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3:6-10] 니느웨의 회개

은바리라이프 2009. 10. 10. 16:26

[요나 3:6-10] 니느웨의 회개



요나 3:6-10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자신이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열심히 자랑합니다. ‘나는 머리가 아주 좋아’, ‘나의 학식을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름난 학교만 다녔어’, ‘나는 여태까지 일등만 했어’, ‘나는 힘이 아주 세’, ‘나는 아주 아름다워’ 등등. 그들은 자랑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은연중에 자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자부심이 없었으면 인간 세계의 발전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그들은 모두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건전하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런대로 참을 만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역겨움과 혐오감을 준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모순투성이입니다. 인간 문명의 찬란한 발전이 있는가 하면 그 이면에 지독한 착취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면에 있는 악은 생각하지 않고 그 외면에 보이는 장밋빛 환상만을 좇습니다.


  니느웨! 그 거대하고 강한 성! 이 성읍이 바로 그러한 성읍이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그 이면에 악이 만연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악을 저질러도 뒷짐을 지고 계시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에 괜히 실족해서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간의 경영은 제한적이고 협소하지만, 하나님의 경영은 제한적이지 않고 무한하며 광대합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전 우주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만연하다고 해서,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작은 죄도 저지르지 않도록 늘 책망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가 죄로 물들어 어둠속에서 방황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악인은 경우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의 경우에는 그가 악을 저질러도 어느 정도까지 참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참고 계십니다. 만약 그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예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430년 이상을 머물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가나안의 거민들의 악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에게 내리신 심판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니느웨가 바로 그 단계까지 도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임계점으로 정하신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번영은 악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번영이 주는 유익 때문에 그 악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들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강한 유혹 때문에 그들은 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들이 이 심판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도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멸망하여 참혹한 꼴로 변했습니다. 앞선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은 그들의 금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높은 자로부터 낮은 자까지 모두 베옷을 입고 금식을 했습니다.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욘 3:6) 그 소문은 온 니느웨로 퍼졌고 마침내 그 소식이 왕의 귀까지 들렸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은 그것에 놀라 자신의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니느웨 왕의 회개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무소불휘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성읍이 멸망한다는 소문에 겁에 질렸습니다. 그가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 왕복을 벗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그가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재 위에 앉았습니다. 화려한 모든 것을 내어던져 버리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니느웨 왕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베옷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그와 그의 신하들은 온 니느웨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7-8) 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먼저 그 조서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 금식을 명하는 왕의 명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금식은 물을 취할 수 있는 금식을 하는데, 그들에게 내려진 금식은 물조차 금하는 금식이었습니다. 왕이 이렇게 금식할 것을 선포한 이유는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선지자의 외침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이미 고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와 시간적으로 차이가 큰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단지 그것을 역사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경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상황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접촉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들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둘째, 그 안에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짐승에게도 베옷을 입히라는 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니 죄는 자신들이 범하고 애꿎은 짐승까지 고난을 시킵니까?’ 짐승까지 베옷을 입는 것은 지나친 반응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피조세계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짐승도 좋은 주인을 만나면 선한 일을 위해서 쓰입니다. 반대로 악한 주인을 만나면 악한 일을 위해서 쓰입니다. 니느웨 왕이 그 정도까지 깨달았나 봅니다.


  셋째,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들이 그들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했던 민족이었습니다. 왕은 이 점까지 고려했습니다. 자신의 민족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이 명령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에게 구원을 요청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방인이 섬기는 대상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거짓 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형통할 때에는 그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는 것처럼 꾸미는 거짓 신들이었습니다. 니느웨 왕과 신하들이 그 신들에게서 돌아서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아주 적절한 반응이었습니다.


  넷째,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 용서의 은총을 주시지 않았을 겁니다. 진실한 회개는 악으로부터 떠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먼저 마음에서 그 다음에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니느웨 백성은 왕의 조서의 내용이 선포되자, 그 조서의 내용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았던 이방 민족이 전체적으로 회심한 사건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선지자의 멸망 선포로 전체적으로 회심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민족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요나가 속한 북이스라엘도 역시 이방 민족을 따라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 신들이 주는 복이 탐이 났나봅니다. 그들은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하는 것이 아닌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세상의 신들이 더 좋아보였나 봅니다. 하나님의 것이 정말 좋은 것인데, 하나님의 것 대신에 세상의 것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있었던 그들에게 돌이키도록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이적들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아와 엘리사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들을 보여 주셨는데도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왕이 솔선수범하여 악을 행했습니다. 왕이 자신의 민족의 올무와 함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왕을 보십시오. 그는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백성을 경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이 혹 그들이 섬겨왔던 신들을 섬길 것이 두려워서 조서를 내려서 그 악에서 떠나도록 지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렴풋하게 알았던 이방인들이 민족적으로 회심을 했습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도 역시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과거에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 과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사실 우리 주변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역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그들을 권고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세상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나방처럼 세상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 나갑니다.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세상에서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와 고통으로 회복되면 다시 세상으로 열심히 나갑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좋고 놀라운 길로 인도하실 텐데... 그들은 여전히 세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참 놀라운 일들이 생길 텐데... 그들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빨리 그들의 죽음의 행보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힘써 기도해야겠습니다.


  니느웨의 회심 사건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예로도 쓰였습니다. 또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강퍅함과 악함을 경계하는데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우리라고 해서 별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항상 깨어서 옛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고 있지는 않는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와 같은 악한 일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도 돌이켜야 합니다. 괜히 얻어맞고 돌이키지 마시고 그전에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 :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
글쓴이 : 오직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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