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3:1-5] 니느웨의 멸망 선포

은바리라이프 2009. 10. 10. 16:25

[요나 3:1-5] 니느웨의 멸망 선포



요나 3:1-5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재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 일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이 세상은 고난이 없으면 방탕해지고 타락하기 쉬운 곳입니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부터 이 세상은 죄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거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이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죄를 피해 아주 깊은 산속에서 혼자 거하는 경우는 어느 정도 죄를 피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죄에 노출된 모든 인간은 서서히 그 죄로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그 기울어짐의 정도는 평안할 때 더 빠르게 진행됩니다. 이런 곳에서 이것들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고난이 없다면 사람은 아주 방탕하게 변해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이미 검증된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왕들은 번영이 극에 달할 때, 타락해졌고, 그로 인하여 그의 나라를 멸망해 버렸습니다. 비단 왕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의 타락도 번영이 정점에 달할 때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리고 어느 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합니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깊게 체험했던 요나는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욘 3:1-3) 육지로 나온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한 그의 고난은 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먼저, 그는 죽음의 실체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예외가 없이 임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게 되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교훈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바른 인간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은 사람을 큰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이유는 고난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생존욕구가 강해집니다. 그 욕구는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동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사람은 더 많은 삶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지혜가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직접 경험함으로 이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아주 느린 방법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위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앞서 산 사람들의 지혜를 책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입니다. 고난의 모습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런 차이가 상이한 고난의 형태를 낳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제외하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지혜를 줍니다. 이 지혜는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통합니다. 세상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면 형통할 삶을 삽니다.


  고난을 통해서 순종적인 사람이 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곧바로 그 말씀대로 실천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았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만, 그 당시 선지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것과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은 그의 영혼에 큰 감동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듣는 자의 영혼을 정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게 되면 어둠의 권세를 모두 떠나게 됩니다. 완전한 자유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음성이 악인에게는 멸망이 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의 앞에 큰 성읍이더라”(욘 3:3) 니느웨는 고대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 그 성은 아주 큰 성이었습니다. 요나와 같은 성인이 사흘 동안 걸어야 할 만큼 성읍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아주 뛰어난 것이나 좋은 것을 일컬을 때, “하나님 앞” 또는 “하나님의”라는 수식 어구를 붙입니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이 성읍은 성벽의 둘레가 약 12km, 성 내곽의 너비가 45m난 되는 큰 성이었습니다. 도시건설 기술수준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특히, 물은 구릉지대에 있는 물을 18개의 수로망을 통해서 도시로 공급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성읍이었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루 만에 끝냈습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 3:4) 그 큰 성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를 하루 만에 마쳤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사실 그곳에서 그런 선포를 하는 것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거나 악한 말을 전한다고 하여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꺼림이 있었지만,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는 죽음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악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초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면 미친 사람취급을 하거나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처럼 듣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죄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즉 불법이 만연한 곳에서는 사소한 죄는 죄처럼 여기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음란한 말로 수작을 거는 것, 음란물을 보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음욕을 품는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이중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은 큰 음란죄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면서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간음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생각조차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때 상대방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을 허용하면 같이 그 생각에 동조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귀신이 조장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음란한 생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것은 허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죄는 하나님께 큰 징계를 받는 죄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둘째 사망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리스트가 나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런데 이런 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 그들은 분노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 악은 그들에게 아주 짧고 허무하지만,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분노는 아주 맹렬합니다. 아주 거칠고 함부로 상스런 말을 하며 아주 거만하고 교만하게 그들의 악한 행위를 지적하는 사람을 향해서 거칠게 행합니다. 그들은 마귀로부터 분리되기를 싫어합니다. 마귀가 주는 쾌락과 쾌감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던 상관없이 그것에 사로잡히면 아주 맹렬해집니다.


  니느웨는 바로 그런 악이 만연하던 곳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말씀을 선포했던 당시 니느웨의 번영은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고,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악으로부터 떠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방신들 섬겼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번영은, 그 신들이 준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악으로부터 떠날 가능성이 희박한 곳이었습니다. 사람은 악을 저질러도 계속해서 번창하게 되면, 그는 그 악으로부터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요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 사람들은 회개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욘 3:5) 요나가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그들은 두려워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베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 않습니까?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은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니느웨 백성이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완악한 이스라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짓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을 미리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큰 은혜와 특권을 받았지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반면에 니느웨 이방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주객전도.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나중에 니느웨가 멸망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나중에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또 다시 불평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요나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민족은 이방의 길을 열심히 갔고, 이방 민족은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민족의 길을 걸었습니다. 요나는 질투가 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요나시대 이스라엘처럼 질투가 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 나게 하시는 것이 그다지 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질투 나게 하시면 그 때의 상황은 아주 비참한 상황일 겁니다. 그 때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형통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읽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출처 :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
글쓴이 : 오직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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