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1:17-2:10]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때

은바리라이프 2009. 10. 10. 16:25

[요나 1:17-2:10]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때



요나 1:17-2:10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리를 예바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적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따사로운 햇살, 이 빛은 생명의 빛으로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력을 줍니다. 빛이 없으면 해 아래 있는 모든 생명체는 쇠퇴의 과정을 반복하게 되어 결국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이 빛이 겨울과 봄과 가을의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일깨워 줍니다. 그러나 아주 더운 여름에는 그것에 대해 느끼던 소중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강렬한 빛에 대한 불평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사례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익과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과거에 그 빛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현재 그것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그것에 대한 태도를 금방 바꿉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쉬게 잊어버립니다. 아쉽고 절박할 때는 그것을 구하나 상황이 바뀌어 안정되면 그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나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이 불만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을 거스르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죽음까지 각오를 하고 그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바다에 던져지자, 그의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바다로 던져진 요나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서 그는 어두운 바다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고래였는지 아니면 다른 거대한 생명체였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거대한 물고기가 그를 삼켰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땐가 제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멸종의 위협을 받고 있는 북극곰의 삶을 방영했던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프로에서 아주 거대한 고래가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고래가 죽었을 때, 북극곰이 그 고래를 뜯어 먹었는데, 그 고래의 크기가 엄청났습니다. 그 고래를 보니, 요나를 삼킨 것이 고래인 것 같습니다. 여러 마리의 북극곰이 일 년간 먹어도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잎을 통해서 배속으로 들어간 후, 그곳에서 삼일을 보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가 그곳에서 삼일동안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먼저 먹잇감을 삼키는 생명체가 그렇듯이 그 물고기도 뱃속에는 먹잇감을 녹이기 위한 소화액이 있었을 겁니다. 그 소화액은 산성이고 그것에 닿은 먹이는 분해됩니다. 그것이 분명하게 요나를 둘러쌓을 것인데, 요나는 하나도 상함이 없이 삼일동안 온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풀 수 없는 의문입니다.


  또한 그는 그 뱃속에서 삼일동안 충분하게 호흡할 수 있었을 만큼 충분한 공기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또한 인간의 상식으로 풀 수 없는 의문입니다. 요나는 실제로 그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기적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보냈는데 무사했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보내면서 그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다시스로 도망했던 그가 그 때부터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인 반항심으로 죽음을 각오하기는 쉬워도 막상 그것에 직면하면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믿음이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1:2) 그 곳은 요나에게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을 ‘스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올은 ‘무덤’, ‘지옥’, ‘구덩이’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현한 것은 사실상 그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무덤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물고기 뱃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연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였지만,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렸던 요나, 그의 도망은, 곧 하나님과 분리였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죽음은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분리된 순간부터 죽음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 죽음의 상태를 자신이 선택했든지 안했든지 상관없이 그 상태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내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요나는 도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도망자체가 멸망의 선택이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3-4) 그러나 그러한 죽음의 경험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열정이 되살아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렸던 곳, 즉 성전에 대한 향수가 짙어졌습니다. 불만은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이것에 붙잡힌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요나가 바로 이 불만의 마취제에 의해서 마비되었습니다.    


  그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죽음의 경험을 하자, 그를 그 마취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그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곧바로 건져주시지 않았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싸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5-7) 그는 고래와 함께 깊은 바다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곳을 산의 뿌리라고 표현했는데, 그 산의 뿌리는 바다의 밑바닥이었습니다. 그곳은 빛이 없고 어두운 곳입니다. 즉 그에게는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고래 뱃속에서 안전하게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곳은 먹잇감들을 녹일 소화액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곳은 아주 불쾌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요나가 그곳에서 삼일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곳이 고통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이 그에게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 기간은 그에게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상대적입니다. 같은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긴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짧을 때가 있습니다. 전자는 고통을 당할 때이고, 후자는 기쁠 때입니다. 폭풍이 세차게 몰아쳐도 배 밑층에서 태연하게 잠만 자고 있었던 요나, 그는 그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제야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소중한 것은 그것이 없어지고 난 후에야, “그것이 소중한 것이었구나!” 라고 느끼게 됩니다. 요나가 바로 그 처지였습니다. 요나가 그 상태로부터 바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그가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온 세계의 만물의 운동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명령 하에 움직입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제 땅을 다시 밟고 싶어도 밟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는 담대했었는데, 막상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되니까, 그 담대함은 사라졌고 그 담대함이 어리석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요나의 간절함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욘 2:6) 그는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그는 마치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한 것처럼 깊은 바다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깊은 바다에게는 빛도 없고 어둡고 컴컴한 곳입니다. 어둠은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은 빛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상태까지 내려갔습니다. 요나의 두려움이 상상이 됩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있었던 요나의 심정도 알만합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지만 거부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절망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요나도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 2:7-9)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던 요나는 그 때부터 변화되었습니다. 반항아였던 요나가 다시 순종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가 잠시 동안 반항적이고 불만스러운 삶을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빗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망한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경영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이 잘 발휘되도록 쓰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고난을 겪었던 요나는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되어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힘이 듭니다. 마치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앞이 캄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때, 요나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출처 :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
글쓴이 : 오직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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