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주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 오셨을 때에,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그 머리 위에 임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고 복음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마3:17
이것이 그 음성이다. 2004년 봄, 뒤늦게 성령님을 만난 후에 이 말씀은 내게도 가장 강력한 기름부음이 되었다. "이것이...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이 음성을 듣는 것이..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구나!" 진리의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열어 주신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경이와 축복이었다. 주변과 책들을 살펴 보니 아무도 이것을 성령세례의 가장 본질적 의미로 취하는 이가 없는 듯 하였다. 나홀로 내밀하고 오롯한 기쁨 속에서 이 기름부음을 구하고 구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 그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쓰고 나아가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의'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이 아버지의 음성은 어떤 의미일까? 주님께서 그 공생애를 그렇게 치열하고 강하게 걸어 가실 수 있는 근원적 에너지가 바로 이 음성이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걸어 갈 모든 길의 모범이요 형상이다. 그를 믿고 따르를 제자들은 그 삶의 자취와 형상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르심'이다. 하늘 문이 열렸을 때, 주님이 들으신 그 음성은 그 길위에 서는 모든 이들이 들어야 할 아버지의 사랑이요 전략, 능력의 원천이다. 이것은 진정이다. 과장이 아니라 그 안에 그것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장 하나 하나도 엄청난 것이다. 성령님의 가장 주되고 중요한 사역이 이것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됨이니 롬5:5
성령님을 사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갈망하는 이들도 이것을 깊이 주목하지 않았다. 성령의 기름부음 중 가장 크고 강력한 것은 단연코 그 '사랑'을 부어 주심이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좋은 은사를 제시한다며 사랑을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그 은사를 간절히 구하지 않는다. 다른 표피적인, 자극적인 무엇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래서 요단의 그 강가에서 성령님이 임하시자 그 사랑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을 소유하셨기에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이 사랑을 깊이 체득한 바울은 참으로 확신에 차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아아...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바울의 승리의 근원을 만졌다. 이 선배들은 우리와 이토록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겼던 것이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으며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 다"(요일4:18)고 요한이 증거했다. 온전한 사랑이 부어지면 흑암의 공격과 조장하는 두려움과 장벽들을 부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으리라 롬8:37-39
바울은 이렇게 이어서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했지만, 바울은 자신들의 길이 만사형통이 아니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았다"(롬8:36)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이기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 많은 이들이 성령의 은사나 기름부음을 무슨 축복과 행복의 만능카드로 생각하는 그것 과는 사뭇 다른 길이었다. 성령세례를 받으신 우리 삶의 모범이신 주님의 길도 마찬가지다.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부터 모든 여정을 시작하셨고 이기셨다. 성령님은 요단강가에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을 광야로 사망의 그늘에 앉은 흑암의 땅으로 내모셨다. 남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와 그 땅 끝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이 은사와 능력과 내 삶과 사역을 잘 되게하는 어떤 필요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power)을 주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광의 길'로 우릴 이끄심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 길은 당연히 진리의 본질적 소산인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다. 십자가는 추성적인 길이 아니다. 피처럼 선명한 삶의 실제다. 예수님의 형상은 고난과 핍박과 오래참음으로 마침내 십자가에 도달하는 여정이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이 길을 체득하고 거기 서야만 한다. 그것을 위한 투쟁을 해야만 한다. 이 예수님의 형상을 생애 속에 담고자 하는 이...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기고 즐겁게 가는 힘이 부여 되는데.. 바로 그 능력이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이다.
주께서 의(義)를 사랑하시고 불법(불의)를 미워 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 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히1:9
히브리서 기자는 이 본질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나사렛에서 요단의 강까지 걸어 오셔서 세례를 청하며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니라"(마3:16)하신 주님은 그 때만이 아니라 평생을 그 나라와 의만을 구하셨다. 그 의(義)를 사랑하신 주님께 그 사랑,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주신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주님처럼 오직,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들에게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온전히 임하시어(세례) 그 사랑을 기름부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임하면 우리는 쉽게 낙담하거나 지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이 곤고하고 재미었는 세상을 희열로서 걸어가는 열정이 솟는 것이다. 그 원천(源川)이 곧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 음성이다. 나는 예수님의 길들을 탐구하면서 너무 소유하고 싶은 풍경들이 있었다. 그 중에 주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구하지 않고 환경을 의식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엄청난 능력과 역사로 수많은 이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변화 시키신 후에, 그들이 왕으로 구세주로 삼으려고 몰려 와도 주님은 '한적한 광야'로 가신다. 열광하며 마주 달려오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로 가시는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통렬한 쾌감이 느껴진다. 세상에서 만나기 힘든 풍경이다. 그리고 외딴 빈들에서 홀로 기도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분의 얼굴만을 구한다(마4:10)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과 언약만을 집중하며 섬긴다. 이것은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만 하신 멘트가 아니다. 주님의 생을 깊이 살피라. 그러면 광야 길을 가는 온 생애를 걸쳐 오직 그렇게 사신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오늘 우리의 곤고와 낙담과 무기력은 사람과 환경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창조하시고 죽함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적이 없는 정오에 황막한 광야의 우물가에서 상종해서는 안되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혼신을 다해 그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집중하고 애쓰신다. 아무도, 들판의 새조차 보아 주지도 알아 주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사람과 세상을 의식하는 프로젝트와 사역을 꿈꾸는 이라면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그런 존재를 대하면 눈살을 찌푸리며 피했을 것이다. 수많은 남자를 거쳐간, 손가락질 받을 그 메마른 영혼의 진정한 남편..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고자 애쓰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 너무나 닮고 싶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6:56
오병이어와 기적들.. 그 표적으로 따라 오는 이들을 피하시며 주님은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 말씀 하셨다. 광야에서 행하신 그 표적안에 담긴 진정성을 보라는 것이다. 그 안에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그 사랑... 언약을 살피라는 것이다. 생명의 떡, 진정한 생수인 주님을 발견하고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그저 주님에게서 얻을 영적인 축복과 은혜만이 아님을 잠잠히 깨달았다.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분의 본질적 형상을 닮는 것이며 예수님이 먹고 마신 그 양식인...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르는 그것이니라 요4:34
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입맞추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본질이시다. 그 삶을 양식으로 삼아 그렇게 '십자가와 보혈'을 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는 삶을 포함한다고 깨달았다. 그 그리스도의 본질적 삶을 양식으로 삼아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 표적을 보고 따라오던 수많은 무리들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6:66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 믿고 얻어지는 기적과 유익과 평안과 안식을 위해 따르던 그 많은 제자들이... "진정으로 나처럼 십자가를 지고 그 나라와 의를 이루라"라고 하시자, 다 떠나간 것이다. 그렇게 겨우 12제자만 남은 상태인데... 예수님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절묘한 풍경이다. 그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6:67)고 물으신다. 참으로 이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죄인된 자리에 서셨다.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아 가는 목자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사람을 조종하거나 그들의 인기, 필요를 구하지 않으신다. 치열하게 사랑하시지만 사람의 것들을 구하지 않으신다. 그 인기(人氣)에 영합하지 않는다. 그 평온함..그 깊은 자유함,...만족의 충일함... 그것은 어디서 부터 나오는 것일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예수님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진정코 이 사랑의 기름부음이 그 깊은 자유와 안식에 서게 했다고 믿는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너무나 절실하다. 이 기름부음.... 바울이 단언하듯 이 사랑이 부어지면 세상 풍파와 규모와 요구에 흔들리지 않는다. 단 한 영혼에게서 천하 보다 귀한 본질을 본다. 그러면 낙담하지 않고 외적인 것들로 허덕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헌신과 열정들 뒤에 도사린 이 공허와 절망들은 그 사랑의 부재에 있다. 2006년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라는 말씀을 성령님이 내게 열어 주신 적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 했을 때에, 특이하게도 그 말씀을 선명히 손에 쥐어 주셨다. 그것을 영으로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하늘로 솟구쳤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정말 한순간에 다윗처럼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내 영혼은 천지를 창조하신, 만물을 주관하시는 '대주제'(大主帝)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안에 사심을 누리게 되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게 되자 그것은 엄청난 능력이 되었다. 오직 그분만 집중하고 하늘에 두신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두려는 갈망이 솟았다. 주님처럼 그 크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내 안에 부어진 것이다. 그러자 세상이 두렵지 않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구속한 주'만 구하고 보는 나를 발견했다. 바람 부는 언덕, 좁은 길을 홀로 걸어도 외롭지 않고 공허하지가 않았다. 그것은 엄청난 자유이고 힘이었다. 후에 초대교회의 기름부음을 탐구하면서 나는 이런 말씀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시요 행4:24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이킨 것으로 예루살렘에 엄청난 소동과 격변이 일어났다(행3.4장) 그 일로 두제자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지만, 또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이미 예언하였다. 작은 비자(卑者) 앞에서도 세번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공회에서 채찍(살이 파이고 찢기는)에 맞고 심문을 당하는 그 핍박 앞에서도 담대히 그 이름을 증거한다. 이것이 성령의 세례, 기름부음 받은 자의 변화다. 결국 풀려나서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에게 그 일을 간증하자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천지의 대주재여(大主帝)!"하고 외친 것이다. 이 고백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본질적 선언이다. 나는 이것이 초대교회에 성령께서 부어 주신 진정한 '새방언'이라 믿는다. 그들은 이어서 이렇게 기도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행4:25,26
이 제자들의 선포는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도문 중 하나라고 한다. 이것은 시편2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사실, 요단강가에서 성령께서 예수님께 들려주신 그 음성은 바로 이 시편2편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8.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마3:17
짧은 하나나의 문장으로 된 이 음성은 간단치가 않은 것이다. 사실, 여기에 창세기 부터 마지막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와 그 언약적 부르심, 승리의 전략이 다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구조나 주제가 매우 일관되고 놀라운 통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태초의 에덴에서 아담을 부르시고 명령하신 그 신령한 축복이 이 안에 들어 있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 여호수아, 다윗, 무수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이스라엘을 향한 이 언약의 주제는 변함이 없으셨다. 진리의 성령님은 신,구약을 관통하며 그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을 부어 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것이다. 요단강의 그 세례터에서 거친 맨발을 담그며 나는 다시 그 음성을 생각하였다. 이제 그의 '몸 된'우리가 이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토록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바라 보았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이 사랑... 우리를 향한 이 아버지의 박찬 사랑의 음성... '성령님 더욱 열어 주세요...이 하늘 사랑과 마음의 본질을... 아직도 가려진 내 눈의 수건을 벗겨서...그것을 보게 하여 주세요. 누리게 해 주세요..' 나는 그 물 속에서 그렇게 기도하였다. 그러자 정말 바람이 임의로 불듯 그 여행의 시간 동안과 그 후에 더욱 이 말씀의 깊이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전에 알던 것보다 더욱 깊게 들어간 새로운 기름부음이었다. 나는 이 아버지가 들려준 한 문장에 담긴 '언약의 대서사시'를 성령님의 가이드로 탐구하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을 쓸 만큼 그것은 엄청나고 방대한 것으로 내게 열려 갔다. 아버지가 요단강가에서 들려 주신 그 음성... 비록 성경에 기록된 것은 단 한 문장에 불과 하지만 이것은 놀랍게도 구약의 전반, 특히 시편과 이사야의 본질들을 깊이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두개의 언약으로 나누어 지는데... 구체적으로는 앞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는 시편 2편의 메시아적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뒷부분의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는 이사야 42장의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는 말씀이다. 그 말씀들을 탐구해야 이 음성의 깊이를 더 누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 하나에만 그 후부터 거의 몇 주를 붙들려 있어야 했다. 그만큼 그 말씀의 의미는 깊고 넓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다 글로 옮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이해를 중심으로 나누기로 고민 끝에 마음 먹었다.
내가 명령을 전하노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7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의 본질을 그 때 주님께 들려 주신 것이다. 이 시편2편은 시온에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향해 부어진 성령의 의탁된 음성이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이 시편2편과 110편의 메시아적 예언을 깊이 주목하고 있었다. 요단의 강가에서 주님께 들려진 그 음성과 '멜기세덱'에 대한 이해들을 그들은 탐구했다. 그것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성취를 선포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온전한 언약적 증인은 다윗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의 씨, 그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 그는 또한 "내 마음에 합한 자"(삼상13:14)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참으로 부럽고 부럽고 또 부러운 사람이다. 나의 생애를 걸고 가장 듣고 싶은 말이 그것이다. 아버지로 부터...주님으로 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합한.. 기뻐하는 우현이로구나.." 아아... 이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너무나 사모하게 되었다. 참으로 구약에서 그런 복된 사랑의 칭호를 받은 이는 다윗이다. 그것이 시편2편에서 예언적으로 예수님의 향한 묵시(默示)가 되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2:7
'내가 너를 낳았다는 것'은 바로 '기름부음'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 가운데 들어 갔다는 것이다. 시편2편은 그것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2:2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기도문이었던 이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마시아흐, 메시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구약에서는 너무나 드문 용어로서 '아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오늘 너를 낳았다"(시2:7)고 선언한다. 초대교회에서 이 '오늘'은 바로 예수님이 요단 강가에서 받으신 '세례사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그 '오늘'이 다시 적용된다(마17:5, 막9:7 눅9:35). 이 음성이 들리는 두가지 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모든 의'를 이르시고자 하는 드림 위에 들려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이랴와 더불어 '별세'(別世)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들렸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과 별세는 같은 본질이다. 후에 더 다루겠지만, '어린 양'으로 세상의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이다. 그 '유월절의 어린 양' 되심으로 진정한 별세, 헬라어로 '엑소도스'(exodos)를 이룬다. 그것은 '탈출'과 '돌파'와 '해방'을 이루는 '희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의 삶을 향해 그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그 사랑하는 자녀가 되는 '오늘'의 비밀이 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의'룰 구하는 이에게 이것이 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앞으로 기회가 되면 더욱 깊이 탐구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방대한 주제이므로 거기에 집중하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기에...)
'여기에 비밀이 있었구나! 아버지의 그 음성은 십자가의 길에 있다' 나는 당연한 진리를 영혼으로 전율하며 새롭게 감지하였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과 마음, 언약을 알고 예수님처럼 세상의 화목제물이 되고자 하는 그 삶을 아버지는 사랑하신다. 그런 갈망을 가진 이들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으신다. 거기에 진정한 성령세례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편2편을 통해서 다윗에게 동일한 그 칭호와 언약을 주셨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네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사55:3,4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를 향한 만민의 증인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믿는 만민의 영혼을 살리는 인도자와 명령자가 되었다. 나는 이 말씀을 발견하고 다윗의 그 삶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전에 알던 지식들이 놀라운 기름부음이 되어 내게 부어졌다. '정말 다윗은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고 그 사랑을 받는 자녀의 조건이구나.' 그 과정에서 그런 감탄을 여러차례 했다. 다윗을 연구하다가 이 이 요단강의 그 사랑의 음성이 시편 외에도 이미 구체적으로 묵시(默示)로 들려졌음을 알았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그 음성은 이미 다우시에게 언약으로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짓고자 하는 다윗을 축복하며 그의 자손, 그의 '씨'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그 기초, 그 왕을 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신다. 혹자는 그가 솔로몬이라 생각할테지만 그는 영원한 기초를 세우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대(代)에서 이스라엘은 분열하여 무너진다. 그 '다윗의 씨'에게 하나님이 부르는 칭호는 이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삼하7:14
이것은 얼마나 담대한 약속인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이런 칭호는 상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는 그들에게 '아버지', '아들'이라는 이 놀라운 약속을 하심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예언한 것이다. 이 말씀은 나단 선지자에게 이상 중에 들려 주신 것이다. 나단은 그것을 다윗에게 전한다. 이런 약속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다윗은 그 때에 블레셋에서 되찾아 온 언약궤를 영원히 예루살렘에 안치하려 한다. 자신은 백향목의 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천막의 휘장 뒤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화려한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한 하나님께서 어느 작은 공간에 고정적으로 갇히 실리가 없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한 이후 부터 고정된 집이 아니라 항상 그들의 성막안 거하시며 옮길 때 마다 움직이셨다(대상17:5)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다윗의 그 마음을 받아 스스로 제한 되시고자 하신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삼하7:3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임마누엘'을 선포하신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었다'(삼하7:9)하시며 다윗을 축복하시고, 그 몸에서 날 '씨'가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거축하겠느냐?"(삼하7:5)라고 반문하신 하나님은 오히려 "내가(여호와)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몸에서 날 씨를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7:11,12)하신다. 나는 이것을 읽으며 몹시 부럽고 놀랐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애정과 사랑은 놀랍기만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영원한 그의 '집'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축복을 받는 자가 그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왜 이토록 다윗에게 깊은 축복을 더하시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사랑하는 아들들의 본질이 담겨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누구도 따라 올수 없는 사랑과 경외를 가졌는데, 그것은 언약을 지키고 이루려는 열심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이것을 깊이 주목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 가운데 여전히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의 모든 지경을 정복하라는 것은 모세에게 주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부여하신 것이었다.(창12장, 17장) 나는 이 언약을 탐구하다가 놀라운 구절을 대하였다. 모세가 언약을 받으러 시내산에 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신으로 만들어 숭배하고 만다. 이미 이들은 "하나님을 비겨서 은이나 금으로도, 그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20:23)는 강력한 경고를 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은 차지 못하고 우상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하시며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에게 더 큰 나라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모세가 그 하나님을 향하여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출32:13
모세는 담대하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언약을 하나님께 다시 상기시킨다. 그렇게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라는 것이다. 참으로 이런 무모한 사람은 흔치 않으리라. 그런데 나는 더욱 놀라운 구절을 대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32:14
아아...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게 하는 이런 것은 어떤 힘인가?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구하고 붙드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 언약에 스스로 제한을 받으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놀라운 칭호로 불러 주신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 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출33:11
이 문장은 얼마나 가슴벅찬 것인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그 음성의 구약판인것이다. 이것을 읽다가 거의 통곡하며 울 뻔 하였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친구처럼 대면하여 그렇게 친밀히 교제할 수 있는... 그런 영혼이기를 너무나 사모한다. 어떻게 모세는 그런 사랑의 임재 가운데 들어 갔는가? '여기서 친구처럼 대면하여'라는 히브리적 표현에 그 답이 있다. 그것은 '언약을 이루는 관계'라는 의미다. 서로의 언약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그런 사이... 그것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라 불리우는 진정한 조건이다. 진정 하나님의 그 신부로서 친밀함을 사모하는 이들은 언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만민의 증인이 된 다윗이야 말로 이 하나님의 언약에 목숨을 건 사람이다. 다윗은 조상들에게 주신 이 언약을 깊이 주목한 것이다. 아브라함 이후 모세, 여호수아를 통해 맹세하신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온전히 정복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숙원이었다. 그러나 다윗 당시에 단 한 지역만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 땅은 예루살렘, 즉 당시 여부스 족속이 지배하던 영토만 남은 것이다. 여부스의 성(城)은 너무나 강했고 오히려 다윗의 군대를 절름발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그것을 두려워 하여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이루지 못했다. 사사시대 400년동안에도 그 성을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다. 사울도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 그 언약은 이스라엘에게서 잊어 버린듯 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는 것에 그냥 있지 못했다. 그것이 진정한 기름부음이다. 그는 이미 소년이었을 때에 블레셋의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의 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군대들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사로서 그저 대치만 하고 있는 중에 그는 단신으로 골리앗을 무너 뜨리러 나간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17:45
나는 이 말씀을 찾아 읽다가 약간의 전율을 다시 느꼈는데 그것은 어린 다윗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모세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그가 정확히 알고 있음을 증명한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치기로 있던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시려 한다. (다윗도 양치기였음을 생각하라) 그 때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무엇이라 대답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3:13-15
베들레헴 광야에서 양을 치던 소년 다윗은 이 언약을 명확히 기억하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언약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 작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치는 그 강력한 역사는 이 언약을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 위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에게 임마누엘로 임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훼손을 당하고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여호와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에 대한 다윗의 의분(義憤)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다. 그와 함께 '권능의 팔'로서 동행하신 것이다. 그런 다윗에게 가나안의 모든 지경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 마음.. 사실 하나님은 그것을 다윗에게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가 그것에 대한 갈망을 스스로 가진 것이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주어진 사역이나 환경.. 이루고자 하는 비전과 관심의 영역을 넘어서, 아버지가 언약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뜻들에 대하여 가슴이 불타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들이 진정한 '증인'들이다. 비록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여부스의 성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어코 정복하고 만다. 그것이 '예루살렘 성(城)'이며 후에 이스라엘과 세계의 언약적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을 정복하여 '다윗성'이라 이름 붙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강성하게 하셨지만 그에겐 여전한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이요 상징인 '성막'과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있지 못한 것이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긴 후에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시편132편은 다윗이 "그 성막과 언약궤를 발견하기 까지 침상에서 잠도 자지 않고 눈꺼풀로 잠들게 하지 않을 것이라 "(시132:2-5)고 말한다. 이런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성막과 언약궤를 찾기 위해 베들레헴 에브라타등 당시 적지인 블레셋의 점령지까지 샅샅히 뒤지며 찾았다. 오늘에도 이처럼 하나님의 회복되지 않은 언약을 찾아 나서는 이들을 아버지는 기뻐하신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언약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주님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그 유언 같은 약속과 명령...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인 '성령세례'를 받으라(행1:4,5) 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그것을 담지하고자 하는 그릇들... 그들을 오늘도 아버지는 찾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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