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스크랩] [요나 1:1-7]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요나(1)

은바리라이프 2009. 10. 10. 16:24

[요나 1:1-7]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요나(1)



요나 1:1-7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한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의 속성을 크게 부각시키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공의, 공평, 심판의 속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합니다. 특히 악독한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속성을 더 크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심리학의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방어기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누가 범죄자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들의 과거의 행위로 보건데, 앞으로도 동일한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피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변화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그런 반응은 우리의 이기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사람들은 아무리 악독했다고 할지라도 변하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그런 반응을 하게 되면, 선지자 요나와 같은 실수를 동일하게 저지를 가능성이 큽니다.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져 있었던 시대,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사로서 사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법궤 대신에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긴 이후부터 줄곧 우상을 섬겼던 나라였습니다. 요나가 선지자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고, 처음 북이스라엘이 세웠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과 같은 죄를 반복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백성은 과거 여로보암이 저질렀던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아람에게 빼앗겼던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하기는 했지만,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암울한 시대에 선지자 활동을 했던 사람이 바로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자기 민족의 끊임없는 배도를 보고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 요나는 이 명령을 듣자,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지자가 꼭 갖추어야 할 조건은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을까요?


  다시스는 ‘금속정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땅은 금속생산과 가공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배들이 오고 갔던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은 산업지역이었습니다. 왜 요나는 그곳으로 도망하려고 했을까요? 그곳은 그 당시 선지자의 시각으로 볼 때, 가장 서쪽이었습니다. 즉 땅 끝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가장 서쪽 땅인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시각입니다. 인간의 시각은 제한적입니다. 아무리 그 시각을 크게 하려고 해도 인간의 시각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볼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인간의 시각은 아주 편협할 정도로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근본적인 이유는 의외로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뭐야, 그런 사람이 선지자야!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면 더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섣부른 생각입니다. 그 당시 그 선지자가 처했던 상황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돌이키셔 그곳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만을 품었습니다. 자신의 민족은 회개하지 않고 있는데, 악한 니느웨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앙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은 없었습니다. 이방인들도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 자비, 죄사함을 경험하는데, 정작 자신의 민족은 더 타락하여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짜 이유였습니다. 그 악한 도시는 요나의 외침으로 모두 회개하게 될 것 같은데, 자신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선지자를 보내 회개를 촉구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멸망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현실은 그에게 큰 짐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니느웨의 악독의 선포와 회개는 불만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꼬부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죄의 용서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는 모습을 보면, 배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가고 있고, 아주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상황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신앙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욘 1:4-5)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가 다시스로 도망하자, 하나님께서 바다에 큰 바람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배는 파선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이 되자, 사공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각각 자신들의 신을 부렀고, 또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버렸습니다. 인간은 불가항력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신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신이 대신 해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신을 전심으로 찾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가 찾는 신은 응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거짓 신이 응답할 수나 있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가장 최악의 방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모든 시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온 배에 죽음의 공포가 가득해졌습니다. 모두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진행되는데도 요나는 배 밑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깊이 잠들었습니다. 밖에서는 배를 삼키려는 파도가 배를 세차게 강타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그 진동도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한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도 아니었지만, 잠은 그가 불만스런 명령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나 봅니다. 때로 잠은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 구실을 합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대체로 요나가 만났던 것과 같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도리어 큰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재앙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험한 지경에 노출시켜서라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고쳐서 사용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을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좋지 못한 감정을 품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장이 배 밑에서 자고 있었던 요나를 깨워, 그가 믿는 하나님께 함부로 급박한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요나에게는 동기조차 주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이미 죽을 각오까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도망하고 있었는데, 선장의 말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그 배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별의별 수단을 다 강구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감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 재앙의 원인이 누구인지를 가려내기 위해서 제비뽑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욘 1:7) 제비뽑기는 여러 방식으로 실시됩니다. 동전을 던져서 어떤 일의 실행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일종의 제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비뽑기는 전 세계에서 실시됩니다. 그 형태를 다를지라도 그 원리는 동일합니다. 본문의 제비뽑기의 형식은 그들의 인원수대로 제비를 만들고 그것에 이름을 적고 섞은 후, 그 중에서 하나를 뽑아서 그 이름을 확인하는 식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이것은 어린 시절 한번쯤 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주 어리석은 방법 같은데, 놀랍게도 그 방법이 통했습니다. 그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재앙의 원인이 요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비뽑기가 그렇게 신통했다고 했다고 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제비뽑기를 통해서 결정하는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땅을 분배할 때, 제비뽑기를 사용했고, 사도시대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도 제비뽑기를 사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제비뽑기를 사용한 예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시행된 제비뽑기의 행위와 세상 사람들의 제비뽑기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제비뽑기의 내용도 다를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나오는 제비뽑기를 하나님께서 말씀에 따라서 시행되었다는 점에서도 다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뽑는 사람들에게 수준에 맞는 제비가 선택되도록 하십니다. 각 사람이 제비를 뽑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점쟁이들이 뽑는 제비와는 다릅니다. 그들이 제비에 기록해 놓은 지식은 자체가 거짓 지식입니다. 즉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길을 잃도록 이끄는 지식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도 거짓된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중에서 아무리 좋은 제비를 뽑아도, 그것은 그들이 길을 잃게 만드는 제비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는 마귀의 역사도 배제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제비뽑기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끼리 제비뽑기를 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제비뽑기는 통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고, 큰 바람과 거센 파도는 그의 불순종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비뽑기에서 그가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 놀랍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삶을 모두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을 떼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회피하거나 도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협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신성,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하면 요나가 한 시행착오를 우리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말씀하실 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굳이 고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멘.     

출처 :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
글쓴이 : 오직은혜 원글보기
메모 :