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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 서다(2)

은바리라이프 2010. 1. 7. 22:38

그 길 위에 서다(2)

4.


<우리를 호위해 준 이스라엘 군인들>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으로 호위하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에 요단강이 손에 잡힐듯 다가 온다.
건너편에 요르단의 군인들이 역시 총으로 무장한 채 약간 놀란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저기 예전에 있었던 기념 교회 터며 세례를 위한 나무로 만든
구조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이스라엘 여군이 군용 짚에서 내려 조심스레 앞을 경계하며 인도했다.
그녀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에 작은 강이 나타났다.
드디어 요단강이다.
오랜 가뭄으로 상상보다도 훨씬 그 강폭은 작았지만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이곳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곳인 것이다.

여리고에 인접한 요단은 세상에서 가장 낮게 흐르는 강이다.
세상의 해수면(海水面)보다 무려 4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낮고 낮은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상징이다.
내가 이토록 다른 무수한 성지들 보다 이 장소를 와보고 싶어한 것은
여기서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이 그 위에 강림하시자
그 하나님 나라의 여정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그 여정은 우리를 위한 모델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8:29


<건너편 요르단 국경 안의 세례 기념교회가 보인다>


뒤늦게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행1:8)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인가를 구했었다.
거의 날마다, 하루에도 수십번을 구했었다.
성령님이 내게 오시고 그 능력을 부어 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 증인으로 사는
삶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 열어 주신 말씀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아아...이것이 나의 증인 됨...부르심이구나!
이 놀랍고 엄청난 삶을 위해 나를 부르셨구나!'
내 안에 이런 감격과 전율이 절로 솟아났다.
그전에 추상적으로 읽혀지던 그것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만져지는 것이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토록 엄청나다.
'망하게 하는 자'인 마귀가 우리의 눈을 가리워서 보지 못할 뿐,
우리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그 걸어 가신 길과 삶을 닮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본(本)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과연 우리가 성령님을 '진리의 영'으로서 사모하여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그전에 그저 문자로서 읽혀지던 이 말씀들이 내 영안에서 환히 반응하게 된 것이다.
나의 부르심은 이제 명확하여 졌다.
이제 더 이상 그것으로의 고민은 사라졌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하여,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그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내게 능력의 기름부음이던지!
예수님을 닮아 그 가신 자취, 그 본질적 형상에 이르기를 힘쓰며 사는 것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단 한가지...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형상을 내 안에..내 삶에 채우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나며 흥분되는 천국의 삶인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을 찾아서
늘 허덕이는 것은 아닌지요?"
그후 나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고민하는 무수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예 나 자신부터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들의 시초부터 다 닯고자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베들헤헴의 탄생부터 마지막까지 그 가신 길들을 말씀 속에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작된 공생애의 여정을 깊이 주목하며 살폈다.
그것에서 내 공생애의 길들을 조망(照望) 받고자 함이다.
주님이 사신 그 천국의 본질을 나도 닮고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단강에 인접해 있는 요르단 평원>

2006년 즈음의 일이다.
그것이 나의 작은 부흥의 시작이었다.
진리의 성령님께 지도를 구하며 가던 길에서 나는 그전에 보지 못했던,
전율하도록 깊고 치열하며 아름다운 예수님의 진실과 풍경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이 삶을 갈구하였다.
'그리스도의 풍경'....
세상의 가장 남루하고 버려지고 절망의 극한에 이른 그 삶들 속에서 식사를 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풍경...
그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익명'(匿名)의 그리스도...
나는 사무치도록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주님이 숨어 계신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25:40)들을 찾아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
길섶에서.. 뒷골목에서.. 지하철과 벼랑끝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서고 싶었다.
죄인이요 세례와 같이 친구들을 내 작은 카메라로 사귀고 삶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길을 가고 갈수록 보이는 것은 내 안의 '허위'(虛僞)였다.
멀리 멀리 갔다가 지치고 공허하여진 아이처럼  서러움으로 주님을 구할 때에
예기치도 않은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다.
'위로의 영(靈)'...
그분이 오시자 내 안에 어둠과 기갈과 허무가 사라졌다.
그것이 진정한 '복역(僕役)의 때'를 끝내는 보혜사의 위로였다.
2004년 봄 날의 일이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

이 글을 쓰는 도중 이 말씀을 발견하였다.
주님의 길 위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해산(解産)의 수고...그 진통...그 애통(愛痛)이 요구된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와 그 헌신이 있어야 만져지는 길이다.
주께서 그렇게 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힘겨움이 있더라도 이제 다시는 이 영광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으리라.
붉은 황혼을 마주한 선지자처럼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그 역정(歷程)들을 말씀 속에서 찾고 찾으며 나아갔다.
그런 여정 가운데서 다다른 공생애를 열어 준 그 장소...
이 요단강의 세례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오랫동안 집착하여 떠나지 못했다.
아니,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여 주셨다.
'주님을 닮는 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길과 본질을 뒤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열으신 그 공생애의 조건....그것이 내 안에 있어야
나도 진정으로 그 시작을 살 수 있으리라'
'공생애의 조건'....
잠잠한 생각 속에 튀어나온 그 말이 거대한 저작(著作)의 주제처럼 온통 나를 사로잡았다.
공생애(公生涯)....
나즈막히 이 단어를 읊조리는데 내 심장에 붉은 피처럼 선연히 스며오는
말씀이 하나 있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후5:14)라고 선언한 후에
이 삶을 말하고 있다.
공생애란, 주님이 그렇게 사셨듯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온 생(生)을 다 드려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처럼, 그 사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처음 창조처럼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게 내 심비(心碑)에
'불의 정(鋌)'으로서 새겨진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부여하신 그 공생에를 살리라!'
압도하는 영처럼 그것이 내 안에 부어졌다.
오직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위하여 사신 주님의 그 사랑의 강권함이 내 안에 출렁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사랑이 임하자 내 안에 깊은 회개가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영혼의 자책이 일어난 것이다.
그 전에는 그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추구하고 치달으면 된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을 열망이나 욕구를, 공허한 무엇을 메꾸기 위한,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추구는 아닌가?' 하는 자문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과 진리앞에서 철저히 살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저 막연히 가다가 이 길 끝에서 겨우 그것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언젠가 당연히 설 주님 앞에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하여 추구한 것이다."하는 음성을
듣는다면...
골수까지 파고드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 때, 이 찬양들이 내 안에서 날마다 솟구쳐 나왔다.
'헛된 마음'....
'정결치 않은 영'...
만일 이것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을 진리와 보혈로서, 불로서 다스려 달라고
성령님께 날마다 구하고 또 구했다.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 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혼자 숲속이며 한 줌 햇살과 작은 새들 밖에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진 빈터를 찾아
얼마나 이 찬양을 부르며 울고 울었는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숨어 있던 자아의 것들...허망함과 비진리들이... 툭툭 튀어 나오던지...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그 회개의 과정을 통해 성령님은 나를 서서히 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층 맑아진 영혼으로 정말 예수님을 닮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신 것이다.
아니, 내 영혼이 비워지자 눈이 열리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基業)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威力)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

추상적으로만 읽히던 이 말씀이 손에 잡히듯 너무나 실제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예 바울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 지게 하기 위하여 드린
이 간구를 내 기도로 차용하였다.
역시 날마다 그것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그분을 따른 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엄청난 유업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위력'(威力)만이 아니라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본향의 풍경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지문처럼 내 안에 새겨지기까지 나는 기도했다.
나는 그 삶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
마귀는 이 축복과 안목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다.
에덴의 그 사람들이 창조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시고
부어 주신 그 생기(生氣)...생육과 번성의 신령한 부요, 그 복을 상실하게 하여
'가난한 자'로 만든, 그 마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의 부르심의 축복과 영광의 언약을 상실하게 하여
패망의 골짜기로 이끌어 간 그 망하게 하는자...
그 간교한 세력들이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눈을 가리어,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허덕이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위한 도움의 수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런 줄도 모르고 가게 하였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그 열심과 그것의 짜릿한 축복을 상실한 것이다.
나는 결코 그 하늘의 부르심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던 중 이 '공생애'(公生涯)란 말을 한자로 찾다가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그 '애'(涯)자가 '물가 애'자라는 것이다.
"물가에서 시작 되는 하늘의 삶..!!"
마치 주님의 그 길을 위하여 조성된 문자인양 그것이 다가왔다.

물가로 나오너라
내 곁에 서라
네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에 헤맬때 흘리던 네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20대 초 이리저리 휘청이다가 다시 주 앞에 와서 부르던 그 노래...
그 물가...그 사랑...
아아...나는 그 주님이 서신 물가를 그리워 한 것이다.
그 갈릴리와 그 지류인 이 요단이 너무나 보고 싶어진 것이다.
요단강의 그 세례로 부터 예수님의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고후4:4)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 작은 문자 하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후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을 흐르는 이 작은 요단강...
그 세례터를 ...그 물가를 그리워 하고 서기를 너무나도 꿈꾼 것이다.




5.


<그토록 그리던 요단강에 발을 담근채..>

드디어 신을 벗고 요단강에 첫 발을 내디디었다.
언덕 위에서 총을 가슴에 품듯 움켜진 이스라엘의 여군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황토처럼 탁한 그 물에 맨발을 넣는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시력을 잃을것만 같은 강한 햇빛 때문인가?
순간 눈이 뜨거워지고 그 속에 물기가 서림을 느낄수가 있었다.
비록 가뭄으로 작아지고 좁아 졌지만 내 사랑하는 주님이 이곳에 서셨었다.
그 이유만으로 감격이 솟은 것이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 때 갈릴리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하셨다(마3:13).
그 길은 지금 차로도 한 참을 가야할 먼 길이다.
당시 수많은 무리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으므로 나사렛의 목수인
예수님이 그렇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선 것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주님을 알아 보았다.
성령께서 증거하신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면 어떻게
당황하여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3:15

그 때, 주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당시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씻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엔 더럽혀진 것들을 씻는 '정결례'(淨潔禮)가 있었다.
요한의 불같은 심판의 메세지에 회개한 많은 이들이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죄인들이 받을 세례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시려 하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님은 남들이 스쳐 지나갈 이 부분을 자꾸 바라보게 하셨다.
'모든 의(義)를 이루기에 합당함...'
예수님의 공생애에 첫 말씀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의 삶과 그 형상을 치밀하게 닮고자 하는 내게 이것은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것을 깊이 알고 싶었다.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의 의미를 열어 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씀에 의지하여 자꾸만 구하였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나는 성령님에 대한 이 말씀을 깊이 사랑하였다.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 말씀의 본질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 깨달음은 내게 혁명이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아이처럼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작은 영역도 일부러 성령님께 구하려고 하였다.
주변을 보니 나처럼 구하는 이들이 너무나 적음에 놀랐다.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여 순종치 않음이다.
그것이 우리를 풍요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정말 '의'(義)대하여 가르쳐 주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린 그 깊이와 본질은 엄청나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또한 '주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소유하신 가장 본질적인 천국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늘 주님의 형상을 조명하신다.
또한 성령님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증거하신다(요16:8)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 영적 습관,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걸어가신 걸음 하나 하나가 하늘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나는 오랫동안 이 요단강가에 서신 주님의 얼굴을
말씀으로 뵈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1,22

예수님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그 의....
그것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나게 하는 그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였다.
'모든 의'에 대한 많은 깨달음 중에 먼저 나의 마음을 두드린 것은 이 말씀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젊은 시절 천착하던 로마서를 다시 깊이 읽게 되었다.
이 '의'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는 바울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래 모든 사람이 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그 길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그 '구원의 길이며 하늘의 방도, 대책'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다.
죄인된 우리지만 무한 무한히 사랑하신다.
그리하여 그 영광이 임재와 사랑 가운데 들어 오기를 너무나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속성은 또한 '공의'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죄악을 가지고는 그 사랑과 영광에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다.
사랑할지라도 그 공의라는 진리의 속성을 위배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모든 것을 어그러지고 질서는 파괴될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하나님의 선(善)'은 그분의 본질적 속성과 길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공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이다.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즉 불변하는 언약적 사랑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인자'와 '긍휼', '은총', '사랑'이시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모든 속성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에 오직 아버지의 그 선하심과 뜻만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갈망이 나타난다.
요단강의 그 세례는 그저 유대인의 결례를 따르는 요식행위가 아니다.
그 주님의 공생애의 조건, 하나님의 아들이 가야하는 길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직 아버지의 뜻, 그 길, 언약이라는 선(善)에 온 생애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생애(公生涯)다.
이 예수님을 깊이 영의 눈으로 보아야 나도 그 형상을 닮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도 아버지의 그 사랑 가운데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그 공의를 충족시켜 하늘 문을 열 방도를 준비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롬3:24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바로 그 장소..>

아아...
나는 참으로 오랫만이 이 요단강의 풍경 속에서 복음의 본질로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알아 오던 이 진리가 강렬한 불이 되어 내 심령을 살랐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루시려는 그 의....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심판을 받으시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짐으로 저주를 받아 죽으시겠다는 선언이다.
갑자기 심장이 고동치며 그 사랑이 내게 부어졌다.
주님의 길은 이토록 시작부터 십자가의 길을 내딛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들이 받아야할 세례를 죄없으신 분이 기꺼이 받으시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바울의 장엄한 선언을 읽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5,26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그 의는 이토록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래 참으셨다.
당신이 예비하신 그 아들이 와서 그 의를 이루기까지 참고 기다리셨다.
이 요단강의 세례는 그 하나님이 오랜 갈망이 성취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마3:17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자 하늘로 부터 성령님이 임하시고 이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의 그 오랜 갈망, 그 사랑, 그 언약을 이루시려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시다.
이것은 모든 공생애를 내딛는 그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음성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물에 잠그시는 순간...
세례 후에 요한의 입을 통해 증거 되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 되기로 작정하시는 순간이다.
세례를 받으시는 그 순간 주님의 죄인이 되셨다.
나를 사랑하사...나를 위하여...
나의 죄 때문에....
나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이며 사랑인가를 읽어내지 못하였다.
요단강에 더럽고 자아의 땀으로 범벅된 에고(ego)의 신을 벗고 맨발을 집어 넣는 순간,
그 주님의 아픔이 설핏 느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제한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고통...
죄를 뒤집어 쓰시는 그 아픔....
그를 따르는 그 어떤 제자가 그 마음과 통증의 의미를 알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어졌다.
너무나 주님의 그 심정을 만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뜨거운 물기가 심장을 타고 솟구친 것일까?
그 세례터에 서서 어쩌지 못하는 통증으로 나는 울고 있었다.
어린 딸 지우가 곁에 있었으므로 애써 그것을 참아내며....


<힘든 촬영에 지쳐있던 지우도 모처럼 웃었다>

6.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우리가 요단강에서 기도를 하며 촬영하는
지켜 보고 있었다.
건너편 요르단의 군인들도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로
하던 일을 멈추고 지켜 보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약간 조급했다.
깊은 기도도 하지 못하고 촬영을 하였다.
나는 언제 또 올지 몰라 좀 더 깊이 요단강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때, 떠오른 비둘기처럼 내게 임한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이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10:5-7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죄를 씻기위해 행해지던 율법의 속죄죄로는 온전히
우리의 죄가 사해지지 않음을 강조한다(히10:1,2)
만일 그렇다면 해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아버지는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하시기 위하여 다른 '한 몸'을
오랜동안 준비하셨다.
온전히 죄를 씻지 못하는 짐승이 아닌, 우리를 동일하게 대신 속죄(代贖)하는 사람을
예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요단강에 나오셨을 때....
그 언약하신 '한 몸'으로 나아가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에 인류의 모든 죄는 주님께 전가(傳加)되었다.
'이것은 바로 이 여리고 근처...아사셀의 산의 제물이다!
주님이 이곳에 나아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 내 영이 밝아지며 그것을 외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이 막혀 있는 세례터를 올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 가이드 '우리'를 통해서다.
그런데 그와 가고자 하였던 곳은 바로 '아사셀의 산'이었던 것이다.
그 산은 이 세례터와 더불어 이번 촬영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유대광야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곳이라 일반적인 차로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날 짚 투어(Jeep Tour)를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이 저 여리고 에서 이어진 유대 광야의 정상 이군요!
바로 눈 앞에 요단강과 사해가 있고..."


<아사셀 산 정상에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

그 산에 올라서야 나는 여리고, 요단강, 사해, 예루살렘을 있는 가교처럼
아사셀의 산이 중심에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주님께서 그 공생애를 여리고 근방의 이 요단강에서 시작하셨는가 궁금했다.
그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는 여정에서 정말 생각지 않은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산에 오르고 나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요단 근처에 솟은 이 아사셀에서 죽은 염소로서 오신 것이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라
레16:10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두마리의 염소를 제비뽑고
한 마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안수하여 제사로 드렸다.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염소에게 제사장이 안수를 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그 염소에게 전가되었다.
그 염소는 그 엄청난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어 진다.
그리고 유대광야의 가장 높은 산인 아사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다가
그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그 염소의 몸이 갈기 갈기 부서지고 그 내장이 다 터지면 이스라엘의 죄는 속죄된다.
유대인 가이드 우리는 그 절벽에 서서 그것을 아주 리얼하게 설명했다.
카메라로 그 바위 투성의 절벽 아래를 촬영하면서 명치 끝이 저려 옴을 느꼈다.
너무나 험한  광야의 길을 걸어와 이 깎아 지른 벼랑으로 떨어지는 염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이 같은 염소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았을까>

나를 위해 험한 실 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그 산에서는 이 노래가 그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세례요한이 주님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이스라엘의...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 되었구나.'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놀랍게도 아론의 자손(눅1:5)이다.
누가는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며 모든 계명과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는 흠없는 자들'(눅1:6)이라 기록했다.
이 기록을 읽으며 다시 놀란 것은 '아사셀의 양'을 안수할 것을 명 받은 첫 제사장은
바로 '아론'(레16:6-10)이었다.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세례요한...
그는 아론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율법의 마지막 상징인 것이다.
그에 대한 주님의 증거가 생각났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0-15

뜻밖에 귀가 열리고 깨달아 지는 것이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세례요한은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 선지자보다 나은 자의 칭송을 주님께 들었으며 아론의 후예로서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을 때에, 모든 인류의 죄가 예수님께 덮여진 것이다.
아론이 안수한 아사셀의 그 염소처럼...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심이
합당하니라

아아...
주님의 이 말씀을 그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본질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이며...주님이 가시는 모든 길은 이 길의 외연(外然)이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이 그 길 끝에서 역시 아사셀에서 이어진 그 골고다의 언덕에서
모든 살과 내장을 터뜨려 죽으심으로 주님은 진정으로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10:7

아버지의 그 구원의 길...
그 말씀하신 그 뜻과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인이 받는 그 세례를 자청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게 엄청난 기름부음이 되었다.
'나도 오직 아버지의 언약을 받고 그 의를 이루는 아들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그 사랑...그 의...십자가와 보혈..그 사랑에서 나의 모든 추구를
시작하리라.'
용암같은 멈추지 않을 뜨거운 다짐이 터져 나왔다.
그 후에 '어린 양 예수님'은 내 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사랑...그 의...그 진실...그 길....
나는 너무 너무 너무 그 주님의 삶과 길과 희생을, 그 형상을 갖고자 하였다.
요단강의 이 세례터는 그 주님의 길을 여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것으로 끝나는 의미만이 아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자 예수님께 비둘기 같이 성령님이 임하셨다.
'성령 세례'가 부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살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요 본질의 열림이었다.
그 하늘 문이 내게도 열렸을 때 비로소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천국의 작은 아이로서 그 나라를 침노하기 시작하였다.


<아골골짝, 빈들에.. 우리가 서 있었다>


(사진 : 이지연)









킹덤빌더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들을 찿고자 그렇게 죽으셨지요.
당신은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로 몸입고 오셔서 자신이 가신 길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들을 찿고자 하셨지요.
성경은 아담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아들들을 찿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의 메세지입니다.

바로 자신이자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위해 먼저 그 길을 가시고
부르심을 받은 많은 아들들이 따라오시기를 손짓하고 있습니다

허다한 믿음의 조상들이 그 길을 갔고
지금도 증인으로서 우리를 바라보며 힘내어 오라고 응원하는 그 길
겸비함과 긍휼함으로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야할 그 길
십자가의 길
바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모두 더불어 나아갑시다.
09-09-25
18: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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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장
이제 내일모레 주일부터 대속죄일이 시작되는데, 타이밍이 참 절묘하네요...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다가오는 욤키푸르를 어떻게 지켜야할런지 다시 한번 묵상해봅니다.
09-09-25
22: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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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온전히 주께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주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보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자는 주에 계속 이찬양을 부르다 잠이깨어 들어와서 보니
놀라운 여정을 보게되네요
보기만 해도 험한 그곳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날마다 목마르고 갈급한 내 심령에
주님의 보좌안에 거하는 은혜를 구합나다
내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 : 30)
09-09-26
01: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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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주님을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격스러워서..목이 메입니다..
09-09-26
03: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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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우리가 가야할 길을 미리 예비하시고 보여주시며 먼저 걸어가신 그 길,,,,
너무나 깊은 만지심이 느껴집니다.
간구합니다....내 영을 만지소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히시고 보여주시며 이끄신 그 역사가
내영을 오늘 많이 만져주십니다.
성령이여..의지하고 또 의지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작은 그리스도의 풍경하나라도
저로 하여금 놓히지 않고 보게 하소서..
아바 아버지...사랑합니다...주님..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임하소서...가득히... 내게도.... 임하소서....오,,,주님!
보게하신거, 열어주신거.,,갈망한것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주예수여, 오시옵소서...
09-09-26
12: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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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현
따라 가면 갈수록 주님의 길은 간단한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말씀하나..걸음하나...엄청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의와 언약을
품고 걸어가신 길임을 아주 부족한 눈으로 발견합니다.
글이 장황하고 긴듯하나...이것도 많이 줄여서 나누는 것입니다.
여리고와 요단강 부근에서만 많은 시간을 소요할 정도로 주님의
그 길위에 서는 것은 깊고 오묘합니다.
여리고 성에서 라합이라는 여인...길갈의 그 할례...
근처 아골골짝...아사셀의 산...시험 받으신 그 광야....
요단과 여리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주님의 여정은 모드 깊고 깊은
영적인 고리들로 연결이 됩니다.
이 퍼즐을 어떻게 풀어 갈지가 숙제입니다.
바디매오와 삭게오...그들 하나까지...
그러나 모처럼 도전에의 의지가 불탑니다.
성령님께 지혜와 총명을 구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나마 풀어가다 보면...또 그 땅에 가서 기도하며
걸어가다 보면 더욱 손에 잡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든 추구는...주님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작은 시도입니다.
이 여정이 조금 어렵고 거칠더라도 함께 ... ...
09-09-26
12: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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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
터져나오는 비명과 오열에 가슴이 터질듯이 울었습니다.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살기를 다짐해봅니다.
정말 자신은 없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은
내가 가는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게하는 길임을 믿고
그 길을 가기를 소원하는 제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공생애가 시작되어 그 길을 가기를.....
09-09-26
14: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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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aly
너무 귀한 사진과 글 감사합니다.. 모셔가서 같이 나눌께요 감사합니다~ 09-09-27
2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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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내일 월요 모임에 가고자하는데 지금도 대림동교회에서 하는지 궁금해서요
아시는분 계시면 빨리 좀 알려 주시겠어요?
09-09-27
21: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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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위로를 받는군요
사명도 각자 각자 ....
전 큰 교회 한귀퉁이 이름없는 집사입니다
2년 전부터 이른 나이에 중풍에 걸려 비틀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외모가 미소년같은 말조차도 어눌한 한청년을 주목했으나 그는 누구에 접근도 귀찮아했습니다
신학생이었고 40일 금식하다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애기가 길어 거두절미하고 보름전쯤 방언을 받았고 다른 사람처럼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지난주 몇사람이 모여 기도하는데 이런간증을하더군요
신학교 1학년때 40일 금식을하고 기력이없어 집에와 누워있는데 어머니가 죽을끓여와첫수가락을 입에 넣는순간 기도를막았고 새까맣게 순식간에 죽어가는순간 119가왔고
털컹거리는 차때문에 먹은것이 내려가 살았으나 그렇게 되었다고 ....
그런데 은혜를 받으며 자신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가족인 어머니와 여동생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며 새까맣게 사단이 달라붙은 모습과 오직 땅에것만을찾아 헤메는 모습을보여주시며 이래도 너에 회복이 먼저냐고 물으시드랍니다
어떻든 그청년은 그래도 이제 되었다 는 생각이
교회에 이름은 올렸으나 그래서 교회 숫자통계에 들어가나 ... ?
너무나 사단의 이벤트에 놀아나는 .....
마음에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그들에 영의실상
도저히 교회의 현실이 교회에서도 방치될수밖에없을것 같은 변두리 성도들 ???
나도 비바람에 십자가 기둥을 굳건히 잡아야 할판인데
염소가 되어 절벽으로 굴러떨어지신 갈기 갈기 찢기신주님 .....
나에게 힘을주소서
어린 삼남매를 남편이 바람핀다고 버리고나가 그딸이 애엄마가 되어이제 나타나
교회 다닌다며 하나님이 말씀으로 들려주셨다는 내용이 참으로 황당하나 그딸이 이제교회를 나오려하고 엄마가 잘못되었다는 우리에말을 신뢰합니다
그여린 그딸에 믿음이 그복잡한 시댁과 친정을 살리는 가녀린 촛불같아 먼저밑고
체험한 우리가 기도를 아니할수없습니다
같이 기도로 나누는 이들이있기에 .....
역술을 했던 대기업임원의 부인 모든사정은 여차하고
전도하고 1년반을 나름대로 끌어왔는데 몇일전 울면서 자살하고 싶지만 집사님이 말한 지옥이 무서워 못죽는다고 하더군요
돈은 있을지모르나 그도 시댁 이나 친정이나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니요
그래도 그에 말을들으며 복음전한것이 헛것이없구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딸이 그가문에서 치루어야할 영적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길 바랄뿐이니다
그가 지금은 영적전쟁이라는 말도 이해할수 없겠지만요
눈이먼 집사님 불륜속에 있는 집사님. 눈이 아니라 불륜이 아니라
영이 현재서있는곳 그리고 장차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것 ....
누워서 방언으로 혀를 움직이며 방언하다 그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사 눈물이 돌았습니다
나도 발버둥치며 나를 가눌때가 부지기수건만 ....
감독님 글 사진 ...!!!!
감독님 정말 오직 주님의 뜻만 이루고 가는 길이되시길
끝까지 주님에뜻만 이루고가는 길이되시길 간구합니다
그래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도 잠시 앉았다 쉬어가게 영의 통로가되어주십시요
09-09-28
0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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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만을 믿음
다른 블로그에 링크된 글을 읽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분들의 뜻을, 명령을 지키기위해 노력하시는 모습 보기좋습니다.

다만, 글을 읽던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제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어 글 남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앞에 칭찬받습니까?
오직 주님의 명령을 지킴으로가 아닐까요?

그점에서, 김우현님의 본문 내용중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로, 온전히, 그리고 옳게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겠고, 그 다음에는 그 명령을 '그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점에 있어서는 지금 카톨릭,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에서는 그 종교의 가르침이 뒤섞여 있다보니
주님의 명령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긋나 있는지조차, 우리가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종교계의 지도자, 유명한 신학자들의 말과 글에 현혹되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은 뒷전이 되었습니다.

그 점에 가장 기초로, 근본으로 돌아가, '성경'을 다시 살펴보는 것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있습니다.

님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앞뒤 문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 없으십니까?
저는 종종 그리고 자주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어릴 때는 제가 잘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도 했었고, 나이 들어서는 어려운 한자어 때문에 이해가 되지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하고나서는, 왜 제가 예전에 이해되지않았는지를 알게되었습니다.
바로 성경 자체에 오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옮기는 과정에 번역하는 과정에 마귀에 의해서 사람에 의해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잘못된 성경으로 인해 잘못된 길로 인도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것이 올바른 성경인가 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기존에 배워왔던 지식들이 올바른가에 이르기까지 정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혼탁한 가운데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몇줄의 글을 쓴다고 해서 모두 밝히 보여드릴 수도 없겠고,
기존의 믿음을 뒤흔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저의 글에 납득하시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저또한 모두 무조건 믿어달라고 할수도 없겠고, 그렇다고 직접 대면해서 설명을 해드려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보건대, 하나님이 허락하심이 아니고서는 정말 그 어두움을 보여드리기 조차 어렵고 되어있더군요.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님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있던 기존의 성경이 잘못된 내용으로 우리를 잘못된 길로도 이끌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은 것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올바른 성경이고,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물으시겠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각자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구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올바른 성경과 그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증명은 스스로 비교 연구하면서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예전에 무조건 어떤 성경이고, 어떻게 해야된다고 했었지만, 믿음이 좋다는 분들조차 강퍅함에 싸여 검토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까지는 아니고, 모두다 그 때가 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들께도 그런 기회가 허락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P.S.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이라고 성경 어디에 언급되어있는지 알고싶네요.
침례, 정확히 밥티즘(baptism)은 물속에 잠김으로 죽음을, 물에서 나옴으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밥티즘은 기존 유대교의 정결례, 죄씻음이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09-09-29
13: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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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sl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 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_마가복음 1:4,5
09-09-30
10: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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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성경만을 믿음 님...

성경을 읽을 때 글자 그대로 읽어서 이해될 것이 얼마나 있으셨어요??
유대 상황을 알아야 이해되는 본문도 있고
그들의 히브리적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본문도 많습니다.

성경만 믿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님께서 하시는 말을 기초로 한다면

구약은 히브리어로 유창하게 읽을 줄 알아야 알겠지요?
신약은 헬라어로 읽어야 당연한 것일거구요

그렇게 읽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은 조심하세요
현재 세상 모든 곳에는 사본으로 번역된 성경이 전부 입니다.
자신만 높은 경지에 있고 다른 사람은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지 마세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부족한 사람이라 이렇게 글을 남길 위치는 아니지마는
자신의 소견이 전부인 것처럼 글을 남기시는 건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09-09-30
22: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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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만을 믿음
저도 잘 알지 못했는데, 다른 형제님의 강의 듣는 중에 알게된 밥티즘의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로마서 6장:1-5절, 개역개정)

이해가 조금 어려워 킹제임스성경으로 보자면,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2.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3.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로마서 6장:1-5절, 흠정역)

덧붙여 세례 요한 (침례 요한) 본인은 물로 침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위의 '로마'님께.

저는 히브리어 성경, 그리스어 성경을 읽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보존하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지금 이 시대에도 보존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온전히 보존된 성경이 어떤 것이냐가 문제이겠지요.
영적으로 어두워진 사람이 그것을 분별하기는 쉽지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영적으로 뛰어나서 분별할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제 안에 함께 계신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그 분별할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 뿐입니다.

기존 성경들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저는 킹제임스성경을 읽음으로 해결되었고,
평안함과 마음의 자유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1611년에 번역된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 1611 KJV를 본문으로 하여, 한글로 번역중인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킹제임스성경 한글 번역 진영들간의 주장이 조금씩 차이남은 어쩔수없는 사람의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수많은 번역본들이 난무하는 이 마지막 시대를 어떻게 보시는 지요?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계획이라 여겨지지는 않으시는 지요?
왜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있지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져보지 않으셨는지요?
09-10-05
09: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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