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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위에 서다(7)

은바리라이프 2010. 1. 7. 23:14

그 길위에 서다(7)

16.


나는 아직도 여리고의 요단 부근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의 여정을 탐구하는 가운데 있다.
솔직히 이 작업이 이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가야 할 길이, 가고 싶은 주님의 그 길들이 너무나 많은데....나는 왜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의 풍경을 넘어서지 못하는가....
사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여정이다.
정말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같은 느낌이다.
그런 여정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사건은 메시아 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몸 된 교회와 함께 이 세상을 정복하는 그 전쟁의 예언과 전략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사실이다.
성령님은 이 영적 탐험을 통해서 그것을 내게 부어 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겸손, 진실하게 열심히 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사람에게 보이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이 '온전한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말씀의 반석위에 깊고 굳게 서야만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왜 주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가?
그리고 그 부근의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가?
성령님을 왜 메시아를 그리로 견인해 가셨는가?
진정 광야의 시험은 에덴의 그 시험이며, 그와 동일하게 이스라엘 광야에서 받은 그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첫 사람 아담이나 이스라엘처럼 실패하지 않으신다.
오직 진리로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배하고 이기신다.
그 시험은 오늘 교회에도 동일하다.
그들이 지나간 그 길들은 "말세를 당한 우리의 거울이요 경계"(고전10:11)다.
요단과 여리고, 유대 광야의 일들...
그것은 메시아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그냥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그냥 팔리거나 떨어지지 않는데 예수님의 여정이란 오죽하겠는가?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그 땅의 무엇이, 어떤 언약의 줄기들이 예수님을 그 장소로 다시 불러 내었는가?
나는 그것을 탐구하다가 여호수아의 군대가 길갈에서 행한 것을 주목하게 되었다.
먼저 요단을 건넌 것을 기념하여 길갈에 '열두 돌'을 세우게 하신다.
그리고 여리고 동편 '길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명하셨다.
그 다음에 출애굽 이후에 '유월절'을 처음으로 지킨다.
이것이 주님과 연관해 중요한 열쇠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것은 또한 이 시대를 정복하기 위하여 여호수아의 군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하늘 전략'이다.
예수님의 길을 의미하는 영적인 언약들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길갈'은 '굴러간다'는 뜻으로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다'(수6:9)고 하여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길갈에서 행하여진 일들은 '애굽', 즉 '흑암'으로 부터 해방되는 영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할례를 행하고 나서 그 이름을 주셨다.
할례는 애굽의 수치를 벗기는 역사다.
나는 이것을 주목하였다.
할례는 승리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기름부음이다.
실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흑암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다.
성령세례로 지혜와 총명을 받은 베드로의 선언을 보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
행10:38

이 길갈에서 행해진 것은 약속의 땅을 회복하는 가장 본질적인 기본을 세우는 것이다.
할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하고 승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다.
그래서 명하신 것이다.
나는 그전에 할례나 장황한 율법의 외적인 제문제 같은 것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도무지 복잡하고 눈에 들어 오지가 않았다.
그것은 육적인 유대인들의 것이고 우리는 은혜속에 들어간 '영적인 유대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아마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 여호수아를 다시 읽을 때에 그 율법의 조항처럼 딱딱하고
지루하겨 여겨지던 것들이 살아서 생수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 놀라운 하늘의 전략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요단 근처에서 할례를 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땅위에 예수님을 서게 하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 예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수5:2

그동안 '할례'의식을 그저 유대인의 형식적인 행위로 보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언약적 의미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나는 할례를 처음 명하신 창세기의 그 장면 속으로 돌아가 보았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창17:1,2

100살을 앞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 언약을 하시는 장면이다.
그전에도 약속하신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확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적으로는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믿음을 지킨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다(창`15:6)
그런데 그 때도 아브라함은 그 몸에서 난 '씨'가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100살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도 생명을 잉태할 육체적인 시기를 넘어선지 오래다.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의 현실적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는 믿은 것이다.
자녀를 낳을 뿐 아니라 셀 수 없는 민족들이,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그 말씀을
100살을 앞둔 상태에서도 믿은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엄청난 믿음이다.
그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그것에 대한 영적 계시를,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롬4:11,12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불가능 가운데 신뢰하는
그 믿음에 대한 인(印)침.. 그 확증으로서 언약하신 것이 '할례'다.
그러므로 할례는 믿음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비밀이었다.
이것은 신선한 기름부음이 되었다.
그 본질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그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발견하고 붙들야 할 그 자취...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울은 세세히 풀어 주고 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4:17-22

로마서가 이토록 생생하게 읽혀지기는 처음이다.
이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을 확증하고 그 본질을 기억하게 한 표징이 할례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조상들이 했던 불순종으로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함으로 그 땅을 정복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 땅으로 왔고, 그 약속을 받은 것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이 믿음을 살겠다는 진정한 헌신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그것의 외적인 형식에만 그치고 영적인 본질을 알지 못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할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있다.
이것은 할례가 그저 유대인들의 증표로 주어진 율법의 의무를 넘어서는 놀라운
영적인 의미임을 발견케 하였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포피'(包皮)를 베라고 하심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육신의 생식과 연관되는 그 근원을 베어 피를 흘림으로써 혈육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에서도 아브라함 부부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깨달았다.
혈육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성령으로 잉태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그 '약속의 씨'를 이미 거기서 부터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함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차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실 예수님에 대한 본원적 예표다.
나는 그것을 확증할 말씀을 찾았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요단 부근에서 세례와 시험을 당하시고 공생애를 여신 근거가
길갈에서 할례를 받은 것과 깊은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다.
역시 바울이 그것을 간파하고 있다.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6

이 말씀은 역시 엄청난 기름부음이다.
바울이 말하는 이 약속은 아브라함을 부르고 계속 약속해 온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나서 가장 온전하게 언약된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22:17,18

이 약속하신 '씨'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실
그리스도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그전에 관심도 없던 할례의 언약을 탐구하게 되었다.
할례는 난 지 8일 째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복음에서 예수님과 연관해서 매우 귀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이는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눅2:21

이 말씀은 깨달음이 되어 내 영혼에 전율을 일으켰다.
할례를 행하던 날에 처음 '예수'라고 이름을 부른 것이다.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긴밀한 영적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이다.
할례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원, 임마누엘로 견인한다.
마리아의 성령 잉태는 아브라함의 그것과 이어지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4:28,29

바울은 그 할례의 증표로 태어난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 표현했다.
이것은 언약적 유비(類比)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출산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에서 오직 믿음으로
즉 성령의 역사로 이삭을 낳은 것이다.
마리아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소유함으로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한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 묻는다.
천사는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능력이 덮으면 그것이 이루어 진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마리아가 반응한 것이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
눅1:37,38

할렐루야!
이것은 진정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이다.
아브라함에게 명한 할례의 언약은 오직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
성령님의 그 임재로 이 땅에 오셔서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실 '그 씨'...
'여자의 후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어린 소녀 마리아가 그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였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길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두나미스,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말씀에의 복종)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정해졌다 함과 같으니라
갈3:5,6

성령님의 권능,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믿음으로 열매맺고 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할례가 주는 영적 의미다.
'오직 믿음'...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는 군사훈련이나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이 할례의 본질인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복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실제로도 가나안의 전쟁은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고 싸우셨다.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고 오직 그 언약을 믿음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시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요단강가 길갈에서 할례를 명하셨다.
나는 할례의 진정성을 더 탐구하다가 독특한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여호수아 5장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까닭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수5:5

왜 광야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했을까?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낳은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라 하셨다.
만일 이것이 오직 유대인임을 의미하는 표식이거나 위생과 건강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동한 그 길의 시간은 무려 40년이나 된다.
매일 전쟁을 하거나 이동한 것이 아니다.
그 여정에서 자녀들을 무수히 낳은 것이다.
그런데 왜 수십만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가?
여호수아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 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수5:6-7

그들이 할례를 행하지 못한 것은 놀랍게도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않음"에 있다.
출애굽 1세대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였으므로 할례를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할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순종의 믿음과 연관되는 것이다.
할례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그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청종'(聽從)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들은 할례의 본질인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에서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언약, 뜻, 마음은 관심이 없고 끝없이 '자기 의'와 '자기 필요'만 내세웠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킨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애굽에서 벗어날 때에는 그들이 모세를 통해 믿음으로 나왔기에 할례를 행했으나
그 과정에서 믿음을 상실하고 불순종 하였으므로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세대들...
새롭게 할례를 받을 여호수아의 세대들에게 말씀하시는 다시 그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10:16

이미 이 때에도 하나님은 할례의 진정성, '마음으로 그것을 행하라' 하셨다.
이것의 앞뒤 구절을 읽으면 더욱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道),
언약의 말씀을 사랑하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약에서 명하신 그 계명이 이미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만물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유임을 선포하고
그 분만을 믿으라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신,구약이 없다.
그 본질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예수님은 그 본질을 드러내시고 완성하신 것이다.
신,구약으로 나눈 것은 인간일 뿐이다.
그 믿음의 외형적으로 '인(印)치는 것'이 바로 '할례'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30:6

이 한 말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할례를 언약하신 이유를 깊이 알 수가 있으리라.
진정으로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는 존재이유는 이 믿음과 순종을 소유한 자를 일컫는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도 이 본질을 소유해야만 한다.
이제 요단강에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할례를 받는 다는 의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그 약속하신 말씀, 명하시는 것에 복종하며,
그분만을 믿고 따르겠다는 맹세다.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니라
마3:15

예수님이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고자 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곳에서 행해진 할례의 본질,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그분의 언약하신 뜻만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세례를 받으시려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뜻에 복종하시려는 것이다.
자기 의나 추구가 아닌, 하나님의 의(義)에 모든 것을 다 드려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 증표로서 물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의 세례가 부어졌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새롭게 다가오는 무엇을 직감하게 되었다.
한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들이 진리의 성령님을 구하면 급격하게 다가온다.
앞에서 여리고의 정탐과 라합을 다룰 때에 두 정탐꾼을 숨겨준 '삼대'라는 것이
영혼을 사로잡으며 그랬었다.
그전에 보지도 못했던 그 말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놀라운 그리스도의 세마포,
속죄와 보혈의 의미를 부어 주었다.
그런데 할례라는 것에 붙들려 가는 길에 다시 생각지 않은 것이 나를 포박한다.
그것은 할례를 행하는 도구인 '부싯돌'이다.




17.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수5:2

참으로 특이한 느낌이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다.
'부싯돌'이라면 옛날 고인돌 같은데 나오는 불을 지피는 그 돌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칼을 만들어 할례의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냥 할례를 행하라고 하면 당연히 알아서 할텐데 왜 이렇게 그 도구까지
섬세히 가르쳐 주시는가?
왜 그런 것들을 기록하였는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그 까닭은 '부싯돌'과 '칼'이라는 단어가 나를 향해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잠잠히 기도하며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했다.
'무언가 있다.
이것은 성령세례와 연관이 있다.'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시기는 '후기 청동기'(Late Bronze Age)시대였다.
철기시대를 곧 눈앞에 둔 시기인데 그들에게 돌칼로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다.
거기엔 어떤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부싯돌'에 대하여 조사를 착수했다.

부싯돌(Flint), 석영(石英)의 일종으로 고대로 부터 사용되는 치밀하고 반투명의 굳은 돌.
쇠로 칠 때 불꽃이 일어나 불씨를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 고대에는 화살촉등 무기로도 사용.
여호수아닌 여호와의 명으로 이 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했다.

이런 정도의 일반 상식을 얻었다.
이 부싯돌은 다른 곳에서 '반석', '차돌'로도 번역되어 있었다.
그것은 같은 말이다.
이것은 내게 강한 자극과 울림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이 그런 의미로 번역된 말씀들을 찾아 보았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 4 : 24-26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벤 그 '차돌'이 바로 '부싯돌'이었다.
그것은 할례를 행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할례는 칼리나 다른 도구가 아닌 부싯돌 칼로서 행해야 한다.
이 부싯돌이 '차돌'이라는 이것은 내 영혼을 몹시도 들뜨게 하였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관심을 키워온 골리앗을 쓰러 뜨린 다윗의 물매돌이
곧 '차돌'이었기 때문이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삼상17:40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우러 나아갈 때에
사울이 입혀준 큰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그것은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다 하고 곧 벗고 양을 치던 막대기와 시내에서 주은 차돌 다섯을 골라서
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다윗이 그 차돌을 주운 곳은 베들레헴 근방 엘라 계곡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그곳에서 대치 중이었다.
차돌은 와디(wadi)에 흐르는 물에 부딛치고 다듬어져 단단해진 돌이다.
나는 주님꼐서 시험을 받으신 곳을 찾아 촬영 하다가 '와디 켈트'에서 이런 돌을 많이 보았다.
마귀가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한 돌들이 이런 둥굴 둥굴한 빵처럼 생긴 '차돌'이라고도 한다.
그것을 만져 보았을 때에 너무나 단단하였다.
네피림의 후손인 거인 골리앗이 그것 한방으로 무너지기에 충분한 무기였다.
블레셋과 골리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을 상징한다.
그것을 무너 뜨린 무기가 곧 차돌(부싯돌)이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 돌로서 할례를 행하라 하신 이유를 가늠케 하는 근거다.
주께서 인도네시아에 집회를 갔을 때, 이 말씀을 열어서 보여 주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7:38

자카르타의 호텔에서 이른 아침 기도하며 집회를 위한 말씀을 구하는데,
이 익숙한 말씀을 열어 주셨다.
그 '생수'는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요한은 주석(柱釋)을 했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하는 말씀을 덧붙였다.
이 말씀을 읽는데 심령이 밝아지면서 깨달음이 솟구쳐 올랐다.
주님이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실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반석이 모세의 지팡이에 맞아 깨어짐으로 거기서 샘물이 흐른 것과 같다.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곳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출 17:6

초막절에 주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반석'은 히브리어로 '츄르'인데 이것이 곧 '부싯돌', '차돌'이다.
반석을 깨트리면 생수가 나온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그 반석(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 하신 것이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려면 그것을 깨트리거나 갈아야만 한다.
그 부싯돌(차돌)은 둥굴고 단단한 '반석'이기 때문이다.
부싯돌 칼은 십자가로 깨어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자카르타에서 나는 거기까지 생각지 못하였다.
반석을'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카'다.
나는 성령님께 구하며 그 '나카'의 의미를 쫓았다.
그러다가 도달은 지점이 엘라 골짜기다.
다윗 무겁고 얽매는 치장된 군복과 칼을 벗고 양을 치던 막대기와
'시내에서 주운 매끄러운 돌 다섯개'로 나아간 것은 매우 영적인 상징을 지니고 있다.
그 '시내'는 '생수의 강'이다.
성령의 생수로 부터 나온 능력의 팔이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할것이라
열방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가의 시내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110:5-7

시냇물을 탐구하여 찾다가 이 시편을 만났다.
이것은 다윗이 기름부음으로 왕권을 수여 받고 전쟁을 하러 나가는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시110편은 주님이 인용하신 메시아에 대한 영적 예언을 담는 대표적인 것이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라고 다윗이 말한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영으로 보고 말한 것(마22:45)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부음 받은 왕이 대적을 물리치러 가는데 '그 시내물을 마시고 머리를 든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구절이다.
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 역사는 '시내물을 마심', 즉 '성령의 생수'를 마심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치기 위하여 무기로 삼은 '시내에서 주운 돌 다섯개'는 바로 그런 의미다.
성령의 생수에서 나온 다섯개의 차돌....
(이것에 대하여 연구했지만 지금 나누는 것은 적절치 않아 절제하기로 한다)
그 차돌로 골리앗의 머리를 쳐서 깨트리는 것을 히브리어로 역시 '나카'라 하였다.
그 차돌은 반석이요, 부싯돌이다.
그것이 깨짐으로 생수가 흐른다.
거기서 주운 돌은 원수의 머리를 깨트린다.
이것은 비밀이다.
다윗의 전쟁은 진정한 할례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세상의 것이나 규모, 전략, 프로그램, 조직으로 치장된 군복이 아닌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 이름과 언약을 의지하여 나가는 것...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란 바로 아브라함과 모세가 만났던 그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그 믿음을 다시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준비요, 승리의 관건이다.
차돌은 흐르는 물에 깎여 둥글 둥글 모나지 않으나 그 자체가 엄청 단단한 반석이다.
그것을 물매에 끼워서 던지면 파괴력을 가진 가공할 무기가 된다.
나는 성경을 찾다가 이스라엘에 이 차돌을 사용하는 물매돌부대가 있었음을 알고 놀랐다.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7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
삿20:16

베냐민 지파는 차돌을 잘 다루는 용사들이었다.
후에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 대표적인 하늘의 용사인 바울은 이 부싯돌(반석, 차돌)을
이렇게 표현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시령한 반석으로 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1-4

결국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한 그 '부싯돌'은 '그리스도'다.
이것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치밀한 영적 고리로 연결되어 계시된 성경은 그것을 명확하게 증거한다.
나는 이런 구절을 만났다.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 너희들을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의 하나님을 잊지 말라 여호와는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 인도하여 주시고, '차돌 바위'(굳은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 분이시니라.
신8:14 -15

여호수아의 세대들에게 다시 명하신 말씀에서 바울이 말한 그 생수를 낸 '반석'은
차돌바위였다.
히브리어로 그것은 동일한 단어다.
그것은 십보라가 할례를 행한 그 '차돌'이다.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그 '부싯돌'이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찌어다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114:7- 8

다윗의 이 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는 것이다.
홍해와 요단의 물을 마르게 하신 그 권능의 팔을 노래한다.
그런데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낸 그것이 곧 '차돌바위'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놀랍기만 하다.
할례를  행하는 데 사용된 도구인 부싯돌(차돌)은 곧 '반석이신 그리스도'다.
이것은 비약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4-15)고 하셨다.
모세가 장대에 매단 그 '놋뱀'사건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레모스', 즉 '빈들'에서 5천명을 먹이시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하신 것은 광야에서 내려온 '만나'를 의미하시는 것이다.
그 '만나'가 곧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부싯돌로 만든 칼로 할례를 행하라는 그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음을
나는 새롭게 발견하고 놀랐다.
그것을 쪼개어 샘물을 내신 것처럼, 그것을 쪼개어 칼을 만들고 할례를 행한다.
이것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올 성령의 생수와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부시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 당시 부싯돌은 불을 일으키는 도구였다.
그것으로 갈아 만든 칼은 '불칼'즉, 화염검(火炎劍)이다.
이것은 '성령의 검'이다.
그것으로 할례를 행하라 하심은 성령세례와 이어진다.
이것은 또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주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너희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눅3:16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요한은 성령에 충만하여 그렇게 외쳤다.
이것은 이 지경에서 이루어진 여호수아 군대의 '할례'행함의 본질을 성취하는 것이다.
진정한 할례의 의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의 능력은 '성령세례'를 통해서
부어진다.
성령세례의 목적은 그 여호와의 팔에 붙들리는 권능, 그 믿음을 기름부음 받는 것이다.
할례를 부싯돌로 만든 칼(불칼)로 행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그것은 그 불칼, 우리의 심령에 할례를 받게 하는 그 '성령의 검'은
부싯돌인 반석이, 차돌이 쪼개어 져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세례는 쪼개어진 반석에서 샘물이 나오듯...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다.
이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 본질적 과정을 거치지 않는 성령세례는 진정한 할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관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3:13,14

바울은 갈라디아서3장에서 '오직 믿음으로 성령과 그 능력을 받는 것'에 대하여 설파한다.
이것은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소유한 그 믿음의 지경이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모든  여호수아의 군대, 그리스도의 군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요 대적을 파하는 강력이다.
그것을 확증하는 인(印)이 할례 행함이기 때문이다.
그 할례는 부싯돌로 만든 칼로서 행한다.
지각있는 자, 젖이나 먹지 않고 단단한 것을 먹는 자라면 이것의 본질을 만졌으리라.
불칼이 진정한 성령의 약속을 산출하는 믿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믿음,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 다윗과
모든 의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그 믿음의 지평에 이르게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호수아의 군대가 그 약속하신 땅을 회복하는 것을 가로막은 그 산지들의 성과 산과
군대들을 이기는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그 믿음의 복종이다.
'산을 옮기는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믿음'....
오늘 무수한 이들이 성령의 권능을 구하고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어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그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을 누리지 못함은...
약속하신 성령의 진정한 세례를 누리지 못함은...진정한 할례의 본질을, 성령세례를 만나지 못함이다.
그것은 그 할례의 도구가 깨어진 반석으로 부터 나오는 불칼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와 보혈, 성령의 믿음에 대하여 나누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