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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 서다(5)

은바리라이프 2010. 1. 7. 23:06

그 길 위에 서다(5)

11.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온 다윗에 대해 탐구하다가
갑자기 하덕규 형님의 출현으로 1960년대 후반의 '예수운동(Jesus Movement)에
갔다가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다녀오는 휘파람 같은 휴식이 아니었다.
여전히 지속되는 측량못할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어제는 사랑의 교회 주일 예배에 갑자기 오정현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척 스미스 목사님 얘기를 했다.
다양한 사역을 시도했지만 지치버린 척 스미스는 깊은 기도 가운데 오직 순전하고
단순한 말씀만을 그대로 전함으로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쓴 책들을 구해서 읽으며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그 그 운동 중에 성령을 받고 주역으로 쓰임받은 이는 척 목사님만이 아니다.
무수한 영역에서 다양한 이들이 성령의 도구로 기름부음 받고 쓰임 받았다.
그런 이들 중에 큰 도전을 준 사람이 '키이쓰 그린'(Keith Green)이다.
그는 역시 유대인으로서 그 시절에 변화 되어 강력한 성령의 능력에 붙들리었다.
20대 초반에 그 길에 선 후 20대 후반에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천국에 가기까지
단 7년간 그가 이룬 결실은 엄청나다.
400곡이 넘는 곡을 썼고  무려 28장의 음반을 만들었다.
어떻게 그런 경이적인 삶을 살았을까?
인터넷에서 그가 만든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란 곡을 건반을 치며 부르는
동영상을 여러번 보았다.
정말 진정성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란 진정 그런 것이다.
그 결실들이 경이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진정으로 성령님의 권능을 받으면 몇년 사이에도 엄청난 역사를 누린다.
나도 뒤늦게 변화되어 그것을 맛보았지만 진정 그분께 붙들리면 그리스도의 영광과
형상이 강력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구조와 현실, 꿈들을 넘어서는 돌파와 결실과 하늘의 사닥다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다시 강력한 기름부음을 구하고 있다.
"주님..제게도 이런 놀라운 기름부음을 주세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주님의 영광과 의를 위하여...
한번도 경험못한 강력한 권능으로 데려가 주세요."
요즘 내 간구는 다시 이것이다.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그 경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간구와 추구를 멈추는 피상성을 넘어서야 한다.
키이쓰 그린과 그 '예수운동'의 주역들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오직 그리스도께만 집중한다.
그분이 중심성...그분의 십자가와 보혈...그분의 다시 오심...
이스라엘의 회복...
그들에게 부어진 메세지는 그것으로 뜨거웠하였다.
성경의 약속들을 단순하게 믿고 그것에 순종한다.
그들의 찬양...
그들의 메세지와 삶의 추구는 결코 그리스도의 흔적과 말씀에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을 다시 조명하여 주시는 성령님의 의도를 알것만 같다.





<히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척스미스 목사와 찬양하는 키이쓰 그린>

참 신기한 것은 '예수 운동'에 대하여 글을 쓸 때에 후배 세준이가 마침 L.A에 있었다.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수상하게 되어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즉시 연락하여 그 운동의 본산인 척 스미스 목사님의 갈보리 교회에 가라 하였다.
그리고 그 운동에 대한 자료들을 모두 구해 오라고 명하였다.
착한 세준이가 순종하여 그 당시의 자료들을 담은 dvd들을 구해왔다.
이런 것도 다 성령님의 은혜다.
성령님은 너무나 섬세하시고 우릴 인도하신다.
그 영상들을 보며 나의 가슴은 뛰었다.
'주님..다시 저렇게 순수하고...가슴 벅찬 그리스도의 계절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오직 주님 한분만으로 울고 웃고 흥분하여 소리치던 그 시절....'
우린 너무 멀리왔고 너무 많이 가졌으며 무감각해진 것일까?
아침에 황사를 뚫고 기도를 하다가 사무실에 들어가니 미국의 엘리야 킴 목사님이
메일을 보냈다.
간만에 소식을 전하며 최근에 'Jesus Movement'에 대한 관심을 부어 주신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그것에 대한 다소 놀라운 답이 왔다.

김 감독님
아틀란타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상공에서 Inflight  인터넷이 연결되어 답장 드립니다.
이번 Asbury 심포지엄 발제 가운데 하나가 Jesus Movement 였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Jesus Movement 에 대해 말씀을 증거했지만 이 운동을 통해 회심한
세대가 이제는 기성 세대가 되었으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주자를 길러내 그만한 일들이
미국에 일어나지 못했음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나는 이 메일이 '예수운동'에 대한 어떤 확증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성령님이 그것을 열어 주시고 가르쳐시려는 것이다.
충성된 종이 되어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낮에 후배 진상이가 갑자기...
" 감독님 에즈베리 부흥에 대해서 아세요?"
라고 뜬금없이 말하는 것이다.
서강대 이승엽교수가 와서 Jesus Movement 대해서 대화를 하는데 불쑥
그런 말을 했다.
난 잘 모른다고 했다.
"에즈베리 부흥이 'Jesus Movement'를 통해 일어난
가장 놀라운 부흥이라는데요!"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1970년 애즈베리 부흥의 모습- 대학교 채플 시간에 성령이 임하셔서 전세계로 나아가게 하셨다>

엘리야 킴 목사님과 주고 받은 메일을 모르는 진상이가 갑자기 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진상이는 인터넷에서 '예수운동'에 대해서 찾다가 '에즈베리 부흥'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예수운동'의 놀라운 불꽃임을 알지 못했다.
킨터키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1970년 초에 일어난 강력한 부흥은
전세계를 뒤흔들었고 그 대학생들이 미국 전역을 돌며 불을 지폈고, 그것으로
1972년의 그 놀라운 '엑스폴로72'집회가 열린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 빌 브라이트등 수많은 사역자들이 쓰임 받았다.
그 부흥은 전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운동으로 수많은 선교단체, 청년운동들이 일어났다.
나는 이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성령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구나!"
나는 감탄하였다.
아직은 더 알고 더 배워야 한다.
"진리의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내 손을 꼭 잡고 오직 주님의 뜻 가운데로 이끌어 주세요."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간구하였다.
나는 'Jesus Movement'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집에 와서 이 글을 쓰는데도 세준이가 사온 dvd의 흑백의 화면들이 자꾸 떠오른다.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그 장면...
그 가운데 상당수가 히피들이며...유대인들도 여럿 끼어 있었다.
그들은 감격을 견디지 못하고 뜨겁게 울고 웃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아 들이는 삶은 그런 감격이다.



12.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삼하6:14,15

다윗이 왕의 체통을 잃고 어린 아이가 되어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춘 이유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기 때문이었다.
이 언약궤는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언약궤의 모습>

문득 이런 깨달음이 엄습한다.
주님은 다윗이 성령 안에서 메시아이신 당신을 보고 기뻐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토록 그 언약궤를 가져 오려고 힘쓴 이유는 그것에서
영으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마 22:43)이리라.
그의 육신은 어떤지 몰라도 그 영은 성령 안에서 그렇게 예수님을 보고 뛰논 것이다.
"성령님...이미 영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한 다윗을 확증할..
말씀을 제게 가르쳐 주세요."
아침에 그런 기도를 하며 우면산의 숲속을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말씀들이 떠올라 급히 사무실로 왔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 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1

처음으로 찾은 말씀이 이것이다.
그전에 익히 알던 이 말씀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이것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던 그 말씀이다.
이미 다윗은 고난받는 예수님의 형상을 그의 삶으로 살아낸 것이다.
시편22편 하나를 읽으면서도 다윗이란 존재에 대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죽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 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22:6-8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시22:14-15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들을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22:16-18

이것은 다윗이 사울의 군대에 쫓기거나 여러 환난 당함을 시로서 노래한 것이다.
주석에 의하면 '아앨랫샤할'(사슴)이란 곡조에 시를 지어 부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노래한 것인데 그것이 장차 실제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실 그대로 묘사해 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시편69편 또한 놀라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형상을 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극서을 다 다룰 수는 없으나...

저희가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 초를 마시웠사오니
시69:21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음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마27:34)
그리고 주님께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이 마르다"하시자 신 포도주(식초)가
담긴 해면을 입에 대어 먹게 하였다(요19:28,29)
진리의 성령님께 다윗이 성령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이미 알고 그 행위들을 한것이라는
확증을 달라고 구했을 때에 이런 말씀들이 갑자기 열렸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확증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큰 열정과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그 언약궤...
그 행동 또한 '모든 의'를 이루시는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그림인 것이다.
나는 그것에 담긴 비밀을 깨닫게 해달라고 구했다.
역시 이것과 연관해서 내게 주목되어지는 말씀이 있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3:25,26

진리의 성령님은 그 언약궤의 본질을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이렇게 바울에게 알게 하셨다.
요단강에서 죄인의 세례를 받으시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하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려고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 ....'화목제물'로 서신 것이다.
나는 문득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가져 오는 그 여정을 생각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엘리 제사장 때에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져갔다가
빼앗기고 말았다.
이 언약궤를 블레셋의 경지에서 싣고 오던 '벧세메스의 소'(삼상6장)를 기억한다.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그들의  주신(主神)인 우상(다곤)을 무너 뜨리고 무수한
독종과 전염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돌려 보내기로 하는데 소 한겨리를 택하여 수레에 실어 보낸다.
이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밭'근처에서 법궤가 온 것을 기뻐하며 제사를 지내고
그 여호와의 궤안을 들여다 보는 사건이 벌여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것을 본 칠십명이 죽고 말았다.
놀라고 두려워한 그 땅의 사람들이 기럇 여아림에 전령을 보내어 속히 이 궤를
가져가라 한 것이다.
이것을 읽을 때에 무엇인가가 강렬하게 내 영혼을 건드렸다.
'이것은 명확히...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이다.'
하는 생각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본 것은 그것을 덮는 덮개가 없었거나
억지로 열었기 때문이다.
아마 전쟁 통에 그것이 유실되었는지도 모른다.
언약궤를 만지거나 안을 그냥 들여다 보는 자는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 안에는 율법을 상징하는 십계명의 증거판, 주님의 몸과 부활을 상징하는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다.
이것의 의미는 강렬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 이시기에 죄인들을 당신의 영광에 오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역시 '사랑' 이시기에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언약궤의 덮개는 그 공의와 사랑의 모든 것을 충족하는 구속의 상징이었다.
그 '덮개'를 '속죄소'(贖罪所)라 부른다.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 속에 넣어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도 속죄소위 곧 증거 궤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1,22

하나님은 이 '속죄소'라는 덮개에서만 이스라엘을 만나 주셨고 거기서 말씀하셨다.
그만큼 언약궤에서 덮개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고 하늘 음성을 듣는 장소가 속죄소다.
거기에서 놀랍게도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 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33:11)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깊고 오묘한 비밀이 있다.
여기서 '친구'라는 의미는 히브리적 어법으로 '피의 언약을 지키는 관계'를 의미한다.

너희가 나의 명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 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다.
요15:14,15

'피의 새 언약'에 대하여 말씀하신 유월절의 그 밤에 나눈 이 말씀의 의미는 그것이다.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예수님의 친말한 임재를 누리는 자인가?
나는 오래전 부터 진정으로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을 너무나 갈망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는 "나의 명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신다.
결국 그 명하신 언약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이다.
그런 친구는 아버지의 음성과 그 일들을 알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나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요15: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를 충분히 깨닫고도 남음이 있다.
주님께서 그 언약, 의를 이루고자 하셨기에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으신 것이다.
그 사랑안에 거하신 것이다.
모세는...다윗은...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언약, 계명, 그 말씀을 지키는 자였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런 자가 곧 하나님의 친구다.
그것은 '피의 언약', 생명을 나누는 깊은 친밀함의 결속이다.
그런 친구 사이로 모세를 여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려면...그 음성을 들으려면 그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사모하면서도 이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비밀의 언약을 구하지 않는다.
다윗이 언약궤를 그토록 가져오려고 애쓴 갈망의 본질은 이것이다.
십자가와 보혈로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구할 때에 ...
그 복음의 진정성을 성령으로 깨닫고 증거할 때에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
우리는 그 피의 복음을 그저 예수를 믿을 때에 소용되는 진리거나 대강은 안다고 치부한다.
찬양이나 어떤 감정적인 영적 기분 속에서 그 친밀함을 찾으려고만 한다.
철저한 언약의 관계속에서 그것을 지키는 삶을 피흘리기까지 추구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이 덮개, 속죄소에 피를 뿌리고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간구했다(레16:14~16).
그것이 없으면 그 안에 있는 '돌판', 즉 '율법'의 정죄로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속죄소'를 펼친 것을 '시은좌'(施恩座)라고 불렀다.
즉 '은혜의 보좌'인 것이다.
그것이 어린 양 예수님의 보좌다.
주님은 거기에 계신다.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과 깊은 임재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그 시은좌로 가야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하나님의 사랑...그 은혜가 그 덮개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죄가 구속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간다.
이곳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을 만나 주신 것이다(레16:1-5)
놀라운 것은 먼저 대제사장이 여기서 희생제물의 피로 속죄를 하고 '아사셀의 염소'를
안수하여 대속죄일에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이 여리고 근처의 그 '아골골짝'을 지나 험한 그 산에서 갈갈이 터져 죽는 그 염소...
이것은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아 희생을 하시는, 요단 강가에 서신 '어린 양'
그리스도의 언약임이 자명하다.
역시 놀라운 것은 이 '시은좌'를 히브리서에서는 '속죄소'(히9:5)라 하였는데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ijlasthvrion) 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의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가 없노라
히9:4,5

그런데 그 '힐라스테리온'을 바울도 로마서에서 동일하게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서3장25절에서 말한 '화목제물'이라고 한 것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ijlasthvrion)로 세우셨으니...
롬3:25

같은 단어를 다르게 쓴 것이다.
'속죄소'는 곧 '화목제물'인 그리스도를 상징했던 것이다.
주님이 자신을 다 주어 희생제물이 되셨기에 우리의 죄악이 면죄 되었다.
그 예수님께 율법의 요구, 하나님의 공의가 쏟아졌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를 '간과'(pass over)하신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펼쳐진 것이 곧 그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어린 양 그리스도다.
"다윗이 가져 온 언약궤의 의미는 이것이구나!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증인으로 산 것이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의 합한 자로, 친구처럼 사랑스럽게 불리우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의 언약궤를 찾으려는 남다른 열정과 희열은 바로 시편을 통해 십자가의 주님을
성령으로 노래했듯이 화목제물인 어린 양을 추구한 것이다.
그 예루살렘성(城)...
바로 성전될 자신의 영에 그것을 모셔 들이는 것이다.
그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이 '피의 언약'을 찾고 찾은 것이다.
그것을 찾기 까지 침상에 오르지도 않겠다는 열심...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화목제물인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영광...그 능력...그 권능...
오늘 그리스도의 교회에 너무나 절실한 회복이 이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언약과 구속의 복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 복음 속의 뜨거운 피와 기름과 불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 발견해야만 한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고 그 음성과 친구됨의 자리로 이끄신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이 고백이 너무나 절실하다.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 된다.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으로 이미 오실 구세주,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 했다고 하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케 하는 희생제물...
기꺼기 죄인의 자리에...속죄의 그 양이 되기를 갈망한 예수님의 본질을 그렇게 기뻐하며...
춤추며 구한 것이다.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그 십자가와 보혈의 본질을
관념이 아닌 ...외면적인 문자..육체대로가 아닌...
진정한 영혼의 갈망으로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구하고 구했다.
그 여정에서 그 어떤 말의 지혜나  인간적 방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 했노라"(고전2:2)
선언하던 바울의 갈망을  조금 알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수사(秀辭)나 관념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의 갈망이요 추구리라.
이것을 알 때에 "성령의 능력과 나타내심"(고전2:4)을 알게 된다.
이것을 탐구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그 '마음에 합한 자', '사랑하는 자'라 부르시는가를
영혼 깊이 깨달았다.
요단 강가에 어린 양으로 서신 주님은...
그 하나님의 언약을 맺으시고 말씀하여 주시는 그 자리인 '속죄소', '화목제물'의
그 자리에 서신 것이다.
그 언약궤로서 걸어 오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사랑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비밀이 있다.
진정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며...
세상의 고통과 죄악과 문제들을 동일시하는 어린 양을 닮는 형상이 없이,
그저 음성만을 들으려는 것은 큰 모순이다.





12.


요단강가의 그 세례터를 찾아가면서 성령님께서 부어 주시는 여러 생각들이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오랫동안 한 나로서는 촬영을 위해 무수한 자료들을 찾는 것이 기본이다.
나만이 아니라 후배들도 동일하게 많은 자료들을 찾았다.
그러나 그 땅에 갔을 때에 그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오직 성경만을 읽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근처의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 언약의 근거들을 알게 해 주세요."
진리의 성령님께 그것을 구하며 성경을 읽을 때에 그전에 보이지 않던 무수한 것들이
손짓을 하며 툭툭 튀어 나왔다.
그것들을 탐구하면서 나는 무척 놀라고 감격하였다.
'성경은 이토록 놀랍고...치밀하고 오묘하구나!'
새삼스러운 탄성이 연바로디었다.
그 세례를 받으신 요단 강가의 땅들 조차 '화목제물'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놀랍게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성경 전체가 화목제물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6,27

그러나 유대인들도, 심지어 제자들 까지도 성경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하여
어린 양 그리스도를 이해 못했다.
듣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도 그 땅을 걸어가며 성경을 읽어도 그 표피만을만질까 두려워 하여 성령님을 구한 것이다.
'왜 세례요한은...예수님은 그 긴 요단강의 지류 중에서 여리고 근처에서
세례를 주고 받은 것인가?'




나는 남들이 관심조차 갖지 않는 그것에 며칠을 매달렸다.
대부분 여리고하면 삭게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뽕나무' 앞에 가서 사진을 찍거나,
좀 더 깊은 공부를 한 이들은 아직도 흐르는 '엘리사의 샘'을 찾아간다.
아니면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고대 여리고의 성벽의 흔적이 남은 터를 찾을 것이다.


<삭개오의 뽕나무>


<엘리사의 샘>


<무너진 여리고 성벽의 유적>

그 위로 '시험산'이라 불리우는 곳까지 케이블을 타고 가서 내려다 보는 코스도 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유대광야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그 사역의
시작점이기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가진 땅이라는 생각을 했다.
요단 강가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들으신 그 음성도 놀라운 주님의 길들을
담아내는 것이지만...주님이 서신 그 지역의 땅들 조차 그 언약적 메세지를 잔뜩 품고
있다는 믿음이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조금씩 알아 가면서 나는 더욱 더 하나님의 언약의 치밀함과
그것을 이루시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열심을 만졌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수3:11,12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그 땅의 경계인 여리고의 요단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만 살펴도 왜 예수님이 이 여리고 근처인 요단의 강에 서셨는가가
손에 집힐듯 선명하다.
가장 먼저 깨달아진 것이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전략은 언약궤를 앞세워 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요단 강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대로 이루신 것이다.
그 언약궤의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죄를 씻는 그 '속죄소'의 본질인 '화목제물'로 서시자 모세의 때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율법의 언약을 완성하시는 풍경이다.
또한 놀라운 것은 언약궤가 요단에 들어서자 그 흐르던 창수가 멈추어 섰다.
이것이 진정한 '성령세례'다.
성경에서 '창수', 깊은 물', '홍수'는 음부의 세력이다.
시편 69편에서 성령님께 입술을 의탁한 다윗은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시를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 까지 흘러 들어 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 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69:1,2

'쓸개'와'식초'를 마시게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물'의 공격은 예수님을 향한
음부의 공격들이었다.
여호수아 때 요단의 물은 지금과 달리 매우 창일하고 깊었다고 한다.
그 물이 멈춘 것은 흑암의 세력들로 부터의 승리를 상징한다.
나는 한동안 성경 속의 이 '물'에 대한 탐구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이 물과 바람은 성령세례의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깊게 탐구하면 다시 엄청난 길로 들어서야 한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이 요단에서 들리신 그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마3:17

이것의 뒷부분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삶...
'이방의 빛'이 되는 삶을 의미한다.
역시 그 음성의 본질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그것도 이 '여리고 광야'를 다룬 후에 다시 들어갈 것이다.)
언약궤가 요단을 건넌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12명을 택하여 상징으로
세우라고 하셨다.
이것은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12제자를 택하시는 주님의 모습니다.
예수님의 여정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여호수아'(이 히브리어 이름은 '예수와', 즉 예수님의
이름과 같다)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과 그 땅들에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언약의 메세지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고 명했다.
후에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과 정탐을 보내실 때에 '둘씩 짝지워' 보내셨다.
그들이 가서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서 정탐을 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것이 여리고의 사람들에게 들켜서 사람들이 잡으러 왔을 때에 라합은
적당히 둘러대고 그들을 지붕위에 숨겼다.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 가서 그 지중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수2:6

참으로 성령님은 주님 말씀처럼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놀라우신 분이시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첫날 여리고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보았다.
극도로 피곤한데도 갑자기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땅에 스민 예수님의 언약과 근거들을 알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며 성경과 자료들을 살피는데...
이상하게 여리고의 고고학적 근거들, 그 땅의 역사와 라합의 의미에 대해서 찾은 무수한
자료들은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한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단어와 말씀이 나를 붙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두 정탐꾼을 숨긴 '삼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전에 주의 깊게 읽은 적도 없다.
심지어 그런 말씀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것이 불도장(火印)처럼 내 안에 새겨져 심장을 자꾸만 데워갔다.
그 삼대라는 것에 예수님과 연관한 어떤 의미가 있다는 근거없는 심증만
자꾸 커져갔다.
'인터넷이라도 가능하면 좋을 텐데...
이 새벽에 동생들을 깨워 노트북을 달라 할 수 도 없고...'
팔레스타인 지경인 여리고는 아무리 인터콘티넨탈 호텔이어도 인터넷이 잘 안된다.
작년에 여기서 처음 열린 이스라엘 코스타(KOSTA)강사로 왔었기에 잘 안다.
아직 어둠을 머금은 여리고 평지가 여명에 깨어남을 창문으로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호텔 주변을 돌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이 땅에 담긴 예수님의 행적들과 그 언약의 뿌리들을...."
나의 간구는 집요하다.
한참을 기도한 후에 들어 오는데 로비에 비치한 컴퓨터가 보였다.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삼대'에 대한 궁금함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인터넷의 속도가 빨랐다.
후에알아보니 그 사이에 속도가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예기치 않은 '삼대'에 대하여 찾으며 다시 심령이 뜨거워 짐을 느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분명하다.
여기에 화목제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상징이 있다.'
나는 흥분을 억제하며 혼자 호텔로비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래 자료를 찾았다.
'삼대'란 '아마 삼(亞麻 蔘)'을 가지고 옷감을 짜는 틀을 의미한다.
그 옷감을 널어 놓은 지붕위의 다락방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다양한 자료들을 찾으며 내 영혼은 전율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입으신 그 ''세마포'(細麻布)를 짜는 삼이었다.

'세마포'의 원료가 된 '아마'(亞麻)는 성경의 역사로 볼 때 지구상 가장 오래된
약용식물중의 하나다. 성경은 아마의 줄기를 벗겨서 섬유를 생산하여 옷을 만든
세마포에 대하여 상당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그 옷과 대제사장의 옷도 아마섬유에서 추출한 것이다.
아마는 마치 여인의 손이 하얀 한랭사를 짜듯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옷이며 역사적 식물이었다. 세마포는 이제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의 무덤안에서 서로
한자리에 있음을 보게된다.

성경에서 그 아마 삼으로 짠 세마포에 대한 구절들을 찾으며 더욱 놀랐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편을 당하게 할지니
출27:9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레16:4

그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아비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성의(聖衣)를 입고
레16:32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굴려 무덤문에 놓으매
막15:4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5:6

세마포에 대한 아주 일부분만 찾아 봐도 그것이 성경에서 가진 의미가 깊음을 알 수 있엇다.
의복은 인체의 세포조직으로 보면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세포의 막과도 같다고 한다.
놀랍게도 아마삼의 씨에는 세포의 원형질막을 구성하는 분자에 문제가 생기거나
세포막 표면에 상처가 났을때 빨리 복구하는 물질인 '리그난'(Lignan)을 대량으로
함유하고 있으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원형질막을 형성하는 지방산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열이나 화학물질로 정제하지 않은 유기농 아마씨는 뛰어난 약효를 자랑하는데
장의 이완촉진을 도와주며 혈액내의 혈당을 조절해주고, 암 , 특히 유방암 , 자궁암 ,
대장암 그리고 전립선비대증과 같은 호르몬에 민감한 질병을 예방하는 것에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씨가 함유되어 있는 함암성분인 리그난은 다른 과일이나 야채 보다 무려 최대
800 배나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종양이나 암등 불치병을 억제 하는 능력이 뛰어난
식품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천연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삼대'(蔘垈)에 숨겼다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탐구하던 이 자료들이 내게 영적인 깊이를 더해 주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속죄소에서 아마로 된 세마포옷을 찢음으로 정죄함을 받았다.
어린 양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셨을 때 그것을 감싼 세마포....
아마의 씨를 깨트리고 벗겨내어 그 안의 치유하는 약효 성분을 추출하듯이...
그 안에는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모든 것을 구원, 치유, 회복하신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있었던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다.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대상17:11-14

요단강가의 그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의 근원이 되는 그 말씀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성전과 언약궤의 본질을 진정으로 회복할 다윗의 씨...
그의 자손에 대한 칭호다.
거기에도 한 '씨'(seed)가 나온다.
그분이 요단 강가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시다.
라합이 두 정탐꾼을 숨긴 그 삼대는 세마포의 본질과 그 '씨'를 상징하는 것이다.
성소의 휘장도 이 아마삼의 세마포로 짰다(출26:31-33)는 것은 정말 전율이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10:19,20

'휘장은 예수님의 몸이다'...
그런데 그것을 세마포로 짰다는 것은 세마포는 곧 예수님의 육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성소와 성소사이에 가리웠던 휘장은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는 순간 찢어졌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영원한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피묻은 그리스도의 시체는, 그 몸은 세마포에 싸여서 무덤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세마포의 옷감에 숨겼다는 것은....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에 감싸일 때...
구원받고 치유와 보호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화목제물로서의 어린 양은 여기에서 계시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수님을 상징한 성막을 살피면 세마포 울타리로 쳐져 있다.
그것은 마치 세마포 옷을 입은 한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의 옷도, 휘장도 그것을 두른 울타리도 세마포다.
성막의 덮개의 맨 안쪽도 성막 전체의 바깥뜰의 울타리도 모두 세마포다.
안과 밖이 모두 세마포로서 일치할 때 온전히 하나님의 성전이...거룩한 신부가 된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7,8

마지막 때에 다시 이 '세마포'는 계속 중요한 천국의 실제로 등장한다.
그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 원문으로는 '의'(Righteousness)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주제요 우리가 추구할 본질이다.
우리가 입어야할 이 '의'의 의미를 ...주님을 통해서 나타난 그 비밀을 깊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그 길을 따를 수가 있다.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여정에 이 통찰은 매우 중요한 계시이며 하늘의 전략이다.
구원의 비밀이다.
그것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이어진다


<세마포 울타리로 쳐진 성막>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여정에 이 통찰은 매우 중요한 계시이며 하늘의 전략이다.
구원의 비밀이다.
그것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이어진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 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수2:18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공격할 때에 자기 집이 구원을 받을 징표를 요구했다.
그 때에 두 정탐꾼이 증표로 준 것이 바로 '붉은 줄'을 창문에 내걸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애굽에서 온전히 탈출하게 한 증표...
유월절의 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과 비견된다.
그런데 두 정탐꾼은 "여기 이 붉은 줄을 매라"(수2:18)하고 눈에 보이는 그 줄을 지시한다.
그것은 여리고 사람들을 피해 창문에 매달아 피하게 한 그 줄이었을 것이다.
라합이 짠 세마포의 옷감은 붉은 색이었다.
이 붉은 줄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만 구원의 증표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에게도 적으로부터 탈출하는 도구였다.
십자가와 보혈...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속죄는 예수님을 믿게하는 근거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그르 따르는 제자들이 흑암의 세력을 깨트리고 자유케 되는 능력이기도 하다.


<라합이 매었던 붉은줄- 지붕 위로 삼대 속에 숨은 두 정탐꾼이 보인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이 말씀은 놀라운 통찰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dunamis), 즉 '권능'(power)이다.
십자가의 도가 성령의 권능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계시록을 읽으면 최후 승리를 하는 자들은 '어린 양의 피'에 세마포 옷을 적시고(계7:14),
원수 마귀를 그 피를 증거하는 말로서 이긴다(계12:11).
이것에 대한 강력한 계시가 이미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스라엘에게 여러 각도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깊이 탐구해야만 한다.
나는 이스라엘로 촬영을 떠나기 얼마 전에 히브리 크리스챤 연합회(IHCS)설립자인
리차드 부커 목사의 <붉은 줄의 기적>이라는 책을 읽었다.
늘 그렇듯이 서점에 가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던 중에 구석에 있던
그 책을 발견하여 사서 읽게 된 것이다.
그 책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의 피의 능력을 계시하는' 이라는 부제(附題)가
붙어 있었다.
이 '붉은 줄'은 당연히 라합이 구원의 증표로 내건 그 줄이다.
부커 목사는 본래 이지적이고 신실한 성공한 컴퓨터 전문가였다.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한가지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신약과 구약의 관계성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발견하고 믿었다.
그러나 구약의 영적인 가치를 거의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구약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구약을 읽을 때면 이해가 잘 안되어 책장을 닫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중에 자신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고 깊은 회개 가운데 성령님을 체험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 후부터 놀랍게도 신구약이 연결되는 통찰력들을 성령께서 열어 주시기 시작한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그의 수건이 벗겨지고 눈이 열려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어지는
하나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구약이 너무나 놀랍고 깊은 비밀들을 계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는 나사렛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그림은 의미없는 종교의식들, 관습들, 장소들, 이름들
그리고 관계없는 일들 속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일한 그림 속에 있는 각각의 구성요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적인 수건을 벗겨주시자, 그 그림이 뚜렷히 보였습니다.
나는 구약에서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리차드 부커 <붉은 줄의 기적>에서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력이다.
나는 이스라엘로 촬영을 다녀 오면서 기도 가운데 그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그 땅의 작은 요소들까지 주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탐구에 확증같은 것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부커가 발견한 신구약을 하나로 연결하는 붉은 줄은 '화목제물로 오신 어린 양'이었다.
나는 다시 전율하였다.
왜 주님께서 여리고 근처의 요단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란
증거를 받고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가?
이 여리고가 그 붉은 줄의 증표를 가진 땅이었기 때문이다.
라합이 숨긴 '삼대'와 구원의 증표로 내건 '붉은 줄'은 곧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이 요단에 오신 언약궤이신 그리스도를 계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그것만이 아니다.
바람과 물...돌들이..온 땅이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엇다.

사진 : 이지연  
음악 : Keith Green "Create in me a clean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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