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4:1-4] 요나의 불신앙

은바리라이프 2009. 10. 10. 16:26

[요나 4:1-4] 요나의 불신앙



요나 4:1-4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나만 사랑해줘”, “내가 독점할 거야”, “나 외는 안 돼” 등은 누구나 선호할 만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심각해지면 광적인 집착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 집착은 사랑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망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아직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성인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둘 중에 하나가 미성숙하다면 그는 성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직 미성숙한 사람은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경영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성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점적인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하신 분만이 자신 있게 자신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만 사랑해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사람만 사랑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는 바로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나의 경우가 꼭 그랬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왕과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고 그들의 죄를 떠나므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멈추시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선고대로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왜 요나가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요?


  그 원인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욕망은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것, 또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욕망은 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독점하고 싶어집니다. 요나가 바로 그러한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정통성을 가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 민족의 한 일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개인이나 민족은 큰 특권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큰 특권입니다. 이 우주 안에 하나님을 능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우주 안에 모두 피조물의 능력을 다 합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크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니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 특권을 받았던 그는 그 특권을 이방민족과는 나누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니느웨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한 경향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제사를 드리는 일은 레위 지파에 속하는 제사장들에게만 한정되었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도 아무나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역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정통했던 바리새인들이 거의 독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졌던 독점적인 특권을 잃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했던 겁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내부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람들이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자신들만 독점하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보입니다. 소위 교회의 특권층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쉽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 죄까지 저질러가면서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우리인들 예외겠습니까? 온전하게 성화되지 않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요나의 어리석은 분노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요나는, 그 특권은 자신의 민족만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거의 역전되었습니다. 요나가 속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이 심했습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 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왕하 14:23-25) 그 당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했습니다. 그와는 달리 번창했던 니느웨의 회심과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보았던 요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심한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심한 분노에 사로잡혔던 요나는 하나님께 그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데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2-3) 요나는 이미 일이 그렇게 진행될 줄을 알았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일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으면 이미 마음속에 불안감이 감돕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일의 성취의 기미만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도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셨을 때, 이미 일이 그렇게 진행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의 민족에게 주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아 선민의 칭호를 얻었지만, 그들은 선민으로서 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방민족을 동경하여 이방민족처럼 이방신들과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도 알고 보면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누렸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아주 배은망덕하고 패역한 족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나 선지자도 그것을 알았을 것인데, 그도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큰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성읍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베옷을 입고 물과 식물까지 금하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했던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께 하소연한 후,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취할 것을 청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의 심사가 얼마나 악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음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아직까지 철이 없는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심정이 사도 바울과 같은 민족애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민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복음을 전했어도 자신의 민족은 믿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방해꾼이 되어 그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그런 그들에 분노를 느낀 자신의 민족에게서 돌아섰고 이방인을 위한 사역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민족에게서 돌아섰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들의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과 요나가 같은 면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한 일입니다.


  그런 요나를 끝까지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자녀로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징계를 주십니다. 이 징계가 없으면 그는 사생자나 다름없습니다. 요나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관계가 떠오릅니다. 요나는 어린 아들처럼 철없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교훈과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 그를 바른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4) 요나의 분노에 하나님께서는 타이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자녀처럼 여기십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자신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다시 낳기 위한 산고의 고통을 직접 체휼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직접 산고의 고통을 체험하시고 낳으신 우리를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입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날마다 지키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아멘.

 

  


  

출처 :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
글쓴이 : 오직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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