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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 서다(4)

은바리라이프 2010. 1. 7. 23:00

 그 길 위에 서다(4)

9.


이 글을 쓰는데 갑자기 하덕규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술의 전당 근처에 와 있는데 우리 사무실에 오겠다는 것이다.
덕규형은 '시인과 촌장'으로 유명한 대중 가수였는데 지금은 CCM과 기독교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로 있다.
예전엔 친형제 보다 더 가까이 지냈던 사이였고 '문화'와 '예술'을 통해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는데 최근에 서로가 분주하여 잘 만나지 못했다.
특히 형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오래 보지 못하였다.
아는 후배 피디와 함께 온 형을 보니 무척 반가왔다.
이런 저런 대화 중에 덕규 형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이 돌아 가시기 전에...'jesus movement'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할턴데...생각이 어떠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내 영혼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3년전에도 형이 했었다.
그 때는 <부흥의 여정>이란 작업을 마쳤을 때인데, 형이 60년대 일어난 그 '예수 운동'이란
부흥이 미친 영향과 역사를 반드시 탐구해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나도 그것에 크게 공감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일본과 '하늘의 언어'를 나누면서,
그런 작업들이 뭍히고 말았다.
사실, 그 때는 덕규형이 그것을 하고자 하는 갈망이 더 컸다.
왜냐하면 척 스미스 목사님을 통해 열린 그 부흥운동은 현대 찬양들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저스 무브먼트와 찬양 사역자들>


<당시 거리에서 전도하며 행진하는 모습들>

60년대 세계의 청춘들은 반전, 반문화, 마약, 히피, 로큰롤, 포크송, 뉴에이지 등으로 기존의
질서와 세대에 환멸을 느끼고 반항아였다.
전통과 교리에 얽매인 교회도 그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1967년 부터 교회의 젊은 사역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혁명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을 포옹하는 새로운 언어와 메세지를 소유하였다.
교회에 회의적이던 많은 이들이 그 새로운 운동안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켈리포니아 해안가의 척 스미스 목사를 중심으로 한 갈보리 교회에 성령이 부어졌다.
그 성령의 역사는 놀랍게도 모든 계층을 포용할 뿐 아니라 각종 매체를 통하여 급격히 번져 나갔다.
그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강력하고 새로운 성령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 불렀다.
이 예수운동은 히피, 갱, 록스타, 마약중독자, 청소년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이들의 언어와 문화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귀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과거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의 '음악'이라는 새로운 메세지의 효력이 빛을 발하였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시대 영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명을 이루어 나갔다.
그들은 음악으로 반항에 뭉쳐있던 젊은이들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이것이 지금은 보편화 된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씨를 뿌린 것이 되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물가로 나오라' '작은 불꽃 하나가'
'내가 산을 향하여', '이와 같은 때엔' '주님의 성령'같은 영혼을 울리는 수많은 찬양들이
그때에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방황하던 수많은 히피들과 청춘들이 이 그 때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났다.


<해변에서 세례받는 이들>

덕규형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포인트들이 그 부흥운동에 들어 있던 것이다.
나도 그것에 관심이 있었으나 그 때는 당면한, 해야 할 것들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번엔 내 영혼이 엄청나게 반응함을 느꼈다.
덕규형 이후에 내게 이 운동과 척 스미스 목사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해준 형님이 있었다.
역시 친형제같은 내수동교회의 홍종일 형님(지금은 장로가 되셨다)은 입버릇처럼
척 스미스 목사님이 메세지와 그가 성령과 이스라엘의 회복과 종말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가진 중요한 사역자임을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분에 대한 자료들과 서적들을 찾아 보며 이 때 부어진 기름부음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 알게 된 것은 그 예수운동을 통해서 거의 불가능할것 같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된 것이다.
"형..그 때에...지금 세계적인 리더가 된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혹시 아세요?"
나는 즉각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덕규 형은 그런 것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히피나 마약중독자들이 예수를 믿은 것도 놀랍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이다.
과거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 때에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처음 덕규형과 이 대화를 나눌 그 때는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것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지가 않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일들을 주목하게 하셨다.
그 사이에 나는 일본을 넘어서 '이스라엘'로 인도하심을 받았다.
참으로 그것은 내가 꿈꾸지 않은, 생각지 않은 영역이었다.
이스라엘에 가서 열린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 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니라
롬11:16-18

바울 또한 다윗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자다.
그는 하나님께서 수없이 언약하신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롬9:3)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이 갈망은 모세의 그것과 같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한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들을 용서하시지 않으시면,
'주의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소서'(출32:32)라고 탄원을 한다.
이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심정을 소유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한 동족 유대인들에 대하여 심장이 견딜 수 없는 자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깊이 깨닫게 하신
지혜와 계시가 있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처음 떡덩이'가 거룩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심으신 '원뿌리'(아브라함,이삭, 야곱의 언약)는 거룩한 것이었다.
다만 가지 얼마가 불순종하여 꺾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이방인인 우리가 거기에 접붙임을 받아서 거룩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 교회다.
교회는 그 '처음 떡덩이', '원뿌리'인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과 성령님을 보증으로 보내어 주신 것도 바로 이 축복에
연결되게 하심임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3:13,14

이스라엘에 가면서 가장 강력하게 부어진 것이 이 말씀들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의'를 이루신 이유는 이것이구나!
그 원뿌리...아브라함의 축복을 내게 주시려는 것이구나!"
나의 영혼이 이것을 강하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도 모르는 교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에 대한 눈이 열리면서 나는 그것을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것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2,3

이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2006년에 나는 "하나님의 가장 기쁘신 뜻을 가르쳐 주세요."
라는 간구를 얻게 되었다.
참으로 그것은 성령님이 부어 주신 것이다.
대구에 '부흥을 위한 청년 집회'에 갔다가 회개의 영이 부어지고 그 때부터
내 영이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구하는 간구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게 부어진 부흥이었다.
그 당시엔 언약이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그 기도의 응답이 일본으로 가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생각지 않은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지극히 작은 자들을 통해서 극적으로
그 길을 인도하셨다.
그리고 2007년 워싱턴과 뉴욕에서 '하늘의 언어'를 기름부음 받는다.
2007년 여름 일본에서 수백명의 동지들과 중보하고 오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한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갑자기 열어 주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백석대 신학대학원장이자 부총장이신 김진섭교수님이시다.
교수님은 거의 기적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에서 일본의 집회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더욱 받으셨다.
마지막 돌아 오는 날은 주일이었는데, 나는 버스 중 한 대를 교수님께 맡겨서
예배를 부탁드렸다.
거기서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무려 3시간이나 메세지를 하신 것이다.
그 선포가 씨앗이 되어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이스라엘로 가게 된 것이다.
교수님이 가져 온 것은 이스라엘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서 대학을 세우는 프로젝트였다.
"교수님...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언약...그 축복이 아직도 유효합니까?"
나는 그 프로젝트를 도와 달라는 교수님께 그렇게 당돌히 물었다.
김교수님은 즉각 답을 했다.
"당연하지요.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이스라엘을 품기로 작정했다.
돌아보니 전부터 주님은 내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스라엘'로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이미 6개월 전부터 이스라엘 문화원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
몇 사람이 모여 교제하는 일이 이루어 졌다.
그러면서 점점 나도 모르게 이스라엘에 대하여 듣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전통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여 죽인 자들이고, 타락한 종교적 영을 가진 '회칠한 무덤들'이며,
팔레스타인의 작은 자들을 핍박하는 세력들이다.
게다가 이미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고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인 우리가
진정한 '이면적(영적)인 유대인'로 대치되었다.
그런 거부감을 가지고 그 대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항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 문화원장님의 한 마디가 영혼을 흔들었다.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죽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내가 죽인 것이지요...
주님은 내 죄 때문에...나를 위하여 죽으신 겁니다."
그 한마디에 나의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불순종이 있지만, 정말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나는 이글을 쓰기 얼마전에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을 발견하였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1,15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죽이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
이미 요단강가의 그 세례를 받기로 하시며 '모든 의', 희생제물로 서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었다.
나는 유대인들이 정면으로 미워하지는 않아도 예수님의 죽였다는 혐의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로만 카톨릭이 수천만명의 유대인을 교회사에서 핍박하고 죽여 온 신학적 근거였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히틀러가 그 엄청난 학살을 자행한 신학적 배경도 역시 본질은 그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10:17,18

이 말씀은 가히 충격과도 같았다.
물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언약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 준 극악한 이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고 하셨다.
바로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진정한 목자이시기에 그렇게 죽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갈2:20)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이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계5:6)고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 이미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늘에서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셨다는 해석이 있다.
예수님은 죄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백성들, 양들을 위해서, 이미 하늘에서
그렇게 어린 양이 되신 것이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오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계명, 언약이었다.
그것에 순종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은 어디에 있는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이 의를 이루심으로 그 사랑과 영광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기업으로 소유하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희생의 의미를 유대인들이 죽였다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희석시키는 것일 수 도 있다.
주님은 죽기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니라
마3:16

공생애를 여는 그 첫마디...
대천덕 신부님은 '의'(義)라는 한자가 '나'(我)가 '어린 양(羊)이 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조성된 한자라는 것이다.
꼭 그런 의미에 힘을 빌지 않아도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다.
스스로 희생제물로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10:17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그 사랑을 성령님으로 부어 주시는 비밀이 이것이다.
이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그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스스로 죽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죽으심의 권세와 복종을 인정치 않고 오직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나의 진정한 근거, 시금석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마귀도 말씀을 슬쩍 인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을 일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마27:25)는 유대인들의 말...
로만 카톨릭이 자기들이 우주에 유일한 교회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고안한 전통에 근거하는 잘못...
그것을 그대로 계승한 교회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성경보다도 그런 말들에 권위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권위는 오직 성삼위 하나님시다.
이것은 내 안의 죄된 속성, 곧 책임을 전가하는 그 타락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스라엘에 가면서 내 안에 뿌리 깊이 도사린, 오직 하나님의 말씀, 언약에 근거한 말과
생각과 추구가 아닌 것들을 씻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매우 혁명적인 말씀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가 없느니라
롬11:1

저희가 넘어지기 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11:11,12

그전에도 수없이 읽었던 이 말씀이 전율적으로 내 영의 눈을 열고 돌진해 왔다.
나는 이스라엘이 실패했고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아니라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인, 일반적인 사고다.
그런데 성경은 "그럴수가 없다"고 선언한다.
가히 충격이었다.
나는 그토록 성경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마귀가 그런 의식들을 조장하고 주입시킨 것이다.
막연한 인본주의적 사고의 틀, 내 체질, 이해를 따라 판단한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서 이 말씀의 깨달음은 내게 엄청난 기름부음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실패조차 이방인들에게 은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충만함, 즉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는 순종이 일어나면,
얼마나 더 큰 은혜가 임하겠느냐는 바울의 반문이다.
이 말을 확증하는 말씀이 이어진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들을 받아 들이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롬11:15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트리는 강력한 기름부음...
마지막 때의 그 대부흥...마귀를 심판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역사가 이루어 진다.
아아...
"이것이 진정이라면...
이 말씀의 약속이 진리라면 이것은 내가 갈망하던 그것이다."
나는 그렇게 외쳤다.
나 자신의 삶에 얽매여 허덕이던 내가 2004년 봄에 성령님을 만나 변화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되었다.
부활의 권능을 가진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꿈꾸게 되었다.
전국과 열방을 돌며 안타까운 것은 이 권세와 능력의 언약을 가진 주님의 교회가
너무나 허약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그리스도의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가지지 못하고 피상성에 매몰되어
자기 유지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권능의 기름부음을 구하고 구했다.
그런데 바울은 너무나 생각지 않은 말씀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면 부활의 권능이 나타난다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체질을 가지고 있다.
정말 그런가 늘 확인하고 파악하고 본능을 소유한 것이다.
그런 체질을 사용하셔서 전 세계의 부흥의 현장을 탐구하고 촬영하는 일에 부르신 것이다.
정말 그런가 하고 확인하는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그 대부흥들, 그리고 4,50년대와 6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그 기름부음들의 근원에 정말 '이스라엘'의 회복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코드였다.
20세기 중후반의 그 강력한 기름부음의 핵심에 '예수운동'(jesus movement) 이 있었다.
분명 그것은 67년에 잉태되어 상상못할 새로운 하늘 문을 열어 온 것이다.
"형님..지금 예수님을 믿는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1967년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되어졌을 때...그 때 일어난
'예수운동'(jesus movement) 당시에 믿음을 기진 것을 아세요?"
나는 덕규형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래?!...그것은 알지 못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덕규형은 매우 흥미를 느끼며 그 부흥을 다양한 관점에서 촬영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전과 다른 적극적인 마음으로 그러자고 답했다.
덕규형이 가고 나서 갑자기 진상이가 말했다.
"감독님...아셔 인터레이트를 비롯해...거의 대부분의 메시아닉 쥬들이..
그 때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기록들이 있네요."
나는 깜짝 놀랐다.
진상이는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자기 책상에서 컴퓨터만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도 우리의 대화를 예사롭지 않게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외국의 자료들을 찾아 본 것이다.
"정말이냐?
나도 몇가지 근거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놀라운 코드다!"
"두 분이 그 얘기를 할 때에 정말 저도 놀랐습니다.
여기 보세요...에디 목사님도 그 때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인터뷰가 있네요."
진상이 보여준 미국 방송의 인터넷의 동영상에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는 에디 목사님이 보였다.
그분은 지난번 촬영하러 이스라엘에 갔을 때 갔을 때 만난 키이쓰(어셔)목사님의 동역자다.
우리의 기도에 너무나 감동하여,
"우리에게는 여러분들의 그 기름부음...
강력한 기도의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라며 유대인 형제들을 가운데 몰아 놓고 우리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분이다.
진상이가 찾은 자료들을 보니 너무나 많은 중요한 유대인 사역자들이 그 당시에
정말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들이 있었다.
20세기 찬양의 흐름을 주도한 마라나타의 유대인 사역자 폴 윌버(Paul Wilber),
그리고 세계적인 찬양 인도자인 밥 피츠(Bob Fitts), 빈야드의 존 윔버((John Wimber)...
수많은 선교단체, 영적인 사역자들이 그 때 당시 탄생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체질, 문화, 신학적 사고의 틀까지도 변화하였다.
20세기 현대 교회의 흐름과 변화에 있어 '예수운동'은 너무나 중요한 코드다.
그런데 그것이 1967년의 '예루살렘 회복'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모세다얀 장군>


<예루살렘 성벽 앞에선 이스라엘 군인들>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3,4

이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언약에 깊은 경외를 가지지 못했을 때에는 그런 구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그 언약대로 역사하신다.
나는 이 깨달음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것임을 절절히 느꼈다.
어떻게 그동안 만나지 못한 덕규 형이 몇년 만에 갑자기 와서 이런 교제를 나누는가?
이 글을 쓰는 흐름 가운데 이것을 열어 주심은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중요하며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가를 확증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성>

10.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의 땅, 그 가운데 정복되지 않은 여부스 족의 산성인
'예루살렘'을 회복하려는 다윗을 다루다가 생각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1960년대 일어난 '예수운동'(Jesus Movement)과 이것은 어떤 연관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은 아직도 유효하다.
하나님은 그 맺으시고 말씀하신 언약을 따라 지금도 철저히, 치밀하게 역사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의미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의 회복을 위하여 엄청난 노력과 전쟁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언약궤를 가져 오기 위하여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열정으로 나아간다.
그로 인해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린다.
사무엘하8장은 축복을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다윗(삼하7장)이
가나안과 다른 열방의 족속들을 하나님의 권능의 팔로 물리치는 기록들만 나온다.
놀랍게도 예루살렘과 언약궤를 그곳에 가져 온 후부터 강력한 승리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언약을 잊지 않고 그 위에 굳게 섰다.
그것이 그에게 축복과 능력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이 능력없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말씀을 내 작은 삶을 위한 적용정도로 취하는 피상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장대한 흐름을 알아야 한다.
쉽지 않아도 그 흐름에 서야만 한다.
역시 오늘 우리의 취약점은 너무나 쉽고, 실용주의적인 것들에만 익숙하다는 것이다.
단장 내 손에 잡히는 유익, 필요로서의 복음을 구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복음의 '모든 의'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그 길...
광야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을 약속한다.
이 길위 서는 것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을 회복해야 하는 의미의 중요성을 다윗은 명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엔 '모든 의'를 이루시는 그 메시아에 대한 비밀이 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王谷)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14:!7,18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order)를 따라서 제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살렘(평화)의 왕'이라 불리웠는데, 그것이 곧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멜기'는 '왕'이고 '세덱'은 '의'(義)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인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는 그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의 왕'이자 '의의 제사장'이었다.
그가 아브라함을 영접하기 위해 나온 '왕곡'(王谷)은 모리아산의 줄기인 '골고다'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다.
또 한편에서는 '기드론 골짜기'라고 한다.
무엇이 정확한지는 확증하지 못했으나 그 두 곳이 모리아산에 연결되는 것은 분명하다.
모리아 산은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이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바로 그곳이다.
멜기세덱이  왕곡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삭 대신에 그 모리아산에 제물로 예비된 희생제물인 '숫양'(창22:13),
즉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인 '떡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으로 '모든 의'를 완성하시는 진정한 평강의 왕이 되셨다.
예루살렘은 그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그 언약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약의 지식이 우리의 길, 충성, 축복을 좌우한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보다 위에 있는
제사장이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7

이 말씀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해를 못한 유대인들이 "오십도 안된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다 하느냐?"고 하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물론 주님은 창세 전에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만난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시는
왕이신 예수님을 의미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메시아이신 예루살렘의 왕을 믿음으로 보고 영접한 것이다.
다윗 또한 성령 안에서 그것을 보고 믿음 가운데 예루살렘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마22:43,44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제 알게 된다.
이 시편110편은 시편2편과 더불어 예수님의 '세례사건'의 그 음성을 예언한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여호와(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시110:1)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 주', 즉 메시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윗은 이미 성령 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시편에서 다윗은 구약의 누구도 말하지 않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않으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110:4

나는 이 구절에서 매우 놀랐다.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예루살렘왕 멜기세덱의 이 말씀과 축복의 언약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이 언약들을 그는 붙들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토록 예루살렘이 회복되지 않음에 고통한 것이다.
참으로 다윗을 '증인'으로 삼으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인으로 서기 위하여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언약,
말씀들을 깊이 알아야만 한다.
그저 능력과 기도만으로 다는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다윗 외에 그 땅이 회복되지 않음에 아픔과 갈망을 가진 이는 드물었다.
사울도, 그 누구도 그 마음이 없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3:17)의 그 음성의 모태가 되는...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되리라"(삼하7:14)하는 축복의
그 약속을 주신 근거가 이런 그의 열심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탐구했으며 그 약속하신 말씀들을 존귀하 여겼다.
다윗에게 능력과 축복이 된 이 언약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것을 나는 붙들게 된 것이다.
내가 동지들과 함께 이스라엘에 가서 그 땅을 밟으며 예루살렘이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 언약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못 밖은 후에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황폐하여 버린 바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의 숫가 차기까지 그들에게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1967년 놀랍게도 그 땅이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에 회복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6일 전쟁으로 거의 100분의 1정도 밖에 안되는 엄청난 전세(戰勢)의 차이에도
아랍의 연합군에 승리하여 예루살렘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세 엄청난 것이었다.
나는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위해 3차에 걸친 이스라엘의 전쟁들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과거 여호수아와 다윗, 엘리사의 때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팔'이 역사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그 안에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들을 도우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1967년 이 기적적인 예루살렘의 회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저희가 칼 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인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21:24

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언을 보라.
정말 주님의 예언처럼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무너지고 황폐하여졌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 세계로 사로 잡혀 가서 무수한 고난을 당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성이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버려질 것이라 했다.
그 수가 차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67년 그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시작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눅21:28

'무화과 나무의 비유'와 함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해 매우 중요한 고리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의 궁극인 '마지막 때'와 그 때에
열리는 '대부흥', '대추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는 다시 주님의 말씀에 눈을 부릅뜨고 주목해야 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예루살렘)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마23:37-39

마지막 생애의 절정기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하신 예언이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흩어질 것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그 집이 다시 주님을 보게 될 그 날이 언젠가 오는데...
"바룩하마 베셈 아도나이"...
다시 유대인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때이다.
다시 주님을 이 땅에서 보게 되는 날...
그날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 영광의 날인 '재림의 때'이다.
그런데 그 날은 유대인들이 배반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날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주님의 다시오심을 사모하는 이들이라면 이 말씀을 깊이 주목하고 붙들어야한다.
왜 우리가 예루살렘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는지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윗이 그 땅을 그토록 회복하고자 하는 근거 속에 성령안에서 바라본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되는 그 날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교회에게는
엄청난 은혜의 날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그 날의 의미를 깊이 생각지 못했다.
그저 해외토픽 정도로 치부하였을 뿐...
그것이 가져 오는 엄청난 언약의 성취를 깨닫지 못하였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막4:12) 어리석은 종자가 될까 두렵다.
다시 마귀는 교묘한 술책으로 교회에게서 예수님의 재림을 빼앗고 있다.
"형이 재림이나 종말..이스라엘...그런 예언들에 대해 말하면
교회에서 비판 받지 않나요?"
덕규형과 대화를 할 때에 마침 다큐멘터리를 하는 후배가 와 있었다.
그는 덕규형이 가고 나서 슬쩍 그렇게 물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마귀는 치우친 극단주의자들을 부추켜 교회의 가장 큰 소망이요 언약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열망과 본질을 앗아가 버렸다.
이 틈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오늘 교회가 주님이 약속하신 음부의 권세를 파함과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는(마16:18)
그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을 상실한 이면에 재림에 대한 신앙의 부재가 있다.
진정한 복음은 십자가를 넘어서 성령과 재림을 포함한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재림의 가장 중요한 코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언약은 한치의 오차도 없다.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원뿌리를 축복하면 그들도 축복을 받는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회복의 이면에는 그것을 위해 중보한 소수들이 있었다.
1967년만이 아니라 1948년 현대 이스라엘의 기적같은 독립과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 오는 일, 그리고 1967년 예루살렘이 회복의 이면엔
그것을 위해 헌신하고 기도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다.
예루살렘이 회복된 후에 놀라운 부흥의 소식이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해변가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이 그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때처럼 엄청난 흑암의 세력들을 물리치는 승리를 가져왔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깊은 연관을 가지는 유대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역사를
열게 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도 동일하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기드론골짜기>





사진 : 이지연

삽입곡 : "For those Tears I died" - Children of the Day

<Children of the Day>는 Jesus Movement 때 변화된
대표적인 히피 그룹으로 수많은 은혜의 찬양들을 만들었다
한국어로 '물가로 나오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For those Tears I died'는 그 대표적인 곡이다.  







이스라엘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원뿌리를 축복하면 그들도 축복을 받는다
오늘새벽 옆자리에서 기도하시던 중보자분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매일새벽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올려드리는 마라나타~찬양속에 감춰진 "원뿌리 "
이스라엘의회복을 향해 함께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야곱의사닥다리~말씀이풀어진 3층하늘 ~
하늘에 뜻이 이땅가운데 이루어지리이다 !
이사야62장 .성경을 펴놓고 하루종일 교통했습니다

성령이 나를 데리고 크고높은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내려오는 거룩한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0

나는 알패와오매가요 처음과나중이라 계 21: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것이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여 주소서하라 (마9:37ㅡ38)
09-10-07
1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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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지난 2여년전 이스라엘 귀환운동을 하는 모단체의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류간사님의 열린다 성경이야기를 보기도하고 이스라엘 잡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감독님의 기도집회에 우연회 끌려가 몇개월 지속 참여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막상 저에게 복음에 대한 감동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삶속에서 복음과 구원에 대한 비밀을 알고자 하는 갈증을 가난한 마음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게 되었고 두달 정도 됬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며
완전 와~~ 하는
더이상 말을 못하겠습니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언약은 정말 네버엔딩 스토리이네요
언약, 믿음 - 모세, 제사 - 예수 - 성령 - 증인 - 재림 - 영광
--- 하늘에는 영광이요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평화로다 ----
------------------------------------------------------------

혹시 하나님의 '의' / 아브라함이 믿어 '의'로 여겼다는 그 '의' /
'의'의 히브리 원어와 뜻이 무엇인가요?
09-10-07
13: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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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하나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올 4월.
이사야 62장 6절 말씀(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네가 파수꾼이다." 라는 이 말씀하나로, 7년간의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을 접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하시고, 버림받은 자들과, 서자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 또한 축복하게 하시며(창세기 17장 20절)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드리는 기도를 하게 하시는 나의 여호와 하나님.

^^a 하나님 언약을 깊이 알고자 하는 제게 이 나눔이 큰 힘이 되네요.
09-10-07
15: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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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
이것은...!
그래서 그렇게도 민족들의 연결과 동으로부터 서로의 흐름과 현존 이스라엘에 대한 뚤림에 압도되는 힘이 실린거군요.
그 길을 위하여 전세계 주의 군병들 하나하나를 배치하시는 아버지의 놀라운 손가락.
하하 ^^;; 이 연재 제목 '그 길 위에 서다' 이것은 그 동안의 글들보다 빨아들이는 힘이 강렬합니다... 설레임 속에 기대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축복받는다... 이것, 저도 이 거룩한(?) 욕심을 내어야겠습니다.

언젠가는 그 길의 선상에서 만날 모든 형제자매의 주안에서의 승리 !! 예수아멘 !!
09-10-07
17: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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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오늘! 키비 세미나 통해, 장자된 이스라엘을 향한 아버지의 계획과 마음을 확인하고는 어쩔줄 몰라 하고 있는데..~ 늦은시간 이곳을 만나게 하시고 또 한번 확인작업을 하시네요.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지금도 열심을 내고 계시는 아버지! 오늘도 깨어있는 자들을 일으키시고, 눈을 열게 하시고, 품고 중보하게 하시는 그 놀라움에 다시한번 찬양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09-10-07
2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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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a
김 감독님:

지금 새벽 3시 16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깊은 소원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 1시 40분 경 제 연구실로 와서,
오늘 저녁은 춘천 [김 감독님의 공향이요 6.25 남침을 막아 조국을 살린 애국의 동네라 거절하지 못하고] 교역자회 집회를 위해 떠날 터인데...
"물가로 나오라"는 찬송은 저의 1977년 미국 유학 세이트 루이스 카버난트 신학대학원에 도착에 처음 만난 인도의 변방 소수민족의 형제였던 캄 칸 탕이 자기 누이들이 부른 노래라면서 제게 들려준 이후로,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마다 전율하는 애송가인데, 아! 이 시간 이 글을 숨가쁘게 읽으며 온 몸으로 "네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에 헤맬 때 흘리던 네 눈물, 그 눈물 위해 내가 죽었노라" 감격의 눈물을 쏟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과 갈보리 채플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만 차후로 미루지요. 그분의 수 제자 중의 한 분이 수천 명으로 목회하던 1992년 4.29 폭동의 진원지인 로스앤젤레스 Downey 동네의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주 예수님의 영, 즉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는 진리를 늘 목격했지요.
정말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각성 회개 치유[히브리어 '라파'의 기본 뜻은 원상복귀, 즉 창 1-2장의 상태로 회복시킴]케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예수님 운동"으로 재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09-10-08
03: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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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a
새벽기도시간이 점점 가까와 오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임재를 언제나 강하게 맛보게 하는 이 순결한 찬송을 보다 제3시 가족들이 실감나게 공유하도록 유투브의 실제 동영상 두 개를 소개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Np8GJGZ3Vv8

http://www.youtube.com/watch?v=uP8bO7jBIao&NR=1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딤후 1:6)
09-10-08
04: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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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현
고향 춘천에서 말씀을 나누어 주시고
유투브에서 동영상을 찾아 올려 주신 교수님의
노익장(?)에 깊은 감사...
80년대 초 대학을 다니며 ...방황하며....그토록 자주 부르던 이 찬양을...
그 주님이 서신 물가에....마흔이 넘어 다시 요단의 강가에서 서서..
다시 부르는 노래가 이토록 애절한 것은 오직 주 예수님의 그 사랑...
그 은혜...

60년대 후반부터 터져 나온 '예수 운동'의 그런 순수한 열정과
그리스도 중심성을 다시 일으키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살핍니다.
과연 성령님은 예수님의 진리와 영광만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그 운동의 자료들과 무수한 싸이트들을 살피면서...
특히 그 당시 주역 중 하나인 믿는 유대인 키이쓰 그린의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를 어제 들으면서 내 마음과 삶의 전부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고 드리고 드리고 드리고픈 갈망...
그러나 하나님 나라..부흥이라는 미명아래 마귀는 오늘 우리를 교묘히
다른 무엇에 더 집중하게 하는...

더욱 깨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주 예수님만을 구하기 원합니다.
09-10-08
08:18:36
 


수영
inga님....
너무너무 감사해요...

귀한 찬양...더 깊은 묵상으로 ...
09-10-08
22: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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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ol Lee
개인적으로 Chuck Smith 목사님과 Calvary Chapel의 사역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남가주 거주 교포입니다. 혹시 추가적인 자료가 필요하시다면 최근에 출판된 Greg Laurie 목사님의 자서전 'Lost Boy'를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Greg Laurie 목사님 또한 Chuck Smith 목사님과 더불어 (따로, 또 같이) 엄청난 사역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 분의 책에 Chuck Smith 목사님에 대한 얘기와 사진들이 꽤 실려있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09-10-09
07: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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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현
참 감사한 것은 이 일에 문이 열릴 때에...
후배 세준이가 남가주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1등을 하여 상을 타러 가 있었습니다.
급히 갈보리 교회에 가라고 보냈더니...
척 스미스 목사님은 못만났고 'jesus movement'에 대한 희귀한 자료들을
구해왔습니다.
그중에 소개하신 Greg Laurie 목사님의 'Lost Boy' 디브이디가 있었습니다.
흑백화면 속에 그 당시 장면들을 보는데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 주님을 향한 풋풋한 사랑...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세례를 믿는 청춘들의
히피들의 그 감격...

다시 그런 그리스도의 계절을 갈망해 봅니다.

-부산 집회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고속열차에서
09-10-09
09: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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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감독
저희가 만든 만화 <영으로 비밀을 말함>을
영어로 번역해 보내드려야 겠네요.
혹시 교회 주소를 알면 알려 주실 수 있나요?
Chuck 목사님과 Greg 목사님 두 분 다...
09-10-09
17: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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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ollee
<Chuck Smith 목사님 주소>
Calvary Chapel of Costa Mesa
C/O Pastor Chuck Smith
3800 S. Fairview
Santa Ana, CA 92704
www. calvarychapelcostamesa.com


<Greg Laurie 목사님 주소>
Harvest Christian Fellowship
C/O Pastor Greg Laurie
6115 Arlington Ave.
Riverside, CA 92504
www.harvest.org
(Greg 목사님이 50대 초반이라고 제가 잘못 말씀드렸네요. 1952년생이시니까 57세이십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금 듣고 있는 이 추억의 명CCM 'For those tears I died'를 작사, 작곡하고 또 직접 부른
Marsha Stevens에 대한 얘기를 함께 올렸다가 내용이 너무 충격적인 것 같아 삭제하고
부탁하신 두 분 목사님 주소만 남깁니다. 혹시 다큐멘터리를 만드실 때 필요하시다면
http://en.wikipedia.org/wiki/Marsha_Stevens 를 참조하세요.
09-10-11
08:41:50
 


목선미
아틀란타입니다.
집회중 말씀 마지막에 이 부분을 언급하셨던 것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로마서 말씀을 근거로 해서요...
3월쯤 전 혼자 중얼거리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일어나면
엄청나게 늘어나는 모슬렘인들을 역전하여 밟아 이길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역전승을 거두는 만화 영화를 상상했었어요.
4월 아틀란타 연합교회에서 김종필 목사님 집회가 있었는데
그때 이스라엘 민족중 1880년 헝거리 유대인 메시아주 인정.
미국 유대인 현재 5만-10만명 예수영접,미국에 있는 회당이 120개 있고

이사야 60;8 돌아오는 유대인 (알리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등등 제 노트메모입니다.

그때 제가 중얼거린 궁금증의 해답을 해주심에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 말씀 들으며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감독님 집회 때처럼...

지식이 없어 망하다
항상 이 곳에 와서 충만한 은혜를 한아름 안고 가는 어리석은 백성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올 7월 말일경 새벽기도 때....위 아브라함에 관련된 기도를 방언으로 하고 있었지요.
그 때는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을 뜬금없이 왜 내가 기도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다가 그냥 흘려버렸지요...더구나 우리교회와 연관되어 나오는 기도는 제 좁은 소견으로
이해도 안되었네요...그런데 오늘 여기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보게 되네요.
교회와 관련도 되어지구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무지해서 갈 바를 몰라 헤매는 어리석은 백성에게
늘 마땅히 나아갈 바를 나누어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더 기도할 수 있게해 주심을......
09-10-13
12: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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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은혜는 되지만 모든 내용에 동감할 수 없어서 의문으로 겸손히 질문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성이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버려질 것이라 했다.
그 수가 차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67년 그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방인의 수가 찬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지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끝이 온다고 하지 않으셨고,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는데, 과연 이스라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나요, 아니면 온세상에 전파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나요? 물론 이스라엘이 제일 마지막으로 회복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순서상에서 최후에 이스라엘에 집중해야겠지만 그것 또한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의 중요성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가진 지혜도 한계가 있고, 여러 주장들도 나름 설득력이 있고 혼란스럽네요.

성령님이 참 많이 말씀해 주시는데 왜 이 부분에서는 제게 침묵하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
09-10-16
05: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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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11:25-27

이 말씀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울이 우리가 꼭 알기를 바란 하나님의 비밀은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 완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이방인의 때...그 수가 차간다는 의미지요.
또한 이방인의 수가 찰 때에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것이기도 하구요...
성경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방인의 회복을 동시에 말합니다.
이 둘은 분린된 개념이 아니라 매우 깊은 연관성을 가진 비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인의 수가 차는 것에만 거의 집중 해왔습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선교의 대상으로서 열방으로만 본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성경의 언약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둘은 매우 상관성을 가지고 있고 ...이스라엘이 일어나 빛을 발할 때에
열왕과 열방이 주 앞에 나옵니다.(사60)
우리가 이스라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그 언약...의의 방법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위에 서야만 진정한 회복과 결실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선교적 관점...이해의 문제가 아니라...진정한 열방의 회복은
성경적인 언약의 반석위에 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동안 이스라엘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열방이 회복되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께서 다른 한 부분...
그 중요한 언약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렇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부족했던 부분을 강조하여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방인의 수가 차는 그 선교적 열망이나 추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한 언약입니다.
이 두 언약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추수가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것은 육적인 부분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회복이지요.
주님은 그것을 보거든 머리를 들라고 했습니다.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수가 차는 것의....마지막 회복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아직 이방인의 그 수는 다 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화과만이 아니라...감람나무로서의 이스라엘...
그들이 진정으로 회복되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그 땅의 회복과 그들이 그곳에 돌아가는 것...
그리고 주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는 그 역사가 이루어 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서진(西進)하고 가서 마지막에 이루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열방의 회복과 동시에 더욱 집중해야 할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을 나눈다고 우리가 열방의 회복에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한 것이지요.
누구보다 열심히 그 일을 구하고 순종하려 합니다.
솔직히 이 기름부음도 일본과 한국, 북한을 향해 작은 충성을 다하는 여정에서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은 각자 각자입니다.
그 언약을 나누는 것이지만....모두가 이스라엘에 가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언약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은 모든 제자들의 책임입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 곧 저희가 <약속의 땅>이라는 책을 나눌 것입니다.
그것을 구입해서 읽으시면 그 언약에 대해 지평이 넓혀질 것입니다.
09-10-16
08: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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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2,3

이 말씀은 저를 사역의 길로 인도하실 때 주님이 주셨던 약속의 말씀인데요.
그 의미는 계속해서 조금씩 열리는 것 같습니다.
접붙임을 통해 부어진 아브라함의 복을 저에게 약속하신 것이군요.
주님이 제 인생의 고비 때마다 주셨던 말씀들을
감독님이 깊이깊이 파주시니 참 이상하고 신기합니다.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은혜의 깊이를 더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Your love loosed my chains and in you I am free. But Jesus why me?
09-11-05
14: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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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
어제 아는 동생과 같이 얘기를 하다가, 루이 기글리오 목사님의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1:14에 나오는 단어 "AND" 를 두고 말씀 하셨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이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거대하며 아름다운지 우리 모두 다 알지 않냐고,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AND"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셨고 또 계속 임하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것을 나누며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i can only imag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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