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4:5-11] 요나의 고집

은바리라이프 2009. 10. 10. 16:27

[요나 4:5-11] 요나의 고집



요나 4:5-11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셨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인간에게는 하나의 큰 결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에 집착하게 되면 고집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집착이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잘못된 일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멸과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인간의 집착은 선하지 못합니다. 그 집착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는 그가 무엇에 집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요나가 바로 그러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분노가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 후, 40일이 지나도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자,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분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가 옳지 않다’라고 책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여전히 계속 바랐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그 그들 아래에 앉았습니다.(욘 4:5) 요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집착이 옳은지 그른지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과거의 우리 모습, 즉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새사람으로 변화된 우리의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새사람이 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혹 어떤 사람은 ‘그러면 우리의 삶은 없네요?’라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단지 그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 우리가 살았던 삶은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산 삶이었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 삶은 허무한 삶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의 삶을 돌아다보면,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싶습니다. 변화된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아도 더 행복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구속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정한 자유함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도 가장 큰 만족을 느낍니다. 그분만을 살아도 허무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투정에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를 위한 교훈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교훈의 매개체가 바로 박넝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어 요나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셨습니다. 물론 요나도 초막을 지었고 그것을 통해서 사막의 뜨거운 햇살과 더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박넝쿨만하지 못했습니다. 그 그늘은 그에게 큰 만족을 주었습니다. 분노를 느꼈던 요나는 일시적이었지만, 그 박넝쿨이 제공해 주는 그늘에 크게 만족했고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 그늘은 자신이 직접 만든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그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느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언젠가는 시들어집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열심히 세상 사람에게서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 그들이 받는 사랑은 일시적입니다. 물론 진실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마음속에 있는 갈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갈증은 사람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채워지는 것 같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고갈됩니다. 요즘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도 없습니다. 그 욕망의 노예가 되면 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그 욕망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도 아닙니다. 저는 그 이혼율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영혼에 대한 사랑도 충만해집니다. 그렇게 충만해진 사랑은 당연히 배우자에게도 전달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가 완전해서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죄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는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요나는 그 사랑을 느끼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요나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주는 헌신적인 사랑보다 더 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깨끗하고 순결합니다. 그 사랑을 받는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그 얼굴에도 나타납니다. 형용하기 어려운 밝고 순결한 빛이 발산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빛이 발산됩니다. 그 빛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으면 발산되지 않습니다. 그 빛은 은혜의 빛입니다.


  요나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기뻐하시고 있을 무렵, 하나님께서는 그 박넝쿨을 시들게 할 벌레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그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자 그 박넝쿨은 시들어버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꼼꼼히 따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새가 함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도 함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불행한 일이 자꾸 일어납니다.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잘 회고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좋은 일이 자꾸 일어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방심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평안할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박넝쿨이 시들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 뜨거운 동풍과 해는 요나를 혼미하게 했습니다. 그 고통에 요나는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컸으면 그랬겠습니까? 이해가 갑니다. 우리나라에서의 한 여름은 무덥습니다. 그 뜨거운 빛을 맞으면 우리도 정신이 없고 짜증이 납니다. 사막에서는 습도가 낮고 뜨겁기 때문에 그늘을 만들어 주면, 금방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그늘이 없으면 그 무더위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무더위는 지옥의 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옥불은 뜨거운 유황불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유황불에 던져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이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살기는 하지만, 영원히 고통을 받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통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합니다. 그와 더불어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고통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은 재미가 없어, 지옥이 더 재미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비웃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들은 도리어 그것을 무시하고 우리를 멸시합니다.


  그렇게 요나가 곤비함으로 고통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그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요나의 대답을 보십시오.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으시자, 그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나는 어린 아이도 아니었는데, 그 때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습니다. 구약성경 전체 볼 때, 그와 같은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선한 교훈을 주셨는데, 그는 도리어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평을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귀가 먹은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이 무슨 교훈이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할 만도 하신데,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지 않으시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교훈을 주셨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셨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0) 요나가 지금 원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실로 엄청난 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악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아직 좌우도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 십이만여 명의 목숨까지 멸망되기를 바랐습니다. 성인들이야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도 부모의 죄로 인하여 멸망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찮은 박넝쿨은 그렇게 아끼면서 십이만여 명이라는 어린 아이의 생명까지 멸망되기를 바랐다는 것은 너무 심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되었습니다. 요나의 분노는 그를 아무것도 모르는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함정이었습니다. 누구나 방심하면 그것에 빠지기 쉬습니다. 우리도 방심하면 빠질 수 있습니다. 분노는 그렇습니다. 분노를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잠 27:3)


  분노를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분노를 잘 못 다스리게 되면, 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노기가 충천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십시오. 그 분께서는 인간의 삶을 보시고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계 곳곳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분노를 당장에 표현하시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까지 참으십니다. 우리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
글쓴이 : 오직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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