 서신 이유는 이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궤, 그 강한 팔로서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한가운데 서신 것이다. 메시아이신 주님은 여호수아의 이 말씀을 명확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거기서 하신 첫 말씀....
이제 허락하라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시기에 합당하니라 마3:15
길갈에서 열두 돌을 세워 기념한 요단을 멈추게 한 '하나님의 강한 팔'의 역사... 그리고 거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의를 이루는 것'... 이것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열두돌을 세운 길갈은 '여호와의 강하신 손'을 기념하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기름부음'에 대하여 깊이 탐구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는 예수님의 증인이 결코 될 수가 앖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의 너무나 명확한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엄중하게 믿지 않기에 '기름부음'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슨 성령파나 은사주의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이도 있다. 기름부음이 없이는 승리할 수가 없다. 예수님도 그 기름부음으로 공생애를 사셨다. 그것이 없이는 주님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공생애를 여시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제자들이 구하고 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이 기름부음이다. 그 간구는 성경을 엄중하게 믿을 때에 나올 것이다. 진리의 성령님께 기름부음의 의미를 구하던 중에... 그것의 의미가 바로 '여호와의 팔'에 붙들리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성령님께 기름부음에 대하여 가르쳐 달라고 매일 구하던 중... 갑자기 생각지 않은 말씀이 열렸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에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시89:20,21
이 시편89편은 말씀 그 자체가 내게 엄청난 기름부음이 되었다. 진정한 기름부음의 본질을 다윗을 통해서 열어 주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그 팔이 힘을 주시는 것'(21)이다. 시편기자는 동일한 시편에서 이 여호와의 팔이 '큰 파도와 물결을 다스리는 것'(시89:9,10)임을 강조한다. 바로 길갈에서 열두돌을세워 기념한 홍해와 요단강을 멈추게 한 그 손이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바로 그 팔에 붙들린 '하나님의 종'이라고 선언하신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성령)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사42:1
이스라엘을 구할 기름부음 받은 자는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강한 팔에 붙들린, 하나님이 기뻐하는 택한 종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데 그 이유는 이방에 공의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다. 놀랍게도 이 말씀의 성취가 바로 요단강에서 주님이 성령세례를 받으시고 들으신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마3:17)의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를 말하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는 시편2편으로 예언되어 있다.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팔에 붙들린 종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이방(열방)에 '하나님의 공의(빛)'를 나타내는 이사야42장의 그것을 의미한다. 열방에 공의를 베푼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구절들에 잘 나타나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42:2,3
바로 이것이 공의를 베푸는 삶이다. 자신의 의와 드러냄과 세상에 자랑하는 프로그램, 추구가 아닌... 오직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들'을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으로 회복시키는 삶.. 이것이 열방에 공의를 베푸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의 삶이다. 요단강에서 성령이 임하신 후에 들려온 그 음성을 이 삶을 살아낼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주님 역시 이것을 성취하시러 오셨다고 하셨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그 공의를 베푸는 삶을 더욱 구체화한다.
나 여호와가 의(義)로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6,7
역시 동일하게 그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고, 그 손에 붙들린바 되며 열방에 빛을 비취는 것이다. 그 빛이 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눈 멀고 갇히고 흑암에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하는 삶'이다. 아마 이 말씀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요단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주님이 나사렛의 회당에서 선포하신 그 말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4:18,19
이 바로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 후에 이사야6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된다. 진정 예수님에게 부어지신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음성은 주님을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의 동일한 갈망이리라.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인가? 예수님은 이 음성을 듣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라고 까지 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다는 것'의 의미를 원문으로 살피면... 그 '계시'의 본질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들려온 그 음성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계시여야 하리라. 누구에게 아버지께서 이 음성의 계시를 주시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자'... 곧 '상한 갈대와 써져 가는 등불들을 치유하는 자'다. '가난한 자들'은 누구인가? 포로되고, 눈멀고, 흑암에 갇힌 영혼들이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들을 자유하게 할 갈망이 없다면 그것은 불행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그 능력의 기름부음과 아버지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그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의 삶이란 무엇인가? 흑암(마귀)에 포로되고 갇히고 눈먼 자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자유케 하는 삶... 이것이 성령의 권능으로 땅 끝(열방)까지 '증인'이 되는 그 삶(행1:8)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은 단순한 전도의 삶을 넘어선다. 그 삶이 나타나기 위하여 반드시 성령의 권능, 기름부음인 '하나님의 팔'에 붙들려야 한다. 하나님의 붙드는 종, 기뻐하는 택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더욱 기름부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흑암의 상징인 바벨론에 사로잡힌 가난한 자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진정 그 메시아를 구하게 하셨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사51:9,10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요 예언이다. 바로 다음 구절은 이 '여호와의 팔'이 깨어 날 때에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큰 기쁨으로 시온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을 구속할 하나님의 팔은 옛적에 '라합'(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아니라 히브리어 '라하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애굽을 가리킨다)과 '용'(뱀)을 무찌른 그 팔이다. 그리고 눈을 확 뜨게하는 것은 '바다와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신'... 홍해와 요단의 그 물을 말리신 동풍...그 성령의 바람...그 강하신 손이다. 이 말씀이 선포될 당시는 정말 이스라엘에게 그 팔이 절실했다. 이것이 길갈에 세워진 그 열두돌의 의미다. 길갈에 나타난 그 요단을 가르던 그 강하신 손을 다시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아주 극명하고 중요한 예언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그 여호와의 팔은 다시 요단 강가에 나타났다.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면 길갈에 '여호와의 권능의 손'에 대한 기념으로 세운 그 돌들과... 바벨론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이 구하던 것과 요단 강가에 서신 주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제부터 길갈과 예수님의 깊은 연결고리가 드러난다.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주님과 어떤 언약적 연결고리가 있는가? 그 답은 역시 성경자체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놀랍고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요단 강에 서신 예수님... 그 강가에서"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불리우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이사야 53장이다. 그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전한 것은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1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놀랍지 않은가? 그 팔을 처음 기념한 곳이 바로 '길갈'임을 잊지 말라. 지금 우리는 여리고 동편 길갈을 탐구하던 중이다. 그리고 다윗에게 드러난 시편과 성경전반에 의하면 그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붙드심... 성령의 기름부음이며...'기름부음 받은 자'의 극치인 '예수 그리스도'다. 그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팔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참으로 이스라엘에게도..우리게도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사야53장1절의 히브리어법은 이렇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우리가 전한 그것을 믿는 자에게로다.
이사야를 통해서 선포되는 그 메세지를 믿는 자에게 여호와의 그 팔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전한 말씀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설명 안해도 다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것이다. 아아... 이사야 53장을 깊이 탐구하며 나는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이 어린 양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것이...하나님의 그 팔...그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한 그 어린 양에 대한 말씀을 믿는 자에게... 여호와의 팔이 나타나니라!!" 하고 이사야는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호와의 팔은 홍해를 가르고 요단을 가른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바울은 실로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십자가(어린 양 예수)의 도(道,메세지)가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서 능력은 곧 '두나미스', '권능'(power)이다. 주께서 마지막으로 지상에서 말씀하신 오직 성령님이 임하시면 부어질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권능'(행1:8)..그것은 곧 십자가의 도에서 나온다. 이것을 깊이 명심해야만 한다. 이것은 교리나 관념이 아니다. 십자가는 곧 여호와의 강하고 능하신 팔이다. 그 정점이 진정한 기름부음이다. 이것을.. 이 권능을 가질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 가난한 자들을 자유케 하는 '열방의 빛'이 되는 것이다. 요단 강가의 그 어린 양...우리의 질고(질병과 고통), 슬픔, 시험, 허물, 죄악, 불화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오신 어린 양 예수님... "이제 허락하라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시기에 합당하니라"하시고 세례요한에게 죄인들의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그 모든 짐을 짊어 지시려는 것이다. 그 막힌 담을 허무는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함이다. 그 마귀와 율법의 모든 저주...요구하는 모든 것을 홀로 담당하심으로 그로 인한 모든 흑암의 속박과 저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려는 그 어린 양... 그분을 믿을 때에 ...그 고속의 역사를 온전히 믿고 선포할 때에 그 속박은 풀린다. 마귀의 지배로 부터 죄와 질병과 시험, 불화가 사라지는 능력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어린 양 예수를 바라 보고 믿는 그것에 곧 여호와의 팔,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성령의 능력가 나타내심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것을 믿고 선포할 때에 임하신다. 놀랍게도 길갈의 열두 돌 기념비는 이미 그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길갈은 그런 하나님의 팔인 어린양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호와의 팔로서 그 여리고 근방의 땅에 공생애를 출발하시기 위해서 오셔야 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로서 요단에 서야만 하셨다. '길갈'은 명확히 그 '여호와의 팔'을 기념하는 땅(수4:23,24)이었다. 그것은 곧 그 팔의 본질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사53장)를 이미 계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땅의 지경에서 세례요한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라는 칭호를 당연히 들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여리고를 중심한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지경에서 시험을 당하시며 공생애를 여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언약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리고 동편 길갈의 평지>
15.
길갈의 그리스도를 향한 언약과 계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단을 건넌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명하신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수5:2
길갈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것들 중에 하나가 다시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 또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주요한 코드임을 직감했다. 여리고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새벽에 성경을 볼 때에 특별히 이 할례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던 것이 그 때에는 돌진하듯 내게로 들어왔다. 참으로 성령님이 눈을 여시면 말씀이 열리고 길이 나고 변화가 나타난다. 나는 몇시간이고 성경에서 관심도 없던 할례의 의미를 탐구하게 되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다 광야에서 죽었다.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으로 한 2세대들만 남은 것이다. 그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명하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모든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렸다는 말씀(수5:8)이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여호와의 팔의 능력으로 건넜을 때에 그 소문은 가나안의 모든 왕들에게 알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간담이 녹고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전쟁준비를 하고 이스라엘의 침략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시고 여호수아는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전쟁에 능한 사령관이라면 이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적군이 이미 파악하고 대비를 하고 또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엄청난 숫자가 여리고 평지에 그저 포진하고 있기에 정탐꾼들이 왕래할 것이다. 코 앞에 가나안의 가장 강성한 여리고 성이 있다. 그런데도 온 백성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들은 처소에서 상처가 낫기를 기다린다. 여호수아는 거기에 순전히 복종한다. 이것이 가능함은 현실과 상황을 넘어서는 여호수아의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할례의 비밀이 스며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앞두고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명하셨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수1:5,6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믿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굳게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하신 이 땅을 반드시 차지하게 할것이라 하셨으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실 것이라 믿은 것이다. 이 믿음은 이미 검증되었다.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는 12지파의 대표를 뽑아 정탐을 보냈다. 그들은 이 땅을 두루 다니며 그 강성함과 거대함에 두려움을 가졌다. 10지파의 대표들이 보고하면서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들이 아직도 거기에 거함으로 그 장부들을 보고 자신들을 '메뚜기'에 비유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되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게 좋았을 것을... 애굽에 다시 돌아가는게 낫지 않겠느냐 하면서 원망을 한 것이다(민13:17-14:3)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분연히 일어서서 옷을 찢고 외쳤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느니라 민14:8,9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선포다. 나는 이 말씀을 다시 찾아 읽으면서 전율을 금치 못했다.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탐보고이리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끝까지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언약을 붙들지 않는 것이다. 상황이 조금만 어려우면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사십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여호와의 도, 언약)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95,10,11
이 글을 쓰던 중에 갑자기 홍종일이란 선배가 찾아 왔다. 요즘 내게 부어지는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전적으로 깊이 살피고 거기서 아버지가 이 시대에 행하시는 그 길을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라 나누었다. 그랬더니 홍 선배가 이 시편 말씀을 나누어 주었다. "40년 동안이나 그 능력과 기적들...그 인도하심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처럼...오늘 우리도 그저 우리의 필요... 자지가 원하는 것...그런 것에만 집중하지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광스러운 약속을 받고도 '안식'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길, 그 언약을 목숨처럼 붙들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믿음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내용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이미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그 역사...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서 증거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여호수아'이고 그것은 또한 '호세아'...거기서 '예수아'라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왔음은 상식이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그 이름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의미다. 지금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열방과 이스라엘 땅을 정복하고 회복하는 역사는 단연 이 믿음을 가진 자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의 길을 버리고 무언가 다른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직은 막막한 그 이스라엘의 회복도...통일도 이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해 이루어 지리라.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그 아버지의 함께 하심과 언약을 믿는 자들에게 그 문과 길과 능력이 열린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마귀의 권세는 깨질 것이다. 그것을 믿는 자는 분연히 그 날을 사모하며 땅 끝까지 증인디 되는 그것에만 집중하야 한다. 그 현실이 어떠하더라도 그 믿음이 이기게 한다. 이 믿음이 주께서 말씀하신 "산을 옮기는 그 믿음"이다. 여호수아는 이미 그 믿음을 가졌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보고한 강대한 적진 앞에서 담대히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그 땅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믿음과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의 원천은 '아브라함'이다. 길갈에서 다시 행한 할례의 언약도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할례는 건강을 위해서 행해지거나...유대인이라는 표식을 위해 고안된 무엇... 당시 고대 근동의 원시적인 의식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육신의 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그 믿음을 확증하는 표다. '임마누엘'의 확증이 '할례의 언약'임을 아는 이가 드물다.
그(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된 의(義)를 인(印)친 것이니 롬4:11
바울은 그 조상들의 할례가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로마서 4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이 할례의 본질을 알게 된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롬4:3)고 했다. 이것은 창세기15장6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을 탐구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 행하게 하신 것이 전쟁 준비가 아니라, 길갈에서 다시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 알게 된다. '길갈'은 그토록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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